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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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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ney
1970
Ram
Paul and Linda McCartney
1971
Wild Life
Wings
1971
[[Red Rose Speedway|Red Rose Speedway]]
Paul McCartney and Wings
1973
Band on the Run
Paul McCartney and Wing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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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and Mars
Wings
1975
Wings at the Speed of Sound
Wings
1976
London Town
Wings
1978
Back to the Egg
Wings
1979
McCartney II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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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g of War
1982
Pipes of Peace
1983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
1984
Press to Play
1986
Снова в СССР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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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s in the Dirt
1989
Off the Ground
1993
Flaming Pie
1997
Run Devil Run
1999
Driving Rain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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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2005
Memory Almost Full
2007
Kisses on the Bottom
2012
New
2013
Egypt Statio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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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ney III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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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년3. 비틀즈
3.1. 분열
4. 비틀즈의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5. 윙스 및 솔로 활동 (1970~)
5.1. 1970년대5.2. 1980년대5.3. 1990년대5.4. 2000년대
6. 2010년대7. 2020년대

1. 개요

폴 매카트니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초년

1942년 리버풀에서 태어났으며 댄스 밴드의 리더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선물한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지만 윗입술에 경련이 생기자 이 트럼펫을 어쿠스틱 기타와 바꿨는데 이 기타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4세 되던 해에 어머니 매리 매카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였고 후에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존 레논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3. 비틀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28.media.tumblr.com/tumblr_lfyggrbuyS1qc6yloo1_500.jpg
파일:Capture+_2018-03-26-20-05-43-1.png
비틀즈 초중기[1]의 폴 매카트니 Hey Jude 생방송에서의 모습
1957년부터 존 레논과 함께 쿼리멘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1958년 조지 해리슨의 가입으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프클리프, 피트 베스트의 5인조 밴드가 구성된다. 이후 이름을 '더 비틀즈(The Beatles)' 로 바꾸고 스튜어트 서프클리프가 탈퇴한 뒤 피트 베스트가 링고 스타로 교체되면서 현재 알려진 비틀즈의 기본 체제가 확립된다.

초기에는 존 레논과 함께 레논-매카트니 체제라는 환상의 콤비를 이뤘다. 로큰롤에 기반을 둔 이 둘의 음악은 서로에 의해 조율되었다. 하지만 존 레논이 개인적이고 독특한 음악을 지향했다면 폴 매카트니는 대중적이고 듣기 좋은 음악을 지향한 편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음악에는 각자의 개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파일:Paul-McCartney-during-rehearsals.jpg
1967년, All You Need Is Love 방송 직전의 모습
그러나 이 둘의 차이가 바로 둘 사이의 대립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Yellow Submarine' 이전까지만 해도 이 둘의 협력은 계속되었고 8번째 음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하 페퍼 상사)' 에 수록된, 'A Day in the Life' 는 이 둘의 곡을 합친 곡이었으며 당시 존 레논의 재혼으로 혼란을 겪었을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 를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2] '페퍼 상사' 와 'Magical Mystery Tour'는 폴 매카트니의 주도 아래 제작되었고 다른 멤버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 후기에도 폴 매카트니는 다른 멤버들을 이끌려고 하고 이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사이가 더 벌어졌다.

그렇지만 무조건 폴의 탓만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죽은 후부터 비틀즈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노 요코와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 폴은 와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실제로 폴이 했던 행동이 다소 오해를 살 만한 부분도 일부 있었고. 결국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소통의 문제.

3.1. 분열

파일:bb35ca2d011c8b87e104cf31911aafca.jpg
1968년의 폴 매카트니
'The Beatles' 를 발표할 무렵 비틀즈 멤버들의 대립은 극심해진다. 링고 스타조지 해리슨은 비즈니스적인 문제로 인한 폴 매카트니와의 대립으로 비틀즈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존 레논오노 요코를 녹음 스튜디오에 데려오면서 시작된 개인적인 대립은 비틀즈 해체 이후까지 계속된다. 게다가 폴 매카트니는 완벽한 녹음을 추구했기 때문에 음악을 녹음할 때 30~40번씩 다시 녹음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런 일에서도 멤버들의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뭉치자는 취지 아래 계획된 'Abbey Road' 와 'Let It Be' 에서도 멤버들과의 충돌은 끊이질 않았고 결국 1970년도에 폴 매카트니가 견디다 못해 McCartney 앨범 발표를 앞두고 비틀즈 활동을 지속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비틀즈는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앞서 말했듯이 비틀즈 해체는 누구 하나의 잘못만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러 사안이 얽혀 돌아간 매우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1967년 밴드의 정신적 지주였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이후, 비틀즈는 매일이 혼란의 연속이었다. 존 레논은 그룹에서 흥미를 잃고 점점 멀어졌으며[3], 나머지 멤버들은 지쳐있었는데 이에 폴 매카트니는 본인 나름대로는 밴드의 분열을 막겠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시하며 주도하는 등) 노력한 것이었다. 폴이라도 나서서 주도하지 않았으면 아마 비틀즈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사망한지 1년만에 해체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멤버들에게는 이것이 밴드를 자신의 입맛대로 끌고 가려는 독선으로 느껴졌고, 상호 불신과 감정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틀즈에서 점점 멀어져가던 존 레논이 1968년 이혼하고 오노 요코와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를 공표한 이후부터는 그 이전까지 멤버들 사이에서 암묵의 룰이었던 '비틀즈 멤버들과 고용된 세션맨들을 제외하곤 외부인의 스튜디오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스튜디오에 꼭 오노 요코를 끼고 등장하거나 심지어는 약속 날짜에 스튜디오에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스튜디오에서 요코는 조지 해리슨이 먹으려고 놔둔 과자를 허락도 없이 먹거나 침대 매트를 가져와서 누워있으면서, 사사건건 끼어들며 "아티스트인 자신이 생각하기에 지금 녹음하고 있는 음악은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잘못되었다."라며 음악적인 부분에 도가 지나친 훈계를 하고, 멤버들이 연주 중인 앰프를 깔고 앉는 등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 그래서 존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특히 조지와 폴) 오노 요코를 싫어하게 된다. 때문에 후에 폴 역시 아내 린다 매카트니를 스튜디오에 데려오고[4] 조지는 존과 요코 앞에서 존이 존경하던 밥 딜런까지 얼마나 요코를 안 좋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털어놓은 적도 있다. 존은 이때 요코를 변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파일:paul_in_letitbe.jpg
1969년 Get Back(Let It Be) 세션의 폴 매카트니. 비틀즈 시절의 폴 매카트니는 수염을 기른적이 거의 없는데 유독 Let It Be 세션 때에는 사진처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것을 볼 수 있다.
'Let It Be'를 녹음할 때는 폴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들이 애플 레코드의 매니저로 추대한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게 된다. 당시 폴은 장인이자 법률가인 리 이스트먼에게 애플의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고 존과 요코는 당시 판권업자들에게 있던 저작권을 원가수에게 돌려주는 행위로 음악계의 로빈 훗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앨런 클라인에게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는데다. 자신의 장인을 추천한 폴에 대해 조지와 링고는 폴이 비틀즈를 제멋대로 하려는걸 넘어서 이제는 자신의 처가까지 비틀즈에 끌어들인다며 존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에 앨런 클라인의 연속된 월권행위와 돈에 집착하는 행위들로 인해 앨런의 본성을 알게 된 존 레논Walls and Bridges 앨범에서 그를 비판하는 곡 'Steel and Glass'를 쓰기도 했다.[5]

당시 앨런 클라인은 폴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폴의 곡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에게 넘겼고 필 스펙터는 폴이 예전의 화기애애한 시절로 돌아가자며, 단순한 밴드 사운드로 작곡한 원곡을 자신의 장기인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사용하여 오케스트레이션을 입혀서 곡의 사운드 자체가 바뀌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들은 폴은 분노하여 앨범의 발매를 계속 반대하다가[6] 밴드 탈퇴 선언 직전인 1970년, 타이틀을 'Get Back'에서 'Let It Be'로 바꾼다는 조건으로 앨범 발매를 허락했다고 한다. 또한 훗날 자신이 생각한대로의 사운드를 수록한 'Let It Be... Naked' 앨범을 내기도 했다.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에 대한 앙금과 불신이 있었지만,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은 1970년 12월 31일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멤버들과 애플을 상대로 물적 분할 소송을 진행하면서부터였다.

앞서 말한대로 폴 매카트니는 앨런 클라인월권 행위에 진절머리를 느꼈고, 계약이 애플에 묶여있는 한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판단해 이 소송을 진행한 것이다. 이 때문에 1971년은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이 정점에 달했던 때였다.

일례로 1971년 존과 폴이 각각 발표한 솔로 앨범들은 서로에 대한 디스를 담고 있다. 폴 매카트니는 자신의 솔로 앨범 'Ram' 에서 짝짓기하는 딱정벌레 사진을 집어넣었는데, 존 레논은 이를 자신과 오노 요코를 비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분개하였다. 또한, 해당 앨범의 첫 곡 'Too Many People' 의 가사에는 존 레논에 대한 비꼬기가 담겨 있다.

존 레논도 이에 맞받아쳤다. 자신의 앨범 'Imagine' 의 부클렛 내부에는 폴이 'Ram' 에서 양의 뿔을 당기는 포즈를 따라하며 돼지의 귀를 당기는 사진을 넣었고, 폴 매카트니를 디스한 곡 'How Do You Sleep?'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폴과 존의 대립은 적어도 1972년까지 계속되었고, 존 이상으로 폴에 대해 앙금이 남아있던 조지 해리슨은 "4인조 밴드 비틀즈의..." 라고 말하는 오노 요코에게 "3인조 밴드야"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때가 조지와 폴의 사이가 매우 틀어져있던 때로 폴 매카트니를 비틀즈 멤버로 인정 안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존과 폴, 조지와 폴은 오히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사이가 완화되고, 1980년 경 조지의 자서전 문제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파일:lennon&mccartney_1974.jpg
1974년 3월 29일 로스앤젤레스. 5년 만에 한 사진에 담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7]
위와 같은 예화들 때문에 존과 폴의 불화가 존 레논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틀즈 해체와 물적 분할을 둘러싼 법정 소송이 1973년 무렵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화해의 무드가 조성된다.

사실 폴에 대한 나머지 멤버들의 반감은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후 비틀즈와 애플사의 매니지먼트 문제로 증폭된 부분이 큰데, 폴은 자신의 장인어른인 리 이스트먼을 후임 매니저로, 나머지 셋은 앨런 클라인을 후임 매니저로 밀면서 대립하였다.

그러나 앨런 클라인의 기만 행위들이 밝혀지면서 ‘폴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로 분위기가 바뀌었고, 폴에 대한 멤버들의 반감이 상당히 누그러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폴 vs 나머지 세 멤버 + 앨런 클라인'이었던 법적 공방이 '비틀즈 멤버들 vs 앨런 클라인'으로 구도가 바뀌게 된다.

1974년 3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며 해리 닐슨의 앨범을 프로듀싱 중이었던 존 레논을, 폴 매카트니가 아내 린다 매카트니, 그리고 스티비 원더와 함께 깜짝 방문한다. 이 당시 링고 스타도 함께 있었고, 존과 폴은 스튜디오에서 즉흥 연주를 함께할 정도로 사이가 회복된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해리 닐슨,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Stand By Me'를 함께 연주한 음원.
<A Toot and a Snore in '74>라는 이름의 부틀렉으로 돌아다닌다.

물론 화해를 하긴 했지만, 예전만큼 허물없이 지낸 건 아니었다. 1975년 이후, 음악계에서 은퇴하고 션을 돌보면서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던 존 레논은 20대 시절처럼 연락도 없이 갑자기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나 음악을 연주하는 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폴도 "지금은 20대도 아니고 비틀즈 시절도 아니야."라는 존의 말에 상처받아 나중에 자신의 말에 후회한 존이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등 티격태격 하긴 했다고 한다.

그래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와 달리 교류도 꽤 있었으며, 존이 죽기 전에는 사이가 많이 회복됐었다. 폴은 존 레논이 살고있는 다코타 아파트에 자주 놀러갔으며, 어느날은 함께 술을 마시며 TV에 나오는 SNL 방송을 보면서 출연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물론 둘이 술에 많이 취한 상태라 결국 그 계획은 무산됐지만.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가 McCartney II 앨범을 발표할 때 'Coming Up'을 듣고 좋은 싱글이라고 칭찬했으며, 폴 매카트니 역시 존 레논이 5년의 공백기를 깨고 Double Fantasy를 발표했을 때, 응원차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일화는 1994년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완성되지도 않고 상업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존 레논의 홈 레코딩 노래들이 수록된 두 개의 테이프를 받았는데, 한 테이프에는 (폴, 조지, 링고가) 작업을 마치고 발표[8]한 "Free as a Bird"와 "Real Love"가 수록되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테이프에는 "Now And Then" (원제:I Don't Want to Lose You)와 "Grow Old With Me"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테이프의 겉면엔 "for Paul"'이라고 급하게 휘갈겨 쓴 존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존은 훗날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기도 했으며[9], 폴은 존이 죽었을 때 추모곡 'Here Today' 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대중들은 "역시 폴과 존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말한다.

4. 비틀즈의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

투어 활동을 재개한 1990년대 이래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멤버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비틀즈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비틀즈 관련 활동 및 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하는 편이다.

비틀즈 음악에 관한 판권 분쟁이 매듭된 이후 1994년, 폴 매카트니는 조지 해리슨링고 스타와 함께 존 레논의 미발표 음원 ‘Free as a Bird’를 작업하고 비틀즈의 전기 다큐멘터리인 ‘비틀즈 앤솔로지’에 참여한다. 앤솔로지는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2000년 비틀즈의 영국 및 미국 차트 1위 싱글을 모은 1이 예상치 못한 대박 흥행을 거두자, 윙스의 활동을 정리하는 다큐와 음반 Wingspan을 2002년에 선보이는 한편, 2003년에는 본래 의도의 사운드로 비틀즈의 곡들을 복원하기 위해 'Let It Be... Naked' 를 발매하기도 했다. 필 스펙터의 프로듀싱을 못마땅해한 폴의 원래 의도대로 곡을 다시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노래들을 다시 믹싱했다. 수록곡과 곡 순서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Carnival of Light' 를 발매하려 하고 있으나, 조지 해리슨의 부인 올리비아 해리슨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고 있다. 'Carnival of Light' 는 14분 가량의 곡이라고 하며, 현재 비틀즈 곡 중 가장 긴 곡인 'Revolution 9'(8분 가량) 보다도 2배 가까이 긴 곡이다.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은 생전에 조지 해리슨이 이 곡을 무척 싫어했다는 이유로 이 곡의 발매를 반대하고 있다.

존 레논이 죽은 이후에는 존 레논의 유족과도 화해했고, 오노 요코를 초청한 자리에서 존 레논의 곡을 부르기도 했다.

존이 사망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매카트니의 이름으로 된 곡을 매카트니-레논으로 바꾸려다가 한바탕 논란이 펼쳐졌지만, 이것은 과잉보된 것으로 실제 폴이 바꾸려고 한 것은 오직 'Yesterday' 한 곡 뿐이었다. 'Yesterday' 는 완전히 폴 혼자서 만든 곡이기에 딱히 문제될 게 없는 일이었지만, 이 일이 크게 왜곡되어 모든 곡들을 바꾸려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덕분에 본의 아니게 한바탕 큰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Hey Jude' 마저도 사실 존 레논작곡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치욕까지 경험을 해야 했다.

이리저리 팔려나간 비틀즈 노래들의 판권을 되찾기 위해 오노 요코와 힘을 합치기도 했다. 막대한 저작권료로 인해 실패했지만.

비틀즈의 노래를 새로 리믹스해 재탄생시킨 앨범 'LOVE'로 다시금 전 비틀즈 멤버로서 그래미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열린 현지 시각 7월 28일 0시 50분 경에 피날레 무대에 등장하여 'The End' 와 'Hey Jude' 를 열창하였다. 그는 영국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니 어찌 보면 마땅한 일[10]. 개막식에 참석한 관중들이 함께 후렴구인 "나나나 나나나나~" 를 외치는 떼창 장면은 개막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2023년에는 앤솔로지 당시 끝내 미완성이었던 Now And Then을 완성하여 발매 예정에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며, 동년 11월 2일 발매되었다. 미완성의 원흉이었던 붕붕거리는 소음은 인공지능을 통해 해결했다고 한다.

5. 윙스 및 솔로 활동 (1970~)

윙스 후기에 이미 솔로 앨범을 여러 장 낸 상태였기 때문에 시기 구분이 애매하여 같이 이어지는 흐름으로 정리.

5.1. 1970년대

파일:external/26.media.tumblr.com/tumblr_loogsyuLPX1qz505o_1311242003_cover.jpg
1976년 Wings Over The World 투어 당시의 폴 매카트니[11]
폴은 비틀즈 해체 보도 일주일 후인 1970년 4월 17일, 가족으로의 회귀를 주제로 녹음한 본인의 첫 솔로 앨범이자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폴은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모두 혼자서 다루었다. 폴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는 그저 하모니와 백킹 보컬만 할 정도로 앨범의 기획부터 녹음, 믹싱까지 모두 폴 혼자서 해낸 앨범으로,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1위까지 오를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비틀즈 해체를 폴이 발표하고 뒤이어 바로 솔로 앨범을 냈다는 점에서 폴은 "자신의 솔로 앨범을 위하여 비틀즈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12]

비틀즈 해체 후 1년이 지난 1971년, 폴은 아내 린다를 비롯한 몇몇 세션맨들과 작업한 두 번째 앨범 'Ram' 을 발표한다. 영국미국에서 각각 1, 2위에 오를 정도로 상업적으로는 히트했지만 평단의 반응은 좋지 않았고[13], 앨범 뒷면에 있던 딱정벌레의 짝짓기 사진 때문에 존 레논과 한바탕 디스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How Do You Sleep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뒤 폴은 자신과 린다 매카트니, 기타리스트 데니 레인을 주축으로 윙스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윙스의 명의로 발표된 첫 앨범 Wild Life믹싱을 최소화하여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게 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고, 실제로 몇 번의 테이크만 사용하여 만들어 수수한 느낌이 든다. 다만 차트 성적이나 대중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는데, 이 실패가 '윙스'라는 이름의 낮은 인지도 탓이라고 생각한 폴은 윙스의 인지도가 어느정도 올라갈 때까지 Paul McCartney & Wing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Paul McCartney & Wings로 이름을 바꾼 윙스는 1973년 Red Rose Speedway를 발표한다. 빌보드 Hot 100 1위 곡인 My Love를 비롯하여 Get On The Right Thing, Little Lamb Dragonfly, 4곡을 연달아 이어붙인 장대한 10분여의 메들리 Hold Me Tight/Lazy Dynamite/Hands Of Love/Power Cut 등의 실험적인 곡을 수록한 이 앨범은 빌보드 200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뒤이어 폴은 007 죽느냐 사느냐의 주제가 Live and Let Die를 발표하는데, 이 곡은 현재까지도 최고의 007 주제가로 손꼽힐 정도로 높은 평을 받았으며 빌보드 HOT 100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연이은 성공 이후 폴은 윙스 멤버들과 함께 나이지라아의 수도 라고스로 향하는데, 이는 영국에 싫증을 느낀 폴이 보다 신선한 경험을 통해 창작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타리스트 헨리 매컬록과 드러머 데니 시웰이 윙스를 탈퇴했고, 나이지리아 스튜디오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으며 심지어 녹음 테이프를 도난당하기까지 하는 등 악재가 겹쳤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 1973년 말 윙스는 그 결과물 Band on the Run을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폴 매카트니의 가장 성공적인 솔로 앨범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명반 대우를 받는다. 차트에서도 폴의 솔로 앨범 중 처음으로 영국미국에서 동시에 1위를 하기도 했다.

Band on the Run으로 윙스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폴 매카트니는 1975년 발매된 차기작 Venus and Mars부터 다시 밴드의 이름을 Wings로 되돌린다.

Venus and Mars가 전작 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성공을 기록한 후, 윙스는 Let 'Em In, Silly Love Songs라는 양대 히트곡을 수록한 Wings at the Speed of Sound를 발표한다. 평가 면에서는 혹평 세례를 받으며 다소 기세가 꺾였지만, 흥행에서는 여전한 위력을 보여주었고 커리어의 절정에 다다른 윙스Wings Over The World 투어 등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인다. 이 시기 윙스는 브라스 밴드를 동원하여 빅 밴드 재즈 및 디스코펑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팝 음악을 주력으로 하였다. 상술한 At The Speed Of Sound 앨범의 두 히트곡인 "Silly Love Songs"와 "Let 'Em In"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성황리에 투어를 마치고 1977년 11월 발매한 싱글 "Mull of Kintyre"는 영국 사상 최초로 판매량 200만 장을 넘기며, 1977년 크리스마스 차트 1위, 1977년 최다 판매 싱글은 물론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폴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기록을 모두 가진,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14] 싱글의 성공에 힘입어 발매한 앨범 London Town은 다소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었으나 싱글로도 발매된 수록곡 With a Little Luck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윙스는 1979년의 투어 역시 성황리에 마무리를 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동년 6월 발매된 마지막 정규 앨범 Back to the Egg의 실패에 더불어, 1980년 1월 일본 공연을 위한 입국 수속 중 폴 매카트니가 반입한 대마초 때문에 일본 공연이 취소되며 윙스의 활동은 잠정 중단된다.

5.2. 1980년대

1980년 5월, 폴은 두 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II를 발매한다. 이 앨범 역시 1970년 발매된 McCartney처럼 폴 본인이 앨범 제작의 전 과정을 혼자서 진행하였으며, 기존의 록 음악이나 재즈풍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일렉트로닉 테크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차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영국미국에서 1위와 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8일, 폴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일이 발생한다. 존 레논마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소울메이트였던 존 레논의 죽음으로 정신적 충격과 함께 신변의 위협을 받은 폴 매카트니는 차후 투어 활동을 주저하게 된다. 결국 밴드 활동에서 관심이 멀어진 폴 매카트니와의 협업에 지칠대로 지친 데니 레인이 밴드 활동에 환멸감을 느끼고, 1981년 4월 27일 밴드에서 탈퇴를 선언하며 윙스는 영원히 해체되고 만다. 데니 레인이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Tug of War는 결국 폴 매카트니 솔로 명의로 발표된다.

다시 솔로로 돌아온 폴은 1982년, Tug of War를 통해 또 한번 찬사를 받는다. 비틀즈 시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앨범으로, 비틀즈 시절 폴의 멜로디 감각이 제대로 나타난 수작으로 평가 받는다. 폴의 팬이라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폴의 솔로 시절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앨범 쯤은 'Band on the Run' 과 함께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이 앨범에는 스티비 원더와 함께한 곡이 두 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80년대 촤고의 히트곡 중 하나인 Ebony and Ivory다.

Tug of War의 성공 이후, 이듬해인 1983년 발표된 Pipes of Peace는 앨범 관련 싱글인 Pipes Of Peace, Say Say Say는 각각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HOT 100 1위에 오르며 성공했으나 정작 앨범은 영국 4위 미국 15위라는 다소 아쉬운 흥행을 달성했고 평가도 미적지근했다.[15] 이후 폴은 영화 제작에 오랜만에 도전하여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라는 제목의 영화와 동명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함께 발표하지만, 싱글로 발매된 곡인 'No More Lonely Nights'만 성공하고 올드한 감각으로 만들어진 영화와 앨범은 흥행과 평가 양면에서 모두 실패하고 만다.

이처럼 어느덧 중년 뮤지션이 된 폴 매카트니는 톱스타의 자리에서 밀려나 1980년대에 급격하게 뒤바뀐 대중음악 장르에 적응하는데 꽤나 애를 먹게 된다.[16]

Give My Regards의 실패 후 1985년, 폴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라이브 에이드에 참가하였다. 전 비틀즈 멤버가 꼭 포함되어야 한다는 기획에 응답하여 Let It Be를 불렀는데, 기술적 문제로 인해 첫 2분간 마이크에 소리가 안들어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후 DVD에서는 수정되었다.

1986년 폴은 Pipes of Peace 이후 3년 만에 전곡을 신곡들로만 채운 새 앨범 Press to Play를 발매하지만, 극명하게 갈린 평가와 더불어 역대급 흥행 참패를 기록하게 된다. 이에 폴 본인도 꽤 충격을 받았는지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업을 하여 차기작 제작에 상당한 공을 들이게 되고, 그 덕분인지 1988년 일종의 이벤트성 커버 앨범인 CHOBA B CCCP를 거쳐, 1989년 발매된 신작 Flowers in the Dirt는 오랜만에 영국 차트 1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룬다. 다만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서는 21위라는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다.

5.3. 1990년대

Flowers in the Dirt 앨범이 준수한 성적을 거둔 이후, 폴 매카트니는 10년 만에 투어를 재개하게 된다. 1989년 7월 26일 런던 공연을 시작으로 1990년 7월 29일 미국 시카고 공연까지 총 103회에 걸친 "The Paul McCartney World Tour"가 성황리에 마무리되고[17], 폴은 1991년 음악 방송 MTV Unplugged에 출연 제의를 받고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 공연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MTV Unplugged의 전성기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해당 공연 녹음본을 처음으로 음반화한 라이브 앨범인 Unplugged (The Official Bootleg) 역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993년 폴은 새 정규 앨범 Off the Ground를 발매하고 1990년 투어 이후 3년만에 "The New World Tour"라는 이름의 세계 투어를 진행한다. Off The Ground 앨범 자체의 평가는 별로였고 흥행도 미적지근했으나 투어는 성공을 거두어 폴은 다시금 투어에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 투어는 Paul Is Live라는 타이틀을 달고 라이브 앨범으로도 출시되었으나 투어의 성공과 달리 Off The Ground와 마찬가지로 앨범의 흥행과 평가는 그닥이었다.

이후 그는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1991년 로열 리버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Liverpool Oratorio라는 클래식 앨범을, 1992년 킬링 조크의 베이시스트인 유스와 함께 파이어멘(the Firemen)이라는 명의로 일렉트로니카 앨범을 발매하는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이어맨 듀오는 2000년대까지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94년, 비틀즈 Anthology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서 폴은 앨범 발매는 물론 투어도 중단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는 Anthology 작업 틈틈이 신곡 작업을 쉬지 않았고 1997년, 비틀즈 시절의 느낌과 폴 매카트니 특유의 느낌이 살아있는 곡들로 채워진 4년 만의 정규 앨범 Flaming Pie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영국, 미국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차트 성적도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2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그러나 80년대 말~90년대 초에 걸친 부진을 떨치고 상승 가도를 달리던 폴에게 큰 비극이 닥쳐온다. 1998년 4월 17일, 3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함께한 아내 린다 매카트니가 유방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한 것이다. 인생의 동반자이자 음악적 파트너였던 린다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끼고 폴은 모든 투어를 취소했다. 린다의 사망 1년 후 1999년 4월 10일 로열 앨버트 홀에서 린다 매카트니의 추모 공연이 열렸으며, 같은 해 발매된 Run Devil Run 앨범에 실린 No Other Baby라는 곡을 통해 폴은 먼저 떠나간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애도를 표했다.

5.4. 2000년대

폴 매카트니의 투어는 2001년 Driving Rain이 발매되면서 재개된다. "Driving World Tour", "Back in the World Tour" 등이 진행되었으며, 특히 후자는 Back in the U.S., Back in the World라는 제목의 라이브 앨범으로도 발매되었다. 투어는 성공적이었지만, Driving Rain 앨범 자체는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1986년 Press To Play와 마찬가지로 흥행에 대참패하고 만다.

그렇게 Driving Rain 활동 중이었던 2001년 11월 29일, 린다의 죽음에 이어서 폴에게 또 한 번 비극이 찾아오는데, 바로 비틀즈 시절 밴드메이트였던 조지 해리슨이 폐암으로 사망한 것이었다. 1년 뒤, 폴은 링고 스타와 함께 조지를 추모하는 Concert For George를 개최했다.

2002년, 모델 출신 사회운동가 헤더 밀스와 재혼했다. 아일랜드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하객으로는 링고 스타와 조지 마틴이 참석했다. 이듬 해 10월 28일, 늦둥이 딸 베아트릭스 매카트니를 얻었다. 해더 밀스가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가 절단된 상태라 임신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기적적으로 딸을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폴은 출산 당시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

2003년 11월, 폴은 비틀즈 앤솔로지의 일환으로 Let It Be... Naked을 내놓는다. 기존 Let It Be 앨범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폴 매카트니는 리마스터링 앨범 작업을 통해 프로듀서 필 스펙터가 입혀놨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모두 제거했다.마침 이 앨범이 제작되던 해 필 스펙터가 살인 혐의로 체포됐기 때문에, 이에 대한 흔적 제거라고 보여질 수도 있다. 2004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붉은 광장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Driving Rain의 실패를 딛고, 2005년에는 폴 매카트니 표 발라드 앨범인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음악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더러 흥행에도 성공했으며, 앨범 발매에 맞추어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Chaos And Creation At Abbey Road' 라이브도 호평 속에 마무리되었다.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과 베스트 팝 보컬 앨범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미국에서는 빌보드 6위까지 기록하는 등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뒀다. 타임지에서 선정한 2000년대의 100대 앨범 78위에 선정되는 등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21세기 폴 매카트니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앨범이라 할 만하다.

2년 후인 2007년에는 Chaos and Creation과는 반대로 강렬한 록 사운드가 중심이 되는 Memory Almost Full이 발매된다. 해당 앨범이 나름 성공을 거두고 이어서 2010년 3월부터 2011년 6월까지 폴은 Up and Coming Tour라는 이름의 세계 투어를 진행했다.

6. 2010년대

2012년, 폴은 CHOBA B CCCP, Run Devil Run에 이은 세 번째 커버 앨범 Kisses on the Bottom을 발매한다. 고전 로큰롤 위주였던 앞의 두 앨범과는 달리, 재즈와 스탠더드 팝 위주의 잔잔한 앨범. 동시에 캐피톨 스튜디오에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라이브로 연주했는데, 이는 추후 'iTunes Live From Capitol Studios'라는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되었고 Kisses on the Bottom: Complete Kisses의 보너스 트랙으로도 수록되었다.

1년 뒤인 2013년에는 비틀즈 스타일의 음악에 현대적인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결합한 New 앨범을 발매하며 호평을 받았다. 이 앨범의 발매외 동시에 폴은 다시 투어를 재개했으며, 이 투어 시즌 도중 2015년의 내한 공연도 진행되었다.

2019년 12월 20일 폴 매카트니가 2005년에 집필했던 아동 소설인 하이 인더 클라우즈(High in the Cloud)의 애니메이션 제작이 결정되었다. 당초 2015년 개봉을 목표로 2013년 제작이 결정되었으나 몇년이 지난 후에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셈이다. 넷플릭스고몽에서 제작을 담당하고 폴 매카트니 본인 또한 프로듀서와 영화 음악으로 참여한다고 밝혔다.

또 2019년 커리어 첫 뮤지컬 음악을 작곡한다는 기사가 떴다.# 고전 명작인 영화 '멋진 인생'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이다. 공동 제작자로는 뮤지컬과 영화로 제작된 '빌리 엘리어트'와 엘튼 존의 생애를 그린 영화 '로켓맨'의 각본을 맡았던 리 홀, 런던의 공연중심지인 웨스트엔드의 유명 제작자 빌 켄라이트와 공동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2020년 공개 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에 영향으로 연기 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안에 새 정규앨범을 발매한다는 것 또한 언급했다. 2018년 6월 폴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의 모든 사진들이 삭제되고 새 앨범을 암시하는 게시물들을 올렸고, 6월 20일 새 싱글 I Don't Know/Come on to Me가 공개되었다. 8월 15일 또 다른 싱글 Fuh You가 공개되었다. 9월 7일 신보 Egypt Station을 발매했다. 발매 이후 빌보드 200 1위에 올랐는데, 이는 Tug of War 이후 36년 만의 1위이며 폴 매카트니 커리어 사상 최초의 1위 데뷔 앨범이다.

7. 2020년대

2020년에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으로 글래스톤베리를 비롯한 투어가 전부 취소되고 오랜 기간 칩거할 수밖에 없었다. 예정되었던 투어가 전부 취소되자 폴 매카트니는 예정에 없던 새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2020년 12월 자신의 3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인 McCartney III를 발매했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는 1989년 Flowers in the Dirt 이후 31년 만에 1위를 기록했으며,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서는 2위에 올랐다.

2022년 4월 28일부터 북미 투어인 Got Back 투어를 개시했다. 2022년 초반에 개봉한 피터 잭슨의 다큐멘터리 비틀즈: 겟 백을 의식한 네이밍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다큐멘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1969년 1월 30일 옥상 공연에서 존 레논이 I've Got a Feeling의 자기 파트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대위법이 사용된 곡의 마지막 부분은 과거의 존과 현재의 폴이 듀엣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어 팬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2022년 6월에는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에도 헤드라이너로 참여했다.

2023년 11월 2일, Anthology 세션 당시 녹음하지 못하고 묻혔던 존 레논의 마지막 유산인 Now And Then의 작업을 마치고 비틀즈 명의로 발표하였다.

2024년 6월 14일, 50년 전인 1974년 윙스 활동 시절 기획하여 촬영, 녹음까지 모두 마쳤으나 끝내 공개되지 못하고 묻혀버린 환상의 라이브였던 'One Hand Clapping'을 마침내 리마스터하여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과거 부틀렉이나 Archive Collection으로 일부 곡들이 공개된 바는 있지만 전면 공개는 전무했던 터라 팬들의 공식 발매에 대한 갈증이 매우 컸고, 이에 걸맞게 발매 이후 팬들 사이에서 매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피치포크에서 8.4점을 주는 등 평론가들에게도 고르게 호평받는 분위기. 또한 이와는 별개로 새 정규 앨범으로 추정되는 앨범을 제작 중이라고 밝혔다.


[1] Please Please Me ~ Revolver[2] 이때부터 불화가 시작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중기로 접어들며 존과 폴의 음악적 성향으로 인해 충돌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조지는 소외되는 현상들이 발생하다보니 팀워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 후에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죽음과 이로 인한 비즈니스적인 문제,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까지 겹치며 사달이 난 것이다.[3] 제일 먼저 비틀즈를 떠난 것도 존 레논이었다. 두 차례나 비틀즈 탈퇴를 멤버들에게 언급했다고 한다. 지치다 못해 결국 비틀즈를 놓게 된 폴이 나중에 공식 발표만 했을 뿐 이미 내부적으로 비틀즈는 해체됐던 상황.[4] 이 시기 사진가였던 린다가 촬영한 스튜디오 작업 사진이 남아있다.[5] 묘하게 'How Do You Sleep'과 분위기가 비슷한데, 존 레논은 잘 모르고 폴 매카트니를 깠던 본인의 행위에 대한 반성과 앨런 클라인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고 밝혔다.[6] 이때 존 레논은 "그는 최악으로 녹음된 짐들을 받았지만,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냈다. 내가 들었을 때는 나쁘지 않았다"라며 필 스펙터를 두둔했다.[7] 물론 둘은 그 이전에도 사적으로 여러 차례 만난 바 있지만, 1969년 8월 이후, 둘이 함께한 사진이 대중에 공개된 것은 5년 만의 일이었다.[8] 이 작업을 할 때 셋의 마음고생이 꽤나 심했다고 한다. 링고가 술회하기를 "우리는 존이 휴가를 갔거나 차를 마시러 가서 잠시 자리를 비운 채 우리에게 함께 작업할 테이프를 남겨두고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감정이 북받치는 작업을 해낼 수 없었다."라며 특별한 의식 없이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고자 했다고 한다.[9] 존이 폴을 디스하려고 요코와 함께 작곡한 'How Do You Sleep?'은 존이 나중에 아주 많이 후회한 곡이다.[10] 폐막식에서는 영상을 통해 존 레논이 등장한다.[11] 해당 사진은 Over the World 투어 중에서도 일명 Wings over America로 불리는 북미 투어 도중에 촬영되었다. 다른 시기에 비해 70년대 윙스 활동 당시 폴은 유독 장발로 무대에 많이 섰다.[12] 이 비판을 더욱 뜨겁게 지핀 게 빌보드 차트 성적이었는데, Let It Be보다도 먼저 3주 동안 빌보드 1위를 차지해버렸다.[13] 그러나 갈수록 평이 올라 2012년 재발매 이후로는 솔로 폴 매카트니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명반으로 대우받게 되었다.[14] 1960년대 최다 판매 싱글은 비틀즈의 "She Loves You"로 대략 130만 장이 팔렸다. 또한 "Mull of Kintyre"의 기록은 1984년 밴드 에이드 자선 싱글 "Do They Know it's Christmas?"가 298만 장을 기록하며 깨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현재도 "Mull of Kintyre"는 영국 내에서 최다 판매 싱글 순위 3위에 올라있다. 참고로 1위는 1997년 엘튼 존이 "Something About the Way You Look Tonight" / "Candle in the Wind 1997"로 기록한 477만 장이 최고.[15] Pipes of Peace는 Tug of War와 동시에 작업했던 앨범이었다. 그런데도 차트 성적이나 평단의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점이 아이러니.[16] 같은 비틀즈 멤버인 링고 스타는 연이은 상업적 실패로 음악 산업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해 알코올 의존증까지 가던 시기였다. 그나마 1987년 조지 해리슨Cloud Nine을 히트시키며 80년대 중후반 가장 상업적 성공을 크게 이룬 비틀즈 멤버가 된다.[17] 이 투어의 일부를 담고 있는 라이브 앨범이 Tripping the Live Fantasti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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