상위 문서: 강동우
1. 삼성 라이온즈 시절
삼성 라이온즈 시절 |
흔히 불운의 선수로 일컬어진다.
경북고 - 단국대를 졸업하고 1998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당시 삼성의 외야에는 최익성, 신동주, 양준혁이 주전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전년도 맹활약했던 최익성-신동주 우타 외야 라인에 부진 및 부상이 닥치자 데뷔 첫 해부터 서정환 감독의 눈에 들어 주전 자리를 꿰찼고, 그해 타율 0.300, 10홈런을 쳐주면서 맹활약했다. 후술하겠지만, 1998년의 강동우가 3할을 기록한 이후 무려 17년 뒤인 2015년 구자욱이 3할 타율을 기록할 때까지 신인으로써 3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가 나오지 않은 덕분에 은퇴할 때까지 강동우 하면 "최후의 신인 3할타자" 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도 했다.[1][2] 신인 외야수가 데뷔 첫 해부터 3할 타율을 기록한 덕분에 그 해 신인왕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12승을 거둔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고졸 신인 김수경에게 신인왕 자리를 내줬다.
데뷔 첫 해부터 3할을 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준 데다 연고지인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보니 향후 삼성의 주전 외야수 겸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1998년 말에 개최된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도 선발되면서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6일 벌어진 사건으로 인하여 강동우의 지독한 불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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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당한 후 들것에 실려나가는 강동우. 부상을 당한 후 그 충격 때문에 괴로워하는 표정을 주목하라. |
1998년 10월 16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 때 이병규의 큼지막한 홈런성 타구를 뛰어올라 잡아내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가 펜스에 부딪히는 바람에 정강이뼈가 뒤틀리며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바로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3][4] 이 부상 탓에 강동우의 선수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했다.[5] 부상만 아니었다면 강동우는 트레이드되지 않고 좋은 성적으로 마지막까지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의사의 소견으로는 '야구 선수로는 물론이고 정상인으로서의 생활도 힘들다라고 했을 의사도 부정할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당연히 대표팀 엔트리에서도 탈락되었으며[6][7]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역시 LG에게 1승 3패로 밀려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는 등 씁쓸한 실패를 맛보며 2년 간의 재활이 시작된다.[8]
200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역전 투런홈런을 치고 포효하는 모습 |
2년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을 마치고 2000년 시즌 막판에 겨우 복귀해서 다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지만, 신인 시절의 성적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타율 2할 중후반대의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류중일 코치가 선수 시절에 달던 1번[9]을 달고 나름대로 제몫을 하며 삼성의 톱타자 겸 주전 외야수로 활동했고[10], 2002년 김응용 감독 아래에서 130경기에 출장해 타율 0.288, 134안타, 9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11]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박한이와 테이블 세터를 이뤄 맹활약했고, 삼성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면서 첫 우승반지를 얻는다. 다만 2003년에는 타율 0.266에 머무르는 바람에 '비운의 톱타자' 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2004년에는 132경기에 출장해 0.295, 129안타를 기록하면서 신인이던 당시 98년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임창용과 함께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까였는데, 결정적으로 4차전[12] 당시 12회 말 2사 만루 찬스상황에서 현대 조용준의 몸쪽 공을 맞지 않고 피하는 바람에 밀어내기 득점 찬스를 날렸고, 이후 플라이 아웃으로 삼성이 추가 득점을 내지 못하고 게임이 종료됐기 때문에 욕을 먹기도 했다.[13] 유투브 썸타임즈 "이영미의 셀픽 show"에서 몸쪽 공이 부상당한 다리쪽으로 와서 피할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김응용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한 선동열 감독과 마찰을 빚게 되며 삼성에서 설 자리를 잃었고, 결국 2006년 3월 두산 베어스의 강봉규, 김창희를 상대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 삼성 팬들은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14] 이는 훗날 레전드 양준혁의 등떠밀기식 은퇴, 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는 희대의 발언과 각도드립 등과 함께 선동열의 삼성 프랜차이즈 내치기 사건 중 하나다.
이미 삼성 라이온즈를 떠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삼성 팬들에게 강기웅, 김시진 이후 오랜만에 얻은 에이스 박충식과 함께 여전히 안타까움으로 가슴에 남는 선수다.[15] 훗날 한화에서 부활한 뒤에도 강동우와 관련된 기사의 리플을 보면 한화 팬들보다 삼성 팬들의 응원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삼갤에는 간간히 '은퇴식만큼은 삼성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온다.
강동우 이후 삼성의 풀타임 신인 외야수 계보는 2001년 박한이-2015년 구자욱으로 이어진다.[16]
2. 두산 베어스 시절
두산 베어스 시절 |
트레이드를 통해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기는 했지만, 이후 한 팀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여러 팀을 전전하게 된다. 트레이드 첫 해인 2006년에는 두산에서 그럭저럭 주전 경쟁을 했지만, 2007년 김경문 감독이 직접 키운 외야수 이종욱, 김현수 등등이 펄펄 날아다니기 시작하면서 1군에서 탈락, 줄곧 2군에 머물게 된다. 결국 2007 시즌 종료 후 다시 좌완 투수 이윤학[17]을 상대로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됐다.
3. KIA 타이거즈 시절
KIA 타이거즈 시절 |
조범현의 양아들이라는 욕을 대차게 먹으면서도 시즌 초반 잠깐 동안은 꾸준히 기용되었지만 타율 1할대를 기록하였고, 부상당한 시즌을 제외하고는 커리어 로우 기록을 남기며 줄곧 2군 신세를 졌다.(...)
4. 한화 이글스 시절
한화 이글스 시절 |
4.1. 2009 시즌
2009년 12월 의지노력상을 수상한 강동우. |
2008 시즌 종료 직후 신종길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직전 강동우의 성적이 나빴던 데다 30대 중반의 베테랑과 20대 중반의 유망주 간 맞트레이드였다 보니 당시 한화 팬들은 또 유망주를 내주고 노장 선수를 받아오냐며 구단과 김인식 감독을 깠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그의 부활이 시작되었다.[18]
2009 시즌 한화의 붙박이 1번 타자 겸 중견수로 기용되면서 놀랍게도 맹활약을 펼쳤고, 1998년 이후 12년 만에 3할 타율과 두 자릿 수 홈런, 준수한 출루율을 기록하였으며, 이 시즌에 기록한 sWAR*은 4.55로 데뷔 시즌인 98시즌보다 높다. 또한 팀 내에서 가장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보이서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제이 데이비스 이후 한화가 간만에 건진 수준급 1번 타자. 농담으로 FA로이드를 복용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2009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고, 한화 이글스와 1년 총액 3억 원(계약금 1억 5천+연봉 1억 5천)의 조건으로 재계약에 합의했다. 팬들은 반짝 활약이 아니기를 바랐으나...
한편 2009 시즌 말인 9월 2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고영민을 축하해 주는 장면이 사진에 찍히면서 빈축을 샀다. 게다가 끝내기 안타 직전에는 2루심의 오심이 터진 탓에 다른 한화 선수들은 분을 억누르고 있던 상태였다.
4.2. 2010 시즌
스프링캠프에서 몸이 안 좋아 훈련을 제대로 못 했고 시즌 시작 시점에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간염으로 인해 하와이에서 1주일만에 귀국하여 대전시는 모 병원에서 잠시 입원 생활을 했다. 결국 체력부족으로 1할대를 넘나드는 극악의 타격과 심각하게 좁은 수비범위를 보여주며 FA로이드 부작용 의혹을 받다가 결국 2군에 내려갔다. 그러나 5월 초에 2군에서 복귀해서 타율을 2할 7푼대로 끌어올리는 등 준수한 성적을 냈다. 6월 27일 개인 통산 1000안타를 기록했고, 후반기에는 1군과 2군을 왕복하였다.2010시즌에 문제가 참 많아졌는데 일단 외야수로서 생명인 수비범위가 무진장 좁아졌다. 게다가 백업 플레이에 소홀하고[19][20] 텍사스 안타성 타구를 잡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며, 이대로라면 한화표 노장 선수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듯하다는 둥 팬들의 비난을 샀다.
4.3. 2011 시즌
##2011년 406 대첩에서 대역전의 계기를 마련한 동점 투런을 때리기도 하는 등 그냥 사라지진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강속구 용병 투수로 화제를 모은 레다메스 리즈의 '천적' 소리를 들었다. 8일 LG전은 류현진이 무너지면서 8대4로 졌지만 4점을 강동우 혼자 다 냈다. 레다메스 리즈 상대로 대단히 자신감있는 스윙을 했다. 이어 4월 16일 기아전에서 결승타를 날려 팀의 7연패 사슬을 끊어냈다.
2011년 4월 21일까지 시즌 타율이 2할 7푼대였으나 득점권 타율은 5할 8푼대로 리그 전체 1위였다. 중심 타선같은 1번 타자의 재림에 그나마
5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3연전 첫 경기에서 이승호의 높은 직구를 그대로 때려 2:2 피말리는 접전 끝에 끝내기 안타를 날렸다. 팬과 칰갤러들은 야왕의 작전지시를 충실히 수행한 강동우에게 공작의 칭호를 내려야 한다며 강동우 공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리고 불암콩콩코믹스 <추두: 도망두산을 쫓다> 편에서는 야또나리가 되었다!!
7월 2일 KIA 타이거즈와의 3연전 두 번째 경기 3-6으로 뒤지고 있는 6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손영민의 공을 잡아당겨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역전만루홈런을 쳤다! 시즌 9호. 캐스터가 타이거즈 팬인 건 알지만 좀 심하게 친기아 성향으로 중계하는 와중에 패배로 기울던 분위기를 다시 되찾아온 모처럼 시원한 한 방이었다.
7월 30일 SK 와이번스의 큰 이승호를 상대로 쓰리런을 때리며 기어코 개인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11호 홈런을 쏘아 올렸다!!
9월까지 타율 .265~.270대를 오가면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홈런은 13개로 팀내 홈런 2위였다.
9월 17일 4타수 4안타 1홈런 2타점 맹활약을 펼쳤다.
후반기에 타율을 많이 끌어올린 덕분에 타율 .288, 출루율. 364, 장타율 .400, sWAR* 3.77[21]의 훌륭한 성적을 내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심지어 정규시즌 133경기 모두 출장을 해내는 기염을 토하면서 팀 내 타자 고과 1위(!!)에 오른 것은 물론, 홈런 개수로 프로 경력 사상 최다인 13개를 치며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고, 타점도 순도 높은 타점들이 상당히 많아 38살 나이임에도 차기 시즌에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도루 역시 17개를 성공시키며 회춘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였다.
한편 FA 대상자였지만 시즌 종료 후 FA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봉은 고작 5천만원이 올랐는데, 강동우의 생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인상액이 너무 적다는 인상이 짙다. 물론 노장선수의 연봉은 상대적으로 인상폭이 적은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시기 한화 프런트진의 연봉 인상 정책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강동우는 물론이고 이대수, 박정진 등 A+급 활약을 보인 선수들의 연봉 인상폭이 똑같이 5천이었다. 이는 선수들의 동기부여 실패로 이어졌고, 2012년 한화가 최악의 시즌을 맞이하는데 적지 않은 일조를 한다.
4.4. 2012 시즌
이제 한국나이로 무려 39세로 나이도 있고 하니 체력적으로 힘든 테이블 세터를 다른 선수가 맡아주길 바랬으나... 고동진을 개막전에서 시범으로 1번으로 기용했다가 쫄딱 망했다. 결국 다시 1번타자 임무를 수행하여 4월 월간 타율로 .313을 때려냈다.5월 17일 잠실 두산전에서 꽤나 진기명기급 장면을 만들어냈다. 3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이용찬을 상대로 우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쳐내면서 2루타로 될 줄 알았는데, 2루에서 멈추지 않고 3루까지 내달렸다. 그래서 황급히 중계플레이를 통해 3루수 윤석민에게 공이 왔고 강동우 역시 슬라이딩을 했는데 이로인해 헬멧이 벗겨져 오른팔을 절묘하게 가리게 됐고, 왼손을 뻗어 베이스를 먼저 찍어버리면서 세이프가 됐다. 윤석민은 하필 태그를 오른손에 하려던 것을 헬멧에다가 해버린 탓에 타이밍상 아웃을 잡을 수 있는 것을 3루까지 내어주게 되어버렸다. 강동우의 투지와 주루센스가 합쳐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꾸준히 제몫을 해냈으나 허리 미세통증으로 인해 6월 26일자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엔트리에 합류한 선수는 이양기. 회복기간을 거쳐 7월 10일 1군에 복귀. 한화는 강동우가 2군에 내려가 있는 동안 고동진, 양성우 등을 1번 타자 자리에 기용하였으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실제로 강동우가 2군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한화는 2승 7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마지막에는 장성호가 1번 타자로 기용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1군으로 올라왔으나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8월 2일 자로 다시 2군행을 통보받았다. 7월 10일부터 8월 1일까지의 성적이 안타깝게도 29타수 2안타(.069)로 극심한 타격 부진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엔트리에 합류한 선수는 추승우. 다행히 1번 구멍은 오선진이 각성하면서 메울 수 있게 되었다. 이후 8월 중순에 다시 합류하여 8월 25일 잠실 두산전에서는 또 한번 우월 3루타를 쳐내는 등 분투했으나 큰 반등은 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무리 지었다.
4.5. 2013 시즌
삼성 라이온즈 시절 그의 재기를 도운 김응용 감독을 만나 의지를 불태웠으나, 결국 그 해가 한화 이글스에서 마지막 해가 되었다. 시범경기 11경기에 출장해 16타수 5안타 타율 .313 2타점 2볼넷 출루율 .389를 기록해 다시금 KBO 최고령 1번 타자의 재림을 노리고 있었으나, 시즌 개막을 앞두고 시범경기에서 발가락 부상(골절)을 당해 2군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2012 시즌 종료 직후 가을 마무리훈련부터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까지 빠짐없이 훈련을 소화했기에 더욱 아쉬운 부상이었다. 다행히 1번 타자의 공백은 이대수가 나름대로 메워주고 있지만 팀이 개막 직후부터 연패 수렁에 빠져있고 마땅한 좌타자 요원도 없는 상황이라 그의 공백이 더욱 더 아쉬운 상황이었다.5월 말 1군에 복귀하여 타선에 나름대로 힘을 보탰으나 14경기에서 30타수 6안타에 그쳤고, 팀의 리빌딩 방침과 맞물려 다시 2군으로 향했다. 다행히 퓨처스리그에서는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감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후로 전혀 1군에 올릴 기미가 안 보인다. 그토록 대타를 남발하는 상황임에도 정작 강동우의 복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일각에선 '(감독의 권위를 위한) 베테랑 죽이기'로 의심할 정도.
결국 한화 이글스 이적 이후 최악의 성적을 남겼다. 26경기 52타수 11안타 타율 .212를 기록.
11월 24일, 서산 훈련장에서 훈련하던 도중 방출 통보를 받았다. 강동우 본인은 현역으로 더 활동하기를 원했으나 그를 찾는 팀은 어디에도 없었고, 결국 안타까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별도의 은퇴식 없이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며,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에서 원클럽맨으로 활약한 선배 이만수도 은퇴식 없이 방출당했는데 본인 선수도 같은 일을 겪어 아쉬움을 자아냈다.
5.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8 | 삼성 | 123 | 414 | .300 | 124 | 23 | 8 (2위) | 10 | 30 | 74 | 22 | 43 | .466 | .355 |
1999 | 1군 기록 없음 | |||||||||||||
2000 | 13 | 20 | .100 | 2 | 0 | 0 | 0 | 0 | 3 | 1 | 8 | .100 | .357 | |
2001 | 125 | 347 | .251 | 87 | 15 | 2 | 6 | 42 | 54 | 6 | 52 | .357 | .348 | |
2002 | 130 | 466 | .288 | 134 | 23 | 3 | 9 | 49 | 75 | 11 | 47 | .408 | .352 | |
2003 | 130 | 443 | .266 | 118 | 19 | 4 | 9 | 57 | 61 | 8 | 58 | .388 | .349 | |
2004 | 132 | 438 | .295 | 129 | 22 | 1 | 3 | 49 | 59 | 9 | 51 | .370 | .367 | |
2005 | 125 | 367 | .240 | 88 | 15 | 3 (5위) | 6 | 38 | 61 | 9 | 46 | .346 | .322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6 | 두산 | 118 | 393 | .249 | 98 | 12 | 2 | 2 | 34 | 36 | 8 | 49 | .305 | .330 |
2007 | 25 | 43 | .163 | 7 | 1 | 1 | 1 | 6 | 1 | 0 | 5 | .302 | .250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8 | KIA | 45 | 40 | .100 | 4 | 1 | 0 | 0 | 5 | 8 | 0 | 9 | .125 | .260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9 | 한화 | 128 | 506 | .302 | 153 (5위) | 30 | 2 | 10 | 48 | 88 | 27 | 70 | .429 | .384 |
2010 | 98 | 309 | .252 | 78 | 8 | 1 | 4 | 22 | 45 | 14 | 44 | .324 | .346 | |
2011 | 133 | 518 | .288 | 149 (5위) | 13 | 3 | 13 | 51 | 83 (3위) | 17 | 64 | .400 | .363 | |
2012 | 76 | 257 | .253 | 65 | 16 | 1 | 2 | 22 | 35 | 1 | 26 | .324 | .346 | |
2013 | 26 | 52 | .212 | 11 | 1 | 1 | 0 | 3 | 4 | 0 | 7 | .269 | .300 | |
KBO 통산 (15시즌) | 1427 | 4613 | .270 | 1247 | 199 | 32 | 75 | 456 | 687 | 133 | 579 | .376 | .352 |
[1] 다만 구자욱의 경우 2012년에 데뷔해 군 문제를 해결하고 프로 입단 4년만에 1군에 올라온 중고신인이라 엄밀한 의미로써의 순수 신인 3할타자는 아니다. 따라서 순수 신인 최후의 3할 타자 자리는 강동우가 유지하고 있다가 2017년 고졸 신인 이정후가 데뷔 첫 해부터 3할 타율을 치면서 무려 19년만에 순수신인 최후 3할타자 자리를 내줬다.[2]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저 3할은 반올림으로 저렇게 된 거고 반올림하지 않으면 0.2995...가 된다.[3] 이때 이병규가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던 도중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 방송을 타면서 '후배(강동우는 이병규의 단국대 1년 후배)가 부상당한 게 그렇게도 고소하냐'며 무한 까임을 당했다. 이병규는 강동우가 부상당한 것을 모르고 홈런성 타구가 잡힌 것이 아쉽다는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판단은 알아서.[4] 이후 베이스볼 긱에서 이도형과 함께 한 인터뷰에서 이도형이 이 사건을 언급하였다. 강동우는 '병규형이랑 단국대 다니면서 참 친하게 지냈는데'라는 말부터 꺼냈는데 그 후엔 계속 이병규를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 끝에는 이병규와 오해를 풀었다는 말을 했지만 대학 1년 선배를 그 사람이라고 칭한 것 자체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병규가 2003년 시즌 도중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당해 시즌아웃되었을 때 이병규의 상태를 걱정하는 강동우의 인터뷰가 올라오기도 했고, 2017년 시점에서는 강동우가 은퇴 후 두산 코치로 합류하고 이병규도 은퇴한 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엔 서로 웃으며 연락처도 주고받는 등 지금은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거나 당사자들끼리 어떻게 푼 듯 하다. 판단을 알아서.[5] 20여년 전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한신 타이거스의 준주전급 좌익수였던 사노 노리요시가 가와사키 구장에서 펜스에 부딪히며 공을 잡으려다가 두개골이 함몰되는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6] 어쨌거나 이 부상으로 인해 군 면제를 받기는 했다.[7] 강동우가 부상으로 대표팀 엔트리에서 낙마하자 대체선수로 LG 트윈스의 심재학이 뽑혔는데, 심재학은 1998 시즌을 마치고 공익 입대가 예정되어 있었다가 강동우의 대타로 대표팀에 합류, 주장까지 역임하면서 병역특례를 받는데 성공했다.[8] 그리고 선수의 안전을 위협하는 구장 시설물의 안전 문제는 20여년이 지나도록 하나도 나아지지 않아 2019년 6월 25일 kt wiz의 주축 타자 강백호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9] 원조는 원년 세이브왕 황규봉.[10] 2001년 4월 24일 롯데를 상대로 대타 끝내기 솔로홈런을 기록하기도 했고, 2001년 6월 12일에는 LG신윤호를 상대로 연장 10회에 끝내기 만루홈런을 터뜨렸다.[11] 각 스포츠 사에서 주는 당해년도 재기수상자를 수상 받은 적이 있다.[12]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노런이 나온 그 경기 맞다. 결과적으로 양 팀 모두 무승부로 끝.[13] 다만 이 당시 조용준이 던진 몸쪽 공이 강동우의 무릎 쪽으로 날아왔는데, 상술했지만 신인 시절 강동우가 어느 곳을 심하게 다쳤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아마 당시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본능적으로 무릎 쪽 공을 피한 듯 하다.[14] 김창희는 훗날 선동열을 따라 친정팀 KIA 타이거즈의 전력분석관으로 옮긴다.[15] 다만 상술했듯이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을 때는 까였던 적도 있다.[16] 단 순수신인인 강동우와 박한이와 다르게 구자욱은 중고신인이다.[17] 2018년부터 KIA에서 뛰는 우완투수 이윤학과는 동명이인. 이쪽은 좌완투수였다.[18] 다만 KIA도 훗날 신종길을 몇 년간 주전 외야수로 잘 기용했다 보니 양 팀간 윈윈 트레이드라는 의견도 있었다.[19] 2010년 9월 8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김다원이 우익수 이양기쪽으로 안타를 쳤고 이양기는 이 공을 잡으려다가 실패한 뒤 스텝이 꼬여서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이 황당한 장면에 한화팬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리고 김다원은 그대로 누를 돌고 돌아 홈으로. 이는 김다원의 데뷔 홈런이었다.(…)[20] 그러나 강동우가 백업을 게을리 했다고 보기 힘든 측면도 있다. 강동우는 분명 뛰고 있었고, 오선진이 간 것은 애매한 뜬공을 잡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선진이 가는 게 더 나은 위치여서 간 것이다. 강동우를 깔만한 상황은 아니다. 이 모든 게 작년에 비해 턱없이 좁아진 수비범위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역시 지나친 비난이다.[21] 시즌 전체 외야수 중 7위로, 바로 윗 순위에 김현수, 이병규, 손아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