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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8 15:24:45

가와사키 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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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Kawasaki_1989_02.jpg
구장명 가와사키 구장(川崎球場)
소재지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가와사키 구
홈구단 다카하시 유니온스(1954~1956)
다이요 훼일즈(1955~1977)
롯데 오리온즈(1978~1991)
개장일 1951년
좌석수 30,000명
크기 좌우 90m
중앙 120m

1. 소개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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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가와사키 구장은 한때 일본프로야구의 야구장이었다가, 2000년 이후 대규모 리노베이션을 실시해 지금은 미식축구와 연식 야구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세 프로팀이 이곳을 거쳐갔다.

2. 역사

게이힌 공업지대의 일각을 차지하는 가와사키 시내에는 많은 기업들이 있었으며 사회인야구가 번성했다. 새로운 사회인 야구 전용 구장을 짓자는 이야기가 나와 1951년에 준공되었다. 1952년에는 내야 스탠드를 설치했으며 프로야구 경기를 유치하였다. 수도권 구단들이 대부분 고라쿠엔 구장을 사용하여 일정이 과밀해지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가와사키 구장의 건립은 일정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1]

당시 구장들이 한결같이 좁았으나 이 구장은 특히 좁아서 홈런이 나오기 쉬운 구장이었다. 1954년 다카하시 유니온즈[2]가 프로구단 최초로 이 곳을 홈구장으로 삼았으며 같은 해에 야간 조명 시설이 설치되었다. 1955년에는 다이요 웨일스가 같이 이 구장을 사용하였다. 1956년에 러시아 출신의 투수 빅토르 스타루힌이 이 구장에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개인 300승을 달성했다[3].

1957년부터 1977년까지 21년간은 다이요 단독으로 이 구장을 사용했다[4].

1960년 니시테쓰 라이온즈 감독을 역임했던 미하라 오사무가 다이요 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구단 사상 최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많은 이들이 열세라고 예상했던 1960년 일본시리즈에서도 모두 1점차 승리를 거두며[5] 비원의 첫V를 달성했다[6].

196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입단 시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던 오 사다하루가 스승 아라카와 히로시와 절치 부심해 갈고 닦은 외다리 타법을 처음 선보였다. '왕,왕,삼진왕'이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을 듣던 왕정치는 이 경기에서 홈런 포함 3안타를 터뜨려 팀의 대승을 이끌었다. 이후 홈런타자로 대성했고 1976년 일본 최초가 되는 본인의 통산 700호 홈런을 이 구장에서 때려냈다. 오는 "외다리 타법을 처음으로 선보인 이 날 경기의 2번째 타석에서 홈런이 나왔고 정말 기뻤다. 그게 없었다면 이후 오 사다하루는 없으니까. 고라쿠엔 구장처럼 몸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 없고, 백네트 뒤에서 관계자 객실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으로 집중력을 높이고 있었다"라고 술회했다.

1973년에는 그 해 21승으로 퍼시픽리그 최다승을 거둔 롯데 오리온즈 나리타 후미오가 같은 해 닛타쿠홈 플라이어스(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 가와사키 홈경기 2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했다[7].

1977년에는 한신 외야수 사노 노리요시가 수비 도중 외야 콘크리트 펜스에 부딪히면서 두개골 골절의 중상을 입은 것을 계기로, 일본프로야구는 야구장 펜스에 고무 재질의 보호대 설치를 의무화했다.

그러나, 가와사키 구장이 준공한 지 25년 이상 경과하여 노후화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시설, 관중 동원, 입지 등 한계를 느낀 다이요는 요코하마로의 이전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8년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의 이전을 발표하자 가와사키 시에서는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전을 추진한 다이요에게 반발했으며, 팬들도 분노했다. 그런 와중에 집시 롯데 생활을 이어 나가던 롯데 오리온즈에서 다이요와 공동으로 요코하마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다이요는 구장 공동 사용에 따른 일정 과밀화를 우려해 롯데의 제의를 거부했고, 다이요로부터 배신당한 가와사키 시는 롯데의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결국 중재를 통해 다이요는 요코하마 스타디움, 롯데는 가와사키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것이 정해졌다.

1978년부터 1991년은 롯데가 사용했다. 그러나 노후화하고 협소한 구장을 찾아올 팬들은 적었기에 관중동원에 어려움을 겪었다. 야구의 성지인 고라쿠엔 구장이나 과거에 사용했던 도쿄 스타디움보다도 시설이 크게 열악했다. TV 프로그램에서는 경기는 뒷전이고 프로그램 카메라에 잡히기 위해 나가시 소면을 만들어 먹거나, 마작을 치고, 광고판을 닦는 퍼포먼스를 시전하는 관중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또한 인접한 가와사키 경륜장의 경륜을 스탠드 상단에서 구경하던 관객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롯데는 TV에서는 볼 수 없는 가와사키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적극적으로 광고했다.[8]

1980년 5월 28일 장훈이 일본프로야구 최초이자 유일한 개인 통산 3,000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했다.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3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한 장훈은 6회말 선발 야마구치 다카시[9]에게 우익수 스탠드로 꽂히는 투런 홈런을 기록하며 대기록을 수립했다. 장훈은 훗날, "야마구치는 직구가 빨라서 눈을 감고 휘두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초구부터 스윙했다. 라이트 상단의 그물의 위쪽에 맞았다. 나의 통산 504개의 홈런 중 열 손가락에 들어갈 홈런이었지. 너무 기뻐서 헬멧를 하늘로 집어던지고 날뛰면서 베이스를 돌았는데, 야마구치에게 실례가 되었다고 생각되어 나중에 그에게 사과했다. 그 당시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부끄럽다"고 술회했다.

1985년과 1986년 2년 연속으로 팀의 간판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타격 3관왕을 차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1988년 NPB 사상 최고의 명승부라 불리우는 10.19 더블헤더가 이 구장에서 열렸다. 이 명승부에 대해선 해당 항목 참고.

그러나 가와사키 구장의 노후화는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구장 개장 이후 1번도 교체되지 않은 기기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구장 아나운서는 구장 관계자로부터 "고장나면 바꿀 부품이 없어서 조심히 다뤄달라"는 부탁까지 받을 정도였다. 라커룸은 습기가 많고 스탠드 좌석은 좁고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며 잠금 장치도 고장났다. 팀의 주력 타자였던 아리토 미치요가 말하길 "라커룸이 습기로 눅눅하고 방망이와 글러브, 스파이크를 놔두고 1주일 원정을 다녀오면 곰팡이가 슬고 배트는 20g 무거워졌다"고 한다. 스탠드 경사가 낮아서 파울 볼이 장외로 나가면 롯데 선수들의 애차를 와장창직격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카와사키 구장은 영화와 TV 드라마의 촬영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성적, 관객 동원 모두 바닥을 기고 있었던 롯데는 결국 연고 이전 카드를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고, 치바 현에 치바 마린 스타디움을 준공하여 롯데의 유치를 꾀하였다. 롯데는 1992년부터 치바 마린 스타디움 사용을 발표했다. 다이요에 이어 또 한 번 연고팀을 잃게 된 가와사키 시에서는 항의의 의미로 그동안 시에서 부담한 구장 개수 비용 보상을 요구했으나, 롯데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 그렇게 가와사키 구장 시대는 끝이 났다.

롯데가 떠난 후에 프로야구 1군 경기가 열리지는 않았다. 2군 경기는 1997년이 마지막. 프로야구는 열리지 않지만 고교, 대학, 사회인 야구경기는 계속 치러졌으며 프로레슬링, 미식축구 경기가 열렸다. 그 후 건물 안전 진단 결과 붕괴 위험을 판정받아 구장 페쇄 및 스탠드 철거를 결정했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 야구장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그라운드를 제외하고는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리모델링이 되었으며 '후지쯔 스타디움 가와사키'라는 이름으로 명명권 계약이 된 모양. 다만 현재에도 연식 야구 경기는 간간히 치러지며, 스폰서의 영향인 것인지 가와사키 프론탈레의 유소년 팀이 이 경기장을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 1962~1972년간 롯데가 사용한 도쿄 스타디움의 신축도 일정 과밀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2] 1956년 다이에이 스타즈에 합병되면서 해체되었다.[3] 1955년에는 고쿠데츠 스왈로즈재일교포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가 이 구장에서 히로시마전 2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뒀다(53년에 이 구장 히로시마전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했고 본인의 히로시마전 가와사키 홈경기 등판 통산성적은 6경기 6승(5완투(2완봉) 1구원) 36이닝 4자책점(ERA 1.00)이다)[4] 고쿠데츠-산케이-야쿠르트가 57년 6경기(VS 한신전 4), 59년 2(8월 4일 다이요전 더블헤더), 60년 2(5/11~12 다이요전), 63년 2(10월 10일 히로시마전 더블헤더), 66년 5경기(VS 히로시마전 10월 11일 더블헤더/VS 주니치전 10월 12일 더블헤더), 68년 2경기(10월 12일 히로시마전 더블헤더), 70년 4경기(한신전 2 다이요전 2(10월 26일 더블헤더)를 치렀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59년 10월 16일 더블헤더부터 17일, 10월 20일 더블헤더(모두 주니치전)을 유치했고 오리온즈가 57년부터 63년(63년 경기 없음), 73~77년, 다이에이가 57년 8경기를 치렀다[5] 다이마이 오리온즈를 상대로 1~4차전을 스윕하며 우승했지만 1-0, 3-2, 6-5, 1-0 등 모두 1점차 접전이었다. 미하라의 작전력과 지도력이 빛났던 시리즈다.[6] 다이요는 그 후 리그 우승과 거리가 멀어졌으며 1978년 본거지를 이전한 롯데도 2번의 기별 우승을 했지만(1980~81년) 아쉽게도 모두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여 1960년이 가와사키 구장에서 개최된 유일한 일본시리즈가 됐다[7]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가네다 마사이치는 55년 히로시마전 가와사키 홈경기 2연속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8] 이것은 당시 센트럴 리그에 비해 현저히 인기가 떨어지던 퍼시픽 리그 내에서도 인기 없기로 악명높았던 탓에 TV 생중계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롯데의 신세를 자학적으로 표현한 광고이기도 했다(...).[9] 은퇴 후 한신 투수코치 시절 어느 야구소년의 투구폼을 교정하여 리그 정상급 불펜투수로 키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