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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23:07:44

제3SS기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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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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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무장척탄병사단
(제1벨라루스인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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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니엔
32 SS무장척탄병사단
1월 30일
33 무장기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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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무장척탄병사단
샤를마뉴
34 SS의용척탄병사단
란트슈토름 네델란트
35 SS경찰척탄병사단 36 무장척탄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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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SS의용기병사단
뤼초프
38 SS척탄병사단
니벨룽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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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
3. SS-Panzer-Division „Totenkopf“
[1]
파일:제3SS기갑사단 엠블럼.svg
창설일 1939년 10월 16일
해체일 1945년
소속 무장친위대
규모 사단
사단가 친위대는 적지에서 행군한다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역사3. 편제4. 참여 전투5. 문제점
5.1. 초창기 부대원 구성
6. 전쟁범죄7. 기타8. 출신 인물9. 미디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파일:9k2swrwf18q51.jpg
쿠르스크 전투 중 촬영된 토텐코프 사단 대원들[2]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는 다하우 강제 노동 수용소 경비교도대인 토텐코프 연대(Totenkopfverbände)의 연대원들을 주축으로 창설된 부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장친위대에 의해 편성된 38개 사단 중 하나이자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온 베테랑 메이커 사단으로도 유명한 부대임과 동시에 이들은 또한 아인자츠그루펜, 디를레방어 여단카민스키 여단이 보인 대상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잔인성정예 전투부대로서의 유능함까지 동시에 보여준 탓에 위의 세 부대들도 뛰어넘은 진짜 SS, 유능한 전쟁광들, 해골사신 무리로 불리울 지경이라, 후술할 전쟁범죄로도 매우 악명 높은 사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역사

이들의 시작은 1939년 10월경 나치당의 강제 노동 수용소 경비부대인 토텐코프 연대(Totenkopfverbände)와 SS향토방위군 단치히(SS-Heimwher Danzig)를 모태로 확장되었다. 이때 차출된 구성원 대부분은 토텐코프의 모태인 SS 토텐코프 연대(SS-Totenkopfvervände)와 일반친위대(Allgemeine-SS) 및 질서경찰(Ordnungspolizei)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해골은 주로 독일의 전차병 병과마크 표식으로도 유명했으나, 이들의 모태인 일반친위대(Allgemeine-SS) 소속 다하우 강제수용소 교도관들의 표식으로 군복 오른쪽 칼라에 SS 시겔 문자가 아니라 위의 해골 문양을 패용한 것이 굳어지며 그대로 부대 마크가 되었다.

프랑스 침공에서는 노르 지역에서 투입되었다. 토텐코프 사단의 임무는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5월 19일, 토텐코프 사단은 프랑스군 제1모로코 사단과 첫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작전 첫날 토텐코프 사단은 열악한 장비 사정[3]에도 불구하고 모로코군 200여명 이상을 사살하는 동안 사단은 불과 16명이 전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토텐코프 사단은 단 하루 만에 포위망을 확장했고 결국 모로코군 사단은 포위 섬멸되어 수 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첫 전투 이후 테오도어 아이케와 토텐코프 사단 대원들은 아랍인이 열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로코군 포로들을 학살했다.

다음 날인 5월 20일 아침에는 모로코군이 반격했지만 토텐코프 사단은 이를 격퇴했고 국방군 7기갑사단과 연결하게 되면서 해당 지역의 프랑스군 전선은 붕괴되었다. 토텐코프 사단은 1만 6000명 이상의 포로를 붙잡았다.

토텐코프 사단은 5월 21일, 영국군의 강력한 반격을 맞이했다. 마틸다 II 전차로 무장한 영국군 기갑부대의 반격에 토텐코프 사단은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원래의 점령지역에서 격퇴되었다. 토텐코프 사단은 그 다음 날 분풀이로 프랑스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5월 27일에는 영국군 왕립 노퍽 보병 연대의 포로들을 학살해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르 파라디 학살 참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생하자, 토텐코프 사단은 북부집단군 제4기갑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토텐코프 사단은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뒤 라트비아로 이동했다. 하지만 라트비아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토텐코프 사단의 선봉대 역할을 맡았던 오토바이 대대가 소련군의 저항으로 파괴되었으며, 소련군의 전차 부대는 토텐코프 사단의 측면을 공격해 토텐코프 사단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토텐코프 사단은 재편성을 거친 뒤 모스크바 전선으로 재배치 되어서 다스 라이히 사단을 엄호했다.

1942년, 데미얀스크 전투에서는 사단 전체가 포위되어 사단의 80%가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다. 토텐코프 사단은 프랑스 후방으로 옮겨져 재편성 작업에 돌입했고 그 기간 동안 토텐코프 사단은 북부 프랑스에서 해안 경계 임무를 맡았다.

1943년, 토텐코프 사단은 완전히 기갑사단으로 재편성된 뒤 쿠르스크 전투로 투입되었다. 토텐코프 사단은 파울 하우서가 지휘하는 제2 SS 기갑군 소속으로 남부 방면에서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7월 9일, 토텐코프 사단은 프숄 강 까지 도달해 교도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소련군 포병과 전차들의 강력한 반격으로 사단의 손실이 누적되었으며, 프로호브카에는 직접 투입되지 않고 소련군의 조공을 막는데 주력했다. 치타델 작전이 결국 종료되자 토텐코프 사단은 퇴각해 크레멘추크로 재배치되었다. 치타델 작전 기간 동안 토텐코프 사단은 차량의 50% 이상을 손실한 상태였다.

2차 키예프 전투에서는 소련 제1근위전차군의 첫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키예프를 내주고 후퇴했다.

1944년, 토텐코프 사단은 우크라이나 집단군에 배속되었으며 다른 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마찬가지로 포위되는 독일군 부대들을 구출하는 전선의 소방수가 되었다. 바그라티온 작전 기간 동안 토텐코프 사단은 바르샤바 근교 까지 후퇴해야 했다. 바르샤바 근교의 모들린(Modlin) 방면에서 토텐코프 사단은 다른 무장친위대 기갑사단 그리고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과 연합해 소련군 제2근위전차군 예하 제3전차군단을 격퇴해 바르샤바를 사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토텐코프 사단 역시도 많은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동시기에 발생한 바르샤바 봉기에서 토텐코프 사단 예하 부대가 진압군으로 투입되었으며 폴란드 민간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1944년 말에는 헝가리 전선에 배치되었다. 12월에는 포위된 제9 SS 산악 군단을 구출했으며, 1945년 2월의 남풍 공세 작전 그리고 3월 봄의 새싹 작전으로 사단은 누적된 손실을 견디지 못해 궤멸되었다. 사단 잔여 병력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다가 서쪽으로 퇴각했고 1945년 5월 8일, 미군에게 항복했다. 항복 당시 사단의 잔여병력은 1000명이었고 전차는 6대 밖에 없었다. 토텐코프 사단의 병사들은 소련의 요구에 따라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혹독한 강제 노역을 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남은 생존자들은 독일 본국으로 귀환했다.

3. 편제

4. 참여 전투

5. 문제점

5.1. 초창기 부대원 구성

전 세계가 일반-무장친위대라 하면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부대가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흔히 알려진 SS 부대들 전체를 봐도 이들의 가장 치명적으로 큰 문제점은 아인자츠그루펜, 질서경찰, 보안방첩국(SD), 게슈타포디를레방어-카민스키 여단한데 모아다 엑기스를 푹 고아 놓은 수준의 잔악한 도살자들[8]인 걸로도 모자라 하필 싸움질까지도 아주 유능한 뛰어난 전투광들이었다. 이런 연유로, SS 안에서도 최악의 범죄집단이자 테러조직, 진정한 히틀러의 사병이자 '나치의 유능한 전쟁광들' 로 악명 높은 부대가 바로 이들이다.

그야말로 이들의 존재 이유는 끝없이 목적이 없는 전투와 학살을 즐기기 위해 존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목적과 수단을 뒤집어서 쾌락의 수단을 위해서라면 목적지 따위는 가리지 않는 이들이 바로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것이 바로 이 부대로서,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그들의 부대 상징은 초창기부터 죽음의 머리라 불리움과 동시에 사람들은 그들을 죽음의 해골사단/해골사신 사단으로 지칭했을 정도였다.

이들은 히틀러의 나치당 사병조직인 슈츠슈타펠 안에서도 최악의 전투원들이자 보복 부대였는데, 전쟁 초 ~ 중반기의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의 경우 이들은 본디 사설 강제노동수용소 경비부대인 토텐코프 연대(Totenkopfverbände)를 기반으로 확장된 부대였지만 전투부대로의 본격적 재편 이후 초대 사단장이자 나치의 초기 핵심 전범 테오도어 아이케가 부대를 창설할 당시부터 재편 때는 인원 모집 조건을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하필 사회에서 온갖 부조리에 시달려 갖은 불만과 분노를 잔뜩 품고 있었던 인원들을 부대 안에 들여주고 품어줬던 것이다.

그냥 거기에서 끝났으면 몰라도 아이케는 그들에게 복수심과 불만을 잔인한 방식으로 고취시키도록 훈련시킨 결과, 토텐코프 부대원들은 최고 상관 아돌프 히틀러와 직속 상관인 아이케 사단장 저 두 사람들의 말만을 신봉하는 광전사이자 진정한 의미의 사병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같은 부대의 친위대원들마저 치를 떨었을 만큼 비인도적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6. 전쟁범죄

6.1. 폴란드 침공

이들의 잔악한 전쟁범죄는 1939년 폴란드 침공 때 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브로츠와프에서 유대교 시나고그를 불태우고 랍비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비드고슈치에서도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에 가담했다.[9]

6.2. 프랑스 침공

후술할 전쟁범죄 외에도 토텐코프 사단은 260명 이상의 프랑스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이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6.2.1. 르 파라디 학살

독소전쟁과 더불어 토텐코프란 부대가 서부전선의 연합국 안에서도 SS만 보면 증오의 대상으로 낙인찍은 결정적인 사건.[10] 이로 인해, 적군인 미군과 소련군과 피해자였던 영국군은 이들만 보면 그들이 눈에만 띄면 치를 떨며 즉시 사살했다. 그만큼 토텐코프의 잔혹함을 동부전선과 더불어 제대로 보여준 사건으로, 자세한 내용은 르 파라디 학살 참고.

6.2.2. 샤셀레이 학살

이들은 르 파라디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을 모잘라 샤셀레이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포로로 잡힌 프랑스 육군 수 백명이 프랑스의 아프리카에서 징집된 흑인들이었는데 흑인에 대한 혐오감이 하늘을 찔렀던 테오도어 아이케는 이들을 모조리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1940년 6월 19일 부터 20일 까지 단 하루동안에 세네갈 출신의 100명을 포함한 수 백명의 흑인 포로들이 토텐코프 사단에 의해 학살당했다.

6.3. 독소전쟁

소련군 포로들을 선발하는 작업을 수행했고 선발된 포로들은 강제 노동을 위해 독일 본토로 송환되었다.

또한 정치장교 명령에 따라 포로로 잡힌 소련군 정치장교들을 학살했으며 이를 사단장인 테오도어 아이케가 직접 지휘했다.

6.4.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봉기진압에 토텐코프 사단 예하 예비 동원 대대가 진압과 학살에 참여했다.

6.5. 바르샤바 봉기

봉기로 바르샤바가 혼란한 가운데 1944년 8월 2일, 모코토프(Mokotów) 수용소에서 토텐코프 사단 예하 예비 동원 대대(Feldersatz-Bataillonen)[11]가 수용소에 수감되어있던 폴란드 국내군 포로와 수감자를 합쳐서 700명 이상을 집단 학살했다.

폴란드 국내군이 교도소 인근까지 도달하자 친위대 지휘부는 이들을 모조리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토텐코프 대대는 몇 시간 동안 수감자들을 총기로 학살했다. 그러자 수감자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져 저항을 했고 여러 명의 토텐코프 병사들을 죽이고 무기들을 노획했다. 예상치 못한 수감자들의 저항에 토텐코프 병사들은 후퇴했고, 절호의 기회가 생긴 남은 수감자들은 신속하게 탈출해 봉기군에 합류했다. 탈출에 성공한 수감자는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7. 기타

8. 출신 인물

9. 미디어에서의 등장



[1] 백골. 통칭 백골사단, 또는 해골사단. 두개골, 해골(백골)을 뜻하는 단어로, 토텐코프는 어감 상 독일어로도 백골사단으로 불린다.[2] 다른 무장친위대원과 달리 칼라장에 토텐코프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강제수용소 운영과 경비를 담당한 해골부대에서 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다.[3] 당시만 해도 토텐코프 사단의 장비가 뮌헨 협정을 통해 노획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장비로 이루어져 있었다.[4] 종종 "툴레(Thule)" 로 잘못 명명된다.[5] 이전에는 3 SS기갑척탄병연대 테오도어 아이케.[6] 6호 전차 티거 장비[7] 대전차대대[8] 보통, 해당 부대들 같이 민간인들이나 경무장 비정예부대가 타겟인 부대들이미 상대부터 보면 알듯이 싸움 실력부터가 젬병(...)이라 전투에 써먹을 수준이 못 되는 사례들이 매우 허다했다.[9] 당시에는 토텐코프 사단으로 확대되기 전이며 토텐코프 연대와 SS 단치히 부대가 이 학살에 가담했다.[10] 물론 SS 전반은 이미 혐오대상이자 우선 사살 대상이었으나, 이들 중에서도 특히 토텐코프 출신일 경우 연합군 측에선 군인포로 취급법안이 발의되고 나서도 토텐코프는 베테랑도 신참들도 더욱 가차없이 처형하고 학대하며 산 채로 갈아냈다.[11] 다른 부대에서 전출온 병사가 사단에 적응하게 훈련을 하는 부대이다.[12] 사실상 헌병사단형 중규모 전투부대.[13] 오살라 룬의 경우, 합법적 단체나 기관에서 약간의 변형을 거쳐서 사용하면 합법이지만 불법 단체에서 사용하면 처벌이 가능하다.[14] 콘라드 1호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