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0> 제25무장척탄병사단 '훈야디' 25.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 „Hunyadi“ (ungarische Nr. 1) | ||||||
창설일 | 1944년 11월 2일 | |||||
해체일 | 1945년 | |||||
소속 | 무장친위대 | |||||
규모 | 사단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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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장친위대의 헝가리인으로 구성된 사단.2. 역사
1944년 하반기 이후 동부전선은 거의 붕괴지경에 내몰렸고 발칸반도에서도 루마니아가 소련과 휴전을 맺고 추축군을 적으로 돌렸다. 헝가리에서도 추축국에서 이탈하여 소련 및 연합국과 제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독일군에 의해 진압되어 미클로시 호르티 섭정이 실각했다.1944년 10월에 파시스트 정당인 화살십자당이 집권하여 헝가리는 독일의 괴뢰국가가 되었다. 헝가리의 동맹이탈은 막아냈으나 소련 및 루마니아군이 헝가리 중심부를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해왔고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헝가리군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억지로 괴뢰정부를 앉혔다보니 헝가리 정규군도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치독일과 화살십자당의 살러시 페렌츠는 상황타개를 위해 1944년 11월 20일에서 24일에 걸쳐 헝가리인(머저르인)[1]으로 친위사단 4개를 편성하기로 합의했다. 각 사단의 명칭은 훈야디, 훙가리아, 굄뵈시[2]였다. 네번째 사단은 명칭조차 정해지지 못했다. 이 네개 사단의 편성을 위해 친위대 대장 오토 빙켈만 (Otto Winkelmann)이 헝가리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전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어서 12월에는 부다페스트가 소련군에 포위되었다. 결국 헝가리인 친위대 사단들은 제대로 편성되지 못했다. 훈야디 사단은 슐레지엔에서 편성과 훈련에 들어갔다.
병력은 서류상 22,670명에 달했으나 훈련이 부족했고 특히 무장이 터무니 없이 빈약했다. 1944년 12월 29일 기준으로 사단은 단지 2,700정의 Kar98k 소총과 여타 무기를 보유했고 전투가능한 인원은 4천여명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군이 슐레지엔으로 진격해오자 사단은 뉘른베르크를 거쳐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밀려났다. 종전시에는 미군에 항복했으나 항복한 장병들은 이후 신생 헝가리 정부에 신병이 인도되었다.
[1] 헝가리내 거주중인 독일계인 '민족독일인'들은 이미 무장친위대 여러 부대에 자원하거나 징집되는 중이었다.[2] 전간기 헝가리 왕국의 총리를 역임하였고 이때 추축국이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