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곤룡포(袞龍袍)는 중세 이후 대부분의 동아시아의 국가 군주와 그 후계자인 태자가 착용하던 시무복으로, 단령 형식으로 된 웃옷이다.사실 곤룡포는 군주, 또는 상공(上公)이 입는 용 문양이 들어간 옷을 총칭하고, 곤복, 곤의, 용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즉, 면류관을 쓸 때 입는 면복도 곤룡포로 부른다는 이야기로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용포들은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입는 옷으로 '상복'(常服) 또는 익선관과 함께 착용한다고 하여 '익선관복'으로 부르기도 한다.
용은 동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매우 성스러운 동물인데, 군주는 하늘의 대행자이기 때문에 용으로 비유를 하였다고 한다.그래서인지 군주와 관련된 말을 보면 용과 관련된게 많다.(용안-얼굴, 용덕-덕성, 용포-옷, 용위-위엄 등). 노란색, 또는 붉은색 비단으로 지었고, 황색 단(緞)이나 사(紗)에 붉은색 안을 넣었으며, 가슴, 등, 양어깨에는 보(補)라고 하는 금실로 수놓은 오조룡이나 사조룡을 붙였다고 전한다.
중국 황제의 경우 일월과 오조룡보를, 황태자, 친왕, 번왕의 경우 사조룡보를 붙였다. 반면 조선의 군주는 오조룡보를 유지했고, 조선의 왕세자는 사조룡보를 착용했다. 여러 중국 번왕 및 친왕들의 유물과 영정,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았을 당시 하사받은 곤룡포 등을 보면 사조룡보가 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후술하는 세조 시대의 기사에는 전대 세종 시대엔 황태자, 번왕, 친왕도 오조룡이었다고 서술되어 있어 시대에 따라 변천되었을 수도 있다.
2. 한국사
왼쪽부터 태조의 청룡포 어진. 영조의 홍룡포 어진. 고종의 황룡포 어진.[1] |
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IMG_1523%25255B1%25255D.jpg | ||
황태자 영친왕이 입은 홍룡포(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순종이 입은 황룡포(세종대학교 소장)[2] |
2.1. 삼국시대와 발해
649년 신라 진덕여왕이 중국식 의관을 채택한 이후 신라의 역대 군주들은 단령을 입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통일신라를 다루면서 신라 군주가 금관을 쓴 것으로 묘사된 사극은 사실 오류인 셈이다. 다만 1990년대나 2000년대 초까지는 단령으로 묘사되었다.마찬가지로 발해에서도 단령을 입었던 것 같다. 중국 기록인 《책부원귀》에는 대력 8년(773)에 발해의 질자(質子)로 당나라에 머무르던 대영준(大英俊)이 당대종의 곤룡포를 훔쳤다가 잡혔는데 잡히고 나서 "당나라의 문물을 너무 사랑해서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라고 대답하자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풀어주었고 이듬해 발해로 돌아갔다고 한다. 황궁에 도둑이 들어서 황제 옷을 훔치다 걸렸으니 황제의 체면이 손상될 뻔했는데 당나라의 문물을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니 거꾸로 체면이 세워진 것이다. 현대에도 중국인들은 체면(멘쯔)를 굉장히 중요시하는데 하물며 천자는 말할것도 없으니 대영준은 이를 이용한 처신으로 적절한 대처를 한 것이다.
2.2. 고려 시대
고려는 외왕내제적 요소들도 일부 있었기에 태조는 황제만이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쓰는 등 황제의 의관과 자황포를 착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는 건국 초부터 원나라 간섭 이전까지 자황포(柘黃袍)를 입었다고 하는데[3][4] 이는 황색 곤복이긴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용보가 붙여져 있는 그런 곤룡포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곤룡포는 명나라 이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문종 12년(1058) 4월 문종이 신하에게 군주의 의복 색에 대해 질문하자 신하는 "지금 입는 황색과 홍색 의복 말고는 입을 수 있는 의복은 없다." 대답하는 기사가 있다.(《고려사》 <여복지> '시조지복' 참조.) 의종 대에는 여러 황실 행사에서 자황포(赭黃袍)를, 연등행사에서는 치황의(梔黃衣)를 입는다고 상정한 바가 있다.
《고려사》 <원종 세가>(재위 10년, 1269년)에 따르면 원종은 임연에 의해 밀려난 뒤 복위 시도를 하며 자줏빛 옷을 입다가 이후 황색 곤복을 입고 신하들에게 하례받으며 복위했다고 한다.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뒤 충렬왕은 몽골의 예를 따라 지황색(芝黃色)의 옷을 입으려 했지만 "딱히 의복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5]는 말을 듣고 다시 황포를 입었다고 한다. 이는 원이 한족 왕조가 아니었기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숙종때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푸른색 어의를 따 청룡포를 입었다고 한것을 보아 원 간섭기를 거치며 고려가 기존의 황포에서 청룡포를 입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충숙왕~충혜왕의 시절을 다룬 드라마 기황후에서 묘사되기도 했다. 고려사에서 충렬왕 때에 황포를 착용했다는 기록이 명확하게 나와 있기에, 적어도 천자국 제도가 일부 운용되고 있었던 충렬왕 때까지는 청룡포가 아닌 황포를 착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충렬왕이 원나라 황실을 본받아 착용하고자 했던 지황색의 옷 또한 채도만 다른 것이지 넓은 범위에서는 황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충숙왕 때부터 정치/사회/문화적으로 확실히 원나라에 종속되며 국왕의 복식 또한 당시 원나라의 친왕급이 착용하던 푸른색의 청룡포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도 "(원나라의 기준에서) 고려는 동쪽의 나라이며 동방에 해당하는 색은 푸른색이다."라고 언급한 기록이 남아있기에 원나라에서 정해주는 청색으로 복식의 색을 개정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원나라 혜종인 타환 또한 황태제 시절에는 친왕급의 복식인 청색 옷을 착용하였다. 이후 황제에 즉위하며 타환 역시 황제의 복식인 황포를 착용하게 된다.
물론 공민왕 시기 황포를 착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충숙왕~충정왕 시절 고려 국왕이 정확히 어떤 색의 어의를 착용하였는지 명확히 증명되지는 않았다. 다만 공민왕 말기 명나라에 칭신하며 새로운 복식을 사여받고, 우왕 시기에도 명나라에 요청해 복식을 개정하였다는 기록이 나와있기에 우왕~공양왕까지의 18년의 기간 동안은 확실히 황포가 아닌 청룡포를 착용하였으며 이를 태조 이성계가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1450) 윤 1월 7일의 기록으로 보면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공민왕 18년(1369)부터 고려 군주도 우리에게 익숙한 명나라식 곤룡포를 입었고 조선 때까지 이어진 듯하다. 《고려사》에는 공민왕 19년(1370)에 명나라에서 공민왕에게 면복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있어서 《세종실록》보다 시점이 1년 늦는다.
《고려사》 <예지> '책태후의'에 따르면 공민왕 21년(1372) 1월에 공민왕이 황포(黃袍)와 원유관(遠遊冠)을 착용하고 어머니를 명덕태후로 올렸다고 한다. 이를 보아 공민왕은 명나라의 제후식 의복을 착용하는 동시에 고려의 천자식 의복도 같이 입은 듯하다. 이러한 기록을 반영하여 드라마에서 여말선초 시기를 묘사할 때 고려 군주들은 대부분 원유관과 황포를 기본으로 착장하고 나온다.
조선 숙종 조 기록에 '고려가 푸른 빛을 숭상해 조선 태조도 푸른 곤룡포를 입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기부터 청룡포를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영정이 첨배(瞻拜)한즉 태조 대왕께서 입은 곤의(袞衣) 빛깔이 푸르니, 예복(禮服)이 아닌듯하다. 혹시 국초(國初)에 복색(服色)을, 푸른빛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이르기를, '고려(高麗)에서는 푸른 빛을 숭상하였다.'고 하니, 태조조(太祖朝)는 고려와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더러는 푸른 빛으로 곤의(袞衣)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2.3. 조선
2.3.1. 왕
조선시대 군주의 곤룡포는 대홍색(빨간색)이었다. 곤룡포를 입을 때는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옥대(玉帶)를 매며, 목화(木靴)를 신었다. 여름에는 얇은 비단천인 대홍사(大紅紗) 곤룡포를, 겨울에는 두꺼운 비단천인 대홍라(大紅羅) 곤룡포를 입었다.이는 중국의 영향이 큰데,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1594) 12월 25일 기사를 보면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황제·황태자와 친군왕세자(親郡王世子)는 모두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는데 황제의 곤룡포는 황색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적색인 것으로 되어 있고....... 면복(冕服)은.... 위로부터 세자에 이르기까지 그 제도가 대개는 같고 단지 장수(章數) 및 물색(物色)의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라고 되어 있어 기본적으로 명나라에서 천자의 곤룡포는 세계의 중심이란 의미에서 황색이었고, 그 제후왕의 곤룡포는 붉은색이었다. 곤룡포 서열에 대해 황색>적색>청색 순서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조선 왕조에만 통용되는 말이다.[6] 실제로 명나라는 용포의 색이 아닌 용보의 용이 오조룡이냐, 사조룡이냐에 따라 나뉘었다.
그런데 세조 2년(1456) 3월 21일의 기록엔 세종조에 북경에 다녀온 김하가 '황제만이 왼쪽, 오른쪽 어깨에 각각 해와 달이 있고, 황태자, 친왕, 군왕은 죄다 오조룡인데, 왕세자는 책봉도 못받았고 겸양의 뜻으로 사조룡 쓰시죠'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어 사조룡에 조선 내부의 결정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명나라 만력제의 붉은색 곤복용포도 그렇고, 청나라에서도 옹정제등은 황제가 청색 용포를 입었었다. 당나라는 나무위키에 나온 어진을 보면 황제에 따라 황색, 청색, 적색, 흑색 등 곤룡포의 색상이 다양하다.
홍룡포를 입기 시작한 것은 세종 26년(1444)부터이다. 이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에서 나온 바와 같이 파란색이었는데, 이는 명 태조 홍무제가 조선과의 기싸움 때문에 이성계에게 고려의 군주 대행이라는 뜻을 가진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만 내리고 바라던 조선왕 책봉을 안 해준 게 발단이었다. 조선왕 책봉은 태종 1년(1401) 명 혜종 건문제가 태종 이방원을 정식으로 책봉한 이후부터였으며, 이후 세종 시대부터[7] 새 군주가 즉위하면 명나라 쪽에서 단령과 단삼(團衫)[8]을 내려줬지만 양란 이후 명나라는 망했고 그 이후로는 조선에서 알아서 만들어 입게 되었고, 단삼은 원삼으로 바뀌게 된다.
세종 26년(1444) 기사를 보면 구장복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입는 옷{상복[常服]: 일상으로 입는 곤룡포} 및 그에 갖추어야 할 모든 부속 장식품까지 일습을 내린다.
또한 세종 32년(1450) 기사를 보면 '사대홍직금곤룡암골타운포'(紗大紅織金袞龍暗骨朶雲袍), '나대홍직금곤룡포'(羅大紅織金袞龍袍)라는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 '홍직'(紅織)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즉 붉은 색으로 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붉은색 곤룡포를 입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태조어진을 보면 청색 곤룡포를 입고 있다. 태조 어진 중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초상화도 남아있지만 이것은 후대인 헌종 3년(1837)에 모사된 것으로, 헌종이 당시 시대상에 맞게 붉은색 용포로 그리라고 지시한 것에 따른 것이다. 태조가 생전에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근거는 남아있지 않다. 사극 중에서는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가 처음에는 청색 곤룡포를 입다가 나중에 홍룡포를 입는 것으로 설정했다.
한편 왕의 남자와 왕과 나에서는 연산군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오류를 무릅쓰고 의도적으로 다른색을 입는 것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퓨전사극에서도 그렇다.
2.3.2. 왕세자
조선 시대 왕세자의 용포는 세종 31년(1449) 사조룡을 결정하고 여러 차례 세자의 복식을 명나라에 요청했으나 얻지 못했고, 성종 14년(1483)이 되어서야 옷감이 내려왔다고 한다. 중종 17년(1522) 7월 17일 기사에 이전부터 아청색을 입었다는 대목이 있다.반면 명나라에서 복식을 받아오는 일이 잦아진 선조 때까지는 이전부터 계속 붉은색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은 책봉을 늦게 받아 곤룡포가 아닌 오사모에 흑포를 입게 하였는데, 책봉 뒤에 검은색 또는 아청색[9]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왕세자의 옷색깔이 아청색으로 확실하게 변화된 것은 현종 즉위년(1659) 5월 9일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왕(嗣王)이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검정 곤룡포를 입고 규(圭)를 받들고 여차에서 나오자....
- 《현종실록》
- 《현종실록》
참고
현종은 왕세자인 훗날의 숙종의 의복에 관심이 많아 현종 8년(1667)에도 왕세자의 복식을 논의한 바가 있다. #
세종 대 《국조오례의》에서 군주가 졸곡 전에 아청색 단령을 입었음이 기록되었으며 왕세자는 초록색을 입다가 성종대부터 아청색 단령을 입었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니, 정언(正言) 안윤덕(安潤德)이 아뢰기를,
"왕세자복(王世子服)은 이제 녹색(綠色)을 채용하였는데, 녹(綠)은 간색(間色)입니다. 조관(朝官)의 공복(公服)도 녹삼(綠衫)이 최하(最下)인데 국저(國儲)의 존귀(尊貴)한 이에게 부정(不正)한 최하(最下)의 색(色)을 입게 하심은 첨시(瞻視)에 어그러짐이 있으니, 청컨대, 흑색(黑色)을 채용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청(鴉靑)이 어찌 반드시 정색(正色)이 되겠느냐? 녹색(綠色)은 그름[非]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안윤덕이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푸른 색으로 지은 옷이여![綠兮衣兮]'라고 하였으니, 옛사람은 녹색(綠色)을 천색(賤色)으로 여겼습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유순(柳洵)은 아뢰기를,
"아청색(鴉靑色)은 비록 고인(古人)이 정색(正色)이라고 이르지 않았더라도 녹색(綠色)보다는 낫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청(鴉靑)으로 고쳐 채용함이 옳겠다."
성종 19년(1488) 3월 21일 2번째 기사
"왕세자복(王世子服)은 이제 녹색(綠色)을 채용하였는데, 녹(綠)은 간색(間色)입니다. 조관(朝官)의 공복(公服)도 녹삼(綠衫)이 최하(最下)인데 국저(國儲)의 존귀(尊貴)한 이에게 부정(不正)한 최하(最下)의 색(色)을 입게 하심은 첨시(瞻視)에 어그러짐이 있으니, 청컨대, 흑색(黑色)을 채용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청(鴉靑)이 어찌 반드시 정색(正色)이 되겠느냐? 녹색(綠色)은 그름[非]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안윤덕이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푸른 색으로 지은 옷이여![綠兮衣兮]'라고 하였으니, 옛사람은 녹색(綠色)을 천색(賤色)으로 여겼습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유순(柳洵)은 아뢰기를,
"아청색(鴉靑色)은 비록 고인(古人)이 정색(正色)이라고 이르지 않았더라도 녹색(綠色)보다는 낫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청(鴉靑)으로 고쳐 채용함이 옳겠다."
성종 19년(1488) 3월 21일 2번째 기사
조선 초기에는 왕세자가 익선관이 아닌 신하들이 쓰는 연각사모를 착용했다. 세종 8년(1426)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그때까지 세자는 조복도 없어 (일)상복으로 사신을 맞았기에, 명나라에서 오량관과 세자 조복을 내려받으켠서 상복도 정하게 된 것이다. "복두(幞頭)·홍포(紅袍)·서대(犀帶)·흑화(黑靴)·상홀로 되어 있었으며, 조신의 1품 공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링크
그러므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세자가 익선관 대신 사모를 쓴 것은 맞으나 사모와 함께 입은 곤룡포는 오류인데, 사모를 써서 관객들이 세자인 것을 구별하기 어려울까봐 곤룡포를 입힌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는 용보가 붙지 않은 홍포가 맞다.
칠장복이 사여된 것은 문종 즉위년인 1450년으로, 이때부터 세자가 용포를 입은 듯하다.[10] 그렇다면 곤룡포를 처음 착용한 세자는 단종. 이후로 《국조오례의》에 "익선관은 왕의 것과 같았고, 곤룡포는 흑단(黑緞, 여름에는 黑紗)으로 지으며, 포의 전후와 좌우 어깨에 금색의 사조원룡보(四爪圓龍補)를 달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적어도 성종 때부터는 익선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2.3.3. 조선 시대의 보
조선 국왕의 보는 오조룡(五爪龍), 조선 왕세자의 보는 사조룡(四爪龍), 조선 왕세손의 보는 삼조룡(三爪龍)으로 하였다. 조선시대 보의 크기는 시대마다 다른데, 태조와 세조, 영조의 어진에 그려진 보는 매우 커서 가슴과 복부를 거의 다 덮을 정도이고, 어진에 묘사된 것을 보면 보를 따로 부착한게 아니라 금박을 옷에 직접 찍었거나 금실로 옷감에 직접 수를 놓아 만든 것으로 추정되나, 고종 황제의 사진이나 영친왕의 실물 곤룡포처럼 조선 말기의 보는 크기가 줄어들어 있고, 보를 별도로 만들어 옷에 부착한 형태로 변경되었다. 신하들이 관복에 다는 흉배도 조선 초기 초상화를 보면 옷에 직접 수를 놓은 것처럼 묘사되나 중기 이후에는 별도의 흉배를 만들어 부착한 것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용보도 그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크기가 줄어든 것은 흥선대원군의 예복 간소화 정책의 영향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용보에 그려진 용의 형상도 조선태조어진, 세조 어진 초본 등 임진왜란 이전 어진에는 용이 측면을 바라보는 측면상이었으나 영조, 고종, 영친왕 실물 곤룡포 등 임진왜란 이후의 어진에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상으로 변화되었다. 군주와 왕세자는 둥그런 보를 썼지만 왕세손은 네모난 보인 방보(方補)를 썼다.한편, 조선 국왕의 보는 철종의 어진에서 볼 수 있듯이 곤룡포 뿐만 아니라 구군복과 같은 다른 복식에도 붙여졌던걸로 보인다.
2.4. 대한제국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홍룡포는 황태자의 용포가 되었고, 황제는 황룡포를 착용했다.[11]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결혼한 후 귀국해 순종 황제와 순정효황후 부부를 배알할 때 입었던 것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홍룡포 실물이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종 황제의 황룡포는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하나 더 남아있다.3. 중국사
3.1. 명나라 이전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키고 통일왕조를 세운 수나라의 문제 양견이 처음 황색으로 된 용포인 황룡포를 착용하였다.당태종의 황룡포
송나라 역대 황제들은 주로 신료들의 것과 같은 붉은 색상의 단령을 착용했다. 다만 매체에 따라 현실과는 다르지만 신료들과 구분하기 위해 송나라 황제가 황룡포를 착용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3.2. 명나라
좌측은 선덕제, 우측은 그의 아들인 정통제의 어진.
원래 명나라의 황룡포도 조선의 홍룡포처럼 몸 앞뒤와 양 어깨에 용보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영종 정통제가 토목보의 변으로 폐위되었다가 천순제로 복위하면서 황제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용보의 갯수도 늘이고, 원래 곤복에만 붙이던 12가지 문양[12]을 곤룡포에도 붙이도록 했다. 그래서 천순제 이후 명나라 황제들의 어진을 보면 곤룡포가 화려하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
명나라 황제 곤룡포 중에는 곤복으로 분류되는 곤룡포가 있다.
명나라 만력제의 무덤인 정릉에서 출토된 곤복 복제품 3착.[13] |
명나라 황제 용포의 한 종류로 곤복으로 불린다. 발굴될 당시, 옷에 제작 날짜와 곤복이라는 명칭이 적힌 종이가 부착되거나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면류관을 쓸 때 입는 현색(玄色: 검은색)의 곤복과 구분하기 위해, 옷의 특징인 12개의 용보(龍補: 둥근 용흉배)와 12장 무늬가 들어갔다하여 '12단용(團龍:둥근 용) 12장 곤복'으로도 불린다. 이를 줄여 '12장 곤복'으로도 부르며, 그냥 곤복으로 부를 경우에는 현색 곤복을 '곤면'[14]으로 불러 차이를 두기도 한다.
정확한 등장 시점과 구체적인 사용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영종 정통제의 어진에서부터 보이기 때문에 그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군주의 최고 등급 관복인 곤면(현색 곤복)에 들어가는 12장 무늬가 있어 그와 동등한 최상위의 용포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곤복 사용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보인다. 《성종실록》과 《중종실록》[15]의 기사에서는 '명나라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 황색의 용포를 입는다'며 명나라에 다녀왔던 신하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원래 하늘에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을 쓰고, 현색의 곤복을 입어야 하는데 황색을 입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때는 영종 정통제 시기가 지난 즉, '12장 곤복'이 등장한 이후다. 모든 대신들은 제복(祭服)을 입는 이 엄중한 국가 의례 때 입을 수 있는 황색 용포는 무엇일까? 바로 현색 곤복과 똑같은 12장 문양이 들어가는 12장 곤복 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관련 학계에서는 12장 곤복이 등장하면서 현색 곤복을 일정 부분 대체하여 착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어진을 그린다거나 큰 의례 때가 아닌 평시에는 기본적으로 용보가 4개인 용포라던가 직신(直身), 어깨와 가슴에 구름처럼 모양을 낸 운견(雲肩)과 팔쪽의 긴 통수(通袖) 및 용포 아랫단에 가로로 길게 만든 슬란(스란;膝襴,膝欄)무늬에 각각 용 문양을 더한 화려한 옷 등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붉은색과 청색 및 녹색 그리고 황색, 자색 등 다채로운 색감을 썼다. 실제로 신종 만력제가 교육을 받거나, 업무 활동 등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는 회화 자료들에서 이러한 용포들을 입고 있으며, 정릉에서도 12장 곤복이 겨우 5착인 것에 비해 다른 용포들은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었다.
황포(黃袍) 차림으로 일강(日講) 듣는 중인 만력제_1585년. | 운견통수용란포(雲肩通袖龍襴袍) 차림으로 경연(經筵) 중인 만력제_1583년. | 운견통수용란포 차림으로 어문청정(禦門聽政) 중인 만력제_1577년. | 4단용포 차림으로 알릉(謁陵)하고 돌아오는 만력제. |
청포(靑袍) 차림으로 천단(天壇)에 기우(祈雨) 지내러 가는 중인 만력제_1585년 4월 16일. |
명나라 시대에는 용보가 4개인 용포(4단용포)를 제외하고, 거기에서 더 늘어나 8개인 용포(8단용포)와 12장 곤복(12단용포) 그리고 운견과 슬란무늬를 화려하게 수놓은 용포 등을 '길복'(吉服)으로 통칭하여 부르기도 하였다.[16]
만력제의 무덤에서 출토 된 류황색 4단용 원령포 유물. | 황색 4단용 원령포 이미지화.[17] |
대홍색 8단용 원령포 복제품. | 청색 4단용 직신 유물. |
대홍색 운견통수용란 친습포 복제품. |
3.3. 청나라
사진 속 인물은 강희제.
청나라는 자신들의 전통대로 소매가 좁고 기마에 편리한 의복을 사용했지만 황제의 용포에 수놓은 문양 등은 대체로 명나라의 제도와 유사한 편이다.
청나라의 친왕들은 흔히 알려진 검푸른 청나라 관복에서 신료들의 사각형 흉배 대신 용보가 들어간 형태의 곤룡포를 입었다.
4. 일본사
관련 초상화 #1
관련 초상화 #2
관련 초상화 #3
정확히 곤룡포는 아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휴전 교섭 중 명나라에게서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을 때 하사받아 곤룡포로 썼던 단령들로, 현재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대홍색 바탕에 금실로 기린 흉배를 직조한 단령과, 앞뒤 어깨, 섶과 밑단에 4개의 발톱을 가진 이무기가 들어간 운견(雲肩)형 무늬와 스란단을 수놓은 망포(蟒袍)가 있다. 관련 초상화를 보면 모자는 익선관이 아니라 오사모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5. 여담
세종조에 세종이 신숙주에게 이 곤룡포를 이불로 덮어준 일화가 유명하다. 알다시피 세종이 갸륵히 여겨 덮어준 것이긴 하지만 신숙주에겐 정신적 벌칙인 셈.[18][19]인조가 백성에게 곤룡포를 하사했다는 민담이 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던 인조는 추위와 피로로 인해 제대로 거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인근에 살던 나무꾼인 서흔남이란 백성이 직접 인조를 업고 피신하였다. 이에 인조는 보답으로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서흔남은 인조가 입고 있는 곤룡포를 입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인조는 곤룡포를 하사했고,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인조에게 받은 곤룡포를 소중하게 여기며 무덤에 같이 묻었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서흔남의 무덤 앞을 지날 때마다 잠깐 멈추고 절을 해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야사이고, 실제로는 서흔남의 공적은 영화 남한산성의 등장인물 서날쇠의 실제 모델로 포위된 남한산성을 몰래 빠져나가 근왕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정탐꾼 일을 한 것이 공적이다.
포청천 시리즈 가운데 '이묘환태자' 에피소드의 결말에서, 송인종은 자신이 생모를 돌보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으니 그 죄를 어떻게 벌줘야 하는지 묻고 포청천이 이에 곤장 50대에 해당한다고 대답한다. 이에 황제가 스스로 곤장을 맞으려 하자, 공손선생은 곧바로 '황상의 곤룡포는 곧 황상의 옥체와 같으시니 용포의 장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라는 굉장한 꼼수를 말하고 송인종 대신 그의 용포가 곤장을 맞게 된다. 이묘환태자는 이 때문에 '타용포'라는 제목을 가지기도 한다.
5.1. 곤룡포 일회용설
원래 곤룡포는 한 번 입으면 태워버리는 1회용이었다가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가 태우지 말고 그냥 빨아서 다시 입겠다고 한 낭설이 있다. 초기에는 용보를 금실로 옷에 직접 수놓았으나 워낙 영조 어진에서 보듯이 크기도 만만찮고 고가였기 때문에 탈부착식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새 용포에 용보를 교체하는 것.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 부분이 회자되고 부풀려지고 와전되어 쭉빵카페(아래)와 같은 낭설이 자주 게시되고는 하였다.
물론 위 서술이 명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 조선 군주의 의복에는 시사복인 곤룡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례를 받을 때의 원유관복, 제례 기타 행사시 착용하는 면복까지 크게 보았을 때 총 3가지 착의할 의복이 정하여져 있어 유독 곤룡포에 집착할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궁중 전체 왕실 종친의 의복을 담당하는 상의원의 침선장, 침선비가 곤룡포 1일 1제작 때문에 바빴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곤룡포 재질상 세탁이 빈번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절용을 원칙으로 삼았던게 조선 왕실이다.
《실록》상 영조는 앞서 말한 원유관복을 세탁해 입었으며 정조는 명주, 모시로 옷을 지어입는 걸 선호했다고 한다. 또한 순조의 경우에는 옷이 해지더라도 수선하여 다시 입었다고 한다.
정조가 곤룡포를 태우지 말 것을 명하였다고 서술하였으나 《실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출처
생각건대 《정조실록》에서 곤룡포에 관한 언급은 21개의 기사에 있는데 아마 그 중 <대왕 대비전 행록>에서 "금상이 검소하여 곤룡포를 제외하고는 무명옷을 즐겨입고.. 여름철 옷은 자주 빨아서 해지기 쉬운데 그냥 입었다... (후략)"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역시 제왕을 통틀어 곤룡포 소각에 대한 기사는 없다. 염습할 때도 같이 매장됐던 게 곤룡포, 익선관이다.
원래 조선 군주의 의복 중 급이 높은 곤복이나 강사포 등은 면류관 등 세트를 이루는 관과 함께 군주가 바뀔 때마다 명나라에서 사여받는 것이었는데 세종대에는 예외적으로 곤룡포 3습을 서비스로 같이 보내줘서 세종이 아주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곤룡포가 한 번 입고 소각하는 게 원칙이라면 명나라에서 보내준 귀한 용포도 한 번 입고 태워버렸을지는 의문이다.
정말로 지도자가 옷을 한 번만 입고 바로 불태웠던 나라는 잉카 제국이었다. 잉카 제국의 황제 사파 잉카가 한 번 입었던 옷 뿐만 아니라 사용했던 물건들, 먹고 남은 음식들도 전부 하루가 지나면 불태워졌다. 그와 접촉하고도 불태워지지 않은 것은 건물이나 사람 정도였다. 왜냐하면
사파 잉카는 살아있는 태양의 화신이기 때문에 그와 접촉한 물건들은 불태워져야 한다.
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도 곤룡포 일회용설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6. 매체
- 쌉니다 천리마마트: 사장이 바뀐 후 직원들 제복으로 새로 디자인되어 쓰이고 있다. 김규삼 작가와 정식 계약되어 팔리기도 했으나 나중에 판매를 중단했다.
- EA 스포츠: FIFA 20의 한국어 버전 발매 기념으로 곤룡포 디자인 유니폼이 나오기도 했다. 링크, 영상
- 쿠키런: 킹덤: 스테이지 13,14에서 다크카카오 쿠키가 곤룡포를 입고 있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20]
7. 기타
- 2000년대 이후로 결혼식 폐백용 복장이 기존의 문관 관복인 사모, 단령에서 업그레이드되면서 몇몇 결혼식 업체에서는 신랑에게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의 결혼식의 경우 일반 백성은 사대부의 예를 따라 하였고 양반은 왕실의 예를 따라 하였다. 이는 결혼식은 기쁜날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보다 높은 옷과 예식을 국가 차원에서 허가해주어서 결혼식 하루만큼은 지배 계급이나 왕실의 기분을 내게 만들어 준 것이다. 사실 곤룡포는 제대로 된 왕실 예복은 아니지만 전통적 의미에서 그다지 틀린 행동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왕이 없는 나라인데다 법적으로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 나오는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동양 문화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에서도 결혼식을 할 때 남녀 모두 왕관을 쓴다.
- 2010년대 이후에는 서울의 궁궐 근처에서 한복을 대여해주는 업체들이 늘어났고 곤룡포 또한 관광객들에게 크게 사랑받고 있다. 특히나 "군주의 복장"이라는 데에서 오는 차별성까지 더해져서 인기가 많다. 중국에서도 곤룡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한국과 비슷해서 자금성 근처에서 청나라 황제의 황룡포나 청나라 친왕의 청룡포를 대여해주는 경우가 많다.
-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붉은색 곤룡포를 입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한 한 축구팬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건 곤룡포좌 문서 참조.
8. 관련 문서
[1] 조선-대한제국 시기 곤룡포를 입었던 사람의 직위는 색깔별로 다음과 같다.
홍룡포: 국왕(세종~조선 시기 고종), 황태자(대한제국)
청룡포: 국왕(태조~세종), 태상왕(조선)
황룡포: 황제(대한제국 시기 고종~순종), 태상황(대한제국)
왕세자가 입는 곤룡포의 경우 홍색, 흑색, 아청색(남색), 녹색 등 시기별로 색상이 달랐다.[2] 고종의 황룡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순정효황후가 기증한 물건으로 순종이 착용하였던 곤룡포라 전하여진다. #[3] 《고려사》 <여복지> '시조지복' 참조.[4] 태조 왕건이 다음 왕위에 오를 후계자로 왕무로 점찍고 그의 모친이었던 장화왕후 오씨에게 자황포를 하사했다고 한다.[5] 원세조 쿠빌라이 칸과 원종이 각자 태자 시절 맺은 양국간 조약 가운데 하나가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고 해서 고려의 고유한 복식이나 문물 제도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원래하던 대로 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충렬왕이 몽골풍 차림으로 귀국해서 신하들의 복장도 몽골풍으로 바꾸고 변발까지 하도록 명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쿠빌라이가 의아해했을 정도였다.[6] 고려에선 황색>=적색이었다. 위 고려 문종 단락에도 나오지만 신하는 적색만 입을 수 있지만 천자인 문종은 황색을 입을 수 있었다. 평상시엔 적색을 입다가 일을 볼 땐 황색을 입는 식으로.[7]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명나라에서 사조룡복 대신 오조룡복을 내려줘서 크게 기뻐했다는 말이 있다. 이때부터 조선의 군주들도 상징에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용을 쓰게 된다.[8] 여성용 단령을 말한다.[9] 남색에 가깝다.[10] 다만 사조룡의 양식만 명나라로부터 허락받은 뒤 자체 제작으로 추정된다.[11] 명나라 후기처럼 12가지 문양을 넣지는 않고, 명나라 초기처럼 단순한 황룡포를 사용했다.[12] 일(日), 월(月), 성신(星晨, 별자리), 용(龍), 산(山),화(火).화충(華蟲, 꿩).종이(宗彛, 동물이 그려진 옛 술잔), 조(藻, 해초).분미(粉米, 쌀알).보(黼, 왕권을 상징하는 도끼).불(黻, '己'자 2개를 서로 반대로 하여 왕권을 상징하는 문양)[13] 총 5착(황색1, 홍색4)의 곤복이 출토되었으며, 홍색 중 하나를 신종 만력제가 입고 있었다. 입고 있던 것은 다른 하나를 포함하여 복제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12장 문양과 용보 12개를 색실을 이용하여 짜넣거나 수를 놓았으며 만(卍)자와 복을 상징하는 박쥐, 여의(如意) 및 수(壽)자 문양을 넣은 것들도 있다.[14] 곤면은 곤복+면류관을 뜻하는 것으로 어차피 현색 곤복을 입을 때 면류관을 쓰기 때문에 뭉뜽그려 부르는 것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곤복 자체만을 '곤면'으로 부르면 안되는 것이다.[15] 《성종실록》 19년(1488) 윤1월 28일 기사/ 《중종실록》 23년 3월 25일 기사[16] 청나라 시대에는 길복이라는 관복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용보가 많다거나 화려하다고 아무 옷이나 길복으로 불러서는 안된다.[17] 옆의 유물과 같은 용포는 아니다.[18] 상사가 자고 있는 부하에게 겉옷을 주고 갔다는 것도 충격인데 이것은 군주정 시대에 군주가 신하에게 군주의 의복을 주고 간 거니 얼마나 무서울까... 군필자들은 별 4개 군사령관이 당직실에 왔다가 너무 피곤해 자고 있던 소령인 당직사령에게 자신의 야전상의를 덮어주고 갔고, 소령이 일어나 견장과 명찰을 보았다 생각해보자.[19] 이런식의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 설화인 것같다. 옹정제도 이와 같은 일화가 있다.[20] 참고로 해당 모습이 은근 인기가 있었다보니 후에 스킨으로 출시되었다.[21] 정확하게는 말풍선 자막이 붙어 있다.
홍룡포: 국왕(세종~조선 시기 고종), 황태자(대한제국)
청룡포: 국왕(태조~세종), 태상왕(조선)
황룡포: 황제(대한제국 시기 고종~순종), 태상황(대한제국)
왕세자가 입는 곤룡포의 경우 홍색, 흑색, 아청색(남색), 녹색 등 시기별로 색상이 달랐다.[2] 고종의 황룡포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순정효황후가 기증한 물건으로 순종이 착용하였던 곤룡포라 전하여진다. #[3] 《고려사》 <여복지> '시조지복' 참조.[4] 태조 왕건이 다음 왕위에 오를 후계자로 왕무로 점찍고 그의 모친이었던 장화왕후 오씨에게 자황포를 하사했다고 한다.[5] 원세조 쿠빌라이 칸과 원종이 각자 태자 시절 맺은 양국간 조약 가운데 하나가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고 해서 고려의 고유한 복식이나 문물 제도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원래하던 대로 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충렬왕이 몽골풍 차림으로 귀국해서 신하들의 복장도 몽골풍으로 바꾸고 변발까지 하도록 명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쿠빌라이가 의아해했을 정도였다.[6] 고려에선 황색>=적색이었다. 위 고려 문종 단락에도 나오지만 신하는 적색만 입을 수 있지만 천자인 문종은 황색을 입을 수 있었다. 평상시엔 적색을 입다가 일을 볼 땐 황색을 입는 식으로.[7]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명나라에서 사조룡복 대신 오조룡복을 내려줘서 크게 기뻐했다는 말이 있다. 이때부터 조선의 군주들도 상징에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용을 쓰게 된다.[8] 여성용 단령을 말한다.[9] 남색에 가깝다.[10] 다만 사조룡의 양식만 명나라로부터 허락받은 뒤 자체 제작으로 추정된다.[11] 명나라 후기처럼 12가지 문양을 넣지는 않고, 명나라 초기처럼 단순한 황룡포를 사용했다.[12] 일(日), 월(月), 성신(星晨, 별자리), 용(龍), 산(山),화(火).화충(華蟲, 꿩).종이(宗彛, 동물이 그려진 옛 술잔), 조(藻, 해초).분미(粉米, 쌀알).보(黼, 왕권을 상징하는 도끼).불(黻, '己'자 2개를 서로 반대로 하여 왕권을 상징하는 문양)[13] 총 5착(황색1, 홍색4)의 곤복이 출토되었으며, 홍색 중 하나를 신종 만력제가 입고 있었다. 입고 있던 것은 다른 하나를 포함하여 복제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12장 문양과 용보 12개를 색실을 이용하여 짜넣거나 수를 놓았으며 만(卍)자와 복을 상징하는 박쥐, 여의(如意) 및 수(壽)자 문양을 넣은 것들도 있다.[14] 곤면은 곤복+면류관을 뜻하는 것으로 어차피 현색 곤복을 입을 때 면류관을 쓰기 때문에 뭉뜽그려 부르는 것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곤복 자체만을 '곤면'으로 부르면 안되는 것이다.[15] 《성종실록》 19년(1488) 윤1월 28일 기사/ 《중종실록》 23년 3월 25일 기사[16] 청나라 시대에는 길복이라는 관복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용보가 많다거나 화려하다고 아무 옷이나 길복으로 불러서는 안된다.[17] 옆의 유물과 같은 용포는 아니다.[18] 상사가 자고 있는 부하에게 겉옷을 주고 갔다는 것도 충격인데 이것은 군주정 시대에 군주가 신하에게 군주의 의복을 주고 간 거니 얼마나 무서울까... 군필자들은 별 4개 군사령관이 당직실에 왔다가 너무 피곤해 자고 있던 소령인 당직사령에게 자신의 야전상의를 덮어주고 갔고, 소령이 일어나 견장과 명찰을 보았다 생각해보자.[19] 이런식의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 설화인 것같다. 옹정제도 이와 같은 일화가 있다.[20] 참고로 해당 모습이 은근 인기가 있었다보니 후에 스킨으로 출시되었다.[21] 정확하게는 말풍선 자막이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