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호나우지뉴/클럽 경력
▲ 2003년 계약 당시 | |
소속팀 | <colbgcolor=#ffffff,#191919>FC 바르셀로나 (라리가) |
등번호 | 10 |
기록 | |
145경기 70득점 50도움 | |
35경기 14득점 12도움 | |
7경기 4득점 2도움 | |
1경기 | |
13경기 4득점 3도움 | |
4경기 1득점 3도움 | |
2경기 1득점 1도움 | |
합산 성적 | |
207경기 94득점 71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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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나우지뉴의 FC 바르셀로나 경력을 소개하는 문서2. 이적
사실 바르사가 호나우지뉴를 영입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 호나우지뉴의 이적료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바르사가 여유 자금을 모두 써야 하는 2,500만 유로였다. 성과에 따른 옵션에 포함된 금액이나 호나우지뉴에게 조항에 충족된 성과를 올리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기에 바르사는 흔쾌히 300만 유로를 추가로 냈다. 호나우지뉴는 맨유가 제시한 거액을 마다했고, 바르사는 팀의 명운을 걸고 빚을 냈다. 그리고 양측의 도박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호나우지뉴는 그 돈보다 많은 것을 바르사에 헌신하며 역대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고, 바르사는 호나우지뉴 영입을 기점으로 암흑기를 벗어나 약 10여 시즌 간 구단 역사상 최전성기를 맞이한다.2.1. 2003-04 시즌
FC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시즌인 2003-04 시즌 초반에는 이전 해의 부진으로 인해 팀 자체가 틀이 안 잡혀서 본인의 활약도 그저 그랬지만, 후반기에 4-3-3 포메이션을 가동하면서 3톱의 왼쪽 윙어에 배치, 프리롤로 기용되면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플레이메이킹, 드리블, 개인기, 볼배급, 득점, 패스를 자유자재로 하면서 측면 플레이메이커로서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어 역할 모두를 프리롤로서 수행 하였다. 후반기 엄청난 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고[1] 본격적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한다.호나우지뉴의 바르셀로나 데뷔골 |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32 | 32 | 0 | 15 | 6 |
UEFA컵 | 7 | 7 | 0 | 4 | 2 |
코파 델 레이 | 6 | 5 | 1 | 3 | 2 |
합계 | 45 | 44 | 7 | 22 | 10 |
2.2. 2004-05 시즌
2004-05 시즌 본인의 활약도 정점에 오르고, 여름 이적시장 때 영입한 사무엘 에투, 데쿠같은 선수들의 플레이에 힘입어 팀은 9899 시즌 이후 6시즌 만에 라리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당시 주제 무리뉴 감독의 지휘 하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첼시와 16강에서 맞닥뜨렸는데, 2차전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수비진과 페트르 체흐 골키퍼가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대단한 골을 넣기도 했다. 골을 허용한 페트르 체흐는 어이 없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호나우지뉴는 2004년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비록 바르사는 챔스 16강에서 맞닥뜨린 첼시에게 합산 스코어 5-4로 패배하였으나, 호나우지뉴는 이 시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4-05 시즌: 42경기(선발 42경기) 13골 14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35 | 35 | 0 | 9 | 12 |
챔피언스 리그 | 7 | 7 | 0 | 4 | 2 |
합계 | 42 | 42 | 0 | 13 | 14 |
2.3. 2005-06 시즌
2005-06 시즌 엘 클라시코, 호나우지뉴 vs 레알 마드리드 |
2005-06 시즌에 호나우지뉴와 아이들은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었다. 2005년 11월 19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는 2골을 기록하는 등 독보적인 활약으로 팀을 3-0 완승으로 이끌면서 상대 팀 레알 마드리드의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2005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계속해서 2006년 4월 1일 안방 캄프 누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도 득점했으나,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러나 팀은 라리가 2연패를 확정한다.
한편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공교롭게 또 다시 무리뉴의 첼시 FC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FC 바르셀로나가 총합 스코어 3-2로 첼시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면서 8강 진출하였다.[2] 8강에서 SL 벤피카, 4강에서 AC 밀란, 결승에서 아스날 FC를 차례로 꺾고 FC 바르셀로나가 1991-92시즌 이후 14시즌만에 유럽 정상에 등극하는 데 주축이 되었다. 바르셀로나의 영웅이 세계 축구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이 세 시즌 동안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실로 경이로웠다. 묘기 수준의 개인기를 매 경기 보여주면서도 자기 중심적 플레이가 아닌 팀에 보탬이 되는 플레이를 하여[3] 세계인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알 마드리드와의 클래식 더비에서, 하프 라인부터 치고 나가 레알 수비수들을 농락한 골을 두 번이나 넣은 것.[4] 오죽하면 레알 홈 관중들조차 허탈한 표정으로 기립박수를 쳐줄 정도였다. 이 기립박수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에게 보내는 "고작 선수 하나도 못 막는 이게 레알이냐?"라고 조소가 담긴 박수와 다른 하나는 상대 선수의 플레이에 경탄을 담아 보내는 박수였다.
당시 인간 같지 않은 실력과 독특한 외모[5] 덕분에 붙은 별명이 바로 외계인.[6] 절정의 기량에 달한 호나우지뉴에 대한 브라질 국민들의 사랑과 기대감은 대단해서 고향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였다.
특히 이런 기대가 정점에 달한 시기가 2006 독일 월드컵이었는데 당시 에이스 호나우지뉴에, 살이 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포텐셜만큼은 인정받는 스트라이커 호나우두, 브라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스피드와 슈팅 파워를 모두 갖춘 타겟형 공격수 아드리아누에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카카까지 브라질 공격진의 네임밸류는 정말 엄청나서 소위 '판타스틱4', '천상의 4중주'라고 불렸을 정도이다. 루시우, 제 호베르투 등의 수비진들도 상당히 대단한 편인 것은 마찬가지라서 전문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특히 브라질 국민들은 자국의 우승을 거의 반쯤 확신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네임밸류만 꽉꽉 채워넣고 공수 밸런스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조합적 한계 때문에 본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늙은 수탉이라고 비아냥받던 지네딘 지단 필두의 프랑스한테 8강에서 덜미를 잡히고 탈락한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호나우지뉴의 고향에 세워진 동상을 불태우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전성기 때 외계인 모드였던 딩요도 사람인지라 꼭 막히는 수비수가 한 두명씩 있었다. 대표적으로 레알 마드리드 CF의 주전/로테이션 센터백이였던 이반 엘게라, AC 밀란의 야프 스탐, 첼시 FC의 칼리드 불라루즈[7]가 있었다. 이 중 야프 스탐은 해당 시즌 캄 노우에서 열린 챔스 4강 2차전 원정에서 딩요를 말 그대로 꽁꽁 묶어버리며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맹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밀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한다.[8]
이 시즌은 향후 10여 시즌간 이어지는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전성기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시즌이기에 굉장히 큰 의의가 있는 시즌이다.
2005-06 시즌: 45경기 26골 20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29 | 29 | 0 | 17 | 15 |
챔피언스 리그 | 12 | 12 | 0 | 7 | 4 |
코파 델 레이 | 2 | 2 | 0 | 1 | 0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2 | 2 | 0 | 1 | 1 |
합계 | 45 | 45 | 0 | 26 | 20 |
2.4. 2006-07 시즌
그러나 '호나우지뉴와 아이들'의 전성시대는 2년만에 끝났다. 2005-06 시즌 막판 챔스 4강부터 시작해서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예전에 비해 상당히 정적으로 변모하고 화려한 드리블보다는 킬패스만 노리는 모습을 보여주어[9][10][11] FC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워낙 외계인인지라 일시적인 컨디션 저하거니 했지만 아니었다. 2006-07 시즌에 이르러 바르셀로나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골잡이 사무엘 에투의 장기부상으로 인하여 팀은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호나우지뉴는 팀에서 요구하는 다이나믹함을 점점 잃어가며[12][13] 챔피언스리그는 16강에서 탈락. 라리가에서도 막판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전 당하면서 준우승에 머물고 만다.[14]2006-07 시즌: 49경기(선발 49경기) 24골 13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32 | 32 | 0 | 21 | 8 |
챔피언스 리그 | 8 | 8 | 0 | 2 | 2 |
코파 델 레이 | 4 | 4 | 0 | 0 | 0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2 | 2 | 0 | 0 | 2 |
UEFA 슈퍼컵 | 1 | 1 | 0 | 0 | 0 |
FIFA 클럽 월드컵 | 2 | 2 | 0 | 1 | 1 |
합계 | 49 | 49 | 0 | 24 | 13 |
2.5. 2007-08 시즌
나는 에덴 아자르에게 자주 이렇게 얘기하곤 해. 호나우지뉴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어. 아마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다만, 그 선수는 매일 연습을 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결국 그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되지. 네가 호나우지뉴 또는 메시라고 할 지라도 연습을 게을리한다면, 2년 후에는 넌 잊혀지고 다른 신인이 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야.
- 사무엘 에투[15]
- 사무엘 에투[15]
07/08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막장의 길로 들어선다. 호나우지뉴는 팀 전체 훈련에 1년 동안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면서 나이트 클럽 죽돌이가 되어간다. 늘어나는 뱃살에 움직임은 둔해지고, 게다가 자율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던 감독인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이러한 호나우지뉴에 대해 통제를 가하지 못하였고 팀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 팀 또한 사무엘 에투의 부상재발과 다른 선수들의 부진으로 이제 갓 20살인 리오넬 메시가 팀을 떠받들다시피 하게 된다.[16] 호나우지뉴의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브라질 동료 에드미우송이 그의 방탕한 사생활을 폭로한 검은 양 사건도 이때 터졌다. 결정적으로 2007년 12월 23일에 당초 훈련 불성실로 인해 제외되었던 그가 안데르송 데쿠와 함께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복귀한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0-1로 진 게 독이 되어 라 리가에서는 3위로 밀려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그래도 4강까지 오르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 사실상 후반기에는 그는 팀의 전력에서 완전 제외된 상황이었고 저 성과도 거의 메시 혼자 이뤄낸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2008년 5월에 레이카르트가 경질되었던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1-4 참패를 당한 바르사는 내리 2년을 레알 마드리드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 바르사를 지지하는 스포츠 신문 <문도 데포르티보>는 헤드라인으로 "창피하다!"라고 내걸었고, <스포르트> 역시 "당신들은 바르사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라는 문구를 어떠한 사진 없이 검은 배경에 배치한 1면에 내보내며 극도의 실망을 표했다. 그리고 시즌 이후 실력과 인기 모두를 잃어버린 그를 FC 바르셀로나가 더이상 안고 갈 이유도 의사도 없었던지라 결국 이적시장에 나오게 된다.
바르셀로나 전 부회장이 밝힌 내막에 따르면 호나우지뉴를 내보낸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가 메시에게 악영향을 줄까봐여서 였다고 한다. 예전만 해도 바르사는 메시를 그냥 재능쩌는 유망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챔스전 등에서 그가 보통 재능의 소유자가 아님을 알아본 이후부터 식단, 행동습관, 심지어 잠자는 시간까지 몽땅 다 계획을 세워주고 따르게 할 정도로 투자를 그에게 집중하여 말 그대로 축구기계 육성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그러나 팀에서 그렇게 공들여 기르던 메시는, 태업을 일삼으며 클럽과 마찰을 빚던 호나우지뉴를 매우 따르고 있었고 호나우지뉴와 그 당시 지적받던 선수들도 막내였던 메시를 무척 아껴서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니며 거의 가족처럼 대해줬다.
또 호나우지뉴가 몰락한 데에는 개인사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바르사 입단 초기에 그는 여동생인 데이지, 어머니 미겔리나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살며 축구에 집중했었다. 문제는 여동생인 데이지가 지역 라이벌인 RCD 에스파뇰 선수 에두아르두 코스타와 교제하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후 데이지는 코스타가 PSG로 이적하자 그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면서 이에 외로움을 호소하던 어머니까지 고국인 브라질로 돌아갔다. 이미 호나우지뉴 본인은 바르셀로나 생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지만 홀로 남은 집에서 호나우지뉴는 끝없는 외로움을 느꼈고, 성공의 향취와 더불어 자기 관리에 소홀해져 음주가무에 빠진 채 데쿠와 더불어 바르셀로나에서의 밤문화를 즐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르사는 호나우지뉴의 방탕한 사생활이 그 자신의 플레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역시 좋지 않게 봤지만 클럽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메시가 그에게 물들까봐 더 걱정했다고 한다.[17][18] 특히 어릴 때부터 아르헨티나인 특유의 육류 식단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던 메시가[19] 밤문화까지 배우고 자제력을 잃기 시작하면 어쩌나하는 염려가 컸다고 한다. 팀 내부에선 호나우지뉴를 내보내지 않으면 선수단 분위기는 물론 결국엔 메시까지도 지금의 자제력을 잃고 망가질 것이란 목소리가 커져갔고 메시가 기대대로 07/08 시즌 혼자서 팀을 떠맡는 역할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낼 정도로 성장하자 결국 바르사는 그들의 미래를 하락세의 에이스 호나우지뉴가 아닌 어린 메시에게 걸기로 결정하여 그를 올바른 에이스로 길러내기 위해 호나우지뉴와 기타 선수들을 내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참고로, 이 때 어시스트를 해준 호나우지뉴의 등에 업혀서 손을 흔드는 리오넬 메시는 일명 어부바 세리머니로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이 당시 호나우지뉴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고, 당시 어린 막내였던 리오넬 메시를 아껴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저 데뷔골도 경기가 끝나갈 즈음에 리오넬 메시가 사무엘 에투와 교체되어 들어오자 호나우지뉴가 "어이쿠, 내 동생한테 데뷔골 챙겨줘야지?" 하는 식으로 팍팍 밀어준 덕이 컸다. 저 데뷔골이 들어가기 2분 전에도 호나우지뉴의 로빙 어시스트 - 리오넬 메시의 로빙 슛 골의 똑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그 골은 오프사이드로 노 골 판정을 받았었다.
2007-08 시즌: 26경기(선발 20경기) 9골 3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17 | 13 | 4 | 8 | 1 |
챔피언스 리그 | 8 | 7 | 1 | 1 | 2 |
코파 델 레이 | 1 | 0 | 1 | 0 | 0 |
합계 | 26 | 20 | 6 | 9 | 3 |
3. 평가
명실상부 호나우지뉴 개인의 커리어 최전성기를 장식한 시기이며, 강렬하고 충격적인 퍼포먼스로 레전드들이 즐비한 바르싸에서도 역대 베스트 11에 오르내릴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피지컬, 기술, 킥, 시야, 판단력 등 모든 능력치가 최상위권에 달한 이 시기의 호나우지뉴는 외계인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탈인간적인 임팩트를 보여주었다. 또한 브라질리언 특유의 재기발랄하고 창의성 넘치는 플레이들을 마음껏 과시하며 보는 축구로서의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극대화시키고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축구를 보여주었다.요컨대 바르싸에서의 호나우지뉴는 메시 시대 직전 클럽의 중흥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서 구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레전드였으며, 2000년대 중반의 축구판에서 가장 빛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축구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위대한 선수로서의 평가를 받고 있다.
[1] 다만 상승세의 원인이 호나우지뉴 한 명의 활약 때문만이 아니라 시즌 중 임대해 온 에드가 다비즈 또한 크랙 못지 않은 활약을 해주었던 것도 크다.[2] 이때 역시 상기 언급한 전 시즌의 '궁둥이 씰룩씰룩 골'에 버금가는 오른발 감아차기 슈팅으로 원더골을 터뜨렸는데 당시 센터백으로서 완전무결이었고 세트피스시의 득점력까지 갖추고 있던 존 테리를 피지컬로 압도하고 넣은 골이 바로 그것이다. # 흔히 존 테리의 두 번째 흑역사로 불리기도 한다.[3] 화려한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를 시도하는 일반적인 선수들은 화려함과 실속을 둘 다 챙기기는 정말 어렵지만, 호나우지뉴는 화려하고 예측하기 힘든 개인기를 뽐내면서 템포가 상당히 빨랐고 연계에도 착실히 신경을 썼기에 화려함과 실속 양면을 모두 챙겼다. '실속' 면에서 기복이 심하다는 평도 있는데, 호나우지뉴의 연계는 동료들이 예측하기 쉬운 안전한 연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기복이 심하다고 평가하는 것인데, 거꾸로 동료들의 수준이 호나우지뉴의 수준을 못 따라간다고 할 수도 있다.[4] 지금은 세계적인 수비수지만 당시엔 포텐 충만한 유망주였던 세르히오 라모스를 두 번이나 관광보내고 득점을 했다.[5] 호나우지뉴는 고가의 명품 브랜드 의류를 자주 입었는데 기자가 이에 대해 묻자, "내가 생긴게 이런데 옷이라도 잘 입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6] 당시의 야구계에도 외계인이 있었다. 바로 페드로 마르티네스.[7] 함부르크 SV에서 첼시로 이적하여 먹튀가 된 네덜란드의 국가대표 출신 수비수다. 거친 태클과 타이트한 맨마킹으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카드도 꽤 수집했다.[8] 셰브첸코가 선제골을 득점했으나 일명 푸욜의 장풍 사건으로 골이 무효화되고, 탈락하고 만다.[9] 당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호나우지뉴의 화려한 플레이에 대해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아예 호나우지뉴를 따로 불러놓고 '예측 가능한 행위'를 하라는 주문을 했을 정도. 다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한 게, 거의 완성된 팀인 클럽과 달리 국대에서는 대부분이 단판, 토너먼트인데다가 당시 브라질은 공격자원을 살려보겠다고 호베르투 등의 일부에게 극단적으로 수비와 중앙을 맡겼다. 그러다 보니 호나우지뉴의 예측 불가 플레이가 상당히 부담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국대 동료들도 매일같이 보는 클럽 동료가 아니라서 팀 플레이 면에서는 어쩔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10] 주전 여부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에 뛰고싶었던 호나우지뉴는 스타일을 강제적으로 바꿔야만 했다.(이 때부터 우울증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표팀 자체에서 호나우지뉴에 관한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다. 모 TV 프로에서 당시 경기 영상을 분석했는데, 호나우지뉴가 비어있든말든 일부러 주지 않는 모습들이 자주 잡혔다. 카카나 호나우두의 경우 쳐다봐놓고 안 줘버리는 행위도 자주 했을 정도였다. 호나우지뉴가 코치진과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에 잘해주기 힘든 측면이 있긴 하지만, 축구계에서 좋은 주장은 이런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카카나 호나우두는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위대한 리더형 인물은 아니었다.[11] 독일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경기를 보면 일반적으로 호나우지뉴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정적이며 화려한 모습도 매우 적다.[12] 호나우지뉴 개인적인 부분에서는 이미 06 월드컵에서 축구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떠오르는 메시에 대한 푸시 여부를 놓고 바르사 이사진들의 알력다툼이 일어난 시점도 이 때. 호나우지뉴는 반대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호나우지뉴가 메시를 애지중지하며 아꼈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거라고 밀어줬다는 일화를 보면 호나우지뉴가 메시를 푸시하는데 반대했다는건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앞서 06 월드컵 시절부터 겪기 시작한 조울증을 확진받았다고 한다. 프로 의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울증을 확진받을 정도면 육체적 부상과 같은 수준으로 일종의 병이라고 봐야 된다.[13] 그러나 우습게도 06/07 시즌의 호나우지뉴는 리그에서 21골을 넣으며 역대 커리어 유일의 리그 20골대 득점 기록을 세운다.[14] 사실 승점은 똑같았고 골득실은 바르셀로나가 앞섰으나, 라리가는 골득실보다 승자승 우선이다. 그해 엘 클라시코 결과는 1무 1패로 열세였기 때문에 레알이 우승했다.[15] 15/16 시즌과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의 아자르를 보면 소름끼치게 들어맞는다.[16] 또한 이 당시 언론에서는 호나우지뉴와 에투의 불화설이 떠돌았다.[17] 특히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함께한 감독이라 불리는 이 당시 코치 과르디올라가 메시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하게 관리했는데 호나우지뉴의 나태함을 특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와 어울리는 것에 대해 메시에게 여러차례 경고를 했다고 한다. 과르디올라는 선수들의 피치 밖 사생활에 대해 엄격하기로 소문난 감독이라서 더 그랬다는 이야기가 많다.[18] 그러나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호나우지뉴가 이적 요청을 했을 때 과르디올라는 팀에 잔류할 것을 권했지만 지뉴가 마음을 굳힌 상태라 결국 설득에 실패했다고 한다. 당시 바르셀로나 보드진들은 검은양 사건 등 사생활로 말썽을 일으켜 시즌을 망친 호나우지뉴 등의 선수단 때문에 사생활까지 통제할 감독을 물색하다 펩을 선택했을 정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즉 사생활 통제와 메시의 미래를 위해 호나우지뉴를 짤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장본인들은 신임감독인 펩보다는 당시 보드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9] 메시는 현재도 밀라네사라는 쇠고기 튀김요리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