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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제국 제13대 샤한샤 Artaxerxes II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 |
제호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 |
부황 | 다리우스 2세 |
모후 | 파리사티스 |
황후 | 스타테이라 |
생몰 | 기원전 445년 ~ 기원전 359년 11월 또는 기원전 358년 4월 |
재위 | 기원전 404년 ~ 기원전 359년 11월 또는 기원전 358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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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케메네스 왕조의 제13대 샤한샤. 부황 다리우스 2세보다 더한 내우외환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황위를 놓치지 않고 40여년의 긴 치세를 누렸다. 크세노폰 저서 아나바시스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으로도 유명하다.2. 생애
기원전 445년 다리우스 2세와 파리사티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당시에는 일개 왕자의 자식이었지만, 기원전 423년 부친이 소그디아누스를 꺾고 황위에 오른 뒤 귀한 신분이 되었다. 기원전 404년 다리우스 2세가 병에 걸렸을 때, 파르사티스는 그가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태어난 반면, 키루스 왕자는 왕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키루스를 후계자로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리우스 2세는 이 주장을 일축하고 장남을 통치자로 선택했다.샤한샤는 즉위할 때 키루스 2세의 수도였던 파사르가데로 여행가서 신전에 들어가 옷을 벗고 사제들과 함께 술을 마셔야 했다. 그는 전통에 따라 신전에 들어가 옷을 벗고 있다가, 티사페르네스로부터 키루스 왕자가 신전 안에 숨어있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는 즉시 키루스를 체포한 뒤 사형 선고를 내리려 했지만, 파리사티스가 만류하자 마음을 바꿔 사르데스의 사트라프로 임명하여 수도에서 멀리 보냈다.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고귀하고 진실한 사람인데 암살을 시도했을 리 없다며, 티사페르네스가 키루스를 모함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속았다고 주장했다.
키루스 왕자는 형이 언젠가 자신을 제거할 거라 예상하고, 반란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추방된 스파르타인 클레아르코스를 고용하여 그리스 용병대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겼다. 클레아르코스는 그리스 전역에 용병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낸 후, 트라키아에 모인 용병대를 훈련시켰다. 처음 집결한 병력은 1,000명의 호플리테스, 800명의 트라키아 펠타스트, 200명의 크레타 궁수, 그리고 40명의 기병이었다. 키루스는 이들을 테살리아로 이동시켜 유지 비용을 지불했고, 라리사의 아리스티포스에게 4,000명의 전사를 고용할 돈을 주었다. 한편, 키루스 왕자의 최측근인 크세니아는 소아시아에서 비슷한 숫자의 용병을 모았다. 키루스 왕자는 표면적으로는 사르디스의 유목민족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반란에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키루스는 이오니아 남부 지역에서 사트라프 탓사페르네스의 지지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는 이를 빌미 삼아 3명의 그리스 사령관이 지휘하는 창병 1,800명과 척후병 300명을 모집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용병대의 규모는 10,400명의 호플리테스와 경방패병에 투석병과 궁수까지 포함한 2,500명의 경무장보병이었다. 물론 키루스는 그리스 용병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훨씬 더 많은 페르시아 병력을 모았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대략 2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3,000명의 기병대와 20대의 채리엇으로 구성된 기마 병력이 키루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이렇듯 동생이 대규모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동생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닫고, 페르시아 전역에 흩어진 군대를 수사에 집결해 일전을 벌이기로 했다.
기원전 401년, 양측은 바빌론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진 쿠낙사에서 격돌했다.(쿠낙사 전투) 키루스는 격전을 치르던 중 형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중에 미트리다테스라는 병사가 던진 투창에 맞아 죽었다. 아나바시스에 따르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자기가 직접 반역자를 처단했다는 걸 병사들이 믿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트리다테스에게 훌륭한 옷, 보석, 검을 주는 대가로 침묵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연회 석상에서 술에 취한 나머지 자기가 키루스 왕자를 죽였다고 자랑했고, 샤한샤는 분노하여 그를 처형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파리사티스가 감히 사랑하는 차남을 죽여버린 미트리다테스에게 사형 명령을 손수 내렸다고 한다.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파리사티스는 키루스 왕자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을 샤한샤를 제외하고 죄다 죽여버렸다고 한다. 샤한샤는 사랑하는 황후 스타테이라까지 해칠 걸 우려하여, 그들이 함께 식사를 했을 때 두 사람이 같은 그릇에서 같은 음식을 제공받도록 하여, 어느 쪽도 다른 사람을 독살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파리사티스는 하인 기기스에게 독이 든 칼로 구운 새의 반쪽을 조각하게 하고 다른 한 쪽을 다른 칼날로 조각하게 했다. 이리하여 독이 묻은 반쪽이 스타테이라에게 제공되었고, 그녀는 그걸 먹고 죽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기기스를 처형하고 그의 어머니를 추방시켰으나, 후에 그녀가 다시 법정에 서게 하였다. 그녀가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한편 그리스 용병대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양해를 얻어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티사페르네스는 그들을 그대로 돌아가게 해줄 의향이 없었고, 용병대 지휘부는 그의 음모에 속아 몰살당했다. 크세노폰은 용병대의 새 지휘관으로 선임된 뒤, 온갖 곤경을 헤쳐나가며 이오니아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아나바시스를 저술했다.
샤한샤는 키루스 왕자의 반란을 진압한 후 스파르타, 아테네, 테베, 코린토스, 아르고스가 연루된 코린토스 전쟁에 개입했다. 그는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승리 후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판단하고, 스파르타에 대항하는 연합국을 지원했다. 연합국은 스파르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중요한 승리를 거뒀고, 아테네는 해군을 다시 갖추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샤한샤는 아테네가 강해지자 스파르타를 다시 지원했다. 기원전 387년 또는 386년, 샤한샤는 양 세력으로부터 평화 협상을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고, 코린토스 전쟁은 페르시아의 중재로 종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평화를 가리켜 '왕의 평화'라고 한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넥타네보 1세가 기원전 404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사트라프를 몰아내고 이집트 제30왕조를 세웠다. 페르시아는 하이집트를 상실했고 상이집트도 일부만 점거했다. 그는 기원전 373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정규군과 그리스 용병으로 구성된 12,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스 장군 이피크라테스와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파르나바조스가 군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넥타네보 1세가 멤피스를 요새화한지 오래였고, 넥타네보 1세도 뛰어난 지휘관이기에 이집트가 집요하게 저항하다보니 두 장수는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결국 이집트 원정은 실패했고, 페르시아군은 쓸쓸히 귀환했다. 샤한샤는 원정에 실패한 파르나바조스를 카파도키아의 사트라프 다타메스로 대신하여 이집트 원정을 대신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타메스는 그러는 대신 샤한샤를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타메스의 반란군은 수사로 진격하여 토벌군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그는 중간에 전사했지만, 프리기아의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가 반란을 계속 이끌었다. 소아시아 지방의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이집트, 그리스가 반란을 지원해줬고, 각지의 사트라프들은 반란에 가담하거나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샤한샤의 입지는 무척 위태로웠다. 하지만 반란군 역시 자기들끼리 격렬하게 대립하고 서로를 이용해 먹으려 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기원전 362년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이집트가 지원을 중단하면서 약해진 반란군을 섬멸하면서, 10여 년만에 진압할 수 있었다. 그는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날 걸 우려해 반란에 가담했던 사트라프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당시 테베와 스파르타가 또다시 전쟁을 벌이자 둘을 중재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샤한샤가 테베에게 우호적인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군에게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는 40여 년의 긴 치세 동안 제국 전역에 아나히타에게 봉헌한 신전을 건설했는데, 이 신전 앞에는 아후라 마즈다, 아나히타, 미트라 등의 보호를 요청하는 비문이 세워졌다. 아나히타는 당시 페르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신으로, 풍요, 물, 건강과 치유, 지혜, 전쟁을 관장했다. 기원전 3세기의 역사가 베로수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제국의 주요 도시에 있는 사원에 아나히타의 동상을 세운 최초의 아케메네스 왕조 군주라고 기록했다. 기원전 359년 11월 또는 기원전 358년 4월에 숨을 거두었고,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뒤를 이어 샤한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