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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11:16:0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노협에서 넘어옴
전국노동조합협의회
全國勞動組合協議會
파일:전노협로고.png
약칭 전노협
창립일 1990년 1월 22일
해산일 1995년 12월 3일
임원진
초대
위원장 단병호[1]
조직국장심상정
조합원 수 약 12만명, 456개 단위노조 (1991년)
슬로건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
파일:20081_22719_5633.jpg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회원들의 행진[2]

1. 개요2. 전노협 선봉대
2.1. 선봉대 역사
3. 역사
3.1. 노동자 대투쟁이 몰고온 변화의 바람3.2. 민주노조 건설운동3.3. 건설, 전노협3.4. 눈보랏길 속의 전진3.5. 결실을 맺다
4. 기타
4.1. 강령4.2. 역대 지도부4.3. 노래
4.3.1. 전노협 진군가
4.3.1.1. 전노협 진군가(나레이션)
4.3.2. 전노협 선봉대가4.3.3. 전노협 투쟁가4.3.4. 전노협 깃발가
4.4. 여담

1. 개요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6.25 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단위 민주 노조[3]이다.

현재 존재하는 민주노총의 전신이며, 거의 모든 의 정치인들을 배출했던 노동운동계의 거두이다.

슬로건은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이었으나 전노협 진군가의 영향으로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을 더 많이 썼으며, 대체로 PD성향이었다.

2. 전노협 선봉대

파일:전노협 선봉대.jpg
철거민 연대투쟁을 나간 선봉대원들의 모습

구사대와, 경찰 병력에 맞서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전국의 각 지역에서 결성된 지역정방대, 파업자위대, 등의 다양한 조직이 전노협 건설을 계기로 1989년대 말 조직화되어 1993년까지 싸워온 전노협의 투쟁 조직이다

2.1. 선봉대 역사

지역선봉대는 1989년 마창노련의 정방대 홀동에서 시작하여, 1989년 4월 세신실업 연행노동자를 석방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구사대 폭력에 대한 공동대응, 공동선전·선동등의 다양한 역할을 하개 되었고 이는 서울과 인천의 파업자위대, 경기와 부천 등 여러 지역에서 선봉대를 조직의 큰 자극을 주었다. 이후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이하 광노협 )에서도 노동해방선봉대를 전북노련에서도 선봉대를 조직하기 시작되었다.

이후 1989년 말 ‘제9차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는 선봉대의 위상을 조직선봉대로 규정되어 취약한 단위사업장과 지노협의 지도력 보완과 준 간부로서 역할 수행 및 일상부서 체계의 집행력 보완 및 소모임 활동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는 임무와 미가입 노동자들의 조직화등에 기여한다는 등의 주요 임무로 수행했다.[세부내용]
파일:전노협 선봉대2 - 수련회.jpg
전노협 선봉대 수련회 모습

투쟁을 하기 위해 선봉대는 전국단위 회의를 하고, 훈련을 했다. 1990년 8월 중순, 덕유산에서 전국선봉대의 2박3일에 걸친 1차 훈련이 있었다. 구보를 하면서 체력을 길렀고, 화염병 제작 투척 훈련이 있었다. 쇠파이프 훈련도 있었다. 엉성하지만 유격훈련장을 스스로 만들었다. 유격훈련 코스 중의 하나는 화생방이었다. 철사와 비닐로 5미터 정도의 화생방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투쟁 때마다 수거해 놓았던 불발최루탄을 까 넣었다. 남성이고 여성이고 포복으로 그 안을 기어 들어갔고 투쟁가 한 곡을 부른 뒤에 기어 나와야 했다.훈련 후에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고, 구토를 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심지어 한 여성동지는 기절하기까지 했다.[직접인용]

3. 역사

전노협 역사 4분짜리 요약 영상
대충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순까지의 모든 노동운동이 전노협의 깃발아래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면 된다.

3.1. 노동자 대투쟁이 몰고온 변화의 바람

1987년 대한민국은 끝끝내 민주화를 이루어 냈지만, 이는 말 그대로 법적인 의미의 민주화였지 노동, 시민사회, 언론 전 분야에서 독재정권의 독버섯같은 잔재가 남아있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전태일의 희생을 바탕으로 곳곳에 방직, 섬유피복, 여성 생산직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가 건설되었지만, 이중 2~3년 이상 가는 곳은 몇 곳 되지 않았고 전국적인 노동조합의 건설은 꿈에도 꾸지 못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이 성공으로 끝나고, 여기저기에서 억눌렸던 진보적 요구가 폭발하면서, 그중 가장 억눌렸던 계층, 노동자들의 각성이 시작되었다. 6월 항쟁이 끝난 직후인 1987년 7월, 최소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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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대투쟁의 막을 올린 현대 그룹 노동조합의 가두행진
울산 권역에서 비밀리에 시작된 현대차 민주노조 건설운동이 탄압 국면을 맞자, 7월 5일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이 창원, 마산을 거쳐 계속해서 북쪽으로, 북쪽으로 확산되어갔다. 전국적으로 3천여회의 파업이 일어나, 하루에 40회가 넘는 동시 파업이 이어졌으며, 겨우 4천여개에 불과하던 노동조합은 이후 7천 1백여개가 되었고, 노조 조합원의 수는 180만명으로 전해의 두배, 노조 조직화율은 거의 20%에 육박했다.[6] 하지만 8월 28일경 노조운동을 하다 사망한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에 백골단이 투입되는 것을 기점으로 진압은 강경 일변도로 변했다. 정권이 안정되자 언론도 다시 대기업의 편을 들어 노동자들을 연신 과격, 좌익용공집단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언론에 노출되어 조금씩 노동운동에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민주당계 정당들 마저도 집회의 자제를 요구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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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열사의 장례식
그러나 노동운동의 성장세는 뚜렷했다. 노동자 대투쟁의 경험으로 양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한 노동운동은 이제 산별, 점조직별 민주노조 건설 운동을 넘어 전국적이고, 진보적인 민중과 연대할수 있는 새로운 상설 합의체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 갈망이 바로 전국적 민주노조 건설운동으로 계승되었다.

3.2. 민주노조 건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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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기념 가두 집회 모습, 1989년 4월
민주노조라는 단어 자체는 노동조합이면서도 독재정부에 기생해 고용자들을 탄압한 한국노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진보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려는 운동을 뜻했고, 이미 70년대부터 이어내려오고 있었지만, 이는 산발적이었고, 전국적이지 못했으며, 복수노조 금지법에 의해 계속해서 탄압당해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시의 거의 모든 노동운동가들은 한국노총에 가입한 채로 민주적인 운동을 펼치는 일명 '민주파'라고 불리었다.

개별으로의 민주노조 건설운동의 한계는 이미 뚜렷했다. 대투쟁 전에도 노동운동가들은 점차 지역별, 업종별, 기업별 노동조합 연대체를 건설하며 전국 단위의 민주노조를 건설할 토대를 세웠다. 전태일이 세운 청계피복노조를 계승하여, 85년 6월에 심상정, 박노해, 유시민등이 서울노동운동연합을, 87년 6월, 노회찬이 주도하는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을 건설하였고, 그해 12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건설된 것을 시작으로 13개 시,도,군에 노동조합 연맹이 생겨났다. 또한 그에 발맞춰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연구전문기술직노동조합협의회 등 업종별 노동조합, 현대차 노조, 풍산금속 노조 등 기업별 노동조합도 생겨났다.

이들은 꿈에 그리던 전국 연대체를 건설하기 위해 88년 6월, (가)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를 건설했다. 하지만 창립식에는 어김없이 백골단과 구사대의 탄압이 몰아쳤고, 수십명의 노조 지도부가 줄줄히 잡혀갈 수 밖에 없었다. 전국단위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법에 명시되어있는 세 가지의 독소조항. 바로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 금지, 공익사업 직권중재등을 폐지시켜야만 했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는 노동법 개정을 위한 투쟁본부를 설치하고 11월부터 서명운동, 연좌 투쟁, 학생들과의 연대를 통한 여론 조성에 힘썼다. 전경련과 정부는 노조 조직원들에게 임금을 의도적으로 체불하고,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노동자들을 전부 연행해가면서, 오히려 6월 항쟁때보다도 많은 연행자들을 발생시켰다. '노조가 경제를 망친다'라는 오래된 프레임도 이 시기부터 주요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결국 일반 시민들의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88년 12월22일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전국회의)가 결성되었고,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비롯한 17개의 지역노조협의회, 민주출판언론노조협의회를 비롯한 4개의 업종협의회가 참여했다.[7] 이들의 목적은 하나, 기존의 한국노총[8]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국단위 민주노조의 건설이었다. 이들은 창립을 약 1년 후인 90년 1월 22일로 비정하고, 준비기간동안 실무, 규정, 각 노동조합들의 결집등을 위해 노력하기로 정했다. 전국회의의 이러한 물밑작업은 경찰과 정부의 귀에도 들리기 시작했고, 정부도 수백명의 민주노조 준비위원들을 체포하고, 89년 12월부터 갑호 비상령을 선포하는 등 탄압에 물을 올렸다. 그 와중에 노동운동계에선 '한국노총 개혁론'이 대두되기도 했다.[9]

3.3. 건설, 전노협

우리는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로써 탄생했습니다... (중략)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새 날이 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전노협 초대 위원장 단병호, 창립선언문에서.)
1990년 1월 21일, 이미 수십 지부의 노조위원장들이 체포되거나 가택연금된 상태였고, 노태우 정부는 '전노협 엄단'을 선포하며 모든 경찰병력을 창립대회 개최지로 보이는 지점에 배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22일이 되면 갑호 비상령까지 선포할 계획이 언론으로 퍼지면서, 전노협의 창립대회는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노협 준비위원들의 투표로 초대 위원장에 추대된 단병호 마저도 수배중이었다. 전노협의 중앙위원들은 서울이나 경기권의 특정한 장소를 물색중이었지만, 모든 대학, 광장, 심지어 조금 넓다 싶은 지하철역들까지에도 모두 전경이 배치된 상태였으므로, 창립대회의 강행 자체도 1월 21일 밤에나 확정되었다.

하지만 1000여명에 가까운 전노협 대의원들을 경찰에 들키지 않고 출범식장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노조간부들에게 사복경찰 미행이 붙었던데다가, 초대 전국위원장 단병호는 장신에 깡마른 체형, 매서운 눈빛 때문에 쉽게 눈길이 가는 외모였기에 더더욱 위험했다. 중앙위원들은 처음엔 단병호 위원장을 포기하고 총회를 가질까 생각했지만, 그가 가진 상징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떠오른 묘안이 바로 성동격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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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 창립대회가 경희대학교에서 열린다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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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 창립대회를 막기 위해 성균관대를 봉쇄한 모습

이 외에도 출범식을 서울대, 성균관대, 한양대에서 연다는 포스터와 언론 인터뷰도 만들어 놓았다. 각 지역의 대학들도 전노협 결성식이 자기네학교에서 열리는것처럼 꾸며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1월 22일 새벽, 전노협의 주요 간부들이 의정부역을 통해 도봉산역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경찰에 들려왔다. 이들이 예상했던 도보나 산개후 집합이 아닌 서울지하철 1호선을 타고 빠른 속도로 서울 중심부를 향한다는 소식이 접수되자, 서울 경기 지방에 흩어져있던 대부분의 경찰병력은 수도권 전철 1호선 주변에 있는 대학가와 광장을 포위하기 위해 위치를 벗어났다. 수원, 광명, 고양등의 전투경찰들도 수십, 수백대의 전경버스에 나눠 탄 채 서울로 올라왔고, 경기권의 대학가는 한순간에 상주 경찰인원을 제외하고 텅 비어버렸다.
1시가 될 무렵에는 창립 대회가 진행될만한 1호선 주변의 대학가들은 모두 소개되어있었다. 의정부에서 전철을 타고 움직이던 대의원 백여명이 체포되었던 데다. 전노협이 출범식을 12시에 연다고 공표했는데 1시가 가까이왔는데도 아무일도 없었던 만큼, 전노협 창립대회가 실패로 끝났다는 이야기가 언론에서 돌기 시작했다. 정부도 비록 단병호를 체포하는 데는 실패했어도 전대협 출범식은 원천봉쇄에 성공했다고 조금씩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파일:전노협 단병호.jpg파일:창립대회 사진.jpg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대회, 1990년 1월 22일, 성균관대학교 수원 자연과학캠퍼스
그러나 전노협은 몇몇 대의원들을 희생시켜 경찰병력을 서울로 집중시킨 다음 기습적으로 성균관대학교 수원 자연과학캠퍼스에 집결했다. 1월 22일 새벽을 기점으로, 서울권역의 노동자들이 이 작전을 각 대의원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다. 어찌나 비밀 엄수가 확고했던지 경찰은 이들의 숫자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도봉산으로 향한 유인조의 인원들도 절반 넘게 체포당하지 않은 채, 그대로 1호선을 돌아 수원으로 향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10]
이들은 수원행 전철 속에서 그대로 인원을 파악한 후[11], 바로 성대 수원캠퍼스로 돌진했다. 수원 캠퍼스에는 상주 경찰 몇 십명만 남은 상황이었고, 전노협 대의원들은 백여명이 사전체포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8~900명이나 되는 대규모였다.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생회는 전노협 측과 사전 협의에 따라 학생회 간부 100여명을 모집하여 학내에서 밤을 새며 대기시켰고, 노래공연 준비를 핑계로 강당의 사용권을 확보하여 사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12] 아무런 충돌없이 강당에 도착하자마자 행사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수원 전경들은 모두 서울로 가 있으니 전노협 창립식을 방해할 병력은 하나도 없었다. 행사가 시작된 후 경찰병력을 증원하고자 했으나, 전날부터 내린 폭설로 인해 경기남부권의 주요도로의 정체가 극심하였다.

수원으로 복귀한 첫 진압부대는 이미 전노협 창립대회가 끝나 학내 가두행진으로 번져나가는 상황에서 도착했다. 수원 지역 인근 대학에서 도착한 '전노협 건설지원 공대위원회' 사수대가 합세하여 시위대 규모는 수천명이 된 상황이었기에, 그나마도 수적으로 부족하여 금방 패퇴하였다. 하지만 다음으로 들이닥친 두번째 진압부대는 백골단구사대를 위시한 엄청난 숫자로 수원캠퍼스를 포위했다. 단병호와 전노협 중앙위원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전노협 선봉대와 대학 사수대들의 치열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눈이 내리고 땅이 얼어 던질 돌도 없던 데다가, 비밀리에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 화염병도 전혀 챙기지 않았던 사수대원들은 말 그대로 맨몸을 던져 단병호를 학교 바깥으로 탈출시켰다. 전원 체포를 각오한 141명의 노학연대 사수대는 장렬하게 전경들에게 끌려갔다. 그러나 그 희생 덕분에 전노협은 위원장을 잃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같은 날 노태우민주정의당,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이 되었다. 서로 극과 극인 두 집단이 같은 날 같은 눈보라를 맞으며 한국 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3.4. 눈보랏길 속의 전진

출범하자 마자, 전노협은 엄청난 탄압에 직면했다. 출범일인 1월 22일부터 그해 6월까지, 900여명의 남은 대의원 가운데 262명이 체포되고 10여명이 수배되었다. 국제노동기구는 전노협 창립을 폭력적으로 방해한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고 시정조치를 권고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이를 들을리가 없었다.

전노협은 3당합당 저지, 노동법 개악 저지를 모토로 그해 2월부터 6월까지 대규모 연좌 단식과 파업을 진행했다. 정부는 전노협 산하 160개 노조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압수수색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전노협의 세는 점차 불어났고, 1990년 끝 무렵에는 20만 조합원과 600여개의 단위노조를 거느린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노태우 정권이 강행한 3당 합당, 임금 억제와, 공안 정국등으로 서민, 화이트컬러층도 전노협에 긍정적인 쪽으로 돌아서며, 언론과 방송도 방송 민주화 투쟁으로 전노협에 화답한다.

그러나 계속된 탄압은 전노협의 조직력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1991년경 100여개에 가까운 전노협 산하 노조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하거나, 전노협에서 탈퇴했고, 1991년의 대기업 업무조사로 현대, 대우등의 대기업 노조들이 간부를 잃었다. 1993년까지 체포된 노동자들의 수는 총 1,973명에 이르렀다. 심지어 제 3차 전노협 결의대회는 대부분의 대의원이 구속되어있던 관계로 인하여 구치소에서 개최되기까지 했다. 조금씩 전노협의 활동력은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 방향성도 합법적 민주노조의 결성 인지, 아니면 변혁적 노동해방의 실천인지 확실하지도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업별 노조, 지역별 노조 그대로 활동하며 산업별 노조로 확장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점또한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1991년부터 2천여명이 넘는 구속자와 5천여명이 넘는 해고자를 낸 거대한 전노협 투쟁은 골리앗 크레인 파업과, 마창노련의 파업 실패, 단병호와 문성현 등 수십명의 지도부가 구속되는 199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막을 내리고 있었다.

3.5. 결실을 맺다

전노협을 시작으로 전국단위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는 조직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권영길 위원장이 이끄는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와, 국제기준을 따르자는 ILO공대위,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노동운동 진영 전체가 탄압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느꼈고, 1993년, 권영길을 위원장, 단병호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전국노동운동대표자회의를 건설했다. 이들은 94년부터 모든 민주, 좌파적 노동조합을 포괄하는 전국조직 건설을 목표로 실무협의에 돌입했다. 새로운 노조는 기존의 생존권 쟁취 투쟁에 더해, 복수노조 허용, 제3자 개입 허가 투쟁, 사회개혁 투쟁을 임금인상 투쟁과 결합하여 주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등 대중성을 강화하기로 결의했다. 이른바 민주노총 준비위가 시작된 것이다. 1995년 후반기가 되자 흔들리는 전노협을 대신할 새로운 전국단위 노조가 윤곽을 드러냈다. 11월 11일, 세 민주노조가 합쳐져 40만 조합원, 천여개의 노조가 참가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즉 민주노총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바로 다음해부터 권영길 위원장을 위시한 1996년 노동법 날치기 반대 총파업을 주도하며 제1노조라는 위상을 과시했다. 민주노총의 건설은 흔들리던 전노협에게 돌파구를 제시해 주었고, 전노협은 민주노총이 결성된 그해 12월에 발전적으로 해산하면서 흡수되었다.
“…평등사회를 앞당기겠다는 전노협의 깃발은 이제 없지만 민주노총은 전노협의 핵심 정신인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 변혁지향성’의 내용을 현재의 노동운동에 어떻게 실천적으로 접목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해 깊게 성찰할 것이다. 우리는 2020년 일하는 모든 노동자의 노동권 확대와 사회대개혁, 한국사회 불평등․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노동해방의 총진군을 계속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출처]
2020년 1월 22일 민주노총의 성명서‘전노협 30년, 그리고 민주노총의 창립 25년’”

민주노총은 노사분규간 제3자 참여 허가, 복수노조 건설 허용이라는 전노협의 염원을 대신 이루어주며, 말 그대로 전노협의 후예가 되었다.

4. 기타

4.1. 강령

전노협 강령
[ 강령 펼치기 ]
우리는 주 44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직종 남녀 학력간 차별임금을 철폐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쟁취한다.

우리는 해고,실업의 방지와 실업자에 대한 생활대책 및 취업보장을 위한 고용안정보장제도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안전한 작업환경의 확보를 위해투쟁한다.

우리는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의 완전쟁취를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전국노동자의 단결투쟁으로 자본과 권력의노동운동탄압을 분쇄하기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노동자와 전민중의 생활향상을 위해 공공임대주택 제도의 확립,무상의무교육과 의료보장제도의 실시,불평등한 조세제도의 개혁 및 복지재정지출 확대,물가안정,공해방지 등에 대한 제도적 정책적 개선을 쟁취한다.

우리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의 철폐와 모성보호를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퇴폐적인 외래문화를 척결하고 건강한 민중문화를 확립한다.

우리는 노동자와 전민중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사상의 자유 등 민주적 제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제민주세력과 굳게 연대하여 조국의 민주화,자주화,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세계 노동자들과 국제적 유대를 강화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한다.

4.2. 역대 지도부

파일:민주노총 로고.png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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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제1-4대
단병호
제5대
양규헌
초대
권영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권영길
제2대
이갑용
제3·4대
단병호
제5대
이수호
제6대
조준호
제7대
이석행
제8대
임성규
제9대
김영훈
제10대
신승철
제11대
한상균
제12대
김명환
제13·14대
양경수
}}}}}}}}} ||

역대 지도부
1대(초대) 2대 3대 4대 5대(마지막)
단병호
(1990~1993)
양규헌
(1994~1995)

4.3. 노래

4.3.1. 전노협 진군가




작사 김애영 작곡 김호철
1절 2절
새 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새 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갈라진 조국의 역사 외세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전국의 노동자 뭉쳤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주인될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4.3.1.1. 전노협 진군가(나레이션)
[ 나레이션 펼치기 ]
전노협의 깃발을 휘날리며!

피어린 사망, 끊임없는 음모와 수탈만이 자행되는 야만의 땅, 굴종의 세월, 얼마나 기나긴 치욕이였는가?

잘리온 허리로 허덕이는 조국 강산을 보듬어 안고 비참한 임금 노예가 되어 신음해야 했다. 피로 쓴 노동해방 그러나 우린 훌떡거림조차 안으로 안으로 삼키며 분노의 칼을 갈며, 투쟁의 칼을 갈며 임금 노예의 족쇄를 싹둑싹둑 잘라버리고 더러운 착취의 세상을 쓸어버리기 위해 피투성이 포복으로 진군해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우리들은 투쟁의 사선을 넘고 넘어 40여 년의 기나긴 암흑을 뚫고 척박한 대지 위에 노동해방 투쟁의 깃발을 드높이 휘날렸다.

거제에서 구로까지 마산에서 태백까지 전국을 휘몰아친 우리들의 함성은 여의도 광장을 붉게 물들이고 전국 노동자 총단결을 외치며 메이데이(May Day) 투쟁으로 타올랐다!

노동자의 진정한 조직, 전국 노동자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노동해방 아로새겨진 전노협의 깃발을 피의 젖은 조국 강산에 휘날렸다.

전.노.협 긴 세월의 폭압을 뚫고 치솟은 노동해방의 깃발이여, 우리들은 이제 우리들의 투쟁을 멈출 수 없다.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노동자가 주인 되는 참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들은 우리들의 깃발 전노협의 깃발을 휘날리며, 노동해방의 그 날까지 힘차게! 힘차게! 진군! 진군! 총진군할 것이다.

4.3.2. 전노협 선봉대가


가사
나를 따르라 노동형제여 우리는 선봉대
자주, 민주, 통일의 선봉 전노협 선봉대
캄캄한 조국 분단된 조국 군부독재 총칼 판치는 조국
이 목숨 다바쳐 노동해방이 온다면
가져가거라 이내 한 목숨 해방의 재단에 바치오리라
아 아 아 투쟁을 말하라 전노협 선봉대

4.3.3. 전노협 투쟁가



가사
몰아치는 폭력 깨부수고 하나되어 섰다
전노협의 깃발날리며 우리는 뭉쳤다. (합)
자본가의 군사독재정권 갈데까지 갔다.
더 이상은 참을수없어 우리는 뭉쳤다.
한 맺힌 지난 세월 모조리 날려버리고
전노협 깃발 높이 해방 투쟁 선봉에서
투쟁하라 전노협 노동자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 전노협 민중의 해방을 위해 (반복)

4.3.4. 전노협 깃발가




가사
전노협의 깃발 아래
군부독재 총칼 밀어버려
대머리야 노가리야

이제 너도 끝장이다.
친구들아 동지들아
노동해방 그날까지
전노협의 힘찬 깃발
기운차게 펄럭 일세 차차 단결 투쟁!
자주 민주 통일 해방( 민중민주 노동해방 )
일천만이 하나 되니
어화 좋구나 에헤 좋다.
전노협의 깃발 아래
노동해방 앞당기세 (2절 반복)

전노협의 깃발 아래
노동해방 앞당기세

4.4. 여담

진보정당 정치인의 대표 격인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를 묶어 부르는 노심조라는 단어는 사실 전노협의 평등파 거두들 즉 단병호, 문성현, 심상정을 부르는 단문심에서 파생된 단어였다. 노회찬, 조승수도 마찬가지로 전노협 출신이었다. 단문심, 노심조로 대표되는 온건파 PD 인사들은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의 평등파로 시작해 전노협의 금속연맹, 전문노련, 사무금속노련 등의 집행부를 거쳤으며, 민주노총으로 합류한 후에는 중앙파로 불리는 온건 성향 집행부를 형성하였다.

한국노총의 전신 중에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50년대 말 대한노총의 민주파가 대한노총을 나와서 차린 단체로, 이 문서의 전노협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로 인해 한국 노동운동사를 다룬 글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약칭[14]을 병기하여 혼동을 막는다.


[1] 전노협 마지막 위원장은 양규헌이며,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대표를 거쳐 지금은 '노동운동역사박물관'을 추진하는 '한내'의 대표다.#[2] 가운데의 키 큰 남자가 단병호 위원장이다.[3] 전쟁 전에는 전평이 있었다.[세부내용] #[직접인용] 전노협 선봉대, 이름없이 투쟁한 동지들에게 전노협 20년 1월 22일에는 ‘전노협 기억행사’를 갖자[6] 이는 현대 미국에 가까운 정도의 조직화율으로, 당시 전 세계 진보 좌파 정당과 노조들에 비교해도 많이 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서구의 노조운동가들이 한국의 열정을 본받고 싶어했을 정도..[7] 이 외에도 전교조, 운수노조 등 수십개의 비합법 민주노조들이 참관, 참여했다.[8] 당시 노동계는 한국노총을 '어용노조'로 봤다. 실제로 1994년 한국노총 혁신보고서는 이 당시 한국노총에 대하여 “집권여당과의 유착으로 집행부가 여당 국회의원으로 진출하고 4·13 호헌을 지지하는 등 정부 정책에 일방적으로 협조하는 편향적 자세를 취했다”라고 평한 바 있다. 한겨레[9] 금융권을 중심으로 사무직 노조 조직화에 나섰던 노동운동 이론가 장명국이 한국노총개조론을 계속 설파하였다. 하지만 1992년 대선에서 장명국이 지지하던 김대중이 패배한 이후, 장명국은 노동운동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한국노총개조론도 순식간에 사라졌다.[10] 나중에 티비로 전노협 창립식을 보았던 이 체포된 대의원들은, 자신들과 함께 유인조로 있던 동지들이 수원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보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고 한다. 서대문경찰서에서 전노협 간부들끼리 대의원 분회를 연 건 덤...[11] 전철 내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대중으로 서로를 확인했다고 한다. 전철역 내 경찰들이 서로 완전히 모르는 시민들이 따로 탑승한 건 줄 알고 그대로 무시해버렸을정도로 연기력이 좋았다고 한다.[12] 학생회에서도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자신들의 캠퍼스도 미끼인줄 알고 있었으며, 전날 밤 부터 보안을 위해 아무도 집에 가지 못하고 합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합숙인원의 대다수는 사수대 역할을 맡아 전노협위원장이 무사히 학교에 진입하고 탈출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출처] #[14] 1950년대 단체는 전국노협 또는 전국노련, 이 문서의 단체는 전노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