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4:22:07

적토마

적토카에서 넘어옴
赤兎馬[1]
영어: Red Hare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평화4. 삼국지연의
4.1. 연의에서 소개되는 능력
5. 수호전6. 기타 창작물7. 속칭

[clearfix]

1. 개요


[2]
인중여포 마중적토 (人中呂布 馬中赤兎)
- 사람(장수) 중에서는 여포가 으뜸이고, 말 중에서는 적토마가 으뜸이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수호전》에 등장하는 명마.

서양에서 부케팔로스, 인도 문화권에서 칸타카[3], 중동에서 후세인 빈 알리의 말[4]이 명마의 대명사라면, 동아시아에서는 적토마와 오추마가 명마의 대명사다.

적토마에 관한 일화로 유명한 천리를 달린다거나 관우가 타고 다녔다 같은 이야기들은 모두 삼국지연의에서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기 위해 나관중이 지어낸 이야기다. 정사에서는 여포가 적토라는 훌륭한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언급되며, 적토마를 관우에게 줬다는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포가 타고 다녔다는 내용을 제외한 적토마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연의의 창작이다.

붉은 색을 띠고, 체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현대에도 명마로 유명하고 붉은빛이 감도는 털빛을 가진 중앙아시아아할 테케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아할 테케의 원산지 투르크메니스탄과 중국이 거리가 멀어서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으므로[5][6]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다. 아할 테케의 원산지인 메르브~페르가나 계곡 일대는 실크로드의 중심 루트로 고대부터 동-서간 많은 왕래가 있었다.

2. 정사 삼국지

정사 삼국지에선 배송지여포에 대해 기술하면서 조만전을 인용해 적토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나마 기록하고 있다.
"여포는 늘 좋은 말을 몰았는데 이 말은 적토(赤菟)라 불리며 능히 성으로 달려가서 해자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 중에 여포가 있고 말 중에 적토가 있다고 했다."
정사 삼국지》 <여포전> 각주.

여포와 적토마와 관련된 기록중 가장 유명한 문구인 인중여포 마중적토(人中呂布 馬中赤兎)가 정사에 기록된 것이 여포가 원소의 객장으로서 적토마를 타고 장연을 격파했던 장면을 소개하며 나온 것이니 원소의 객장으로 있을 때까지는 적토마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적토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죽었는지 단순히 말을 갈아탄 것인지는 불명.

즉 여포가 적토마라는 말을 탄 것은 실제 역사지만 여포 사후 조조, 관우가 그 적토마를 소유한 것은 창작이다.

토끼를 뜻하는 글자가 이름에 포함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해자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서술을 보면 멀리뛰기를 잘 해서 저런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이 있다.

3. 삼국지평화

삼국지연의가 쓰이기 이전에 나온 삼국지평화에는 본래 정원의 말로 등장한다.
그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온 몸이 피빛 같은 선홍색이고, 말갈기가 마치 불타는 것 같아서 적토마(赤兎馬)라 부릅니다. 승상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붉다고 해서 적토마라는게 아니고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말이라 하셨습니다. 논밭으로 가서 토끼를 만나면 한 마리도 놓치지 않으므로, 말을 타고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이름을 적토마라고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만약 이 말이 강물을 만나면 마치 평지처럼 건널 수 있고, 또 물속에서는 풀을 먹지 않고 물고기와 자라를 먹는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이 말은 800여 근의 짐을 지고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보통 평범한 말이 아니지요.

4.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원래 동탁의 말이었는데 여포한테 선물로 줬다. 여포의 사후에는 조조가 차지했다가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죽은 후에는 손권이 차지하게 되어 마충에게 관우를 죽인 공로로 하사했다. 하지만 마충에게 간 후로는 풀과 물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스스로 굶어서 죽었다고 한다. 사실 전 주인인 여포의 죽음 이후 관우가 살다 간 세월만 20년이 넘으니 평범한 말의 수명을 생각해볼 때, 관우 사망 당시 적토마가 살아있다고 가정해도 안 굶고 잘 먹여도 오늘내일하는 노마(老馬)이긴 하다.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조조가 잠깐 항복해서 머무르고 있던 관우를 완전히 본인의 편으로 완전히 끌어들이기 위해 적토마를 선물하자 관우가 기뻐했는데, 기뻐한 이유가 알고 보니 적토마라는 명마를 관우 본인이 얻게 돼서 그런 게 아니라 이 말을 타고 이제 형님을 더 빨리 만나러 갈 수 있겠다는 사유로 기뻐한 것이어서 조조가 이내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우가 받은 말은 여포가 타던 적토마의 자식이나 손주라는 식의 내용을 넣은 삼국지 매체들도 있다.

맹획도 삼국지연의에서 털이 곱슬거리는 적토마인 권모적토마(卷毛赤兎馬)라는 말을 타고 나온 적 있다.

4.1. 연의에서 소개되는 능력

털이 붉은 천리마로 낮에는 천 리, 밤에는 팔백 리나 달릴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단순하게 수학적으로 계산한다면, 후한 시절의 도량형 기준으로 천팔백 리(약 746.5 km)를 하루(24시간)으로 나누면 평균 이동속도는 31.1 km/h 정도이다. 그리고 먹고 쉬는 시간 등을 4~5시간으로 가정하고 19~20시간 동안 천팔백 리를 간다고 하면 37.3 km/h(20시간 기준)가 나오는데 말로 장거리를 이동시 평균속도가 20 km/h임을 생각하면 거의 두 배다.

아스팔트 도로가 있는 시절도 아니고 산길 논길로만 하루에 천 리(약 415 km, 참고로 서울~부산 경부고속도로가 416 km)씩 달린다면 현대의 오프로드 자동차도 견뎌내기 힘들 텐데, 진짜로 하루에 천 리씩 달리며 명마를 혹사시켰을 리가 없다. 게다가 보면 알겠지만 사용자들은 전부 당대에 이름 좀 날린 무장들, 즉 기본적으로 한 덩치 하는 인물들인데다가 말을 타면 전투에 나선다는 뜻이므로 갑옷에 무기에 온갖 무거운 걸 바리바리 싸들고 탈 테니 말이나 탑승자나 받는 압력이 상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저랬다기보다는 만인지적, 일기당천 같은 표현처럼 대단한 말이라는 뜻에서 막연하게 '천 리'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하비성이 수몰당하자 여포가 '내 적토마는 물 위를 평지처럼 달릴 수 있으니 걱정이 필요없다'고 자뻑하는 내용도 있다.

연의의 영향으로 인해 적토마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붉은 말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대 후한말기부터 삼국시대의 무렵이면 말의 품종 개량이 제대로 안 된 시기였기에[7] 실제로는 덩치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을 거다.

다만 위에 나온 추측처럼 이 말이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한 아할 테케라서 품종 자체가 다르다면 현대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덩치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말이다. 연의에 나오는 묘사는 픽션이긴 하지만 정사에도 엄연히 언급이 있는데, 당시 군마로 사용되던 작은 말만 보다가 저런 명마를 봤다면 말 주제에 역사에 기록이 남을 법도 하다.

관우와 장비가 도망가는 여포를 쫒아가려 하는데 적토마가 너무 빨라서 못잡았다라는 연의의 묘사도 있다.

5. 수호전

작중 관우의 적파 후손인 관승도 적토마를 탄다. 관승의 말에 대한 묘사는 관승의 말의 털이 불붙은 숯처럼 새빨갛다는 묘사가 있다. 방랍 정벌에서 적토마 관련으로 재밌는 장면이 나오는데, 관승이 방랍군의 전진붕이라는 적장을 참살하고 그가 탄 권모적토마를 탈취하려는 순간 관승 본인의 적토마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관승이 낙마하게 된다.

사진진달과 대결하는 내용에서 적토마를 타고 있다는 묘사가 있다. 《수호전》에서의 유명한 명마는 적토마 말고도 송강의 '조야옥사자마'와 호연작의 '척설오추마' 등이 있다.

6. 기타 창작물

적토마/기타 창작물

7. 속칭



[1] 가끔 赤菟馬라는 표기도 찾아볼 수 있다.[2] 단 해당 영상은 형주 공방전 이후는 생략됐다.[3] 석가모니의 왕자 시절 애마이며, 석가모니가 출가를 위해 궁전을 빠져나올 때 탄 것으로 유명하다.[4] 카르발라 참극으로 후세인 빈 알리가 죽자 눈물을 흘리며 많은 적군을 죽였다는 전승이 있다.[5] 당시 실크로드의 영향력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있는 신라, 가야 유적에서 투르크메니스탄보다 더 서쪽에 있는 로마 제국 유리공예품이 나올 정도다. 대표적인 유물이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등이다.[6] 심지어는 아예 이 말을 얻기 위해 전쟁까지 일으킬 정도였다. [7] 안장은 제대로 개량이 안됐을 시기일 것이고, 등자의 경우 서진시대 때 유물로 발굴된 것을 보아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쯤에 등자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