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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남북정상회담 2007年 南北頂上會談 2007 Inter-Korean Summit | ||
일시 | 2007년 10월 2일 ~ 2007년 10월 4일 | |
장소 | [[틀:깃발|평양시 | ]][[틀:깃발| ]][[북한| ]]|
주최 | [[틀:깃발| | ]][[틀:깃발| ]][[북한| ]]|
참석 | 남 | 북 |
대통령 노무현 | 국방위원장 김정일 | |
영부인 권양숙 | 위원장 부인 공석[1] | |
결과 | 10.4 남북공동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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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시 공식 수행원들이 착용한 휘장 |
2. 진행
KTV - 2007 선을 넘어 |
참여정부는 위원장을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하는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와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준비기획단’을 구성하고 준비기획단 산하에 사무처를 뒀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그동안 당해왔던 우리 민족의 그 많은 고통들을 이제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원 영상 54초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기 전.
1차 회담과는 달리 2차 회담에서는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통한 육로 방문이 합의되었고 일정 첫 날인 10월 2일 9시 5분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은 1945년 남북분단 이후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3]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4·25 문화회관 앞에서 평양으로 들어온 노무현을 맞이했다.노무현 전 대통령,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기 전.
일정 둘째날인 10월 3일 9시 30분 남북 양측 정상은 소수의 배석자를 대동하고 회담을 가졌고 일정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양측은 6·15 남북 공동선언에 기초해 남북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둘째날의 회담에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나전칠기 병풍과 드라마와 영화 DVD, 팔도특산 차 세트를 선물했고 김정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500상자의 송이버섯을 선물했다. 청와대에서는 이 송이를 정치인, 소록도 주민, 실향민 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과 나누겠다고 공식발표했다. 이때 김정일의 특사로 내려온 것이 바로 박재경 조선인민군 대장인데 이 사람이 바로 1.21 사태 때 살아서 북으로 도주한 무장공비라는 설이 있다.
남포시 평화자동차종합공장 방문 사진(노무현재단) |
3. 10.4 남북공동선언
이 회담을 바탕으로 10.4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4. NLL 대화록 논란
2012년 10월,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선 정국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전 의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본 결과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NLL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NLL 대화록 논란을 참조.5. 여담
- 남북정상회담의 상징과도 같은 군사분계선 노란선은 기존에는 없던 것이라고 한다. 원래 아무런 표시가 없는 곳에 상징성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 그려 넣은 것이다. 문재인의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정상회담을 이벤트화 시키지 말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 때문에 노란선을 새로 그리는 건 허가되지 않았으나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책임을 지고 '북한과 합의가 되었다'고 허위보고하여 성사된 장면이라고 한다.#[4] 다만 이를 기획한 문재인 본인은 대통령비서실장 신분으로 서울에 남아 청와대를 지켰다.[5]
- 조중동 같은 보수 언론이나 보수 인사들은 국군포로 등 납북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부정적으로 봤는데 특히 만화가 신경무는 조선일보 <조선만평>에서 비난 일변도로 다룬 바 있다. (관련 기사)
북한 안내원의 안내를 경청하는 김원기 |
- 2007 남북정상회담의 담례만찬은 쉐라톤워커힐 호텔 조리팀장으로 18차례 국빈만찬을 준비했던 이춘식 쉐프가 준비했으며 남북화합을 상징하기 위하여 8도의 다양한 토속 요리들을 선보였다. 1차 남북정상회담 때는 서울에서 음식을 만들어서 북에 가져갔으나, 2차 남북정상회담 때는 남한에서 온 9명의 요리사들과 북한 요리사 25명이 같이 요리를 만들었는데 북한 요리사들은 플레이팅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당황했다고 한다. #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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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서적 |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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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 남북정상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당시 김정일의 비공식 부인이었던 김옥은 등장하지 않았다.[2]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는 흔히 제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불리웠으나, 문재인 정부에서만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면서 현재는 혼동을 막기 위해 2007 남북정상회담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3]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도보 방북으로부터 11년이 지난 2018년 제1차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전 대통령이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판문점 북측 구역을 잠시 갔다가 다시 남측 구역으로 돌아왔으며 한 달여 뒤에 열린 2018년 제2차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때는 차를 타고 판문점 북측 구역으로 가서 회담을 했다. 2007년과 2018년의 총 세 차례 회담을 제외한 모든 대한민국 대통령의 방북은 모두 항공편을 통해 이뤄졌다.[4] 아이디어 자체는 오승록 전 의전비서관실 행정관(현 노원구청장)의 것이다.[5] 대통령의 해외 순방 등에 대통령비서실장은 국내에 남아 상황을 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