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앤 모로 린드버그와 찰스 린드버그 사이에서 태어난 생후 20개월 된 아들인 '찰스 오거스터스 린드버그 주니어(Charles Augustus Lindbergh Jr., 1930년 6월 22일생)'가 1932년 3월 1일에 유괴된 후 살해당한 사건.2. 전개
한 살 생일을 맞이하여 찍은 린드버그 주니어의 사진 이 사진을 찍고 불과 몇 달 뒤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
당시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 유괴사건을 설명하는 그림 |
당시 찰스 주니어는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린드버그 부부는 평소에 이용하지 않는 본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 1932년 3월 1일 아이 전담 간호사인 베티 가우(Betty Gow)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니, 창문이 열려 있고 사다리 하나가 창문에 걸쳐진 채로 아이만 사라졌다. 부유한 명문가의 딸이자 아내인 앤 모로 린드버그(Anne Morrow Lindbergh)[1]와 찰스 린드버그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유괴되자 미국 전체가 말 그대로 뒤집혔다. 당시 린드버그는 레전드급 으로 유명한 인물이라 미국에서 너도 나도 린드버그의 아기를 찾겠다고 나섰다.[2]
첫 번째 몸값 편지[3] |
하지만 린드버그는 조용히 암흑가 인물과 접촉하는 등 망신을 샀다. 당시 경찰들이 하도 암흑가 쪽을 뒤지니까 화난 암흑가 쪽 사람들이 먼저 수사협조를 했다. 심지어 당시 알카트라즈에서 수감 중이던 알 카포네마저 수사를 도와주겠다고 제의했으나 당시 이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그의 제의는 묵살당했다.
수사가 계속되던 1932년 3월 6일에 유괴범의 두 번째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아이의 몸값을 7만 달러로 올린다는 내용이 있었고 뉴저지 주지사가 경찰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바로 며칠 후인 1932년 3월 8일 린드버그의 변호사 앞으로 유괴범의 세 번째 편지가 왔는데 린드버그 부부가 인명했던 중개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문에 메모를 남길 것을 요구하면서 사건은 점점 커졌다. 이때 같은 날 학교 교장을 은퇴한 존 콘던(John F. Condon) 박사는 자신이 그 중개자 역할을 하겠다고 했고 다음날 유괴범은 네 번째 편지로 이를 승낙했다.
1932년 3월 10일경 콘돈 박사는 현금 7만 달러의 몸값을 받고 즉시 신문을 통해 지불 협상을 시작했다. 3월 12일 오후 8시 30분경 콘던 박사는 익명의 전화를 받은 후 택시 운전사인 조셉 페론(Joseph Perrone)이 신원 미상의 낯선 사람으로부터 받은 다섯 번째 몸값 메모를 받았다. 편지에는 외각에 위치한 지하철역에서 100피트(약 30m) 떨어진 빈 정류장의 돌 아래에서 또 다른 편지가 있다고 말했는데 다섯 번째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여섯 번째 편지는 빈 정류장의 돌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여섯 번째 편지의 지시에 따라 콘던 박사는 233번가 근처에서 자신을 "존(John)"이라고 부르는 정체 불명의 남자와 접촉했으며 몸값 지불에 대해 논의했다. 이 둘은 아이의 신변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이가 있음을 증명하는 물증을 제공을 요청했다.[4] 며칠 동안 콘던 박사는 계속해서 신문에 광고를 냈다. 3월 16일 콘던 박사는 아기의 표시로 아기 잠옷과 함께 일곱 번째 몸값이 적힌 편지를 받았으며 3월 21일에 여덟 번째 몸값 편지가 오고 납치가 1년 동안 계획되었다고 유괴범은 고백했다.
그렇게 계속된 협상이 이어지다가 3월 29일 린드버그의 간호사인 베티 가우가 린드버그 주니어가 납치 당시 착용하고 있던 엄지 보호대를 발견하였는데 유괴범은 아홉 번째 몸값 편지에서 요구 금액을 10만 달러로 늘리겠다고 위협함과 동시에 신문에서의 코드 교환을 거부했다. 열 번째 몸값 편지에는 다음날 밤에 돈을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콘던 박사는 신문 광고로 답했다. 11번째 몸값 메모는 1932년 4월 2일 정체 불명의 택시 기사가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받았다고 말하면서 콘던 박사에게 전달되었으며 콘던 박사는 11번째 쪽지에서 지시되었던 대로 뉴욕에 있는 온실 앞 돌 아래에서 12번째 몸값 쪽지를 발견했다. 12번째 편지 이후에 요구 금액을 5만 달러로 줄이기 위해 다시 한번 불명의 남자와 다시 한 번 만났다. 콘던 박사는 13번째 쪽지를 그 돈과 바꾸고 매사추세츠주에 아이가 마서스비니어드(Martha's Vineyard) 근처에 있는 보트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수사가 이루어졌지만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1932년 5월 12일, 납치된 아기는 린드버그 일가에서 남동쪽으로 약 4.5마일(약 7km), 고속도로에서 45피트(약 15m) 떨어진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시신은 부분적으로 묻혀 있고 심하게 부패되었으며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고 신체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시신은 지나가던 트럭 기사의 조수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1932년 5월 13일 뉴저지주 트렌턴에서 신원을 확인한 후에 화장되었다. 시신을 부검한 결과 아이가 죽은 지 약 2개월이 되었고 머리에 타격을 입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는 연방수사국과 뉴저지 주 경찰, 그리고 콘던 박사가 협상하는 시점에 이미 사망했던 것이다.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의 사망이 확실시되었을 때 연방수사국 및 주요 수사 기관에서는 1932년 5월 23일, 뉴욕시의 은행들에게 연방수사국이 이 사건의 모든 정부 활동을 조정하는 기관이라 통보하였고 몸값으로 지불된 지폐의 일련번호에 대한 면밀한 감시를 당부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유괴범에게 현금은 대부분 금 증권(gold certificates)으로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1933년 5월 1일까지 다른 지폐로 교환해야 했다. 1933년 5월 2일 뉴욕 연방 준비 은행(The Federal Reserve Bank of New York)에서 수령한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유괴범을 추적하는 데 실패했다.
1934년 9월 18일에는 맨해튼의 은행원이 이 금 증권을 발견했으며 은행 인근에 위치한 주유소에서는 뉴욕주의 자동차 번호판인 '4U-13-41-N.Y.'을 부착한 차량이 드나드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경찰이 해당 차량을 추적한 결과 그 차량은 뉴욕에 위치한 이스트 222번가 1279번지(1279 East 222nd Street)에 거주하던 독일계 미국인인 리처드 하우프트먼(Richard Hauptmann)의 차로 밝혀졌다. 그의 직업은 목수였으며 경찰에 체포된 후 과거 독일에서 범행을 저지른 기록을 갖고 있던 이민자였던 것도 추가로 밝혀졌다. 나머지 현금 1만 4천 달러는 집 창고 안에 있던 가스통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연방수사국의 연구실에서 필적을 분석한 사진 |
체포된 하우프트먼은 범행을 인정했으며 추가적인 연방수사국의 연구실에서는 필적 확인을 통해서 협박 편지를 작성한 사람이 하우프트먼임을 밝혔다. 하우프트먼은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36년 4월 3일에 뉴저지주 트렌턴에 위치한 뉴저지 주립 교도소에서 그에게 전기의자형이 집행되었다.
3. 범인?
범인으로 잡힌 하우프트만 |
범인은 독일 출신 목수[5]인 브루노 리하르트 하우프트만(Bruno Richard Hauptmann/1899~1936)이었고[6] 존 콘던 박사가 들은 목소리와 일치했으며 린드버그가 범인에게 준 지폐 일련번호와 일치하는 돈다발이 발견되었다. 하우프트만은 이 돈이 자기에게는 독일로 이주한 이지도어 피슈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가 맡겼으며 지금은 죽었다고 말했다.[7] 그는 재판에서도 이 증언을 반복하는데 이 말도 안되는 증언은 배심원들의 괘씸죄를 사기에 충분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지도어 피슈 자체는 가공인물이 아닌 실존인물이며 하우프트만이 증언한 대로 독일에서 사망한 것은 맞았다. 독일로 돌아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한 날이 기묘하게도 린드버그 주니어의 시신이 발견된 1932년 5월 12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문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피슈의 동생은 피슈에게 하우프트만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전혀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하우프트만은 위의 피슈가 돈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주장 이외에도 피슈가 자신에게 이 돈을 맡겼지만 피슈가 자신에게 수천 달러의 빚을 졌기 때문에 이 돈을 사용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스스로 자폭했다. 피슈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는데 분명 피슈가 여권을 신청한 것은 1932년 5월 12일이 맞지만 독일로 출국한 것은 여권을 신청하고 1년 7개월 후인 1933년 12월이었다. 상식적으로도 범죄 도피를 위해 여권을 신청한 거라면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8]
하우프트만의 아내는 남편이 무죄라고 1994년에 95세로 죽을때까지 주장했지만 결국 하우프트만은 자백을 안 해도 결정적인 증거가 충분해서 사형당했다. 하우프트만은 죽는 순간까지도 독일어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사실 증거의 일부는 검찰에서도 조작했었다고 했지만 범행에 쓰인 사다리는 목수가 아니면 만들 수 없었는데 조잡하긴 해도 충분히 사다리 기능이 작동했다.
훗날 재감정했을 때 사다리는 범인이 근무하던 목재소의 목재[9]와 일치하고 필적도 일치했다고 한다. 린드버그가 장난으로 아기를 숨겼는데 그만 죽자 난처해서 자작극을 했다는 음모론이 떠돌지만 증거가 너무 뚜렷하다. 하지만 음모론이란 게 원체 생명력이 강해서 아직까지도 믿는 사람들이 있다. 유대인과 루스벨트 행정부에 대해 악의적인 음모론을 주장하고 퍼뜨리던 사람이 죽어서까지 자식의 죽음에 관한 음모론에 시달린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사건이 소개될 때 이 음모론이 정설인 것처럼 소개되기도 했다.
3.1. 반론
하우프트만은 목재의 크기가 홈에 딱 맞는 우연성과 변호사의 배심제 하에서 이런 우연성을 배심원들에게 반박하기에 어려운 분위기라 생각한 나머지 변론에서의 당황 내지 무너진듯한 모습까지 겹쳐 유죄 선고를 받았다. 한편 주지사 호프먼은 그의 무죄를 인정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1938년 공직에서 배제되었다.[10]이러한 우연성이라고 해도 약간의 석연치 않는 가능성이(무죄로 볼 수도 있는) 존재하고 있었고 이 점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 '살인본능'의 저자 마르크베네케는 자신의 직업 태도와 맞지 않는 점과 그 가능성의 개연성을 해설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해당 서적에는 린드버그 범인설도 서술되어 있으며 모든 가능성의 부정 후에야 남는 방법의 유죄 채택 방식의 관철 주장이다.
4. 여담
- 미국 현대사에서 꽤 중요한 사건인데 그 이유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32년 미국 의회는 미국의 여러 주에 걸쳐 일어난 유괴 범죄는 연방 범죄로 처리하여 연방수사국이 관할하도록 하는 연방 납치법(Federal Kidnapping Act)[11]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으로 인해 사람들이 금전이 부족해지자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일어난 범죄를 대표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의 부작용도 불러왔는데 바로 그 악명 높은 존 에드거 후버 국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의회를 압박하여 상술한 납치법 및 기타 5개 법률을 추가로 통과시켜서 연방수사국의 권한을 확대하고 막강한 권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후버는 이 권력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적국 스파이 색출에, 냉전 시대에는 매카시즘에 동원했다. 이렇게 후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자 위기감을 느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만든 게 미국 중앙정보국(CIA)다.
- 사건은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수준 낮은 기자들의 졸렬한 취재는 아내인 앤 모로 린드버그(1906~2001)와 둘째 아들인 존(1932~2021)까지 충격을 받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이를 태우고 차를 몰고 가던 아내를 다른 차로 교통을 방해한 다음 기레기들이 몰려들어 막무가내로 사진을 찍고 그걸 대문짝처럼 신문 1면으로 실으며 "린드버그 부인, 슬픔을 잊고자 한다~"라는 투로 보도했을 정도였는데 이 신문을 본 린드버그는 신문을 찢으면서 인터뷰고 뭐고 모조리 거부하며 미국을 떠난다고 일갈했다. 결국 이듬해인 1933년 프랑스로 이주하여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드는 것을 비롯해 전 유럽을 유랑했으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1939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미국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데 90년대에 KBS2에서 일요특선 외화로 더빙방영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도 상술한 아내 앤과 아들 존이 탄 차량을 막고 기레기들이 사진을 찍어서 놀란 존이 엉엉 우는 모습이 신문 1면에 실리자 린드버그는 그 신문을 구겨 내던지면서 "이 망할 기자놈들!"이라고 분노한다. 결국 인터뷰 자리에 나온 린드버그는 단단히 화를 내면서 내 가족을 더 슬프게 하는 건 빌어먹을 신문기자들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영화에서 린드버그가 해외로 이민을 가자 미국인들은 미국이 영웅을 스스로 떠나게 만들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다 보니 당시 린드버그 일가에 대한 기레기들의 만행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제대로 묘사된다.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가 납치당한 초반에 아들의 유괴로 패닉에 빠진 린드버그와 그의 아내가 여기저기 전화하고 바쁜 와중에 한 기자가 찾아왔는데 이 기자란 놈이 비행기를 탄 아들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렇게 보도하고 싶다고 했다가 당연히 "당장 이 미친 놈 내보내!"라며 분노하는 린드버그에게 쫓겨나는 장면도 있다.
-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불후의 명작으로 불리는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집필하였다. 스포일러니 문서 참고.
- 미드 CSI 라스베가스에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듯한 사건이 나온다. 시즌1 19화 "Gentle, Gentle"이다. 수개월밖에 안된 영아가 납치되었는데 방 창문에 사다리가 놓여 있던 점, 아기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가족들이 의심받게 된다는 점이 유사하다. 드라마에서는 3형제가 있는 가정에서 3살짜리 둘째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실수로 막내 동생을 죽였고[12] 부모가 둘째를 보호하기 위해 시신을 유기했다가 엄마가 유력한 용의자로 몰린다.[13]
5. 둘러보기
[1] 찰스가 완전히 상류층으로 진입하는데 큰 도움을 준 인물. 나중에 린드버그와 같이 비행기로 대서양도 횡단했으며 유명한 작가이기도 했다.[2] 심지어 린드버그가 도착한 날 미국 주식거래소는 상장을 중단했고 인기가 절정을 달릴 때는 린드버그의 모친이 미용실에 간다는 이유로 밖에 나오자 경찰들이 교통 정리를 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일화가 있다.[3] 편지에는 good을 gut로 적는 등 외국인의 소행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이후의 확인 수사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4] 이때 경호원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협상 외에는 경호원을 동반했다.[5] 그가 살던 브롱크스는 당시 흑인들과 독일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6] 협박장에도 독일식 영어가 쓰였다. 위에 달린 주석에 있는 good을 gut로 쓴 게 그 중 하나다.[7] 혹은 독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는 기록도 있다.[8] 다만 여권을 받는 즉시 출국하면 경찰이 덜미를 잡을 것이라는 우려로 일단 잠적해 정황을 살피다 사건이 잠잠해진 틈을 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9] 워싱턴 행정부 소속의 나무 전문가 아르투르 쾰러가 에드가 후버에게 법정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제재소에서는 긴 각목을 다듬는 데 칼날이 8개 장착된 회전 대패를 사용합니다. 이 대패는 1분에 대략 4000번 회전하며, 32개의 절단면을 남기는데,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이 나무는 가문비나무이며 사우스캐롤라이나 혹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로써 그 나무를 생산했음직한 공장이 4만(당시 미국 제재소의 수)에서 1598개로 줄어듭니다. 공장주들에게 문의한 결과 25개의 공장만이 넓은 쪽 8날, 각쪽 6날 장착 대패를 사용합니다. (후략)" 이런 식으로 검사한 결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돈 앤드 컴퍼니라는 곳에서 사다리가 생산되었으며 이는 브롱크스의 럼버 앤드 밀워크스 컴퍼니로 판매된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10] 마르크베네케 저 『살인본능』에서 인용[11] 린드버그법(Lindbergh Law) 이라 불리기도 한다.[12] 부모가 외출하며 고등학생인 첫째아들에게 늦둥이 둘째아들(3살)과 셋째아들(갓난아기)을 돌보라고 했다. 그런데 첫째가 여자친구와 전화 통화하느라 동생들에게서 눈을 뗀 사이, 둘째가 베개로 셋째의 얼굴을 짓눌러 셋째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물론 어린 둘째는 셋째를 죽일 생각도 안 했고 자기 행동으로 셋째가 죽는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자기가 베개로 짓누르자 셋째가 숨이 막혀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게 재미있어서 한 행동이었다.[13] 진실이 드러난 후 경찰은 용의자로 몰렸던 엄마에게 "둘째는 어려서 처벌도 안 받고 전과기록도 안 남을텐데 왜 누명을 쓰고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엄마도 둘째가 처벌받지 않을 것은 알았지만 사실이 밝혀지면 언론에서 이 비극적인 사건을 보도할 테고 둘째가 성장한 후 자기 기사를 읽고 자기가 동생을 죽였다는 걸 알게 되어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살게 될 것이라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