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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09:05:33

크리스티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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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바사 왕조 제7대 국왕
크리스티나
Kristina
파일:Queen_Christina_(Sébastien_Bourdon)_-_Nationalmuseum_-_18075.tif.jpg
이름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
(Kristina Alexandra)
출생 1626년 12월 18일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로노르[1]
사망 1689년 4월 19일 (향년 62세)
교황령 로마
장례식 1689년 6월 2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재위 스웨덴 왕국의 여왕
1632년 11월 16일 ~ 1654년 6월 16일[2]
아버지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어머니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
종교 루터교가톨릭
서명 파일:크리스티나 여왕 서명.svg
1. 개요2. 생애3.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스웨덴 바사 왕조의 마지막 국왕.

2. 생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왕비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딸.

구스타브 2세의 자녀 중에서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크리스티나뿐이었고, 구스타브 2세도 1632년에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7살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크리스티나는 비록 어렸지만 다행히 요한 바네르(Johan Banér), 레나르트 토르스텐손(Lennart Torstensson),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와 같은 중신들이 보좌를 맡아[3] 30년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스웨덴은 포어포메른을 포함한 발트해 연안에 거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1638년에는 훗날 델라웨어주가 되는 지역의 북쪽에 식민지 포트 크리스티나가 세워졌으나 이 식민지는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1651년에 네덜란드 공화국에게 빼앗겼다.
파일:external/www.lefrancofil.com/dispute-reine-christine-vasa-rene-descartes.png
이미지 오른쪽 테이블에서 첫 번째. 왼손을 든 사람이 국왕이다. 데카르트는 M자 머리 남자 왼쪽에 있다.

나이를 먹어 친정을 시작한 크리스티나는 르네 데카르트[4]와 같은 유명한 학자와 예술가를 스웨덴으로 초빙해 문화 발전에 힘쓰는 한편 페르 브라헤 백작을 핀란드로 보내 오보, 헬싱포르스, 타바스테후스, 빌만스트란드 등 주요 도시들의 인프라를 확충하였다. 또한 1640년에는 오보에 핀란드 최초의 대학교인 오보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1654년에 사촌오빠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궁정백 카를 구스타프를 세습 왕자이자 후계자로 지명한 후 1년 뒤 돌연 왕위에서 물러날 의사를 밝혔다. 미혼인 여왕의 배우자 문제가 거론되는 시점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그보다는 종교적 원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데카르트를 만난 이후 가톨릭에 심취했는데, 루터교를 국교로 삼은 왕국에서 가톨릭 교도가 임금이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1655년 정식으로 왕위를 넘긴 그는 성탄절 전날에 브뤼셀에서 정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에 정착해 여생을 보냈다. [5]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자마자 스스로를 '도나(Dohna) 백작'이라고 부르며 남자 행색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남자들이 입는 것과 똑같은 코트를 입고 남성용 바지 위에 치마를 입었으며, 넥타이를 매고 남자 신발을 신었다. 머리는 남자처럼 짧게 잘라 제멋대로 자란 상태였다고 한다. 말할 때조차 남자처럼 낮은 저음으로 말해, 훗날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그의 남성적인 모습과 태도, 군인같은 말투에 루이 14세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크리스티나는 줄곧 로마에 머물면서 예술가, 학자, 작가, 성직자, 정치가 등과 학식을 교류했고 학술원을 설립하는 등 지적 풍요를 누리며 살았다. 3~4시간 정도만 잠을 자고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 토론, 사냥 등으로 보냈다고 한다. 1689년에 사망했으며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자녀가 없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쪽 친척들은 가톨릭 교도여서 계승권이 없었기에[6], 스웨덴 바사 왕조는 크리스티나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이에 따라 그가 스웨덴이라는 국가의 문화를 크게 중흥시킨 것은 사실이나, 급작스럽게 퇴위하여 스웨덴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매체에서

파일:Queen_Christina_1933.jpg}}} ||
실제로 피멘텔은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음에도 크리스티나의 측근이 되면서 염문이 돌았다. 그러나 크리스티나의 퇴위 직후에 결투로 죽진 않았고, 왕위를 버린 뒤에도 세계 정세에 관여하던 크리스티나를 향후 몇 년간 보조했으며, 이후엔 스페인의 외교관으로 계속 일했다.
파일:The _Abdication_1974_Liv Ullmann.jpg}}} ||
실제로 당대에 이 둘 사이에 대해서도 염문이 돌았는데, 크리스티나가 보낸 편지에 애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기도 하다.


[1] 현재 스톡홀름 왕궁의 전신.[2] 대관식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열렸다.[3] 모후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정신질환 때문에 정사는 커녕 양육에서조차 배제되었다. 크리스티나 여왕의 어린 시절을 돌본 사람은 고모였던 카타리나 공주(칼 10세 구스타브의 어머니)였다.[4] 이는 데카르트의 수명이 단축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데카르트는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고 늦잠이 습관이었는데,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일정에 맞추어 새벽 5시부터 철학 강의를 시작할 것을 요구했다. 억지로 생활습관을 바꾼것과 맞물려 과로로 체력이 소진된데다가 추운 스웨덴 기후에 몸이 상하여, 데카르트는 오래지나지 않아 폐렴으로 앓아워누웠고 결국 초청 1년 만에 세상을 뜨게 되었다. 다만 여왕의 총애를 시기한 자들에 의한 독살 의혹 역시 존재한다.[5] 생활비는 크리스티나의 명의로 된 스웨덴 영지에서 해결했다.[6] 애초에 할아버지인 칼 9세가 본인의 자손들만 계승권을 갖도록 못박아서 요한 3세의 폴란드 바사 왕조는 스웨덴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다만 폴란드 바사 왕조는 계속 스웨덴 왕위를 주장하다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얻어 맞고서 1660년에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7] 로마가 추가될 때는 범용 모델을 쓰다가, 북방의 사자 패치로 전용 모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