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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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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당 파일:wpk.jpg 김창수[1]
(재령군당 책임비서)
인민위 파일:wpk.jpg 김효삼[2]
(재령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면적 328.4㎢
시간대 UTC+9
인구 125,631명 (2008년)
인구밀도 383명/km² (2008년)
관청
소재지

재령군 인민위원회
(위치 미상)
재령읍내(2010년 11월)[3]

1. 개요2. 역사3. 교통4. 재령평야
4.1. 조선 및 대한제국4.2. 일제강점기4.3. 광복 후 북한 치하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6. 기타7. 관련 성씨

[clearfix]

1. 개요

황해남도.

황해남도 동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황해북도 은파군, 봉산군, 사리원시, 서쪽으로 신천군, 남쪽으로 신원군, 북쪽으로 안악군과 접해 있는 군이다.

2. 역사

고구려의 삼경 중 하나인 '한성(漢城)'으로 유력한 곳이다. 두번째로 유력한 학설이 현재의 서울이라는 학설이다. 또 원래 서울이었다가 나제동맹에 밀려 서울 지역을 잃으면서 재령으로 한성이 옮겨졌다는 학설도 있다. 고구려 때는 평양, 국내성과 견줄 만한 도시였다.

이 때문인지 과거 ‘한성(漢城)’ 또는 ‘한홀(漢忽)’로 불리던 기록이 있고, 고구려의 도시 유적지가 나온 바 있다.#. 다만 고대의 대도시는 기존의 도시를 바탕으로 확장되었고 과거 재령지역이 한사군 중에 대방군의 영역이었음을 고려해보면 대방군의 중심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안승검모잠은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부흥운동을 펼친다.

통일신라 경덕왕이 762년 5월 성을 쌓고 태수를 두어 정식 군현으로 만들었다.

재령(載寧)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인 1217년에 붙었는데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장수산성이 있다 하여 성(城)의 옛말인 재로부터 유래하여 재령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부터 경기도에 속했지만 조선 개국 후 새 수도인 한성부로부터 너무 멀다는 이유로 태조 3년(1394년)에 도로 서해도로 복귀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 국토가 분단되면서 북한 땅이 되었다. 농민에게 땅을 주겠다는 말을 하여 농민을 북한 당국이 속이고서는, 그 땅에 현물세 25%를 물리는 쌀 수탈과 이를 외세인 소련에 넘기는 행위가 심하다고 하여 "의혈청년들이 현물세 창고와 벼 5천 가마에 기름을 붓고 방화했다가 체포돼 주동자가 사형을 당했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1952년에 북한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군의 남부 지역(신원면, 하성면, 상성면, 은룡면 일부)을 분리하여 신원군을 신설하면서 면적이 축소되었다.

3. 교통

도로는 51번 국도54번 국도(대한민국 기준)가 지나간다.

철도는 은률선이 지나가며 금산역, 재령역이 있다.

4. 재령평야


한반도의 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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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재령평야.jpg
신재령에도 나무리벌
물도 많고
땅 좋은 곳
만주 봉천은 못 살 곳

왜 왔느냐
왜 왔느냐
자곡자곡이 피땀이라
고향산천이 어디메냐

황해도
신재령
나무리벌
두 몸이 김매며 살았지요

올벼 논에 다은 물은
출렁출렁
벼 자랐나
신재령에도
나무리벌
- 김소월, <나무리벌 노래> (1924)

군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재령평야는 순우리말로는 '나무리벌'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시대 이래로 황해도, 나아가 북한 지역의 주요 곡창지대로 꼽힌다.

재령평야는 삼국시대까지는 '고재령만(古載寧灣)'이라고 해서 해서정맥 구월산 산괴와 황주평야 사이에 위치한 (灣)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재령만의 융기와 재령강, 서강, 은파천 등의 지속된 퇴적작용으로 인해 습지로 바뀌었다.[5]

4.1. 조선 및 대한제국

조선 인조 대부터 김자점의 주도로 개간하기 시작하면서 원래 만이었던 재령평야가 오늘날의 곡창지대로 탈바꿈하였다. 특히 북률면 일대에 김자점이 세운 수리시설인 경우궁(景祐宮洑)는 심지어 광복 때까지도 일부가 남아 기능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형성된 농경지는 경우궁(景祐宮) 소속의 궁장토였기에[6][7] 경우궁들이라고도 불렸다. 여기서 생산된 쌀은 북률무사미(北栗無砂米)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말 그대로 모래 한 톨 안 섞여 있는 쌀이라는 의미다.[8] 무사미는 당시 왕실에도 진상되었다.

4.2. 일제강점기

재령군의 쌀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유명했다. 재령군 출신의 실향민이었던 연예인 송해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재령군에 대해 증언을 하면서, "나무리뻘 연백평야(재령평야)가 유명하죠. 김제 만경평야를 연상하면 될 거요. 일제의 조선총독이 나무리뻘 쌀만 먹었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밥을 하면 워낙 기름져서 파리가 앉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지요." 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1927년 11월 29일 기사에서는 "북률무사미의 질은 조선반도 쌀 전체를 대표할 정도로 최고다" 라고 칭송을 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재령평야에서 생산한 쌀은 왕실에도 진상되었을 정도로 품질이 매우 좋았다.

다만 여기에는 비극적인 역사도 있다. 국권 피탈 과정에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경우궁의 궁장토 소유권을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겨 북률농장으로 개편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지주들이 들어왔고, 궁장토 소속 농민들은 동척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궁장토 시절 소작료가 3할이었다면 이때부터는 5할, 여기에 각종 농사비용과 수리비용까지 소작농에게 전부 떠넘겼기 때문에 실제 소작료는 7~8할에 달할 정도로 과도한 소작료가 징수되었으며 생산된 쌀의 70%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당연히 주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이는 다시 1924년과 25년의 북률 소작쟁의로 이어졌다. 이때 동척에서 총기로 무장한 직원들을 보내어 주민들을 위협하는 바람에 이 사건은 큰 사회문제로 불거졌다. 결국 양측의 타협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후로도 많은 주민들이 생활고를 겪다 지역을 떠나 만주로 향했다. 시인 김소월 역시 이 사건에서 착안한 시를 동아일보에 게제하여 주민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는데,[9] 그게 바로 상술한 <나무리벌 노래> 다. 재령군을 등지고 만주로 이민하여 힘든 삶을 살아가는 시의 화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다. 위의 시 전문에서 뜬금없이 '만주 봉천은 못 살 곳' 운운하며 만주를 나무리벌과 대비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이듬해인 1926년에는 이곳 북률 출신의 나석주 의사가 동척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다.[10] 나석주 의사 역시 북률 일대에서 집안 대대로 경작한 토지를 동척에게 뺏긴 사람 중 하나였기에 그 원한이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4.3. 광복 후 북한 치하

눈물어린 툇마루에 손 흔들던 어머니
하늘마저 어두워진 나무리 벌판아
길떠나는 우리아들 조심하거라
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70년
보고싶고 보고싶은 우리 엄마여

재넘어 길떠나는 유랑 청춘아
어디가면 그리운님 다시만날까
정주면 이별인데 그 어디 머물까
그 세월 아득하니 벌써 70년
보고싶고 보고싶은 우리 어머니

보고싶고 보고싶은 우리 어머니
- 송해, <유랑청춘> (2015)

해방 이후, 재령평야는 38선 이북에 위치했기에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 한국 전쟁 도중 북진 과정에서 잠시 대한민국 정부가 수복하였으나, 곧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인해 1.4 후퇴가 벌어지며 다시 북한 치하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신천군 사건 같은 이념 대립으로 인한 양민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재령 출신의 실향민으로 유명 연예인인 송해가 있는데, 생전 송해는 죽기 전에 자신의 고향 재령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22년 세상을 떠났다.

재령군 북부, 옛 북률면 지역에는 '김제원리'(金齊元里)라고 하는 리가 있는데, 원래 '대홍리'였던 것을 1961년에 이름을 바꾸었다. 이 지역 출신인 '김제원(1888~1950)'이라는 농민이 북조선인민위원회의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배받게 되었다는 것에 감격하여 수확한 쌀 30가마니를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바쳤다는, 이른바 애국미헌납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김제원의 쌀 헌납은 선의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이를 악용한 애국미헌납운동은 또다른 형태의 쌀 수탈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북한 정권 수립 시기에 이어진 토지개혁 때문에 재령 지역 대부분의 자영농과 지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고, 많은 이들이 월남했다.

과거 재령에 동척 소유의 북률농장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조선노동당의 김제원협동농장, 재천협동농장, 북지협동농장 등의 집단농장들이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지역 농민들은 사실상 농노처럼 착취당하는 삶을 이어오는 중이다. 협동농장 시스템의 비효율과 비료 부족, 북한 정부의 무능한 대처와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오늘날 재령은 과거의 명성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래도 북한 내부에서는 여전히 가장 농업생산성이 좋은 지역으로 평가받는다. 북한 내에서 연백평야와 함께 쌀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다. 가령 북한지역정보넷에 따르면 김제원리는 리 면적의 93%가 논이다. 사치로 유명했던 김정일이 생전에 재령 쌀만을, 그것도 호위사 소속 식품공장에서 전문 인력들이 하나하나 골라낸 쌀만을 먹었다는 증언 역시 흘러나온다. 그리고 대동강 맥주는 재령의 보리로 만든다.[11]

2022년부터는 김정은의 교시로 평야 내의 재배 면적을 기존의 1.5배로 늘렸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최근 들어 경제 사정이 더욱 악화된 북한이 옥수수 재배에 한계를 느껴 대신 밀 재배를 늘린 것이라고 분석한다.[12]#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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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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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미수복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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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군
載寧郡
Jaeryŏng Co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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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C51A3><colcolor=#ffffff> 군청 소재지 재령읍 일신리
상위 행정구역 황해도
하위 행정구역 1 10
광복 당시 면적 739㎢

파일:재령군기.png

6. 기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한 송해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14] 그는 재령에 대해 "곡창으로 유명한 곳이다. 재령은 물이 흔하고 교육, 교통, 종교의 도시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 재령의 좋은 쌀[15]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총독도 재령군의 쌀을 사 먹었다고. 또한 이곳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고 싶다는 소원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나, 본인이 사망함으로써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16]

재령군의 한자 표기 '載寧郡'에서 '寧'의 본음은 '녕'으로 원래대로라면 '재녕군'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활음조 현상에 따라 '재령군'이라고 읽는다. 비슷한 사례로 보령시, 의령군, 부령군, 회령군, 무령왕 같은 사례가 있다.

7. 관련 성씨



[1] 2022년[2] 2022년[3] 썸네일이자 영상 1:03에 나오는 2층 한옥은 "해림상회"라는 곳으로, 1910년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실측할 수는 없으나, 당시 건물이 맞다면 등록문화재급 건물이다. 좌표는 북위 38도23분52초15, 동경 125도37분18초43.[4] 한자로 음차하면 ''가 된다.[5] 그래서 재령평야의 대부분은 해발 20m 아래의 평지로 만조 때에는 해발 -3m에 달하는 곳도 있다.[6] 궁방전이라고도 불리는 궁장토는 특정한 궁에 딸린 토지를 의미한다. 정부가 아닌, 왕실의 사유지에 속한다. 궁방전에 사는 주민들은 정부에 대한 면세 혜택을 누린 대신 소속된 궁방에 전조를 납부하면 되었다. 궁방전 중 가장 핵심으로 꼽힌 토지들은 일사칠궁(一司七宮)이 나눠 관리했다. 일사(一司)는 내수사를, 칠궁(七宮)은 말 그대로 일곱 개의 궁가를 의미한다. 그 외에 옹주방, 대원군방 등의 방에 소속된 토지들이 존재했다.[7] 조선 시대에 황해도는 경기도와 함께 궁방전이 가장 밀집했던 지역 중 하나였다. 여러 농산물들이 많이 생산되었고, 곳곳에 산재한 갈대밭과 간척지로 인해 개척 소요 역시 높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 한양과 가깝고 송상으로 대표되는 상업이 발달했기에 생산물들을 운송하기에도 편했다.[8] 요즘에야 도정기술 발달로 이물질이 섞여 있는 경우가 없지만 과거에는 돌가루나 모래 등이 쌀에 섞여 있는 경우가 잦았다.[9] 당시 그는 평안도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고 있었다.[10]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되었다.[11] 은 량강도산, 물은 대동강 상류의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북한에서 주요 식량작물로 쓰이는 옥수수는 애초에 종 자체가 많은 비료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소위 '주체농법'이라 불리는 밀식 농법으로 인해 지력 소모가 극대화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북한의 암울한 경제와 자원 상황으로는 옥수수 재배에 필요한 화학비료 수요를 충당할 수 없다.[13] 구 재신저수지. 재령군과 신천군에서 각 한 글자씩 딴 이름[14] 공부는 해주에서 했다.[15] 미식가로 유명한 김정일은 생전에 재령의 쌀로 만든 밥만을 먹었을 정도였다.[16] 2003년 평양에서 전국노래자랑 특집편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이 때도 고향에는 끝내 가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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