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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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위 | 팀명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1 | 브라질 | 3 | 2 | 1 | 0 | 8 | 2 | +6 | 5 | |
2 | 유고슬라비아 | 3 | 2 | 0 | 1 | 7 | 3 | +4 | 4 | |
3 | 스위스 | 3 | 1 | 1 | 1 | 4 | 6 | -2 | 2 | |
4 | 멕시코 | 3 | 0 | 0 | 3 | 2 | 10 | -8 | 0 | |
■ 토너먼트 진출 | ■ 탈락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13개국 본선 13강 조별 라운드의 진행 상황 중, 1조에 대해 정리하는 페이지.
2. 1경기 브라질 4 vs 0 멕시코
경기장 |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 히우지자네이루 - 브라질 | |
경기일[1] | 1950년 6월 24일 15:00 (1950년 6월 25일 03:00[2]) | |
심 판 | 조지 리더 (잉글랜드) | |
국 가 | 브라질 | 멕시코 |
득 점 | 4 | 0 |
득점자 | 아데미르 (30', 79') 자이르 (65') 바우타자르 (71') |
브라질 선발 명단 3-2-2-3 감독: [[플라비우 코스타|{{{#0000ff 플라비우 코스타}}}]] | |||||
GK 1. 모아시르 바르보자 | |||||
FB 2. 아우구스투 | FB 3. 주베나우 | FB 4. 비고지 | |||
HB 5. 엘리 두암파루 | HB 6. 다닐루 아우빙 | ||||
FW 8. 아데미르 30', 79' | FW 10. 자이르 65' | ||||
FW 7. 마네카 | FW 9. 바우타자르 71' | FW 11. 프리아사 | |||
FW 11. 호세 벨라스케스 | FW 9. 오라시오 카사린 | FW 7. 카를로스 셉티엔 | |||
FW 10. 마리오 페레스 | FW 8. 엑토르 오르티스 | ||||
HB 6. 호세 로카 | HB 5. 마리오 오초아 | HB 4. 로드리고 루이스 | |||
FB 3. 알폰소 몬테마요르 | FB 2. 펠리페 세테르 | ||||
GK 1. 안토니오 카르바할 | |||||
멕시코 선발 명단 2-3-2-3 감독: [[옥타비오 비알|{{{#003366 옥타비오 비알}}}]] |
어찌보면 세상에서 가장 모골이 송연한 스포츠 경기이다. 이 경기 휘슬이 울리는 그 순간, 정확하게 지구 정반대편에서는 6.25 전쟁이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 시작했다.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은 브라질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서 치러졌다.[3] 경기장이 완전히 지어진 게 아닌지라 화장실도 모자라고, 관중의 입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81,649명의 관중이 몰려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행사와 경기를 지켜보았다. 21개의 예포와 5천여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온 브라질 국민들은 물론 브라질 정부까지 월드컵에 쏟는 관심은 정말 대단했다.
전반 30분, 몇 차례의 기회를 놓치던 브라질이 선취골을 기록했다. 브라질의 스트라이커 아데미르가 수비형 미드필더 다닐루 아우빙의 패스를 받아 골을 기록한 것이었다. 열광하는 브라질 관중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라디오 중계진들과 사진 기자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는 바람에 잉글랜드 출신의 주심 조지 리더는 경기를 재개하기 위한 고생을 따로 해야만 했다. 당시 리더는 54살의 최고참 심판이자 심판 중 최고 연봉 수령자였지만 이런 식의 소동이 아주 흔한 일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경기는 속행되었고 전반은 브라질이 한 점 차로 리드한 가운데 끝났다. 브라질은 겨울인지라 전반이 끝날 무렵에는 해가 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후반 20분, 브라질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이르가 멕시코의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왼발로 강력한 땅볼 슈팅을 날렸고 멕시코의 골키퍼 안토니오 카르바할[4]은 급히 왼쪽 다리를 뻗어보았지만 이를 막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데미르는 뒤이어 다시 찬스를 잡았지만 공은 아쉽게도 골대를 때리고 말았다.
후반 26분, 바우타자르는 마네카의 코너킥을 머리로 받아넣어 세 번째 골을 성공시켰고, 34분에는 아데미르가 골대를 맞춘 것을 만회하듯 자이르의 크로스를 받아 결국은 쐐기골과 더불어 자신의 두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최종 점수는 4:0. 브라질은 첫 경기에서 기분 좋게 승리를 챙겼다.
3. 2경기 스위스 0 vs 3 유고슬라비아
경기장 | 이스타지우 인디펜덴시아 벨루오리존치 - 브라질 | |
경기일 | 1950년 6월 25일 15:00 (1950년 6월 26일 03:00) | |
심 판 | 조반니 갈레아티 (이탈리아) | |
국 가 | 스위스 | 유고슬라비아 |
득 점 | 0 | 3 |
득점자 | 라이코 미티치 (59') 코스타 토마셰비치 (70') 티호미르 오그냐노브 (84') |
스위스 선발 명단 2-3-2-3 감독: [[프랑코 안드레올리|{{{#ffffff 프랑코 안드레올리}}}]] | |||||
GK 1. 조르주 슈투버 | |||||
FB 2. 앙드레 뇌리 | FB 3. 로제 보케 | ||||
HB 4. 게르하르트 루센티 | HB 5. 올리버 에기만 | HB 6. 로제 킹슈 | |||
FW 8. 키키 앙테넨 | FW 10. 르네 바더 | ||||
FW 7. 프레디 비켈 | FW 9. 장 타미니 | FW 11. 재키 파통 | |||
FW 11. 베르나르드 부카스 | FW 9. 코스타 토마셰비치 70' | FW 7. 티호미르 오그냐노브 84' | |||
FW 10. 스체판 보베크 | FW 8. 라이코 미티치 59' | ||||
HB 6. 프레드라그 자이치 | HB 5.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 HB 4. 브란코 스탄코비치 | |||
FB 3. 미오드라그 요바노비치 | FB 2. 이반 호르바트 | ||||
GK 1. 스르잔 므르쿠시치 | |||||
유고슬라비아 선발 명단 2-3-2-3 감독: [[밀로라드 아르세니예비치|{{{#ffffff 밀로라드 아르세니예비치}}}]] |
유고슬라비아와 스위스의 경기는 벨루오리존치의 이스타지우 인데펜덴시아에서 열렸다.
경기 전의 예측을 잠시 짚어보면 유고슬라비아는 2년 전 올림픽 무대에서 준우승했기 때문에 스위스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칠 것이라는 예측이 다수였다. 이 경기가 시작되기 전 작은 해프닝 때문에 시작이 늦어졌는데 그 이유는 코너 플래그의 분실이었다. 20분에 걸쳐 코너 플래그를 찾고 나니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서 그대로는 시합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명을 밝혔는데 이 경기가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조명을 사용한 시합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반은 인사이드 포워드 라이코 미티치, 스체판 보베크, 하프백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프레드라그 자이치의 우아한 패스를 앞세운 유고슬라비아가 지배했고 스위스는 12년 전의 시리오 베르나티처럼 중원장악을 해주는 선수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양 팀 모두 득점은 없었다. 후반 14분에 라이코 미티치가 선제골을 뽑았다. 그리고 25분에는 코스타 토마셰비치가 헤딩으로 추가골을, 후반 39분에는 티호미르 오그냐노브가 페널티 스팟 근처에서 왼발 슈팅으로 쐐기골을 넣었다. 스위스의 골키퍼 조르주 슈투버는 여러 차례 좋은 세이브를 보였지만 유고슬라비아의 화력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0으로 유고슬라비아가 낙승을 거뒀다.
4. 3경기 브라질 2 vs 2 스위스
경기장 | 이스타지우 두 파카엠부 상파울루 - 브라질 | |
경기일 | 1950년 6월 28일 15:00 (1950년 6월 29일 03:00) | |
심 판 | 라몬 아손 로마 (스페인) | |
국 가 | 브라질 | 스위스 |
득 점 | 2 | 2 |
득점자 | 아우프레두 Ⅱ (3') 바우타자르 (32') | 재키 파통 (17', 88') |
브라질 선발 명단 3-2-2-3 감독: [[플라비우 코스타|{{{#0000ff 플라비우 코스타}}}]] | |||||
GK 1. 모아시르 바르보자 | |||||
FB 2. 아우구스투 | FB 3. 주베나우 | FB 4. 노로냐 | |||
HB 5. 바우에르 | HB 6. 후이 | ||||
FW 8. 아데미르 | FW 10. 마네카 | ||||
FW 7. 아우프레두 Ⅱ 3' | FW 9. 바우타자르 32' | FW 11. 프리아사 | |||
FW 11. 재키 파통 17', 88' | FW 9. 한스페터 프리드렌더 | FW 7. 프레디 비켈 | |||
FW 10. 르네 바더 | FW 8. 장 타미니 | ||||
HB 6. 로제 킹슈 | HB 5. 올리버 에기만 | HB 4. 게르하르트 루센티 | |||
FB 3. 로제 보케 | FB 2. 앙드레 뇌리 | ||||
GK 1. 조르주 슈투버 | |||||
스위스 선발 명단 2-3-2-3 감독: [[프랑코 안드레올리|{{{#ffffff 프랑코 안드레올리}}}]] |
이 경기는 브라질이 이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마라카낭 경기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른 경기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 경기에서 브라질의 감독 플라비우 코스타는 지지뉴, 다닐루 아우빙 등 일부 주전 선수들을 쉬게 하고 그 자리에 원래 구장의 주인인 상파울루 FC 팀 소속 선수들을 기용하는 나름의 팬서비스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 경기에 참가한 칠레 출신의 부심 세르히오 부스타만테는 당시 26세로 월드컵 역사상 가장 어린 심판이었다.
브라질은 경기가 시작된 지 3분 만에 득점에 성공했다. 아데미르가 돌파를 시도했고 스위스의 골키퍼 조르주 슈투버가 그를 막기 위해 나왔지만 아데미르는 슈투버를 제끼고 엔드라인 밖에서 다시 패스를 찔러줬다. 그 패스를 아무도 잡지 못해 뒤로 빠졌지만 늦깎이 공격수 아우프레두 Ⅱ가 달려들어오면서 스위스의 골문에 강력한 슈팅을 날렸고 골이 되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안방에서 자신들의 플레이를 유감없이 펼쳐보였다. 특히 아데미르의 개인기가 눈부셨다.
하지만 전반 17분, 스위스의 반격으로 동점골이 만들어졌다. 브라질 진영 오른쪽 깊숙한 곳에서 프레디 비켈이 땅볼 크로스를 날렸지만 스위스의 공격수가 그를 처리하지 못했고 뒤늦게 달려온 브라질의 수비수 주베나우가 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뒤에 있던 다른 공격수 재키 파통이 그걸 빼앗아 골을 넣었다.
스위스의 득점 이후 리드를 되찾으려는 브라질의 공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전반 32분 바우타자르가 코너킥을 헤딩골로 연결했다. 지난 경기에 이은 연속 헤딩골이었다. 슈투버가 몸을 최대한 뻗어보았지만 골문의 왼쪽 상단 구석을 향하는 공을 막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브라질은 스위스의 골문에 슈팅을 계속 날려댔지만 슈투버의 연이은 선방으로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었다.
후반에도 일방적인 브라질의 공격이 계속되었지만 슈투버는 더욱 힘을 냈고 오히려 브라질은 종료 2분 전에 나온 파통의 동점골로 다 잡은 승리를 놓치게 되었다. 결국 양 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했고, 경기 이후엔 플라비우 코스타의 선수 기용 방침에 불만을 품은 기사들이 속출했다.
5. 4경기 멕시코 1 vs 4 유고슬라비아
경기장 | 이스타지우 도스 유칼립투스 포르투알레그리 - 브라질 | |
경기일 | 1950년 6월 28일 15:00 (1950년 6월 29일 03:00) | |
심 판 | 레지널드 리프 (잉글랜드) | |
국 가 | 멕시코 | 유고슬라비아 |
득 점 | 1 | 4 |
득점자 | 엑토르 오르티스 (89')(PK) | 스체판 보베크 (20') 젤코 차이코브스키 (23', 51') 코스타 토마셰비치 (81') |
멕시코 선발 명단 3-2-2-3 감독: [[옥타비오 비알|{{{#003366 옥타비오 비알}}}]] | |||||
GK 1. 안토니오 카르바할 | |||||
FB 2. 마누엘 구티에레스 | FB 3. 사무엘 쿠부루 | FB 4. 그레고리오 고메스 | |||
HB 5. 호세 로카 | HB 6. 엑토르 오르티스 89' | ||||
FW 8. 호세 나랑호 | FW 10. 마리오 페레스 | ||||
FW 7. 카를로스 셉티엔 | FW 9. 오라시오 카사린 | FW 11. 호세 벨라스케스 | |||
FW 11. 젤코 차이코브스키 23', 51' | FW 9. 코스타 토마셰비치 80' | FW 7. 프르보슬라브 미하일로비치 | |||
FW 10. 스체판 보베크 20' | FW 8. 라이코 미티치 | ||||
HB 6. 프레드라그 자이치 | HB 5.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 ||||
FB 4. 브란코 스탄코비치 | FB 3. 미오드라그 요바노비치 | FB 2. 이반 호르바트 | |||
GK 1. 스르잔 므르쿠시치 | |||||
유고슬라비아 선발 명단 3-2-2-3 감독: [[밀로라드 아르세니예비치|{{{#ffffff 밀로라드 아르세니예비치}}}]] |
브라질과 스위스가 상파울루에서 경기하느라 여기는 한산하기는 개뿔.. 11,000여명의 관중이 몰려와 이 경기를 관람했다.
멕시코는 첫 상대였던 브라질에게 4골을 먹힌 충격이 컸기 때문인지 수비수 3명을 전원 교체했고 수비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바람과는 반대로 첫 골은 전반 20분, 유고슬라비아의 보베크가 기록했다. 밀루티노비치의 크로스가 옆으로 빠지자 달려오면서 그대로 논스톱 슛. 골로 연결되었다. 3분 후에는 젤코 차이코브스키가 형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의 패스를 받아 득점에 성공했다. 계속된 유고슬라비아의 공격 속에 멕시코의 골키퍼 안토니오 카르바할은 지쳐갔다.
후반 6분에는 젤코 차이코브스키에게, 36분에는 코스타 토마셰비치에게 한 골씩을 더 얻어맞고 멕시코는 그렇게 침몰했다. 그나마 경기 종료 직전 엑토르 오르티스의 페널티 킥으로 영패를 면한 것이 멕시코의 위안거리였다.
6. 5경기 브라질 2 vs 0 유고슬라비아
경기장 |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 히우지자네이루 - 브라질 | |
경기일 | 1950년 7월 1일 15:00 (1950년 7월 2일 03:00) | |
심 판 | 벤자민 그리피스 (웨일스) | |
국 가 | 브라질 | 유고슬라비아 |
득 점 | 2 | 0 |
득점자 | 아데미르 (4') 지지뉴 (69') |
브라질 선발 명단 3-2-2-3 감독: [[플라비우 코스타|{{{#0000ff 플라비우 코스타}}}]] | |||||
GK 1. 모아시르 바르보자 | |||||
FB 2. 아우구스투 | FB 3. 주베나우 | FB 4. 비고지 | |||
HB 5. 바우에르 | HB 6. 다닐루 아우빙 | ||||
FW 8. 지지뉴 69' | FW 10. 자이르 | ||||
FW 7. 마네카 | FW 9. 아데미르 4' | FW 11. 시쿠 | |||
FW 11. 젤코 차이코브스키 | FW 9. 코스타 토마셰비치 | FW 7. 베르나르드 부카스 | |||
FW 10. 스체판 보베크 | FW 8. 라이코 미티치 | ||||
HB 6. 프레드라그 자이치 | HB 5. 즐라트코 차이코브스키 | ||||
FB 4. 브란코 스탄코비치 | FB 3. 미오드라그 요바노비치 | FB 2. 이반 호르바트 | |||
GK 1. 스르잔 므르쿠시치 | |||||
유고슬라비아 선발 명단 3-2-2-3 감독: [[밀로라드 아르세니예비치|{{{#ffffff 밀로라드 아르세니예비치}}}]] |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2승, 브라질은 1승 1무였던 관계로 브라질은 이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조 1위에게만 주어지는 결승 리그 진출이 가능했다. 브라질에겐 무승부도 소용없었다. 그들의 염원을 담아 14만 2천여 명의 팬들이 마라카낭 경기장에 모여들었고 이는 당시 최다 관중 동원 기록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브라질은 최정예 멤버를 꾸려 유고슬라비아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브라질에 있어서 다행인 것은 지지뉴가 복귀하면서 아데미르도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위치인 센터 포워드로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사고가 생겨 유고슬라비아 선수들의 입장이 지연되었는데 유고슬라비아의 스트라이커 라이코 미티치가 입장을 위해 경기장 안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철제 대들보에 머리를 부딪혔고 이로 인해 이마에 큰 상처가 생긴 것이었다. 웨일스 출신 주심 그리피스가 경기 입장에 지연이 생기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미티치는 밖에서 치료를 받았고 유고슬라비아는 일단 열 명으로 시합을 시작했다.
브라질은 전반 4분, 아데미르의 선제골로 앞서나갔다. 문전 혼전 상황에서 지지뉴가 아데미르에게 흘려준 볼을 아데미르가 놓치지 않고 오른발로 차 넣은 것이다. 마라카낭에는 난리가 났다. 그리고 미티치가 경기장에 입장한 것은 시작한 지 무려 20분이 지난 후였다.[5] 유고슬라비아는 한 골을 먼저 실점하긴 했지만 잘 버텼고 미티치가 복귀하면서 다시 그들의 게임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하프 타임 때에는 유고슬라비아의 골키퍼 므르쿠시치가 유니폼을 갈아입고 왔다. 므르쿠시치가 전반전에 입었던 유니폼이 흰색 긴팔이었고 브라질의 당시 유니폼도 같은 흰색이라 심판이 헷갈린다는 이유로 므르쿠시치에게 유니폼을 갈아입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후반 4분에는 지지뉴가 골을 기록했지만 시쿠의 위치가 오프사이드로 판정되었기 때문에 무효 처리되었다. 지지뉴의 슈팅은 깔끔하게 므르쿠시치가 지키는 골문의 왼쪽을 뚫었지만 지지뉴가 슈팅을 하는 순간 시쿠가 수비수보다 앞에 있었기 때문에 오프사이드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6] 이후의 시합은 양팀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고 결국 후반 24분, 지지뉴가 아까의 오프사이드에 분풀이라도 하듯 골을 성공시켰다.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브라질 대표팀을 응원하는 브라질 축구팬들의 응원은 정말 장관이었다.
결국 브라질은 2:0으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결승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고 이로써 20년 전의 패배도 고스란히 설욕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수페르가의 비극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스웨덴에게 밀려 탈락하고 잉글랜드가 우쭐대다가 미국에게 덜미를 잡힌게 원인이 되어 스페인에게 밀려 탈락하자 브라질은 내심 우승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칫국의 최후는 처참했다.
7. 6경기 멕시코 1 vs 2 스위스
경기장 | 이스타지우 도스 유칼립투스 포르투알레그리 - 브라질 | |
경기일 | 1950년 7월 2일 15:30 (1950년 7월 3일 03:30) | |
심 판 | 이반 에클린드 (스웨덴) | |
국 가 | 멕시코 | 스위스 |
득 점 | 1 | 2 |
득점자 | 오라시오 카사린 (89') | 르네 바더 (10') 키키 앙테넨 (44') |
GK 1. 안토니오 카르바할 | |||||
FB 2. 마누엘 구티에레스 | FB 3. 그레고리오 고메스 | ||||
HB 4. 엑토르 오르티스 | HB 5. 마리오 오초아 | HB 6. 호세 로카 | |||
FW 8. 호세 나랑호 | FW 10. 호세 보르보야 | ||||
FW 7. 안토니오 플로레스 | FW 9. 오라시오 카사린 89' | FW 11. 호세 벨라스케스 | |||
FW 11. 재키 파통 | FW 9. 한스페터 프리드렌더 | FW 7. 장 타미니 | |||
FW 10. 르네 바더 10' | FW 8. 키키 앙테넨 44' | ||||
HB 6. 로제 킹슈 | HB 5. 올리버 에기만 | HB 4. 게르하르트 루센티 | |||
FB 3. 로제 보케 | FB 2. 앙드레 뇌리 | ||||
GK 1. 아돌프 후그 | |||||
스위스 선발 명단 2-3-2-3 감독: [[프랑코 안드레올리|{{{#ffffff 프랑코 안드레올리}}}]] |
이미 탈락이 확정된 팀들의 경기였기 때문에 경기장은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선제골은 전반 10분 스위스의 르네 바더의 골이었다. 헤딩 경합으로 공중에 뜬 볼을 논스톱으로 슈팅을 때려 카르바할의 방어를 뚫었다. 전반 44분에는 앙테넨의 슈팅이 다시 한 번 카르바할의 방어를 뚫으면서 스위스는 승리를 거의 굳혔다. 멕시코는 주장 카사린을 필두로 스위스의 골문을 노렸지만 후그 골키퍼의 방어에 계속 걸렸다. 경기 종료 직전에서야 카사린의 만회골이 나왔지만 경기를 뒤집기에는 늦었다.
멕시코는 초대 대회인 1930년에 이어 이번에도 3전 전패로 마감하게 되었다.
8. 4강 결선 리그 진출팀
이후 정보는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결선 리그에서 기재.[1] 괄호 안은 한국시간[2] 공교롭게도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간이다.[3]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의 개막 경기는 월드컵 개막 8일 전인 6월 16일에 히우지자네이루 주 올스타팀과 상파울루 주 올스타팀의 시합으로 치러졌다. 경기는 히우지자네이루 올스타팀이 3대1로 승리했으며 개막 첫 골의 주인공은 지지였다.[4] 아마 역대 모든 골키퍼들 중 A매치 데뷔전을 가장 바쁘게 보낸 골키퍼를 뽑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울 골키퍼일 것이다. 카르바할은 당시 21살의 젊은 골키퍼였고 브라질과의 이 경기가 그의 A매치 데뷔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1966년 월드컵까지 4번의 월드컵에 더 출전하여 로타어 마테우스, 잔루이지 부폰 등과 더불어 월드컵 5회 출전 기록을 가진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된다. 하지만 카르바할이 호르헤 캄포스와 더불어 멕시코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손꼽히는 실력자였음에도 멕시코는 그가 출전했던 5번의 월드컵에서 단 한번도 1라운드를 통과하지 못했다.[5] 이 시대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운동장을 오래 비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6] 공과 상관없는 선수가 오프사이드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 시기는 2006년 독일 월드컵으로 상당히 뒷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