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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1:54:03

호나우지뉴/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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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파리 생제르맹 FC3. FC 바르셀로나4. AC 밀란
4.1. 2008-09 시즌4.2. 2009-10 시즌4.3. 2010-11 시즌
5. 고향에서6. 다시 바르셀로나

1. 개요

18세의 나이로 그레미우에서 데뷔하였다.

2. 파리 생제르맹 FC

파일:info_1322236308.jpg

이후 리그 1의 명문 클럽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는데, 개인기가 뛰어난 브라질 선수들 사이에서도 한결 화려한 묘기 수준의 개인기를 매 경기마다 보여 주면서[1]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었다.[2]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도 참가하여 호나우두, 히바우두 투톱의 밑을 보좌하면서 당시 브라질 공격진은 3명의 앞 글자가 모두 R인 것에 착안해 3R로 불리게 된다. 특히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호나우지뉴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수비진을 농락하며 동점골 어시스트, 역전 프리킥 골, 게다가 퇴장까지 당하는 원맨쇼를 펼치며 브라질의 우승에 큰 공헌을 한다. 그러나 이 퇴장으로 가린샤 클럽의 다섯 번째 회원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4강에는 출전하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월드컵 이후 인지도와 몸값이 확 높아졌지만, 정작 소속 팀 PSG에서는 루이스 페르난데스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출전 기회가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3]

2003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영입 의사를 밝혀 이적에 상당한 진척이 있었지만 맨유 보드진의 실책으로 무산되고 만다.[4] 결국 02-03 시즌 최악의 부진으로 회장과 감독이 교체된 FC 바르셀로나가 그를 영입하게 된다.

호나우지뉴가 스페인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주니뉴 파울리스타미들즈브러 FC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 외에 많은 브라질 선수들이 잉글랜드에서 환경과 문화적인 차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찌감치 떠난 것에 비해 바르셀로나는 이미 호마리우, 호나우두, 히바우두 등의 브라질 스타 선배들이 터를 잘 잡아 놓았기 때문에 안전한 선택을 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3. FC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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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C 밀란

파일:Ronaldinho_Milan_Getty_Images.jpg

가치가 추락한 호나우지뉴였기에 이적이 될까 싶었지만 AC 밀란에서 그의 영입을 추진하여 성사. 베를루스코니는 그를 여전히 캄피오네라면서 영입했다. 사실 AC밀란이 호나우지뉴를 원했던 것은 2년 전부터였는데,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로 정점에서 한풀 꺾인 상태의 지뉴에게도 베를루스코니가 계속 러브콜을 보냈던 것이 유명했다. 당시에 여름-겨울 이적시장에서는 호나우지뉴 밀란행 임박과 언제나 그 사실을 반박하는 지뉴의 에이전트 호베르투[5]밀란 행은 사실무근이라는 기사가 2년동안 지겹도록 반복됐었다.

4.1. 2008-09 시즌

하지만 결국 08/09 시즌에서야 영입이 성공했다. 이후 호나우지뉴는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나이트는 바르셀로나 시절에 비해 덜 갔다고 한다.

2009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 CFAC 밀란의 에이스였던 카카를 영입해갔고 호나우지뉴는 카카의 공백을 메꿔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예전의 다이나믹함은 사라졌지만 살이 약간 빠지고, 볼키핑과 특유의 패스가 살아나주면서 밀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으며, 전성기에 보여주던 특유의 화려한 드리블 돌파도 간혹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와중에 유벤투스전에서 2골을 넣더니 일주일 뒤인 시에나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4.2. 2009-10 시즌

이후로도 그때 그 시절 보단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있지만, 국가대표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상황. 브라질 국가대표 前 감독 둥가"모든 선수들에게 기회는 열려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호나우지뉴는 나의 계획에 없다"라고 발언했다.

산 시로에서 치러진 2009/10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는 선발로 나와서 맨유의 수비수 하파엘, 조니 에반스, 리오 퍼디난드를 혼자서 제치고 1골[6] 1어시를 올리는 그야말로 외계인의 복귀라 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팀 전체적으로 경기력이 밀리며 맨유에게 3골을 내주며 패배했다. 스피드를 제외한 경기력이 엄청나게 돌아온 모습을 보이며 팬들에게 2차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기도 했지만 올드 트래포드에선 밀란 전체가 관광을 당하며 4-0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AC 밀란의 1, 2차전은, 특히나 그 중에서도 2차전은 안드레아 피를로박지성에게 문자 그대로 '지워졌던' 그 경기가 맞다.

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국대에도 끝내 뽑히지 않았는데 카카와 포지션이 겹쳐서도 있지만 후보조차로도 못뽑히는 이유는 둥가 감독이 더 이상 브라질 특유의 화려한 개인기위주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의도[7]에 있다. 유벤투스와 함께 부진한 지에구도 그 이유가 더 커서 뽑히지 못하였다.

2010년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하고 브라질 대통령이 브라질 국대에는 호나우지뉴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의욕을 상실할 것을 우려한 일부 팬들이 있었으나, 이후 벌어진 키에보 베로나전에서 지쳐쓰러질 때까지 뛰는 모습을 보여주어 팬들을 훈훈하게 했다.

4.3. 2010-11 시즌

그리고 10-11 시즌 개막전, 그야말로 날아다니면서 팀의 4-0 대승을 이끌었다. 체중도 전성기시절하고 1kg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고 세리에 A 어시왕을 찍었던 09-10시즌보다 드리블이 민첩해지고 활동량도 늘어났다. 허나, 다시 폼이 떨어지며 벤치만 달구다가, 안토니오 카사노의 영입이 확정되면서 친정팀인 브라질 리그 그레미우로 돌아가는 것에 합의했다가 막판 플라멩구의 개입으로 인해 플라멩구로 이적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한다. 결코 짧지 않았던 이 30살의 축구 선수 인생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으나 페이크였다.

5. 고향에서

이렇게 브라질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사실상 월드 클래스 선수로서의 커리어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허나 아직 31살로 몇년정도 더 뛸만한 나이대이고, 금세 더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리그에서 자주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고 네이마르의 산투스를 상대로 3골 1어시라는 미친 활약을 펼쳤다.[8] 역시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 경기는 산투스가 플라멩구를 3:0으로 일방적으로 압도하다다 호나우지뉴가 후반에 멀티골로 역전시킨 경기라서 더 의미가 크다. 또한 경기 결과는 CR 플라멩구산투스 FC에 5:4로 승리했다.

고향 브라질로 돌아와 플라멩구에서 서서히 몸을 데우며 활약했지만 임금 체불이 이어지자 법정 공방 끝에 계약을 해지했다.

2012년 6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로 이적했다. 그리고 계속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이런 클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에 다시 한 번 발탁되었다. 또 시즌 도중 월드 사커 선정 2000~2009 최고의 선수 트로피까지 받는 영예도 누렸고, 특히 이 시기 호나우지뉴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은퇴할 생각까지 했으나 팬들의 지극정성과 쾌유가 겹치며 은퇴를 그만두게 되었다.

2013년 2월 7일, 잉글랜드와의 A매치 평가전에서 PK를 실축하면서 역적이 되어버렸다.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 변명은 있다. 스콜라리 감독도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면 다시 감을 잡을 것이라는 평가를 했다. 그 이후 남미의 챔피언스 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했다. 본인 또한 대회 MVP로 선정. 대회 우승 직후 호나우지뉴는 "모두가 나에게 이미 끝난 선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난 아직 더 뛸 수 있다는 걸 이번 우승으로 증명했다."라며 그간의 설움을 단박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2014년 1월 1일엔 '2013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수상해 클라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그리고 2014년 1월 8일 터키의 베식타쉬와 계약하며 유럽으로 복귀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뜨며 유럽 대항전에서 다시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팬들의 기대가 증폭 중이었지만 갑자기 미네이루 잔류 기사가 뜨며 물거품이 되었다. 미네이루 회장의 잔류 확정 SNS와 더불어 브라질에 남는 것이 확정. 유럽에서 보고싶던 이들에겐 아쉽게 되었으나 본인은 브라질 월드컵을 위해 안정적인 브라질 리그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2014년 자국 월드컵에 뽑히지 못했다. 미네이랑의 비극이 일어나자 브라질 관중들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게 야유를 보내는 한편, 호나우지뉴의 공백을 실감한 듯 그의 이름을 연호하였다.

돌이켜보면 이름값에 비해서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크게 돋보이지는 않다. 유일하게 활약했던 2002 한일 월드컵은 호나우두의 8골에 묻힌 감이 없잖아 있고 2006 독일 월드컵은 프랑스에게 털리며 주가 폭락과 더불어 폼 추락. 2010 남아공 월드컵과 자국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은 뽑히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그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지만, 짧은 전성기와 더불어 시대를 초월해서 역대급의 반열에 들 수도 있었던 그의 평가를 깎아먹는 요인인 것도 맞다. 반대로 그의 선배 호나우두는 클럽팀에서의 짧아도 너무 짧은 활약이 국대에서 보여준 역대급 선수로서의 모습을 퇴색시키는 면이 있다.

뜬금없이 팀을 무단 이탈하여 자유계약 신분으로 풀렸다. 과거 바르셀로나 동료였던 데쿠의 친선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팀에 말도 없이 떠났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안됐다고. 그래서 미네이루는 깔끔하게 자유계약으로 풀어줬고 호나우지뉴는 다른 리그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9]

2014년 9월 6일 리가 MX 소속의 케레타로 FC로 이적하였다.

2015년 7월 11일 플루미넨시 FC로 이적하며 브라질로 복귀하였다.

2015년 9월 29일자로 플루미넨시와 계약을 해지했다.

6. 다시 바르셀로나

2016-17 시즌 여름 이적시장이 끝난 직후 FC 바르셀로나가 미국 진출을 노리며 9월 6일 런칭하는 뉴욕 애비뉴 지사의 공식 앰버서더로 임명되었다.

8년 만에 자신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클럽으로의 복귀이며 구단 측에선 과거의 전 세계구급의 인기와 호나우지뉴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바탕으로 구단을 대표할 공식 앰버서더 적임자라고 발표하였다. 불과 며칠 전 레알 마드리드 CF의 앰버서더로 호나우두가 임명된 것을 견제한 것으로도 보인다. 관련기사

2017년 4월에 열린 레전드 엘 클라시코 친선경기에 출전했다. 그리고 전성기 종종 보여주었던 노룩 로빙 패스로 한 번, 왼발 로빙 패스로 한 번, 역습 상황에서 쓰루 패스로 한 번, 총 3도움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를 3:2로 관광보냈다.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5050188673.jpg
2017년 6월 30일 캄 노우에서 열린 자선경기[10]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레전드 매치에서 다시 한 번 히바우두,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에드가 다비즈 등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선수들과 함께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되었다. 결과는 비록 1:3으로 패배했지만 경기를 뛰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즐겁게 뛰었으며 팬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외계인 퍼포먼스를 선사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레전드 선수로 출전한 박지성의 파울로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넘어지기도 했는데 웃으며 악수하는 장면 역시 축구 올드팬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1] 이 시절에도 개인기는 훌륭한 수준이었지만 여기서 최상급으로 개인기수준을 끌어준 선수가 파리,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제이제이 오코차이다.[2] 왼쪽에서 올려준 크로스를 왼발로 받아서 오른쪽으로 띄운 후,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오른발 시저스 킥으로 마무리해 골까지 넣은 것은 실로 경이로울 정도로 예술적이다.[3] 다만 이는 호나우지뉴의 잘못이 크다. 축구 외적으로 그는 여자를 데려오는 것에만 집중하거나 나이트에 출몰하는 날이 잦았다. 호나우지뉴가 빅클럽 이적 의사를 밝히는 등 문제를 일으키자 감독이 출전 횟수를 점차 줄여 나간 것. 호나우지뉴는 파리에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식단 조절과 전술 훈련을 지도받았고, 구단에게서는 그를 위해 여러 가지 케어를 해 주었다. 루이 페르난데스도 그를 특별히 신경 써 주면서 호나우지뉴는 특혜를 톡톡히 받았다.[4] 맨유 보드진이 원래 합의한 금액에서 더 깎으려다가 빡친 PSG가 맨유와의 협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또 마케팅을 생각해서 못생긴 외모 때문에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호나우지뉴를 놓치고 대신 영입한 선수가 바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5] 풀네임은 호베르투 데 아시스로 호나우지뉴의 친형이자, 부상으로 은퇴해 동생의 에이전트를 한다는 그 형이다.[6] 호나우지뉴 입단 1년 뒤 임대 온 데이비드 베컴의 어시스트[7] 그런데 둥가의 이러한 선택은 일견 만용으로도 보이나 06년 독일 월드컵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남아공 월드컵에서 그다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현역 주장 시절처럼 어느 정도 독선적이었고 과도하게 자기 생각을 밀어붙인 경향이 있다. 현역 국대 시절에는 동갑내기 베베투가 잘 뒷받침했지만, 감독으로서는 무리수였다. 그러나 남아공 월드컵 이후 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목표로 브라질은 둥가식과 기존 브라질식의 축구를 절충하는 과정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8] 한편 네이마르는 이 경기에서 2골을 터트렸으며, 첫번째 골은 2013 푸스카스상을 수상한 골이었다.[9] 이 부분이 말이 많은게 미네이루가 대인배처럼 풀어줘서 그렇지 결코 프로 선수가 보일 행동은 못된다. 아직 자세한 전말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생활이 문란하긴 했어도 아드리아누처럼 무단 이탈하지는 않았는다.[10] 본 경기의 모든 수익은 바르셀로나 지역 어린이 병원에 기부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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