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주요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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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선 | 59회 2024년 7월 4일 | 60회 2029년 8월 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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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지방선거 | 2024년 2024년 5월 2일 | 2025년 2025년 5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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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영국 총선 1945 United Kingdom general election | ||||||||
선거구별 선거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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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 67.3%▲1.7%p | |||
<rowcolor=#006e46> 정당 | 의석수 | 증감 | 비율 | |
| 393석 | ▲239석 | 61.4% | |
| 197석 | ▼190석 | 30.8% | |
| 12석 | ▼9석 | 1.9% | |
| 11석 | ▼22석 | 1.7% | |
기타 정당[1] | 27석 | ▲7석 | 4.2% |
[clearfix]
1. 개요
1945년 7월 5일 치러진 영국 서민원 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였다. 1935년 있었던 제37회 영국 총선 이후 총선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이유로 계속 미뤄져 왔기에 이 총선은 10년 만에 치러진 전후 첫 서민원 선거였다.선거 결과,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이 패배하고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어 총리가 처칠에서 애틀리로 교체되었다.
2. 선거 배경
독일 국방군이 연합군과 소련군에 항복한 이후, 윈스턴 처칠은 일본 제국을 패퇴시킬 때까지 전시내각을 연장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부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처칠의 전시거국내각 연장 제안을 거절했다.[2] 이후 조지 6세 국왕이 직접 제37회 서민원을 해산함으로서 10년만의 총선거가 치러졌다.처칠 총리 개인의 지지율은 81%를 기록해 매우 높았으나 그와 별개로 보수당에 대한 지지도는 그렇게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은 "미래를 마주하자"(Let Us Face the Future)라는 구호를 내걸고 산업 국유화, 국가 주도의 경제 복구, NHS 설치 등의 공약을 내걸었으나 보수당의 전후 폐허 재건 정책은 애틀리의 사민주의 정책에 비해 애매모호하고 원론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었기에 대중의 이목을 끄는데 실패하였다.
또한 램지 맥도널드의 실각 이후 10년간 이어지던 보수당 내각에 대한 피로감 역시 컸고, 네빌 체임벌린 등 전쟁을 방관한 보수당 정치인에 대한 심판 여론도 일었다. 이 때문에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도 노동당의 총선 압승이 예상되고 있었다.[3]
3. 여론조사
1943년부터 뉴스 크로니클이 영국 갤럽에 의뢰한 정당 선호도에 대한 여론조사가 실시되어, 영국 최초로 총선 사전에 여론조사가 실시된 선거가 되었다.날짜 | | | |
1945년 6월 | 41% | 47% | 10.5% |
1945년 5월 | 33% | 45% | 15% |
1945년 4월 | 28% | 47% | 14% |
1945년 2월 | 27.5% | 47% | 12.5% |
1944년 1월 | 28% | 44% | 12% |
1943년 12월 | 31.5% | 46.5% | 11.5% |
1943년 6월 | 36% | 44% | 10.5% |
4. 선거 결과
제38회 영국 총선 주요 정당별 결과 | ||||
정당 | 득표수 | 의석수 | 증감 | |
당수 | 득표율 | 비고 | ||
| 11,967,746표 | 393석 | +239석 | |
클레멘트 애틀리 | 47.7% | 제1당 | ||
| 8,716,211표 | 197석 | -190석 | |
윈스턴 처칠 | 36.2% | 제2당 | ||
| 2,177,938표 | 12석 | -9석 | |
아치볼드 싱클레어 | 9.0% | 제3당 | ||
| 686,652표 | 11석 | -22석 | |
어니스트 브라운 | 2.9% | 제4당 |
큰 이변 없이 노동당이 초압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당은 램지 맥도널드 당수의 총리 선출 이래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선거에서 승리하여 1당의 자리에 올라섰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종전의 154석에서 239석을 늘린 393석을 차지했다. 반면 보수당은 종전의 387석에서 190석이 감소한 197석을 차지하였다. 지난 총선에 비해 겨우 50.9%만의 의석만을 건지는데 그친 것이며, 1906년 이래 보수당 최악의 참패를 기록했다. 특히나 웨일스 지역에서 보수당은 단 2석을 얻는데 그치며 대패를 면치 못했다.
보수당과 노동당 속에서 이렇다할 대안을 내세우지 못했던 자유당 역시 참패했다. 안그래도 의석수가 21석으로 대단히 모자란 상태였는데, 이 총선에서는 단 12명만이 당선되며 보유 의원수의 절반에 가까운 9명이 의원직을 잃었다. 게다가 자유당의 당수로서 선거를 지휘했던 아치볼드 싱클레어마저 33.1%라는 처참한 지지율로 낙선하며 7선에 실패한다.[4]
그 외의 정당으로는 자유국민당이 보수당과의 선거 연대를 맺었으나, 기존의 33석에서 22석이 준 11석을 얻는데 그치며 대참패했다. 영국 공산당은 이번 선거에서 1석을 늘린 2석을 차지했으며 서기장인 어서 호너 후보도 노동당 후보를 상대로 불과 3%p 차이의 패배를 기록하며 분전하는등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단독 과반을 훌쩍 넘긴 의석을 차지한 노동당에 의해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들어섰다. 램지 맥도날드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사회주의자 내각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4.1. 주요 정치인의 당락
후보자 | 특이사항 | 소속 정당 | 지역구 | 득표율 | 당락 | 비고 |
클레멘트 애틀리 (Clement Attlee) | 노동당 당수 | | 잉글랜드 런던 라임하우스 | 83.8% | 당선 (1위) | |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 선거 당시 총리 보수당 당수 | |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우드포드[5] | 72.5% | 당선 (1위) | |
아치볼드 싱클레어 (Archibald Sinclair) | 자유당 당수 | | 스코틀랜드 케이스네스&서덜랜드 | 33.1% | 낙선 (3위) | [6] |
어니스트 브라운 (Ernest Brown) | 자유국민당 당수 | | 스코틀랜드 레이스 | 31.4% | 낙선 (2위) | [7] |
아서 호너 (Arthur Horner) | 공산당 서기장 | | 웨일스 론다 이스트 | 45.5% | 낙선 (2위) | [8] |
5. 여담
- 이 선거에서 클레멘트 애틀리는 흥미로운 전략을 사용했는데, "위대한 전시 지도자 처칠"의 업적을 인정하며 "전시의 처칠"과 "평시의 처칠"을 구분짓는 선거 전략을 썼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주효해서 당시 처칠과 보수당이 주장한 "사회주의자들을 막아야 한다" 등의 원색적 색깔론이 노동당의 구체적인 전시 이후 복구안에 밀리면서 보수당은 노동당의 선거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 되기 직전 총리에서 내려와야 했고,[9] 2차 세계대전의 영국 대표 마무리는 클레멘트 애틀리가 지었다.[10]
- 해당 선거는 영국 노동당 역사에서도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1924년부터 이미 자유당 대신 영국 진보계를 대표하면서 떠오른 노동당이었지만, 이 사이 단독 집권 기간은 몇몇 사정으로 단기간에 그치는 등 제대로 된 수권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었는데, 이 선거 이후부턴 영국 정치 시스템에 확실히 적응하며 보수당과 정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물론 그 와중에 붕 떠버린 자유당은 득표율은 제법 유지되었지만 결국 소선거구제 하에서 계속 일정 의석수 이상 확보에는 실패하다가 1980년대 들어 자유민주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래도 비슷한 상황이 유지되어 오고 있는게 함정이지만.
- 국가원수 본인의 높은 인기와는 별개로 정권연장에 실패한 선거라는 것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11], 2022년 한국 대통령 선거[12]와 비슷하다.[13]
- 이 총선은 동유럽 공산화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전쟁영웅' 처칠이 총선에서 참패한 것에 충격을 받아 소련군이 점령한 동유럽에서 자유선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 참고자료(월간조선 2020년 5월 기사) - 1945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참패했던 원인과 이후 재기에 성공했던 원인을 같이 다루고 있다. 정리하자면 전쟁을 치르면서 국민들의 의식이 사회주의에 친화적이 된 것과 연립내각에 참여하면서 노동당 정치인들의 국정수행 능력이 향상된 것[14],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전후(戰後)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치가 높아진 것, 전쟁 기간 중 정당 활동 면에서 노동당이 보수당보다 더 부지런했다는 것, 보수당이 이런 시대정신과 상황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 등이 총선 참패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또 기사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애틀리가 시대상에 따라 사회 복지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해 영국인들의 민심을 얻었던 것, 선거운동 과정에서 노동당이 인기가 높던 처칠 대신 이전 보수당 총리였던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의 실정을 부각했다는 것, 보수당의 매카시즘이 역풍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선거 패배에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선거 참패에 충격을 받은 보수당은 복지국가 노선 수용, 청년보수운동, 정치센터·조사국 설치 등을 통해 다시 정계에서 입지를 다졌고, 보수당은 1951년 조기 총선에서 다시 이기며 처칠은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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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소속 8석
노동당 성향 무소속 3석
영국 공산당 2석
국민당 2석
민족주의자당 2석
독립국민당 2석
독립노동당 2석
보수당 성향 무소속 2석
독립자유당 2석
연방당 1석
독립진보당 1석[2] 정확히는 애틀리는 전시거국내각 연장에 동의하려고 했지만, 허버트 모리슨 등 당내 반대파의 강력한 저항에 이 제안을 최종 거절하게 됐다.[3] 원래대로라면 1940년 총선이 치러져야 했으나 전시 상황이었기에 선거가 연기되었다. 다만 총선이 치러졌으면 체임벌린에 대한 심판론으로 1945년 영국 총선과 유사한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 자유당, 노동당, 보수당의 삼파전이 일어났는데, 선거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2위도 아니고 3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1위와 2위의 격차가 6표밖에 안되었고 1위와 싱클레어 후보자의 득표로 61표밖에 나지 않아, 영국 총선 역사상 가장 접전이었던 결과중 하나였다.[5] 현재 이언 덩컨 스미스 의원의 지역구인 칭포드&우드포드 그린의 일부이다. 다만 당시에는 런던이 아닌 잉글랜드의 일부였으며 런던에 편입된 것은 마거릿 대처 내각 때의 일이다.[6] 당선자: 에릭 도어(, 33.5%)[7] 당선자 : 제임스 호이 (
, 60.8%)[8] 당선자 : 윌리엄 메인워닝(
, 48.4%)[9] 총선 당시 처칠은 트루먼, 스탈린과 함께 포츠담에서 전후처리에 대한 내용을 논의중이었는데 정권이 바꿔면서 처칠은 중간에 귀국해야만 했고 애틀리가 이어서 논의에 참석했다.[10]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이 사망하면서, 해리 S. 트루먼이 바통을 이어받은 것과도 유사점이 있다. 물론 이쪽은 둘 다 민주당 소속이긴 하다만.[11] 1945년 영국 총선처럼 단임 정권교체는 아니다.[12] 심지어 이쪽은 전술한 두 선거처럼 여당 소속 전임자조차 없이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당했다.(...) 이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와 유사하다. 참고로 저 둘도 스캔들에 휘말리며 불명예 퇴임한 대통령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정권교체를 당했다.[13] 1960년, 2000년 미국 대선도 대통령의 높은 인기와는 별개로 정권연장에 실패한 선거였지만 당시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빌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했으니 논외.[14] 실제로 연립내각에서 보수당 정치인들은 외정을, 노동당 정치인들은 내정을 맡았다. 애틀리가 연립내각의 부총리였다.
노동당 성향 무소속 3석
영국 공산당 2석
국민당 2석
민족주의자당 2석
독립국민당 2석
독립노동당 2석
보수당 성향 무소속 2석
독립자유당 2석
연방당 1석
독립진보당 1석[2] 정확히는 애틀리는 전시거국내각 연장에 동의하려고 했지만, 허버트 모리슨 등 당내 반대파의 강력한 저항에 이 제안을 최종 거절하게 됐다.[3] 원래대로라면 1940년 총선이 치러져야 했으나 전시 상황이었기에 선거가 연기되었다. 다만 총선이 치러졌으면 체임벌린에 대한 심판론으로 1945년 영국 총선과 유사한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 자유당, 노동당, 보수당의 삼파전이 일어났는데, 선거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2위도 아니고 3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1위와 2위의 격차가 6표밖에 안되었고 1위와 싱클레어 후보자의 득표로 61표밖에 나지 않아, 영국 총선 역사상 가장 접전이었던 결과중 하나였다.[5] 현재 이언 덩컨 스미스 의원의 지역구인 칭포드&우드포드 그린의 일부이다. 다만 당시에는 런던이 아닌 잉글랜드의 일부였으며 런던에 편입된 것은 마거릿 대처 내각 때의 일이다.[6] 당선자: 에릭 도어(, 33.5%)[7] 당선자 : 제임스 호이 (
, 60.8%)[8] 당선자 : 윌리엄 메인워닝(
, 48.4%)[9] 총선 당시 처칠은 트루먼, 스탈린과 함께 포츠담에서 전후처리에 대한 내용을 논의중이었는데 정권이 바꿔면서 처칠은 중간에 귀국해야만 했고 애틀리가 이어서 논의에 참석했다.[10]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이 사망하면서, 해리 S. 트루먼이 바통을 이어받은 것과도 유사점이 있다. 물론 이쪽은 둘 다 민주당 소속이긴 하다만.[11] 1945년 영국 총선처럼 단임 정권교체는 아니다.[12] 심지어 이쪽은 전술한 두 선거처럼 여당 소속 전임자조차 없이 단임으로 정권을 교체당했다.(...) 이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와 유사하다. 참고로 저 둘도 스캔들에 휘말리며 불명예 퇴임한 대통령을 겪은 정당에게 단임 정권교체를 당했다.[13] 1960년, 2000년 미국 대선도 대통령의 높은 인기와는 별개로 정권연장에 실패한 선거였지만 당시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빌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했으니 논외.[14] 실제로 연립내각에서 보수당 정치인들은 외정을, 노동당 정치인들은 내정을 맡았다. 애틀리가 연립내각의 부총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