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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클레오파트라 문
12세기 라틴 양식으로 세워진 성 바오로 성당
1. 개요
튀르키예어, 영어 Tarsus그리스어 Ταρσός
아랍어 طَرَسُوس
아르메니아어 Տարսոն
히브리어 תרשיש
히타이트어 Tarsa
터키 남부의 유서깊은 도시. 메르신에서 동북쪽으로 25km, 아다나에서 서남쪽으로 35km 떨어진 베르단 (키드누스) 강 서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35만명으로, 메르신-타르수스-아다나 광역권을 이룬다. 고대부터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잇는 요충지로, 지중해와 아르메니아를 잇는 교역 & 항구 도시로 번영하였다. 전통적으로 킬리키아 지방의 중심 도시이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며, 사도 바울로(바오로)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세 시기에는 동로마 / 이슬람 / 십자군 세력 간의 각축장이다 12세기 후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다만 맘루크 왕조의 침공으로 쇠퇴하였고, 라마잔 왕조 들어 아다나에게 밀려 쇠퇴하였다. 19세기 목화 재배로 재차 번영했으나 퇴적으로 항구 기능을 메르신에게 내어주며 재차 쇠퇴하였다. 그러다 20세기 중엽 농업과 공업이 다시 활성화되며 현재에 이른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던 만큼 고고학계의 기대가 크지만 무려 6천년간 지속적으로 도시가 유지된 결과 일부 외에는 발굴이 행해지지 못하고 있다. 시내에는 가도, 목욕탕, 클레오파트라 성문, 신전 (도눅타쉬) 유스티니아누스 다리 등의 로마 유적과 성 바울 성당, 울루 자미 (대사원), 크륵카쉬크 시장 등의 중세 유적이 남아있다. 성 바울 성당은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후 박물관이 되었으나, 잔존한 소수의 기독교도들을 위해 가끔 미사가 열린다. 그외에 타르수스 박물관, 바울의 우물, 오스만 전통 가옥, 옛 아르메니아 학교 등도 볼거리이다. 교통편으로 1886년에 세워진 철도역이 있으며, 매일 27회 메르신과 아다나 방면 열차가 지난다. 북쪽 3km 지점에는 터키 최초의 수력발전소가 있던 베르단 댐이 있고, 그 물로 일대의 평원에 관개 농업을 한다. 아랍 지역과 가깝고 교류가 잦았기에 훔무스 등 아랍 음식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외에 튤립 피클인 샬감 등의 향토 음식이 있다.
2. 역사
2.1.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서쪽 끝에 위치한 킬리키아 평원에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거주하였다. 타르수스 일대에도 신선기 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도시로 발전한 것은 히타이트 인들이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이때 타르수스는 그 어원이 된 타르사로 불렸는데, 히타이트의 신 중 하나인 타르쿠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700년 경 킬리키아를 수차례 정벌한 아시리아 제국의 아카드어 문헌에는 '타르시시'로 기록되었다. 아시리아의 왕 센나헤립은 기존 도시를 함락, 파괴한 후 자신이 재건하기도 하였다.다만 고대 로마의 학자 스트라보에 의하면 타르수스는 그리스(펠로폰네소스)의 아르고스 시민들이 아나톨리아 해안을 탐험하다가 세웠다고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벨레로폰이 페가수스에서 떨어져 발을 다친 곳으로, 타르-소스 (발바닥)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1] 또한 헤라클레스가 킬리키아 지역의 신인 산돈에게 감금되었던 곳이라는 신화도 있어 헬레니즘 시기의 동전에는 헤라클레스가 세겨져 있다. 여담으로 고대의 기록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타르테소스와 헷갈린다는 불평이 자자하다. 또한 고대 타르수스의 상징이던 뿔달린 사자는 이후 베네치아의 상징인 성 마르코의 사자에 영향을 준 듯 하다.
2.1.1.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시절의 은화. 알렉산드로스 이전부터 그리스 문화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시리아와 킬리키아 왕국 시대를 거쳐 킬리키아 일대는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령이 되었다. 타르수스는 신설된 킬리키아 사트라프의 치소였고, 세습 가문이 자치적으로 통치하였다. 이는 페르시아에서 근무한 그리스 용병 크세노폰의 저작 아나바시스에서 드러나는데, 당시 킬리키아의 총독은 시엔네시스 3세였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키루스 측에 항복하고 군대를 떼어주었으나 막후에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접촉하였다. 페르시아령 킬리키아의 마지막 총독 아라세마스는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이후 마케도니아 군이 다가오자 타르수스를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불태우려 하기도 하였다. 다만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장 파르메니온의 기병대가 그전에 도시를 접수하며 무산되었다.
2.1.2. 헬레니즘 시기
마케도니아령 킬리키아 총독 발라크로스 (타르수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금화 (타르수스)
기원전 333년, 아나톨리아의 페르시아군을 일소한 알렉산드로스는 킬리키아에 진입하였다. 그는 타르수스 인근의 키드누스 강에서 목욕을 한 후 병을 얻었는데, 도시에서 요양한 후 회복하여 이수스 전투에 임하였다. 킬리키아를 상실하고 시리아의 다리우스 3세 진영에 합류했던 아라세마스는 이수스에서 전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발라크로스를 임시 총독으로 임명했다가 메네스를 선임하였는데 그들은 마케도니아 본대가 소그디아나와 인도 원정을 수행하는 동안 아나톨리아 남부와 시리아 서부 일대를 평정하였다. 당시 타르수스 조폐소에서 헬레니즘 양식의 동전이 유래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요절한 이후 필로타스 & 크라테로스[2], 페르디카스 & 에우메네스, 안티고노스 1세가 킬리키아를 지배하였다. .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전사하자 안티파트로스의 차남이자 카산드로스의 동생 플레이스타라고스의 영지로 분봉되었다. 그러나 그는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반격으로 축출되었고 데메트리오스 역시 소아시아 원정 도중 셀레우코스 1세에게 잡혀 죽었다.[3] 이로써 힘이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이집트 해군이 킬리키아를 점령, 타르수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으나 내부를 정비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가 반발하여 6차에 걸친 시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1차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군대는 킬리키아를 점령하였으나 이집트 해군에게 대패하고 점령지외에 카리아까지 빼앗겼다.
다만 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2세는 2차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킬리키아와 이오니아 등지를 점령하였다. (기원전 253년) 그러나 3차 전쟁은 다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대승으로 끝났고 킬리키아 대부분을 포함한 소아시아 및 시리아 해안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3차 전쟁에서 수도 셀레우키아까지 털린 셀레우코스 왕조는 안티오크로 천도하였고, 그와 이웃한 킬리키아 및 페네키아 회복은 왕조의 필연적인 과제였다. 이는 셀레우코스 조의 중흥을 이끈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는 비록 4차 전쟁의 라피아 전투에서 패하였지만 아나바시스 (동방 원정)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 마침내 5차 시리아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며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수복하였다. (기원전 195년)
그러나 5년 후 셀레우코스 군대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대패하며 기세가 꺾였다. 이에 타르수스는 기원전 171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진압되었고 이때 도시는 키드노스의 안티오키아 (Αντιόχεια του Κύδνου)로 개명되었는데 인근의 안티오키아와 혼동되어 자주 쓰이진 않았다. 로마의 역사가 스트라보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의 타르수스는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와 함께 지중해의 학문 중심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4세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내분을 겪으며 더욱 쇠퇴하였고 킬리키아는 기원전 83년 시리아 왕위를 얻은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에 의해 정복되었다. 다만 그 지배는 확고하지 못하였고 킬리키아 해안은 해적들의 거점이 되었다.
2.1.3. 로마 시대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
로마 시대 시멘트로 세워진 신전 유적
킬리키아 지방의 무정부 상태는 기원전 67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타르수스에 입성하며 종식되었다. 로마 시대에 타르수스는 킬리키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한때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율리오폴리스로 개칭되기도 하였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구별하기 위해 키드눔의 안티오키아 (Antiochia ad Cydnum)로 불렸다. 타르수스는 로마 시대에도 여전히 대도시였다.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만난 곳이기도 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인 교사인 아테노도로스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팍스 로마나 시기 타르수스에는 궁전, 목욕탕, 체육관 등이 세워졌고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하였다.
2.1.4. 기독교와 동로마 시대
베르단 강에 놓인 바츠 다리 (유스티니아누스 다리)
타르수스는 그리스도교의 사도 바울로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본래 사울이었던 그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교로 개종, 바울로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른 소아시아 및 시리아 지방의 대도시들에 비하면 소규모였으며 3세기가 되어서야 주교가 있었다. 4세기 초엽, 로마 제국의 강력한 탄압으로 여러 순교자들을 배출한 타르수스는 5세기 무렵에는 확고한 그리스도교 도시가 되었다. 여담으로 타르수스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주도한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에게 패한 후 도시의 성벽 인근에 묻혔다. 메소포타미아 원정에서 전사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역시 그 반대편에 묻혔다.
6세기 무렵에도 타르수스는 여전히 소아시아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시대에 이사우리아[4]가 반란을 일으키자 타르수스는 그 진압군 사령부로 기능하였고 497년 반란 주동자들이 성문에 효수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에 타르수스는 교각을 재건하는 등 정비 되었다. 다만 6세기 중반 타르수스는 청색당의 봉기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7세기 초반에는 사산 제국에게 점령당하는 수난을 당하였으나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수복하였다.
2.1.5. 이슬람 제국기
이슬람 제국의 최전방 기지
637년 안티오키아가 아랍 무슬림 군대에 항복하자 킬리키아도 이슬람 제국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타르수스는 639년경 무슬림 군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같은해 메소포타미아에 닥친 기근으로 원정군이 후퇴하며 정복되지 않았다. 이후로 라쉬둔 칼리파 조는 이집트와 이란으로 관심을 돌렸고 8세기 초엽 우마이야 왕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때에야 킬리키아는 이슬람 제국령이 되었다.
다만 킬리키아는 동쪽으로부터의 방어에 취약하였고 동로마 당국은 타르수스 시민들을 타우루스 산맥 너머 서쪽으로 소개시켰다. 따라서 7세기 중반 무렵부터 킬리키아 일대는 동로마-아랍의 비무장지대였다. 그렇게 폐허가 된 타르수스는 787년에 이르러서야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복구되었다. 3천의 호라산계 아랍인들과 2천의 시리아 인들이 타르수스의 새로운 거주민이 되었다.
2.2. 중세
하룬의 사후 두 아들 알 아민과 알 마문 간의 내전 (811 ~ 813년) 때에 동로마 군대가 일시적으로 타르수스를 재점령하기도 했으나 내전이 끝난 후 압바스 군대가 수복하였다. 이후 타르수스는 킬리키아 관문과 가까운 관계로 압바스 왕조의 동로마 원정, 즉 지하드의 사령부가 되었다. 매년 봄, 눈이 녹아 산길이 안전해지면 아랍 군인들은 동로마 영토를 습격하였다. 다만 845년 타르수스 총독의 동로마 습격이 대패로 끝나며 6년여간 소강 상태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9세기 중반, 압바스 왕조의 중앙집권이 무너지자 타르수스는 시리아 지방과 함께 이집트의 툴룬 왕조령이 되었다. (879년)2.2.1. 아미르 야자만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임명한 타르수스 총독 칼라프 알 파르가니는 전직 총독과 그 부하들을 감금하였다. 그러나 압바스 조의 병영도시였던 타르수스의 시민들은 그에 반발하였고 감금된 총독의 부하 야자만 알 카딤을 석방시킨 후 봉기하였다. 이에 툴룬이 직접 정벌군을 이끌고 왔으나 시민들이 댐을 무너뜨려 수공을 펴자 후퇴하였다. (882년 가을) 이로써 타르수스는 이미 총독이 동전을 주조할만큼 자치권이 보장되긴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3년만에 압바스 조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사태를 지켜보던 동로마 제국은 이를 기회로 타르수스 수복에 나섰다. 883년 늦여름, 스콜라이 연대장 케스타 스티페이오테스가 이끄는 동로마 군대가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도시에서 12km 떨어진 밥 칼라미야에 진을 쳤다.야자만은 이들을 습격하기로 하였고 9월 11일 밤, 실행에 옮겼다. 상승세였던 동로마 군대는 얕잡아 보던 아랍인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하자 진열이 붕괴되었고 사령관 케스타는 물론이고 아나톨리콘 테마와 카파도키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이까지 전사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야자만은 30척의 함대를 꾸려 그리스의 칼키스 (에우보이아 섬)까지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지역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그에 굴하지 않고 886년 초, 야자만은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동로마 영토를 습격하였고 역사가 알 타바리에 의하면 '사상자 없이' 많은 재물과 포로와 함께 귀환하였다고 한다. 그해 여름엔 4척의 동로마 선박들이 야자만에게 나포하기도 하였다.야자만은 890년, 계속된 권유에 결국 이집트의 툴룬 왕조로 주군을 바꾸었다. (890년)
891년 10월, 야자만은 툴론 조의 장군 아흐마드 이븐 투간과 함께 동로마 제국을 침공, 안탈리아로 향하는 관문인 셀리누스 (트라야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10월 22일에 야자만은 수비대의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는 다음날 사망하였다. 원정군은 철수하였고 야자만은 '지하드 문'에 매장되었다. 타르수스의 영웅 야자만은 이슬람 세계가 분열되고 쇠퇴하던 시기에 연이은 승리로 명성이 높았다. 동로마 교회에서 그 용기를 인정하여 초상화를 그려준 10명의 무슬림 장군 중 하나였다. 이후 아흐마드가 타르수스의 총독이 되었다. 그러던 896년 툴룬의 아들 쿠마라와이가 다마스쿠스에서 암살되며 툴룬 조는 후계자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다. 따라서 타르수스는 어렵지 않게 압바스 칼리파의 직할령으로 회수되었다. (897년)
2.2.2. 제국의 역습
그러나 10세기 초반 압바스 조는 재차 쇠락하였고 타르수스는 935년 이집트의 익시드 왕조에 소속되었다. 다만 그 지배는 느슨하였고 10여년 후 944년 알레포를 장악한 사이프 알 다울라의 함단 왕조가 타르수스의 새 주인이 되었다. (946년) 사이프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뜻을 세워 야자만 사후 소강 상태였던 동로마에 대한 습격을 재개, 이코니움 (콘야)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국의 역습은 이제 시작이었다. 945-46년의 원정이 실패로 귀결되자 사이프 앗 다울라는 몇년간 공세를 멈추었다. 그러자 948년과 949년에 역으로 동로마 군대가 함단 왕조를 공격하여 마라쉬를 함락하고 안티오크 근교까지 약탈하였다. 이에 950년, 사이프는 재차 공세에 나섰으나 동로마 장수 레온 포카스에게 8천을 잃으며 대패하였다.사이프는 동로마 측의 평화 제안을 거절하였고, 951년 대 바르다스 포카스가 이끄는 제국군이 킬리키아 일대를 습격하였다. 이후로도 953-55년에 몇차례 바르다스가 킬리키아를 습격해 왔으나 수비에 일관한 사이프로부터 타르수스를 빼앗진 못하였다. 이에 바르다스 대신 그의 아들이자 레온의 형인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사령관이 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사이프는 956년에 오랜만에 타우루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자 동로마 장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가 킬리키아로 침투하며 그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는데, 양측 간의 벌어진 전투에서 요안니스는 4천을 잃으며 패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레온 포카스가 시리아 북부를 침공하였고 사이프의 사촌 아불 아시르를 패배시켰다. 957년 6월, 니키포로스는 타우루스 산맥의 관문인 하다스 요새를 파괴하였다.
이로써 주도권은 동로마로 넘어왔다. 958년 요안니스가 남하하여 다라를 점령하였고 함단 조의 장수 나드자 휘하의 1만 군대를 격파하였다. 959년에는 레온 포카스가 현 시리아 서북변에 위치한 키루스까지 약탈한 후 회군하였다. 960년, 니키포로스가 크레타 정복에 나서며 전선에서 이탈하자 사이프는 지하드 (성전)을 선포하며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그라나 레온 포카스가 재차 남하하였고 사이프와 직접 대결을 피하고 동로마 습격 후 복귀하던 알리 이븐 함단의 군대를 기습하여 괴멸시켰다. 한편, 이듬해 니키포로스는 성공적으로 크레타를 정복한 후 아랍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그러자 961년 이분 앗자야트의 반란이 일어날만큼 함단 왕조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해 말 니키포로스는 킬리키아 동북부의 아나자르부스를 점령한 후 이듬해 부활절에 회군하였다. 위기를 느낌 사이프는 직접 킬리키아의 수비를 맡았다. 이에 니키포로스는 사이프가 없는 시리아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962년 가을, 7만 대군으로 남하하여 마라쉬를 점령하곤 시리아 북부로 향하였다. 만비즈 등 알레포와 하란 사이 일대를 평정한 니키포로스는 마침내 12월 중순 함단 왕조의 수도 알레포를 포위, 함락한 후 엄청난 약탈물과 함께 회군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 정복이 시간 문제로 보이던 963년 로마노스 2세가 어린 자녀를 남긴채 요절한 후 벌어진 내전 때문에 전선은 오랜만에 평화로웠다. 그럼에도 함단 왕조는 히바탈라와 나드자의 연이은 반란으로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소규모 공세도 요안니스에게 분쇄되었고 그의 반격으로 킬리키아의 모프수에스티아 요새가 포위되었다. 마침내 태후 테오파노와 결혼하여 황제가 된 니키포로스 2세는 킬리키아 정복에 나섰다.964년 가을, 니키포로스는 4만 정예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약탈전과 함께 진격하였다. 아나자르부스와 아다나가 함락되었고 모프수에스티아 요새가 포위되었다.
후방의 카이세리에서 월동한 니키포로스는 965년 봄, 킬리키아의 중심 도시 타르수스로 향하였다. 성벽 밖에서 아랍 군대를 격파한 그는 도시를 물샐틈 없이 봉쇄한 후 모프수에스티아 요새로 향하였다. 궁수들과 공성병기들이 수비대를 괴롭히는 동안 공병들이 땅굴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대로 요새는 함락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타르수스 시민들은 시리아로의 철수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을 제안하였고 니키포로스는 이를 수용하였다. 떠난 주민들은 시리아 해안의 바니야스에 정착하였고, 남은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모스크는 허물어지거나 마굿간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250여년만에 타르수스는 동로마 영토가 되었고 킬리키아 테마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한세기가 흐른 11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은 재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068년에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어린 아들 미카일 7세를 남기고 사망하자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유능했던 로마노스 4세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의 동생 요안니스 두카스는 새 황제와 대립하였고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도주해버리며 제국군은 대패하였다. 이로써 미카일 7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는데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로마노스를 풀어주며 내전이 발발하였다. (1072년) 로마노스는 도키아 전투에서 정부군에 패하자 자신을 따르던 안티오키아 총독과 함께 킬리키아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가 기습적으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타르수스를 점령하며 대세는 기울었고 아다나에 있던 로마노스는 항복하였다. 이후 안전 보장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뽑힌 후 곧 사망하였다. 명군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한 후에도 제국은 노르만과 페체네그의 침공에 시달렸고, 그틈에 튀르크 인들이 타르수스를 장악하였다. (1085년)
2.2.3. 십자군 전쟁기
1102년 안티오키아 공국 지배기에 세워진 성 바오로 성당
한편 11세기 후반 셀주크 제국이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정복하자 아르메니아 인들은 서남쪽으로 이주, 킬리키아에 유입되었다. 1095년 아르메니아 왕공 콘스탄티노스 1세는 타르수스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다만 도시 자체는 여전히 튀르크 인들의 수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차 십자군 시기인 1097년 9월 14일, 탕크레드와 보두앵의 군대는 마라쉬로 향하는 십자군 본대에서 이탈하여 킬리키아로 향하였다. 전자는 1백의 기사와 2백의 보병이 있었고 후자는 5백의 기사와 2천의 보병을 거느렸다고 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경로를 통해 타우루스 산맥을 넘은 후 타르수스를 향한 경주를 벌였다. 먼저 도착한 탕크레드는 성밖에서 튀르크 수비대를 패배시킨 후 도시에 대한 항복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한 보두앵은 수적 우위를 내세우며 도시와 그 약탈의 할당을 요구하였다. 결국 항복이 성사되었음에도 타르수스의 주인은 보두앵이 되었다. (9월 22일)
다만 며칠 후 보에몽이 보낸 3백의 노르만 기사들이 당도하자 보두앵은 이들이 탕크레드를 지지할 것을 우려하여 입성을 거부하였고, 성밖에 농성하던 그들은 튀르크 인들의 습격으로 전멸하였다. 충격을 받은 보두앵의 기사들이 봉기하여 성내의 튀르크 인들을 학살하고 주군을 잡아다 성탑에 가두는 사태도 있었는데, 결국 설득되어 사태는 종결되었다. 한편 보두앵과 갈등을 빚던 탕크레드는 동진하여 아다나의 아르메니아 인들과 함께 마미스트라 (모프수에스티아)를 장악하였고 10월 초엽 보두앵과 탕크레드 모두 마라쉬에서 십자군 본대와 합류하며 킬리키아는 십자군의 후방 기지가 되었다. 한편 타르수스에 일주 가량 머무는 동안 도움 요청을 접한 보두앵은 다시 본대를 이탈해 에데사로 향하여 결국 에데사 백국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어진 안티오키아 공방전 당시 장기화된 포위로 이탈한 블루아 백작 에티엔 등의 기사들은 타르수스를 거쳐 필로멜리온[5]의 알렉시오스 1세와 합류한다.
1100년 멜리테네 전투 후 안티오크 공국의 섭정에 오른 탕크레드는 이듬해 여름 동로마 군을 몰아내고 재차 타르수스 등 킬리키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였고, 비슷한 시기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대패한 아키텐 십자군은 공작 기욤의 지휘 하에 타르수스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가 다음번에는 해로를 통해 레반트로 직행하였다. 1102년 1월에는 바이에른 십자군과 함께 성지로 향하던 레몽 드 생질이 타르수스 근해에서 좌초하였고, 총독 베르나르는 그를 사로잡아 안티오크로 압송하였다. 이후 탕크레드는 그를 2달간 감금한 끝에 라타키아 지배권을 대가로 석방한다. 1104년 동로마군은 재차 킬리키아를 장악하였는데, 이듬해 보에몽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아르메니아 귀족인 램프론의 오신에게 자치를 맡기고 철수하였다. 한편 재차 동로마 정복을 시도하러 떠난 보에몽을 대신해 다시 안티오크 섭정에 오른 탕크레드는 1110년 오신을 격파하고 타르수스 일대를 재점령하였다.
이후 타르수스 영주에 봉해진 기는 1111년 샤이자르 전투 당시 마라쉬 영주 리샤르, 아르메니아 귀족 헤토움 등과 함께 마우두드의 셀주크 군에 맞섰다. 한편 콘스탄티노스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 토로스 1세는 1116년 경쟁자인 바실 드가를 축출하고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세력을 통합하였다. 그리고 1119년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섭정 로제르가 전사하며 안티오크 공국이 약화되자 타르수스를 기반으로 킬리키아 서부를 장악하고 자립하였다. 그후 타르수스는 아르메니아 식으로 다르손 혹은 타르손이라 불리며 1198년 시스로 천도할 때까지 한세기간 중세 아르메니아 왕국(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기능하며 번영하였다. 1130년경 토로스는 안티오키아 공국으로부터 마미스트라와 아나자르부스 등을 점령하며 킬리키아 전역을 석권하였다. 이에 보에몽 2세가 침공해오자 토로스는 다니슈멘드의 귀뮈쉬테킨을 불러들여 그를 전사시켰다.
2.2.4. 제국의 재역습
다만 킬리키아의 안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1137년 5월, 시리아 원정에 나선 요안니스 2세의 동로마 대군이 당도하자 타르수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이 항복해버렸다. 당시 셀레우키아(실리프케)를 포위 중이던 레오 1세는 산지로 도주해 농성했으나 결국 포로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동로마 지배가 이어졌는데, 1143년 재차 시리아 원정에 나선 요안니스 2세가 킬리키아에서 갑작스럽게 독살당하자 혼란을 틈타 탈옥한 레오의 아들 토로스 2세가 아르메니아 인들을 규합하여 왕국 재건에 나섰다. 킬리키아 총독 안드로니코스[6]는 속수무책이었고, 토로스는 1144년 타르수스를 시작으로 1151년 마미스트라까지 킬리키아 주요부를 점령하였다. 다만 1158년 10월, 킬리키아와 안티오키아의 복속을 위해 남하한 마누일 1세가 당도하자 토로스는 마누일의 병력이 고작 5백의 기병대에 불과했음에도 타르수스를 포기하고 산중으로 도주하였다가 결국 안티오키아로 망명하였다.결국 맨발로 안티오키아의 동로마 군영을 찾아가 항복한 토로스는 킬리키아 일부에 대한 통치권이 주어졌고, 그는 조금씩 영향력을 넓힌 끝에 1168년까지 산지와 농촌 지역을 장악하였다. 토로스의 사후 내분에서 승리한 동생 믈레 1세는 1170년 동로마 군을 축출하고 타르수스를 비롯한 킬리키아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였으나 안티오키아 공 보에몽 3세와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가 개입하여 해당 영토를 동로마령 킬리키아 총독 칼라마노스에게 되돌려주었다. 1172년 말엽 성지 순례에 나선 작센-바이에른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가 타르수스에 상륙하여 콘야로 향하기도 하였다. 믈레 1세는 동맹 누르 앗 딘 사후 1175년에 폐위되었고, 그후 추대된 루펜 3세는 1182년 말엽 킬리키아 총독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반란을 일으키며 안티오키아군을 타르수스에 입성시키자 보에몽 3세와 협상하여 재물을 대가로 이사키오스와 타르수스를 넘겨받았다. 약속을 어긴 보에몽은 그저 회개하였다고..
2.2.5.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소 아르메니아 왕국)
이로써 반세기에 걸친 중세 동로마 제국의 킬리키아 개입은 종식되었고, 타르수스는 중세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가 되어 안정을 누렸다. 다만 킬리키아 통합 직후 루펜(루벤) 3세는 안티오키아에 초대되었다 램프론 가문의 간계로 사로잡혔고, 동생 레본이 램프론 가문을 제압한 후에야 보에몽 3세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풀려났다. 그후 루펜(루벤)이 양위하며 레본이 왕공이 되었고, 그는 서방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1190년 6월에는 3차 십자군의 독일 부대가 타르수스에 당도하여 살라프 강에서 익사한 프리드리히 1세의 내장을 현지 성당에 봉안하였다. 외교적 노력의 결실로 레본은 1198년 초엽 타르수스의 성당에서 기존의 왕공이 아닌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렸고, 이로써 소 아르메니아는 정식으로 왕국이 되었다. 다만 대관식과 함께 레본 1세는 수도를 킬리키아 동북부에 있는 시스로 정하며 타르수스는 점차 소외되었다가 1220년 내전 당시 레몽 루벤의 거점으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1219년 레본 1세가 사망한 후 아르메니아 왕국은 선왕의 어린 딸 자벨과 장성한 종손이자 보에몽 4세의 조카 레몽 루벤 간에 분열되었고, 후자는 교황의 지지와 함께 타르수스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1220년 자벨의 섭정 램프론의 콘스탄티노스가 타르수스를 포위하였고, 이에 레몽 루벤은 동맹인 구호기사단에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 역시 안티오크 공국에 맞서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국 3개월 간의 포위 끝에 도시는 항복하였고, 포로가 된 레몽 루벤은 얼마후 옥사하였다. 1226년 콘스탄티노스는 아들 헤툼 1세와 자벨을 결혼시켰고, 이로써 루벤 왕가는 램프론 출신인 헤툼 왕가로 대체되었다. 13세기 중반 맘루크 왕조와 일 칸국의 대립에 있어 헤툼 1세는 후자에 복속하였고, 이에 1266년 여름 술탄 바이바르스의 부관 칼라운이 킬리키아를 공격하여 타르수스를 함락하였다. 헤툼은 몽골군과 함께 당도했으나 맘루크 군은 이미 전리품과 포로를 챙겨 회군한 후였다.
2.3. 라마잔 왕조
비록 1275년 바이바르스의 2차 킬리키아 원정 시에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이미 쇠퇴한 타르수스는 1280년대 룸 셀주크 내전에서 패한 후 아르메니아 왕국에 망명한 카이쿠바드 3세가 거점으로 삼았던 것 외에는 한동안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다. 한편 14세기 중반 맘루크 조의 제후국으로 설립된 튀르크계 라마잔 왕조의 라마잔 베이는 1359년 타르수스와 아다나를 점령하였다. 다만 전자에는 맘루크 아미르가 파견되었기에 후자를 수도로 삼았다. 다만 킬리키아에 대한 맘루크 조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14세기 후반 라마잔 조의 이브라힘 베이가 카라만 왕조와 연합해 맘루크 군을 격퇴하고 자립하였다. 그후 새로이 성장한 아다나에 밀려 라마잔 왕조의 제2의 도시로 유지되던 타르수스는 1516년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2.4. 근대
본래 알레포 에얄레트에 속했던 도시는 1571년 신설된 키프로스 에얄레트 산하 타르수스 산작으로 개편었다가 1608년 아다나 산작 산하의 카자 (읍)로 강등되었다. 1671년에 타르수스를 방문한 여행가 에울리야 첼레비는 평원에 있는 도시로, 바다와도 가깝고 사면에 해자를 갖춘 2층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져 있으며 성내의 시가지는 3개의 구역 (튀르크 무슬림 / 그리스 정교도 / 아르메니아 교회)으로 나뉘어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도시 시 주변에는 관개 수로가 얽힌 풍요로운 농지가 있다고 덧붙였다.1832년, 강한 저항에도 타르수스는 메흐메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 군에게 점령되었고 8년간 그의 지배를 받았다. 그동안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나 레반트 해안처럼 일대의 평원에서 목화를 재배했고, 1840년 오스만 제국에 반환된 후에도 목화 재배는 계속되다가 미국의 남북 전쟁으로 인한 목화 수요 증대 및 가격 상승과 함께 타르수스 지방의 주요 산업으로 정착했다. 목화 수출을 위해 타르수스에서 메르신 항구까지 신작로가 건설되었고, 도시는 경제적으로 번영하여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시내에는 지금도 당대에 세워진 부유층의 저택들이 번영기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2.5. 근현대
3천년간 항구로 가능하던 타르수스는 19세기 말엽, 베르단 (키드누스) 강의 퇴적으로 하구 일대가 늪으로 변하며 항구 기능을 상실하며 메르신에게 밀려 쇠퇴했다. 1차 대전 전후에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및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기독교도 주민이 대부분 사라지며 인구도 크게 줄었다.공화국 설립 후 1920년대에는 하구의 습지의 물을 빼고 상류에 댐을 세워 터키 최초의 수력 발전소로 활용했다. 20세기 중반 타르수스는 관개 농업, 도로 & 철도 건설로 경제 부흥기를 맞았다. 최근에는 직물 공업이 발전하고 있다.
3. 갤러리
[1] 더불어 페가수스가 별자리가 되었을 때 타르수스에 깃털 하나를 남기고 갔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2] 1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안티파트로스의 동맹이었으나 에우메네스에게 살해됨[3] 다만 본거지인 테살리아는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가 지켜냈고, 그는 이후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에게 살해되고 셀레우코스 역시 암살되며 켈트 족이 남하하는 혼란기를 종식시키곤 마케도니아를 접수하여 안티고노스 왕조를 세웠다. 동시에 혼란을 틈타 아나톨리아 서부에는 페르가몬 왕국이 세워짐[4] 동로마가 게르만 용병 대신 군대를 모집한 아나톨리아 중남부의 민족들이 사는 곳[5] 현 터키 아크셰히르[6] 후일 안드로니코스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