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헝가리 왕국 웅가른 왕국, Königreich Ungarn 머저르 왕국, Magyar Királyság(헝가리어) | ||
국기(1915-1918) | 국장 | |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 ||
1526년 ~ 1867년 | ||
1867년 ~ 1918년 | ||
위치 | 중동부 유럽 헝가리 | |
수도 | 부더(1526~1536, 1784~1873) 프레스부르크(1536~1783) | |
정치 체제 | 선거군주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공용어 | 라틴어, 헝가리어, 독일어 | |
역사 | 1867년 성립 1918년 해체 | |
통화 | 굴덴, 크로네 | |
성립 이전 | 헝가리 왕국 | |
해체 이후 | 헝가리 제1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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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26년에서 1918년 사이 존재했던 왕국이다.2. 역사
1526년 벌어진 모하치 전투의 결과 헝가리 왕국은 사실상 국가로서의 전력을 상실하는 사태에 내몰렸고, 전투 도중 러요시 2세가 사망하자 헝가리 북서부와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러요시 2세의 처남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를 선출했지만, 헝가리 동부에선 서포여이 야노시가 야노시 1세로서 대립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야노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오스만 제국에게 도움을 청하며 봉신을 자처했고, 이에 쉴레이만 1세가 그 요청을 받아들여 헝가리를 침공, 헝가리를 동서로 양분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장악한 헝가리 왕국은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인 헝가리 북부(상헝가리)와 오늘날 헝가리 서부의 일부에 불과했고, 크로아티아 왕국 역시 오늘날 자그레브 일대의 1/3만 장악하였다.야노시 1세가 사망하고 어린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헝가리 동부에서 즉위했다. 쉴레이만 1세는 어린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때문에 헝가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해 헝가리 중앙 지역을 빼앗아 오스만 직할령으로 두고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에르데이를 위시한 헝가리 동부만 다스리게 했다. 이를 동헝가리 왕국이라 한다. 동헝가리 왕국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1570년 막시밀리안 2세와 슈파이어 조약을 체결하여 성 이슈트반 왕관을 넘겨주면서 에르데이 공국으로 전환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고압적이었으나, 헝가리인 귀족들을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했고, 헝가리인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불만을 품었다.
1667년 레오폴트 1세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귀족들을 압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에르데이 공작 어퍼피 미하이 1세,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지원을 받은 퇴쾨이 임레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였던 상헝가리 지역, 즉 지금의 슬로바키아를 통째로 점령한 뒤, 헝가리를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게 빈 공략을 요청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4세는 그를 상헝가리 공작으로 임명한 뒤 1683년, 대군을 이끌고 빈을 다시 포위하여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구원군에 대패하였고 신성 동맹군에 의해 역공을 받아 부더 등 오스만 헝가리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 의해 수복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제2차 모하치 전투에 이어 젠타 전투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대패를 당하여 도나우강 이남으로 후퇴하였고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에르데이 공국, 오스만 헝가리 등 바나트 지역을 제외한 옛 헝가리 왕국의 영토를 수복하였다. 레오폴트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만 헝가리 국왕 후보자가 나올 수 있도록 헝가리 귀족들을 압박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동부 에르데이 귀족들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군 주력이 빠져나간 틈을 타 라코치 페렌츠 2세를 중심으로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헝가리 왕국의 옛 수도였던 비셰그라드를 박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쿠루츠 봉기는 결국 1711년 4월 29일, 자트마르(서트마르) 조약으로 진압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 전역에서 지배권을 확보하였으며, 에르데이 공국에는 독일인(오스트리아인) 총독을 파견하여 헝가리인과 세케이인을 억제하였다.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퍼뜨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헝가리인은 수백년 동안 헝가리 왕국을 지배해 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격렬한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빈 체제'에 항거한 3월 혁명이 일어나고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하자 헝가리인의 저항은 더욱 고조되어 코슈트 러요시의 주도 아래 부더와 데브레첸, 에르데이 대공국에서 반 오스트리아 혁명을 일으켰다. 이 때 헝가리 혁명군은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독립에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등 헝가리 내부의 소수민족과의 갈등[1]과 자국내 분리주의 운동의 확산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했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고 난 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보복으로 헝가리 왕국의 행정 구역을 오펜, 외덴부르크, 프레스부르크, 카샤우, 그로스바르다인의 5개 군구로 개편하고 헝가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에르데이 대공국과 보이보디나 공국, 크로아티아 왕국, 슬라보니아 왕국 등 소수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분리한 후 헝가리어의 교육을 금지하고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을 이주시키는 등 헝가리 왕국의 독일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이런한 강압적인 통치 방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맞았다. 결국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하며 독일 통일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당하자 오스트리아 제국은 방침을 전환해 제국 내 제2의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인에게 공동의 제국을 제안했다. 대타협[2]의 결과 헝가리인은 독립적인 정부와 의회 등을 구성하는 대가로 오래 전에 헝가리 공주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국왕 페르디난트 1세의 후손인 현재의 황제 프란츠 요제츠 1세를 왕으로 인정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했다. 헝가리인은 비록 오스트리아 황제를 왕으로 모셨지만 분리된 독립 왕국을 만들었다. 1868년에는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으로 크로아티아계는 트란스라이타니아 내에서 대폭적인 자치권을 보장받았고[3]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이 수립되어 헝가리 왕국 산하 자치국이 되었다.
1867년부터 헝가리인은 독일인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에르데이 등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의 다른 민족들[4]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 중 가톨릭 교도가 아닌 정교회 신자였던 루마니아인과 세르비아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은 더 많은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878년 이후에는 제국 바깥에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소수 민족 탄압은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반감과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발칸반도에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입지를 좁히게 만들었다.
산하 향토방위군은 왕립 헝가리 혼베드였다.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면서 헝가리 왕국도 소멸되었다.
[1] 자그레브의 중심지 옐라치치 광장의 모델이 된 요시프 옐라치치, 슬로바키아어의 아버지 루도비트 슈투르, 에르데이 태생의 법률가 아브람 이안쿠 등은 합스부르크 왕가 편으로 참전하여 헝가리 혁명 진압에 앞장섰다.[2] 독일어로 '아우스글라이히', 헝가리어로 '키에제제시'.[3] 원래 헝가리는 크로아티아인이 가지고 있던 자치권을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크로아티아인의 반발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개입해 타협을 제의했다. 크로아티아인은 헝가리 왕국이 삼분할된 시절부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고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쿠루츠 봉기, 1848년 헝가리 혁명 등 헝가리인의 봉기를 역으로 저지하는 등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유별났는데 이는 크로아티아 혼자서는 오스만 제국과 같은 외세의 위협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예측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가 크로아티아 민족을 지킬 수 있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4]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