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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윈스턴 처칠의 생전 평가를 다룬 문서이다.2. 평가
나치 독일에게서 자유 세계를 지켜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그의 총리 재임 시기를 기점으로 대영제국이 서서히 쇠락하게 되었고[1], 확고한 제국주의자로서 식민지를 탄압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1~2차 대전의 전간기(1918~1939)에는 파시즘에 대해서도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를 "민주주의를 실현할 자격도 없는 이탈리아를 안정시킨 지도자"으로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2]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은 우리의 동맹국이며 일본과의 전쟁을 고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 당시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영국에서나 성공한 특이 체제로 평가받았고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엘리트 지식인이나 대학생들조차 파시즘을 지지하는 세력이 상당했던 혼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경우 그 정도가 지나쳤던 인물이었기에[3] 처칠은 그의 등장 초기부터 적대적인 입장을 가졌다.
처칠이 파시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그가 의회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이유도 있지만, 반공주의가 파시즘의 기반 중 하나라는 것 역시 크게 작용했다. 그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1차대전 후 전간기에는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하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수립으로 인해 유럽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었고,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육군상을 지내던 1919년엔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여 아르항겔스크 전선에 있던 영국군에게 독가스를 적군에게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고[4], 멘셰비키 혁명가인 보리스 사빈코프와 접촉하기도 했다.[5] 이후 재무장관에 재임하던 1927년엔 무솔리니와 만난 후 기자회견에서 무솔리니를 격려하고 파시즘을 온 세계에 봉사하고 있다고 극찬하며, "러시아라는 독가스에 대한 해독제"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그가 파시즘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파시즘의 반공정신을 높이 산 것이 그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6] 물론 1930년대에 이르러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자, 그런 그도 결국엔 파시즘이 영국에 큰 위협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소련에 점차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고, 전쟁 당시엔 소련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나치에 맞서 싸웠다. 물론 반공 반소련 성향이 사라진 건 아니라 전쟁 후엔 언싱커블 작전을 계획하며 소련의 뒤통수를 칠 음모를 꾸미기도 했고,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통해 소련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학창시절부터 군사학이나 전쟁사에 개인적으로는 관심이 매우 많았지만 정작 본인의 군사적 재능은 처참한 수준이었기에 전시 지도자로서 군사적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는 평도 있다. 처칠의 정적들이 끊임없이 씹어댄 1차대전 때의 갈리폴리 전투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노르웨이 전역이나 남방작전등에 패배한 것에도 처칠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책임도 크다고 여겨지며, 이탈리아 전선이나 그리스 및 발칸 전역 등 처칠의 지중해 중시 전략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또한 논란이 되기도 한다.
여하간 전시에 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처칠을 칭찬하자, "당신 같은 공산주의자가 왜 처칠같은 반공주의자를 칭찬하는가?"라는 질문이 날아왔고 이에 그는 "만약 히틀러가 승리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답했다.
독불장군 기질도 엄청나서, 차마 처칠이 말한 것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전시에는 적절했던 듯. 글자 그대로 '전시 수상'의 전형이다. 감투 정신이 투철했다는 평도.
마하트마 간디 등 인도인들을 대할 때 당시 기준으로도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논란도 있다.
2.1. 긍정적인 평가
2.1.1. 군사적 리더십과 전략
처칠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사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영국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쟁 초기 나치 독일의 공세로 유럽이 차례로 점령당하고 영국이 홀로 남았을 때, 그는 끝까지 저항할 의지를 다짐하며 영국 국민과 군을 결속시켰다.그의 유명한 연설, "우리는 해안에서 싸울 것이며...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는 영국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고 전쟁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칠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연합군의 승리와 유럽 해방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전쟁 중 영국이 독일 공군의 공습에 맞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방어 전략을 세웠다.
처칠이 아니어도 나치를 막아낼 수 있었느냐와는 별개로, 당대 사람들은 강경하게 독일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처칠을 선택해 보수당, 노동당, 영국 자유당을 아우르는 초당파 거국내각의 수장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그렇기에 전시에 온갖 전략적 삽질을 저질러도 교체되지 않았다.
2.1.2. 외교적 수완과 연합군 결속
처칠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전쟁 자원과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무기대여법을 성사시켰고, 이를 통해 영국의 전쟁 자금을 지원받아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이 같은 외교적 수완은 연합국의 결속을 강화하고,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처칠은 미국, 소련 등 연합국 지도자들과 협력하며 전 세계적으로 연합군의 목표와 작전을 조율하는 데 앞장섰으며, 연합군의 강력한 지도자로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2.1.3. 국민의 결속과 사기 고취
처칠은 뛰어난 연설가로서 전쟁 중 영국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으며 사기를 높였다. 그의 연설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국민들이 단결하고 전쟁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데 큰 역활을 한다.특히 런던 대공습 동안, 처칠은 영국 국민에게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을 약속하며 어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도록 격려했다. 그의 연설은 영국 국민들이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이는 처칠이 전쟁 지도자로서 보여준 강력한 리더십의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이때 처칠은 국민의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애를 썼는데, 그는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집무실의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 라고 한 자신의 말대로 독일군의 공습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런던에 머물렀다. 런던 지하에 대피소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위험하게도 그 위에는 정부 건물이 있었기에 500파운드 폭탄에 직격당하면 그대로 끝장이 나는 위치였다. 하지만, 처칠은 피신하지 않고 끝까지 런던의 지하벙커에 남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지도와 공무를 수행하며 독일군의 침공 위협에 맞서는 한편, 미국에 접근하여 무기 대여법을 통해 수많은 장비들을 받아냈다.
그리고 미국의 참전이 확실시되자 사기 고취를 위해 사회복지에 큰 영향을 남긴 베버리지 보고서의 기초가 되는 '사회 보험과 관련 서비스에 관한 위원회'를 수립시켰다.
2.1.4. 문학적 업적과 역사적 통찰
처칠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문학가로서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는 자신이 겪은 경험과 정치적 통찰을 바탕으로 전쟁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이를 통해 그의 탁월한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아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그의 저서는 역사적 교훈과 인류의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후대에 큰 유산으로 남았다. 처칠은 역사적 사건을 문서화하여 전쟁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의 저서는 전쟁의 의미와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존 처칠도 그의 저서를 통해 다시 영국인들에게 기억되는 명장이 되었다.
2.1.5. 전후 평화와 유럽 통합에 대한 기여
처칠은 전후 세계 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다양한 구상을 제시하며 유럽의 평화와 통합에 기여했다. 그는 유럽이 하나로 단결해 전쟁의 위험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유럽 합중국"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하였다.이러한 그의 비전은 훗날 유럽연합(EU)으로 발전하게 되는 중요한 영감을 주었으며, 전쟁 이후 평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2.2. 부정적인 평가
2.2.1. 최악의 전략적 안목
전시 총리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전략적 안목은 좋지 않았는데 차라리 어떤 면에서 히틀러가 나아보일 정도이다.[7] 싸우는 깡은 있는데 싸우는 법은 몰랐다. 장교로 군생활을 시작, 해군장관, 전쟁장관을 거치고 총리에 도달한 커리어패스가 의심될 정도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전함 HMS 애진코트를 강탈하는 바람에[8]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에 가담하게 만들었고, 그걸 뒤치다꺼리하느라 또 처칠의 최대 삽질 중 하나인 갈리폴리 전투가 벌어졌다.[9]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도 형편없는 식견은 변함이 없어서, 프랑스 전역이 패전으로 끝나갈 즈음에는 동맹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신형 전투기였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들을 아낌없이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는데, 휴 다우딩의 강력한 반대로 다행히 이뤄지지 않았다. 처칠의 뜻대로 공군 전력을 무의미하게 소모해버렸을 경우,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독일군이 제대로 된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상황이고 독일 전투기들의 호위 편대도 느슨했다고 한들 지상전에서 쭉쭉 밀리는 상황이라 안정적인 작전기지를 확보하는 것부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보내는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다우딩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전력을 보존했음에도 영국 본토 항공전 시작 시점에서 양군의 전력비는 1:3으로 영국의 압도적인 열세였고, 독일 폭격기까지 감안하면 1:5 이상으로 벌어졌다. 한편, 프랑스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본토에 상륙할 지도 모른다고 최신 대전차포인 6파운더 대신에 구형인 2파운더 생산을 지시했는데, 독일은 상륙할 방법도 없었지만 2파운더 우선 생산으로 6파운더의 양산이 늦어지게 된다. 이 6파운더는 등장 이후 미국과 영국의 주력 대전차포가 될 정도로 성능이 준수했다.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방어를 해야 할 상황에서 장군들을 재촉하여 무리하게 공세에 나섰다가 큰 피해를 입고 공격을 거부하면 해임했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클로드 오킨렉으로 독일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처칠의 되도 않는 반격 요구가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가 패배주의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해럴드 알렉산더로 교체되었다. 그나마 알렉산더와 함께 부임한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처칠의 되도 않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준비가 될 때까지 버틸 수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을 격파한다. 이후 유럽에 제2전선을 열 때도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 부분인 이탈리아를 공략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해서 이탈리아 전선을 열게 된다. 이탈리아 전선의 성과는 종전 시까지 독일군 사단 20개 가량을 묶어둔 것에 불과했다.[10] 거칠게 표현하자면, 2차 대전의 영국군의 혈전은 처칠이 삽질을 저지르거나 그러려고 들면 명장들이 초개처럼 옷을 벗어가며 뒤를 닦아주거나 트롤링을 필사적으로 막는 식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아무튼 이런 처칠 때문에 개고생 무지한 영국군 장군들은 나중에 처칠이 언싱커블 작전으로 소련과 전쟁을 벌여 3차 세계 대전급 전쟁을 기획하자 대다수가 죽어라 결사반대했다. 몽고메리 원수는 "모스크바로 쳐들어가서 처절하게 실패한 나폴레옹과 히틀러에 이어 3번째 이름에 오르실 겁니까?! 이렇게 역사적으로 전략적 기본은 모스크바에 무력으로 쳐들어가지 말라는 것이거늘."라고 분노하듯이 따져들었다. 이때, 영국의 장군들은 물론, 동맹국인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연합군도 이 작전에 대해 무척 부정적이라 처칠이 포기해야 했다.
2.2.2. 런던 스모그 사건
1952년의 런던에서 발생한 런던 스모그 사건에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당시 처칠은 지금의 안개는 그저 지나갈 뿐이라고 했지만, 추운 날씨로 인해 석탄 사용이 급증하면서 스모그는 이미 평상시보다 훨씬 더 늘어난 상태였다. 결국 스모그에 대해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면서 약 12,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스모그 관련 질환을 얻는 대참사로 귀결되었다.2.3. 논란이 있는 평가
2.3.1. 벵골 대기근에서의 책임 논란
1943년에 수백만 명의[11] 인도인이 굶어 죽은 벵골 대기근에 대한 책임도 있다. 마드후수리 무케르지의 저서 '처칠의 비밀 전쟁'이 이런 주장을 내포한다. 이를 바탕으로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들보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등, 피해 규모를 일부러 부풀리거나 처칠이 인도인을 학살하기 위해서 일부러 저질렀다는 주장이 흔히 있기도 한다.그러나 이런 주장은 걸러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 본국인 영국마저도 배가 없어 호주에서 인도로 밀을 옮길 수 없었다. 유보트로 인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에 둔 영국 정부는 더군다나 이탈리아 전선에 있는 영국군도 수송선을 이용해 보급해줘야 했기 때문에 인도에 쓸 수송선은 매우 극히 한정되어 있았다.
또한 처칠은 수송선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인도에 구호 물품을 보내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호주에서 인도로 구호 물품을 보내려 하는데 배가 없으니 도와달란 서한을 보내기도 하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사적 이유를 핑계삼아 거절했다. 그리고 현지 관리들의 부정확한 통계로 인하여 곡물의 양이 인도가 필요한 곡물의 양보다 적게 수송되었으며, 위에서 언급란 이런 상황들 때문에 구호가 늦어진 것이지, 고의로 인도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구호 물자들을 늦게 보내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처칠이 벵골에서의 상황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현지 관리들의 무능함으로 인해 영국에서 인도로 충분한 구호 식량을 보내지 못했으며 당시 영국 정부는 현지 관리들의 오류가 있는 정보만을 가진 채 벵골의 식량 보유량에 여유가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물론 전시 상황인 것을 고려할 부분이 있지만, 당시 지배국으로서의 책임을 피하진 못할 것이다.
2.4. 타 국가들의 평가
2.4.1. 당대의 평가
1, 2차 세계 대전 쯤에 영국이 행한 악행과 영국에 대한 비난의 상당수가 처칠 때문이다. 연합국들조차 처칠에게 묘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주기도 하는데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경우 더 묘한 평가를 준다. 일단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영미 귀축(혹은 귀축영미)으로 영국과 미국을 하나로 묶어 인간이 아닌 귀신이나 짐승 따위로 묘사했다. 일본군이 태평양으로 진격하면서 당시 태평양 지역에 식민지가 있던 영국군과도 싸웠으나 영국군은 몇 번의 패전 이후 독일 국방군을 상대하느라 이 지역을 많이 신경 못 썼고, 심지어 진주만 공습 당시에도 미국에 선전포고가 늦어지기도 했으나 영국에는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의 소학생들이 부르는 노래에서도 스탈린, 짜찌루(처칠), 루주베르도(루즈벨트)가 3대 귀축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박완서가 소개한 바 있다.1930년대까지는 처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에서는 거만한 제국주의자로서 욕을 무지 먹었다. 중립을 지키려던 노르웨이를 영국 편 안 들면 불바다로 만들 거라고 협박한 탓에 노르웨이에선 차라리 나치와 손 잡자는 소리까지 나왔다. 물론 나치가 노르웨이를 침공하면서 영국과 손을 잡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긍정적인 평가 항목으로 이동한다.[12] 사실 이런 성향은 영국인 자신들이 가장 잘 알아서, 그의 별명 중 하나가 '신이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 영국에 내려보낸 또 하나의 히틀러'였다.
2.4.2. 현대의 평가
현대에도 처칠에 대한 일본 우파들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나카니시 테루마사의 《대영제국 쇠망사》에서는 "나치 독일을 물리치는 데 집착해서 대영제국을 약체화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한다.[13]아일랜드에서는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처칠이 영국의 대정치가이기에 아일랜드의 독립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악연을 맺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처칠은 영국 정계 거두 중에서도 아일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편에 속했고, 2차 대전 당시 전시 총리 마음대로 "해군 기지로 쓰게 땅을 조차해달라"는 등 신생 독립국의 자존심을 자극할만한 요구를 막 들이댔다. 1945년 종전 무렵에는 자국의 중립법을 위반하고 영국군에 입대하여 전공을 새운 아일랜드 출신 군인들을 치하하는 연설에서 노골적으로 아일랜드의 중립을 비판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당시 아일랜드 총리 에이먼 데 벌레라가 한 맞연설이 현대 아일랜드사에선 정치적 명문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평가가 갈리지만 마냥 긍정적인 편은 아닌데 일단 그가 한국인들이 혐오하는 제국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큰 관심이 없는 대중에게는 서양의 위인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의 부정적인 면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인종차별주의자나 식민지를 수탈한 영국 정치인으로 인식된다.
이와 관련 오랜 시간 카이로 회담을 연구한 정치학자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조순승의 연구에 따르면 처칠이 조선의 독립에 반대했던 이유를 당시 영국이 2차대전 종전과 동시에 한국 독립을 인정한다면 자기네 식민지 인도에서도 같은 요청이 나올 것이 두려워 카이로 회담의 선언문을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수정을 고집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밝혔다.#
다만 처칠이 한국의 독립에 대해 그렇게까지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다. 처칠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 독립에 그렇게까지 부정적이진 않았고, 중국이 한국을 흡수하는 상황을 염려했을 뿐이었기에 적절한 절차(신탁통치 등과 같은) 후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 정도를 원했고, 기본적으로 한국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고 미국과 중국이 카이로 회담의 한국 관련 내용들을 주도했다는 것.#[14]
3. 처칠이어서 가능했는가?
본문에서 여러 번 언급되지만, 처칠의 공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히틀러를 막았다"이다.[15] 문제는 처칠이었기에 히틀러를 성공적으로 막았는가, 아니면 히틀러를 막은 사람이 우연히 처칠이었는가이다. 일반적인 당시 영국 수상이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3.1. 부정론
처칠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당시 독일에겐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을 칠 군사적 역량이 없었다.[16] 오히려 개전 초기 저지대 방어를 위한 프랑스와의 연합 작전에서 가용 육군 병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돌프 히틀러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영국 본토만을' 방어하는 데에는 더 유리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처칠이 없었다고 해서 나치 독일이 유럽을 정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일시적인 정복은 몰라도 유지는 불가능했다.또 본격적인 미국의 개입이 있기 이전에도 소련의 공업 생산력은 독일을 능가하고 있었으므로, 히틀러는 미국을 배제하더라도 유럽조차 정복하기 힘든 처지였다.[17] 더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는 개전 초기부터 공공연하게 반 독일 성향으로 전쟁에 개입하려는 의사를 드러냈기에 대독평화협상이 이뤄지는 정도가 아니라면 전쟁에 개입을 안했을 가능성이 낮다.
처칠이 2차대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칠이 아니면 독일이 유럽을 정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영웅주의의 요소가 있다. 과거의 역사에서 대체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 라이트 형제가 없었더라도 비행기는 발명되었을 것이다.[18] 하지만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한글은 창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2차대전을 전후한 인물 중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아니라면 구 프로이센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폴란드와의 전쟁[19] 정도라면 몰라도 유럽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수백만 유태인, 집시, 장애인, 반정부인사들을 가스실로 집어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깽판을 치는 입장이고 윈스턴 처칠은 방어자의 입장이었으니 역사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는 또 차이가 있다.
3.2. 긍정론
처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영국 총리로 있었다면 역사가 변했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당시 독일은 무패행진중이었고 유럽내에서 친독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독일이 멍청하게 서부와 동부전선 모두를 무리하게 늘리지 않았거나, 일본이 독일과 손발을 잘 맞췄으면 영국은 유럽대륙에서 고립돼 손가락 빨 수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무조건 항쟁 선포로 2차 대전의 판도를 그나마 쥐고는 있었다.영국이 처칠만큼 강경한 인사를 수상에 임명할 수 있었을 지가 관건인데, 처칠정도의 강경한 인사가 아니라 유화적인 인물이었을 경우 독일과 협상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굳이 처칠이 아니라도 처칠같은 강경파가 수상이 된다면 비슷하거나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20] 영국정계에 그런 인물은 없었다.
앞서 언급된 What if에서 체임벌린의 후계자로 처칠 대신에 핼리펙스가 총리가 되는 대체역사를 서술한 앤드루 로버츠가 대표적이다. 로버츠의 대체역사에서도 히틀러가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처칠보다 온건파였던 핼리팩스가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벌이는 대신에 독일과 협상해서 발을 빼버림으로써 영국이 전쟁에서 빠지고,
[1] 이미 1920년대부터 대영제국은 미국에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등을 비롯해 선두를 뺏기기 시작했고 소련 역시 등장하여 유럽 중심의 질서에 금이 가던 형국이였다. 경제력면에서도 보면 이미 미국은 유럽 전체를 능가할 정도였으며 일본역시 극동에서 세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1930년대에 이미 웨스트민스터 헌장과 신인도통치법을 비롯하여 대영제국은 이미 한계에 직면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가 대영제국을 쇠락하게 했다는 평에는 논란이 있다. 결국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오히려 쇠락을 늦췄다고 볼 수도 있다.[2]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1994) 상권이나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 참조[3] 아예 대놓고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집권하자마자 베르사유 체제를 깨나갔다. 무솔리니는 집권 초기에는 영-프-미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행동한 것과 대비된다.[4] 역대 전쟁범죄 리스트와 가디언 지의 기사 참조.[5] 사빈코프는 1925년에 소련에 밀입국했다가 소련 비밀경찰에 붙잡혀 옥사했다.[6] 이건 해당 시점에서 영국이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솔리니는 프랑스 침공 직전까지만 해도 연합국과 나치 독일의 중재자를 자처하고 있었고,[21] 별달리 전쟁범죄나 팽창주의적인 행보를 보이지도 않았다.[22]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처칠 입장에서 보면, 딱히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도 유럽 내의 세력균형을 흔들지도 않으면서 빨갱이만 열심히 때려잡는 이탈리아 파시즘은 크게 미워보일 이유가 없었다. 스트레사 체제 붕괴는 영국이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 이탈리아를 나무랄 처지가 못 되었기도 하고. 물론 이런 미묘한 사이는 1940년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선전포고하고, 무엇보다 대영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에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면서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다.[7] 제대로 된 전쟁 준비 없이 제2차 세계 대전을 개전했으나, 영국을 굴복시키는 데 실패한 상태로 소련에 쳐들어간 것, 그나마도 전력을 분산한 것을 보면 히틀러의 전략적 안목이 엄청 좋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늘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도박을 던지는 건 언제나 여전했지만, 당시에 "이놈 미쳤군!" 수준의 평가를 받았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을 과감하게 채택하여 당시 서유럽 최강국 프랑스를 6주 만에 제압한 성과도 있었고, 녹색 상황 당시 숲과 구릉지가 많아 체코슬로바키아가 경시한 곳에 주공선을 추가하기도 했고 다른 장성들이 공에 눈이 멀어 무시한 병력을 키예프 전투로 섬멸시켜 포위섬멸되는 위협을 피했으며, 그냥 찍기에 불과했지만, 칼레를 지목했던 다른 군 수뇌부들과 달리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측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안목이 저평가된 것은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독일 국방군 출신 참전자들이 전후에 잘한 건 자기들의 공으로, 잘못은 전부 히틀러의 잘못으로 떠넘긴 것이 원인이다. 애초에 국가원수이자 나치 독일의 총 책임자인 히틀러의 전략적 식견보다 더 나은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부재했던걸 본다면 국방군 출신 참전자들은 전략에서만큼은 히틀러에게 탓을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면에 처칠은 정말 형편없는 안목을 가졌지만 일단 영국은 승전국이고 장성들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려준데다가 본인의 말솜씨도 뛰어나서 부각되지 않을 뿐이다.[8] 275만 파운드 짜리를 강탈하고 하루 사용료 천파운드 주며 이를 무마하려 한 범실도 있다.[9] 당시 양면전선의 동부를 맡은 러시아의 보급이 협상국에 의존하고 있고 제일 안정적인 루트가 지중해-흑해 루트였다는걸 감안하면 최악의 삽질이었다.[10] 그러나 이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한 단견이다. 영국은 2차 대전으로 빅토리아 여왕 시기부터 유지해 온 제국주의적 패권이 흔들리고 있었고 어떻게든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 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붉은 군대가 유고를 넘어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밀고 내려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한다는 영국 입장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11] 150~4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12] 사실 영국도 노르웨이를 침공하려고 했다. 나치 독일이나 영국이나 그럴 사정이 있었기 때문. 단지 나치 독일이 먼저 했지만.[13] 허나 이는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의 국력은 많이 소진되어 있었는데 그걸 복구하기도 전에 나치가 집권했다. 문제는 나치가 유럽을 석권하게 되면 결국 칼끝은 자신들에게 놓일 수 밖에 없으므로 싫든 좋든 나치를 물리치는데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미영프 3국과 다른 방향(동부전선)에서 나치를 밀어내던 이들은 이념적으로 상극이던 소련이었다. 그나마 나치가 말이 통하는 상대라면 협상이라도 하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종학살에 외교적으로도 말이 통하지 않을 상대로는 그냥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소련이 먹을 몫을 줄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14] 해당 기사에서는 영국 측은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크게 반대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해당 기사는 처칠이 조선을 독립시키는 것을 명시적으로 적는 것은 반대했지만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그 시점 일본은 영국의 적국이었으니 적국 일본의 식민지를 해방시키는 것에 처칠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15] 물론 이것 외에도 업적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베버리지 보고서이다.[16] 크릭스마리네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독일 해군의 역량은 처참한 수준이라 그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지중해의 호위를 부탁할 정도였다. 만약 독일 해군이 일본 제국 해군의 70% 정도의 힘만 갖고 있었어도 영국은 엄청나게 고전했을 것이며 심할 경우 본토에 독일군이 상륙하는 상황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는 추측이 나올 지경이니 말 다했다.[17] 모스크바 공방전을 승리했더라면 소련이 독일을 완전히 압도하는 이후의 전개는 어렵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 소련의 광대한 영토와 어마어마한 인구,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자원을 생각하면 모스크바 점령 이후 독일군이 더 밀고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럴 경우 소련과 독일은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과연 교착상태에서 소련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원을 독일이 감당 가능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18] 2016 리우 올림픽 개막식에도 소개된 프랑스계 브라질인 산토스 뒤몽도 라이트 형제와 별도로 비행기를 만들었으며 라이트 형제보다 단지 1년 늦게 완전한 비행기를 완성하였다.[19] 이 정도는 히틀러가 없었더라도 프로이센 군부나 독일 국민들의 반 폴란드 감정이 높아서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1차대전 전후에 재건된 폴란드가 주변국 대부분에게 어그로를 끄는 영토 확장 전쟁을 차례로 벌였는데, 혁명 직후의 소련, 패전 직후의 독일, 그 외 신생국가다 보니 내정이 안정되지 못한 차에 폴란드가 치고 들어가면 당하기도 해서 다들 이를 갈고 있었다. 문제는 이 폴란드 침공이 영프가 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지만.[20] 그 대체할 인물이 처칠과 달리 군사적인 안목을 조금이라도 갖추고 있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