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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8:16

결혼식/전통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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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절차
3.1. 혼인 전날3.2. 혼인 당일
3.2.1. 초행3.2.2. 전안례3.2.3. 교배지례3.2.4. 합근지례
3.3. 혼례식 후
3.3.1. 신방례3.3.2. 동상례3.3.3. 신행3.3.4. 현구지례3.3.5. 기타
4. 매체

1. 개요

결혼식 중 한국의 전통 혼례에 대해 서술한다.

2. 특징

조선 시대 혼례식을 기준으로 한다. 일제강점기까지도 형태가 유지되어 온 전통 혼례는 절차가 복잡하다고 여겨져 현대에는 많은 부분이 서양식으로 대체되었지만, 사실 혼례식 자체만 따지만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양가가 멀리 떨어져 왕래하기 힘든데 워낙 준비해야 할 것이 많고 여러 가지 상징물들이 많이 동원되며 몸가짐에 예절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하게 여겨질 뿐, 아래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예식 자체의 식순은 오늘날만큼이나 간단하다.

전통 혼례의 절차는 보통 중매나 사주단자 교환, 택일 단계에서부터 서술하는 경우가 많지만, 현대에도 그런 절차는 있는데 결혼식 자체의 절차로 보지는 않는 만큼 여기서는 혼례식 자체의 절차만 서술한다.

혼례식 때 일반 백성도 사대부의 예를 따라하였다. 이는 결혼식은 기쁜날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보다 높은 옷과 예식을 국가 차원에서 허가해주어서 그날 하루만큼은 지배 계급이나 왕실의 기분을 내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일반 백성의 혼례식에서 보통 신랑은 사모관대 차림을 했는데, 이는 벼슬 있는 자의 관복을 착용함으로써 결혼예식을 일생을 통한 최고의 경사스러운 의식으로 여겼음을 나타낸다. 혼례복으로 단령을 착용할 시 관복을 입고 각띠를 띠고 흉배를 달았는데 신랑 예복의 흉배는 당상관과 같은 쌍학을 달았다.

이 때문인지 2000년대 이후로 결혼식 폐백용 전통 의상이 기존의 문관 관복인 사모, 단령에서 업그레이드되면서 몇몇 결혼식 업체에서는 신랑에게는 왕의 익선관곤룡포, 신부에게는 왕비의 궁중대례복인 적의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결혼식은 기쁜날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보다 높은 옷과 예식을 국가 차원에서 허가해주면서 결혼식 하루만큼은 지배 계급이나 왕실의 기분을 내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곤룡포는 제대로 된 왕실 예복은 아니지만 전통적 의미에서 그다지 틀린 행동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왕이 없는 나라인데다 법적으로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 나오는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동양 문화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에서도 결혼식을 할 때 남녀 모두 왕관을 쓴다.

파일:전통 여성 혼례복.jpg

출처

신부는 스란치마나 대란치마 위에 조선 시대 공주·옹주의 혼례복이자 금박 자수가 있는 활옷[1]이나 내외명부의 예복 중 하나인 원삼[2]을 입고 한삼으로 손을 가렸으며, 머리에 화관이나 족두리를 착용하고 예로부터 붉은색은 악귀를 쫓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여 결혼식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신부를 보호하는 뜻으로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는다. 링크. 또한 신부는 가체를 사용할 수 있다. 구한말 사진 자료에서도 형편이 좋은 집은 혼인할 때 가체를 사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북쪽 지역은 머리 장식이 화려한 편이다.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 때 사대부 가에서는 소매에 붉은색 선을 달고, 혼례식 후에는 떼서 일반 옷으로 입고 다닌 염의를 입었다. 고려시대 때 수도였던 개성에는 이 흔적이 남아 원삼 소매 끝에 붉은색 선을 달고 손에 한삼을 추가로 끼웠다. 기사, 기사 2. 척박한 환경에서는 당연히 혼례복이 화려하지 않은데, 제주도는 원삼조차 구하기 힘들어 원삼보다 끝동이 붉은 장옷일반적이었고, 함경도는 혼례복을 구하지 못했을 때 폐백 옷감을 몸에 두른 나삼(羅衫, 라삼)을 입었는데 경상도도 마찬가지다. 연구, 링크

3. 절차

3.1. 혼인 전날

혼인 전날, 서가(남편의 집)에서 혼서(납폐서라고도 한다)와 폐백·채단·오방주머니 등을 함 두 개에 따로 넣어 신부 집으로 보낸다.

이 때 을 들고 가는 사람을 함진아비라고 하는데, 지체 높은 집에서는 보통 하인을 보냈지만 평민들은 마을 사람들 중 첫째를 아들로 낳은 사람, 아들을 많이 낳은 사람 등의 기준으로 함진아비를 골라 보내기도 했다.

파일:함진아비.jpg

2010년대에는 거의 보기 힘들지만, 대한민국 시대가 되고 나서도 핵가족화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신랑 친구들이 마른오징어 가면을 쓰고 " 사시오"라고 외치며 밤길을 돌아다니는 장면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다가 신부 집에 도착하면, 신부 집에서는 몇 차례 거부하며 짐짓 실랑이를 벌이다가 들여보내는 모습도 일상적이었다.

함을 받은 신부 집에서는 함을 열어 폐백을 확인한 후 함진아비들을 후하게 대접해 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3.2. 혼인 당일

3.2.1. 초행

신랑 일행이 신부 집으로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장가 가는 것이다. 초행은 사모관대를 갖춰 입고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평민은 평소에 해볼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 때만큼은 평민이 관복을 입고 말을 타도 양반들이 그다지 허물삼지 않았다.

일행은 상객과 후행이 보통 포함되었는데, 상객으로는 집안의 어른(아버지가 없는 경우 큰아버지나 큰형이 가기도 했다)이 앞장을 서고, 후행으로는 가까운 친척 중 두세 명 정도가 뒤를 따랐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동(小童)이라 하여 어린아이 두어 명을 포함하기도 했다. 신랑 집이 먼 경우, 초행 인원이 신부네 집 마을에 도착하면 신부 측에서 인접(人接)이라는 맞이 인원을 보내 신랑 일행을 미리 준비된 정방(신랑 대기실)으로 안내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부정을 피한다고 신부 집 대문 앞에 짚불을 피워, 신랑이 이를 넘어들어오게 만들기도 했다.

3.2.2. 전안례

신랑 측이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신부 측에 전하는 의례이다. 왜 하필 기러기인지는 문서 참고.

사실상 혼례식 그 자체의 시작점이며, 여기서부터는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에 신부 집의 노인이 홀기[3]를 읽어주어 순서를 진행한다.

신랑이 초례청에 들어서기 전 기러기아비로부터 기러기를 받아 전안상에 올려놓고 절을 하면[4], 신부 측에서 기러기를 받아 안으로 들이는 것으로 전안례가 마무리된다. 안으로 들일 때 신부 방에 기러기를 던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기러기가 똑바로 떨어지느냐 모로 떨어지느냐를 두고 첫아이의 성별을 추측하기도 했다.

문헌에 따라서는 전안례까지를 소례, 이후의 교배지례와 합근지례를 대례로 구분하기도 한다.

3.2.3. 교배지례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절을 하는 의례이다.

신랑과 대반(신랑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초례청 안으로 들어서서 대례상의 동쪽에 서면, 신부가 수모(신부의 시중을 드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나온다. 이때 신랑이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긴데, 신부는 신랑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머리를 얹고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별의별 이유로 혼례식 당일에 파혼이 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파혼이 벌어지면 보통 신부 측이 흉을 뒤집어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지막까지 준비를 마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절을 할 때는 신부가 먼저 두 번, 신랑이 답배를 한 번, 신부가 다시 두 번, 신랑이 다시 한 번 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신부가 입고 있는 옷이 워낙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워 수모의 도움이 없이는 절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 절차도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편이며, 절을 마치고 준비된 세숫대야에 손을 씻으면 교배지례가 마무리된다.

연애결혼이 아니었던 대부분의 옛날 혼례에서, 이 교배지례 때 서로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절하는 사이에 얼굴을 흘깃흘깃 보는 모습은 현대 매체에서 전통혼례 장면의 클리셰로 자리잡기도 했다.

3.2.4. 합근지례

신랑 신부가 서로 술을 마시는 의례이다.

수모가 술을 표주박에 떠서 신부에게 주면, 신부는 입에만 살짝 대고 대반을 통해 신랑에게 넘긴다.[5] 다음으로 대반이 술을 떠서 신랑에게 주면, 신랑이 입에만 살짝 대고 수모를 통해 신부에게 넘긴다. 신부는 입에 살짝 대고 내려놓는다. 다음에 이어지는 세 번째 잔은 합환주라 하여 서로 잔을 교환해 마시는데, 이 때는 진짜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듯. 마시고 나서 안주를 먹으면 합근지례가 마무리된다.

지방에 따라서는 술 한 잔을 받을 때마다 서로 절을 하게 하는 등 여기도 꽤나 절차가 번거로웠다. 사실 실수를 유발할 수 있는 술을 다루는 절차인 데다, 상대방+하객들을 앞에 두고 안주까지 먹어야 하는 상황이니 몸가짐이 더욱 조심스러웠을 것이므로, 절을 하지 않아도 소요시간은 꽤 긴 편이다.

마지막 합환주 때는 청실과 홍실을 달아놓은 표주박 두 개를 교차하여 잔을 교환하게 하는데, 이 때 실이 서로 꼬이거나 술을 흘리면 부부의 앞날이 순탄치 않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 1권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혼례식에서 이 실이 꼬이는 것이 복선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혼례식 자체는 이것으로 마무리된다.

요즘은 술 대신에 매실차 같은 차로 대체되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3.3. 혼례식 후

3.3.1. 신방례

신랑이 사모관대를 벗고 새옷으로 갈아입은 뒤, 상객과 함께 큰상을 받는데, 큰상은 손만 조금 대고 그대로 신랑 집으로 보낸다.
큰상을 물린 뒤 신부 측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신랑이 먼저 신방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간다. 상객은 이때 먼저 집으로 가기도 하고, 신랑이 밤을 잘 보내는지 하룻밤을 있어본 후 가기도 하는데, 상객이 먼저 가는 경우 신부가 나와 인사를 하기도 했다.

신랑이 신방에 앉아 있으면 주안상과 함께 신부가 들어오는데, 최소한 신부의 족두리는 반드시 신랑이 풀어주어야 했다. 현대 매체에서는 신부의 옷고름을 풀어주는 것으로 그리기도 하는데, 신랑이 촛불을 끄기 전까지는 밖에 사람들이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들여다보고 있으므로(...)[6] 불을 켜놓고 옷고름을 푸는 것은 금기시되었다고 한다. 신랑이 촛불을 끌 때는 입으로 불지 않고 소매로 펄럭거려 꺼야 했다. 현대에도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후 촛불을 입으로 끄지 않는 것[7]을 생각하면 될 듯.

3.3.2. 동상례

신랑다루기라고도 하며, 혼례식 다음날 낮에 신랑을 짐짓 괴롭히며 신부 측으로부터 주안상을 대접받는 것. 그 가학성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겨 21세기에는 거의 구경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의외로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풍습이기도 하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1970년대로 묘사된 결혼식 장면에서도 발바닥 때리기+신부 노래 시키기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사실 예식의 일부라기보다는 피로연의 일종이지만, 이런 종류의 놀이들이 그렇듯 꼭 지나치게 괴롭히다가 신랑이 골골거리다 죽어버려 멀쩡한 남의 아들을 귀신으로, 딸을 청상과부로 만들어버리는[8] 경우도 발생하곤 했다. 물론 이것은 평민들의 경우고, 양반들은 시짓기 같은 것을 시켜서 신랑의 학식을 시험하는 식으로 치렀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3.3.3. 신행

신부가 시집에 가는 것. 이것이 시집 가는 것이다. 문헌에는 우귀(于歸)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혼례식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랐는데, 혼례를 치르고 바로 가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지만 이것은 보통 같은 마을에 신랑 집이 있을 경우고, 신랑 집이 다른 마을이나 지역에 있을 경우에는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신랑이 좀 쉬다 가기 위해서라도 당일 우귀는 하지 않았다. 3일 정도를 쉬었다가 가는 삼일우귀도 많았지만, 경우에 따라 3일을 넘기거나 몇 달(달묵이), 심지어 몇 년 만에(해묵이) 가는 경우도 생각보다 드물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예로, 신사임당의 경우에는 본가인 강릉에서 셋째 아들 이율곡을 낳고도 6년이나 지나서야 우귀를 했다. 이러다 보니 자연히 외손자가 외가에서 자란 기간이 길어진 까닭에, 우리나라는 다른 유교문화권에 비해 외가에 대해 상복을 입는 기간이 길었다고.

사실 원래는 달묵이나 해묵이가 더 보편적이었지만, 후에 삼일우귀가 보편화되면서 사라진 풍습도 있다. 바로 재행. 달묵이나 해묵이를 하는 동안에 신랑이 계속 처가살이를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신부 집에 다녀가는 식으로 혼인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재행이었다. 그런데 삼일우귀가 보편화되면서 재행을 할 시간이 없어지자, 신랑이 그 3일 동안 다른 동네에 머물면서 재행하는 척만 하다가 3일째에 신부를 데리고 우귀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행에는 신부 측 상객, 하님에 짐꾼까지 동원되어 신랑의 초행보다 행렬이 길다. 게다가 말 탄 신랑 혼자였던 초행과 달리 신행은 신부가 탄 가마가 있기 때문에 걸음도 훨씬 느렸다.

신행길에는 서낭당이나 개울을 지나면서 부적 같은 종이를 던지고, 가마에 호피를 씌우고 신부의 방석에 숯이나 목화씨를 깔고, 신랑 집 동네에 들어서면 집안 사람들이 마을 어귀에서부터 소금이나 팥 같은 것들을 뿌리고, 신랑의 초행 때와 마찬가지로 짚불을 피워 가마가 넘게 하는 등 온갖 방식으로 잡귀를 쫓았다는 기록이 많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신부가 도착하면, 가마 위에 얹었던 호피를 지붕 위에 올려 신부의 도착을 온 동네에 알렸다.

3.3.4. 현구지례

신부가 시부모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예식. 신부 측에서 가져온 이바지음식을 차려놓고 시부모 및 시가 식구들에게 절을 한다.

오늘날의 결혼식에서도 폐백이라 하여 이 절차가 남아 있다. 물론 현재의 폐백은 시부모뿐만 아니라 처가의 어른들도 참례하지만.

3.3.5. 기타

근친이라 하여, 우귀 후 첫 농사의 수확물과 예물들을 가지고 친정에 잠시 쉬러 가는 절차도 있었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혼례식 자체의 절차라기보다는 첫 시집살이에 힘들었을 며느리를 배려하기 위한 신병위로휴가의 느낌이지만, 문헌상으로는 이것도 전통혼례의 절차에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4. 매체



[1] 다른 지역들보다 비교적 사치품을 구하기 쉬운 서울·경기 지역에서 주로 입었다.[2] 기사[3] 笏記. 손에 든 에 간단히 메모하여 보고 읊는 것이다. 보통 관료들이 대례복을 입고 임금을 알현하는 조회에서 손에 들고 있는 판자 내지는 막대기가 이것이며, 오늘날로 치면 MC들이 들고 있는 큐시트 정도로 보면 된다.[4] 집안의 예법이 달라, 이때 절을 하는 횟수도 달랐다. 재배(2번)나 사배(4번)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5] 이 때 신랑은 술을 다 마셔도 되고 입에만 대고 내려놓아도 되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아예 입에만 대고 바닥에 붓는 식으로 진행하기도 하지만 보통 문헌에서는 술을 '마신다'라고 기록되는 편이다.[6] 현대에는 이것을 관음증 비슷한 취급으로 이상하게 보는 경우도 많지만, 사실은 부부의 첫날밤을 끝까지 보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단둘이 얼굴을 마주보는 신랑 신부의 얼레리꼴레리하고 풋풋하고 달달한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고. 신랑이 불을 끄면 사람들은 해산했다.[7]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끄거나 양 손가락으로 심지를 잡아눌러 끈다.[8] 죽은 신랑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겨진 신부 입장에서도 이 시대에 과부가 재혼이 가능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후폭풍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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