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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23:46:24

일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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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봉서사 진묵대사 부도 문화재청.jpg
봉서사에 있는 진묵 일옥의 승탑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조선시대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일옥(一玉)이지만 스스로 진묵(震默)이란 호를 사용하였기에 흔히 '진묵대사'라고 불린다. 출신이 일천하였는지 속명이나 가계에 대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인터넷상에서는 속명이 일옥이고 법명이 진묵이라는 말도 떠돌지만, 봉서사에 있는 진묵의 승탑(부도탑)에 진묵당일옥(震墨堂一玉)이라는 명문이 있으므로, 진묵은 당호(堂號)이고[1] 법명이 일옥이라고 보아야 한다.

2. 생애

진묵은 명종 17년(1562)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의고 7살에 봉서사(鳳棲寺)[2]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승탑과 비가 전라북도 완주군 봉서사에 있다. 관련 책으로는 초의선사가 지은 진묵조사유적고가 있다.

3. 기타

을 가리키는 은어인 '곡차'와 을 가리키는 다른 말인 '석화'라는 말이 일옥에게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진묵일옥이 김제의 망해사에 머무를 때에 변산 바닷가를 걷다가 배가 고프면 바위에 붙어 있던 굴을 따먹기도 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 "스님들도 그런 비린 걸 다 드십니까? 불가에서는 육식을 금지하는 거 아니었어요?"라고 핀잔을 주자 진묵은 그 자리에서 "이건 굴이 아니라 돌에 핀 꽃(石花)이외다!"라고 대답했다고. 여기에서 굴을 가리키는 '석화'라는 말이 유래했다나. ## 을 '곡차'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말장난인데, '곡차'라는 말도 진묵에게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

술에 대해서도 진묵일옥은 "내가 마시는 건 술이 아니라 곡차야. 쌀하고 누룩으로 만든 차라고."라고 하면서 그냥 마셨다. 대낮에 술을 동이로 마시고는 '대취음'이라는 시를 읊기도 했다.
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遽然仍起舞
却嫌長袖掛崑崙
하늘을 이불 삼고 대지를 자리 삼고 산을 베개 삼아
달을 촛불 삼고 구름을 병풍 삼고 바다를 잔을 삼아
거나하게 취해 일어나 춤을 추려는데
이 긴 소매 휘두르다 곤륜산에 걸리면 어쩐다?

그럼에도 술과 관련해서 뭔가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고[3] 오히려 당대에는 소화불(小化佛) 즉 '살아 오신 부처님'으로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진묵일옥이 출가하고 얼마 안 되어 내전을 읽는데 조금도 막힘없이 줄줄 해석하였으며 한번 눈에 스치면 외우곤 해서 누구도 그에게 뭔가 가르칠 것이 없었으며, 한 번은 일옥이 출가한 절의 주지가 진묵에게 신장단의 신중(神衆)들에게 향을 살라(분향) 공양을 맡겼더니, 밤에 주지의 꿈에 신중들이 나타나서 "부처님을 호위하는 우리더러 그 부처님으로부터 분향 공양을 받으라는 게 말이 되냐"라며 일옥에게 향 공양을 시키지 말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사냥꾼들이 소금이 없어서 노루고기 육회를 먹지 못하고 있는 걸 보고 사람을 시켜 사냥꾼들에게 소금을 보내기도 했는데, 사냥꾼들이 감동해서 “사람을 살리는 부처(活人之佛)가 계곡마다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분을 말하는 것이다.”고 찬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

진묵일옥의 입적에 대해서 완주군에서는 이런 민담이 전해진다. 진묵일옥이 일흔한 살이 되던 해에 천상의 선경(仙境)을 보니 그곳이 지상과 달리 문명화된 사회라서 선경의 문명을 가져다 지상을 크게 개화시키자고 생각한 진묵은 육신을 봉서사에 둔 채 영혼만 두고 선경에 올랐고, 상좌에게 "내가 여드레 동안 여기 누워 있을 것인데 여드레 뒤에 내가 올 때까지 절대 내가 있는 방의 문을 열지 말라"고 당부해 둔 다음 영혼만 빠져나와 선경에 올라갔다.

그런데 진묵이 말한 딱 여드레째 되던 날, 완주군의 양반으로 김봉곡(金鳳谷, 1573~1661)[4][5]이라는 사람이 봉서사에서 하늘까지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뻗쳐 있는 것을 보고 봉서사로 가서 진묵의 육신이 누워 있는 법당 문을 열도록 강요했고, 행자는 양반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김봉곡은 "스님이 돌아가셨으면 화장을 해야지 왜 여태 안 하고 이렇게 두고 있느냐"며 당장 진묵을 화장하라고 명했다.

천상에서 내려온 진묵일옥은 이미 자신의 유해가 모조리 타 버렸음을 보고[6] 지상을 개화시키려던 계획을 이룰 수 없게 되었지만, 도인으로서 김봉곡을 죽일 수 없으니 대신 김봉곡 집안의 대를 끊고 호밋자루 신세를 면치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했으며, 봉서사의 물줄기를 모두 오도재 뒤로 돌려서 김봉곡이 소유하고 있던 논들을 모조리 마른논으로 만들어, 이 일대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수리조합이 생기기 전까지는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밖에도 완주군 지역에서는 김봉곡과 진묵일옥의 험악한 관계에 대해 말하는 민담들이 많은데, 진묵일옥에게 서로 목을 걸고 바둑을 두자고 해서 오히려 역관광을 당해 진묵일옥으로부터 "승려는 사람의 목숨을 해칠 수 없으니 목숨 대신 봉서사 뒤쪽의 광산 김씨 소유의 산을 봉서사에 달라"는 요구로 산을 내주고 말았다든지, 김봉곡이 진묵일옥에게 책을 빌려 줘 놓고 사람을 시켜서 다음날 찾아오게 했더니, 진묵일옥은 김봉곡에서 빌렸던 책들을 절로 돌아가는 길에 바랑에서 하나씩 꺼내 대충 훑고는 땅에 내버렸다는 것이었다. 김봉곡이 진묵에게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책을 빌려 줬는데 그걸 왜 땅에 내다 버리십니까"라고 따지자 진묵은 "물고기를 다 잡았으면 통발은 버리는 법이지."라고 대답했고, 김봉곡은 자신이 빌려준 책의 어려운 부분들만 집어서 진묵에게 물어 봤더니 진묵은 모두 막힘없이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듯 민담들에 따라 김봉곡이 아닌 다른 인물들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어서, 단순히 불교와 유교의 대립을 보여주는 일화로 넘어가도 좋을 것이다.

이밖에도 진묵일옥이 봉서사에 머무르면서 합천 해인사팔만대장경을 화재로부터 구했다는 전승도 있다. 팔만대장경을 보러 해인사를 다녀오고 얼마 안 되어 저녁 공양 시간에 상추를 씻다 말고 갑자기 솔가지를 가져다 물을 적셔서 허공에다 몇 번 뿌렸는데, 마침 바로 그날 해인사에서는 장경각 바로 옆에서 화재가 발생해 있었다. 불길이 점점 커져서 끌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진묵일옥이 솔잎에 물을 적셔서 허공에다 뿌리던 그 시간에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내렸고, 불길이 잡혀서 팔만대장경은 무사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불이 꺼진 자리 옆에는 상추 부스러기가 남아 있었더라는. #


[1] 누군가가 머무는 건물(堂)의 이름을 호로 사용하는 것. 즉 '진묵당'이 당호라면 진묵당(震墨堂)이란 이름이 붙은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2] 완주군 종남산과 서방산 사이에 걸쳐 있는 사찰로 조계종이 아닌 태고종 소속이다. 신라 성덕왕 때에 처음 창건된 절을 고려 말의 고승 나옹이 중창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 진묵이 다시금 중창하였으나, 6.25전쟁 때 '인민군 토벌'을 명분으로 사찰이 전소되었다. 6.25 전쟁을 계기로 육군 제35사단이 봉서사 소유의 토지 25만 평을 무단으로 점유해 훈련장 및 포사격장으로 사용하다가 10.26 사태 때에 계엄령을 명분으로 강제 매입하였다. 이후 봉서사 측이 강제로 뺏긴 토지를 돌려 달라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별 소식은 없고, 이후 35사단이 임실로 이전해서 현재는 해당 부지가 공터가 되었다.##[3] 불교에 '불음주' 즉 '술을 마시지 말라'고 계율을 두고 있고 석가모니 부처 역시 음주의 해악을 무려 36가지나 나열하고 있지만(분별선악소기경) 이것도 굳이 말하자면 음주로 인해서 비롯되는 행위들이 문제가 된다는 것때문이지, 음주 자체를 문제삼은 것은 아니다. 술을 마시더라도 자제하고 분별없이 행동하는 방일함을 보이지 않는다면 술 마시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정확한 설명이 되겠지만, 인간이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냥 먹지 말라는 쪽으로 가르치는 것. #[4] 봉곡은 호이며 원래 이름은 김동준(金東準)이고, 사계 김장생의 후손이었다.[5] 다만 민담에 따라서는 김봉곡이 아니라 '최씨 성 가진 승려' 또는 '김제 사는 양반'이라고 나오는 것도 있고, <진묵대사유적고>에서는 봉곡의 일기에 "“나는 그가 살았을 적에 그와 교유하였는데,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노라(其生也 與之交遊其歸也 爲之慟悼)”, “옥(玉) 대사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스님은 승려이면서도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선비의 행실을 가진 사람이라. 참으로 슬픔을 이길 수 없구나(聞玉師化去云 此僧墨名而儒行 不勝慟悼)"라고 진묵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드러낸 부분을 소개하며 양자간 사이가 험악했다는 것을 부인한다.[6] 상좌에게 손가락 한 마디의 뼈라도 있으면 환생할 수 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는데, 이마저도 김봉곡이 모두 불태워서 찾을 수가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