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atière Fusil d’Infanterie Mle 1867 1867년형 보병 소총 | |||
M1853/67 보병 소총 | |||
타바티에르 카빈 | |||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종류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소총 | ||
원산지 | [[틀:깃발| | ]][[틀:깃발| ]][[프랑스 제2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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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역사 |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1867년~1870년 | ||
개발년도 | 1857년 | ||
생산년도 | 1867년~1870년 | ||
생산수 | 350,000정 이상 | ||
사용국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태국| ]] | ]][[틀:깃발| ]][[프랑스 제2제국| ]]||
사용된 전쟁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3국 동맹 전쟁 아르헨티나 내전 | ||
기종 | |||
파생형 | 줄루 엽총 | ||
세부사항 | |||
탄약 | 17.8×35mmR | ||
급탄 | 단발 | ||
작동방식 | 브리치블록 | ||
총열길이 | 958mm | ||
전장 | 1,422mm | ||
중량 | 4.45kg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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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제2제국에서 개발 및 생산한 후미장전식 소총. 정식 명칭은 "1867년형 보병 소총"으로, 이명인 "타바티에르(Tabatière)"는 총기의 메커니즘이 코담배를 보관하는 스너프박스(프랑스어로 타바티에르)와 유사하여 그 이름을 따 와서 붙였다.
2. 상세
19세기 후반은 보병 무기 개발사에 있어서 격동기나 다름없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로이센 왕국이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 왕국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연이어 격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로이센 왕국군의 승리 요인에 대하여 분석하기 시작했으며, 보병 무기가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1] 오스트리아는 전장식 로렌츠 소총을 사용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프로이센은 익히 알려진 드라이제 후미장전식 소총을 사용했고, 유럽 각국은 너도나도 새로운 후장식 소총을 개발 및 배치하는 데 서두르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자신들의 제식 머스킷인 패턴 1853 엔필드를 후장식으로 개조한 스나이더-엔필드를 도입했으며, 오스트리아는 로렌츠 소총을 후장식으로 개조한 벤츨 소총을 우선 도입한 후 새로운 설계인 베른들 소총으로 교체했다.당대 강대국 중 하나였던 프랑스도 이에 뒤쳐질 수는 없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후장식 소총을 개발하라는 주문을 넣었다. 그 결과 1866년에 프랑스군의 신규 제식 소총으로 샤스포 소총이 도입되었다. 샤스포는 여러모로 드라이제에 비해서 우월한 성능을 자랑했으며, 프랑스는 빠른 시일 내에 전군을 신무기로 무장시키기 위해 샤스포 생산에 서둘렀다. 그러나 아무리 무기 생산에 특화된 국영 조병창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후장식 총기는 기존의 총기와 비교해서 너무나도 다른 설계였고, 때문에 생테티엔 조병창 등 프랑스의 조병창들은 부담이 가중되며 목표 생산량 달성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후장식 소총이 모자람에 따라 새롭게 설립된 기동위병[2] 장병들을 무장시킬 방법이 없었다. 당시에도 드라이제 소총의 활약상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지 기동위병 병사들도 드라이제 소총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샤스포보다는 성능이 떨어지되 적어도 드라이제보다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 총기로 무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프랑스군은 급한대로 기존의 전장식 소총을 후장식으로 개조하여 2선급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했으며, 이것이 바로 타바티에르 소총이다. 설계는 영국의 스나이더-엔필드를 강하게 참고한 듯하며[3] 메커니즘 또한 스나이더-엔필드와 유사하게 경첩식 브리치블록을 채택했으며, 볼트액션 방식인 샤스포와 달리 해머를 코킹해 사격하는 비교적 구형 시스템이었다. 가장 많이 생산된 버전은 M1853 강선 머스킷을 개조한 M1853/67 소총이었으나, 수량이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그보다 이전인 플린트락 머스킷을 개조해 사용한 이력도 남아 있다. 당시 국영 조병창들은 샤스포 생산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기에 타바티에르로의 개조는 프랑스 전역의 민간 업체에 위탁 생산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개조된 타바티에르 소총의 총생산수는 약 350,000정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1867년부터 1870년까지 타바티에르 소총이 생산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최전선 병력을 완전히 샤스포로 무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단순히 소총의 성능만으로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프로이센에 의해 일방적으로 밀리고 말았다.[4] 프랑스는 프로이센군의 공격으로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거의 모든 샤스포를 잃고 말았고, 이어서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마저 포로로 잡히면서 프랑스는 위기에 처했다. 무기가 부족해지면서 프랑스는 유럽과 미국을 샅샅이 뒤지며 남은 병력에게 무장시킬 무기를 구하러 다녔으며, 미점령 지역에서는 전장식 총기의 타바티에르 개조도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타바티에르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실제 성능이 드라이제에 비해 뒤떨어지는 면이 없었고, 오히려 우월한 점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구식" 총기로 무장했다는 점 때문에 사기가 저하되었고 이 또한 프랑스의 패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이듬해인 1871년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타바티에르 생산도 중단되었고, "구식"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타바티에르도 제식에서 퇴출되었다. 프랑스는 샤스포보다 더욱 진보한 소총인 그라 소총으로 무장하면서 1880년대 중후반에 타바티에르 소총을 폐기 및 매각했으며, 대부분은 값싼 엽총으로 전환되어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때문에 현재 원본 타바티에르 소총은 매우 희귀하다.
3. 파생형
- 줄루 엽총
프랑스가 매각 처리한 타바티에르 소총을 엽총으로 개조한 버전. 산탄총으로의 전환은 대부분 벨기에에서 시행되었으며, 미국 및 아프리카로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10년간 미국에서 엽총으로 많이 팔렸으나 1890년대에 이보다 우월한 단발식 탑브레이크 산탄총이 출시되면서 도태되었다. 줄루로의 개조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벨기에 침공 직전까지 계속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1930년대까지 미국 시골에서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시암 왕국 타바티에르
타바티에르를 제식으로 채택한 나라로 프랑스 외에 시암(현 태국)이 있다. 제국주의가 판치던 19세기에 태국은 언제든지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라마 4세와 그 뒤를 잇는 라마 5세의 성공적인 근대화 및 외교 정책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에 태국은 양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할 수 없었으므로 독일 제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무기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운이 좋게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무기인 타바티에르 소총을 도입해 무장할 수 있었다. 이 버전은 프랑스에서 생산한 총기를 직도입한 것이 아닌, 시암 왕국을 위해서 벨기에에서 제작된 타바티에르 소총으로 보인다.
4. 대중매체
5. 참고자료
[1] 물론 프로이센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비단 소총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조직이나 높은 사기 등도 있었으나, 적어도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는 최신 소총만큼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2] Garde nationale mobile. 국민위병(Garde nationale)과는 별개의 조직. 당시 프랑스군은 오늘날의 태국군처럼 추첨 형식의 징병제를 시행했는데, 당첨(?)된 현역병은 7년간 정규군에서 복무했다. 1866년 전쟁 위협이 다가오자 나폴레옹 3세가 병력 충원을 위해 기동위병이라는 일종의 예비군 제도를 실시했는데, 뽑히지 못한 나머지 인원들을 징집하여 1년에 14~15일씩 훈련을 받는 방식으로 5년간 복무하게 하는 제도였다. 2선급 부대였다보니 보급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으며, 당연히 현역에 나눠주기도 모자란 샤스포 소총 지급 대상도 아니었다.[3] 그러나 이에 대한 로열티는 영국에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 일례로 프로이센군은 총보다는 야포에 집중 투자해 암스트롱제 야포보다도 우수한 강철제 포신의 후미장전식 야포인 크루프제 야포였다. 게다가 드라이제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걸 다루는 장병들은 장기간 운용하면서 실전을 많이 치러 총의 성능은 다소 떨어지는 단점을 총에 대한 높은 숙련도로 커버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여전히 청동제 포신의 전장포가 주력이었고 훈련도가 낮은 병사들이 지휘관들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발포 하여서 명중률이 낮은 것도 패배에 단단히 한 몫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