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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11:35:01

자유선진당/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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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당2. 제18대 총선
2.1. 후보
3. 제18대 국회와 원내교섭단체 구성4. 2010년 지방선거의 참패5. 19대 총선에서의 참패
5.1. 후보5.2. 총선 패배와 문제점
6. 총선 후7. 출신 인사들의 분포

1. 창당

창당준비위원회 단계에서는 당명으로 최종안인 '자유신당'과 '자유한국당'?? 중 만장일치로 자유신당이 채택되었지만, 2008년 1월 26일에 당명을 자유선진당으로 확정했다. 창당준비위원장은 강삼재신한국당 사무총장[1]으로 내정되었다. 한나라당 친박계 현역의원이었으나 공천에서 배제된 곽성문 의원과 이용휘 박근혜 선대위 사이버후보위원장이 입당했다.[2] 이후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박상돈 의원과 유재건 前 비상대책위원장, 김혁규 前 의원[3], 이용희 국회부의장, 이상민 의원이 입당[4]했으며, 국민중심당(심대평, 김낙성, 권선택[5], 류근찬) 세력과 통합을 이루었다. 조순형 前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민주당을 탈당하고 한동안 무소속 의원으로 있다가 2008년 초에 상임고문으로 입당했다. 그리고 이상돈 교수와 전원책 변호사, 조영환 같은 재야인사들도 입당했다.

2. 제18대 총선

창당 이후 처음 치러진 총선인 18대 총선에서 지역구 14석, 비례대표 4석(비례 득표율 6.8%)으로 총 18석을 획득, 20석이 기준인 원내교섭단체 지위 획득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충청남도대전광역시의 16석 가운데 13석을 확보하는 등 이 정도의 확보도 크게 선전한 것으로 여겨졌다.[6] 다만 충청북도에서는 8석 중 단 1석[7]만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어찌 되었든 이런 승리를 통해 이회창은 정계에 안정적으로 복귀했다.

사실 자유선진당 입장에서 18대 총선의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일단은 제3당으로 등극하긴 했지만,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원내교섭단체 지위부터 확보했어야 했으나, 기준인 20석에 간발의 차로 미달해서 그러지 못한 것이다. 대선 때 이회창에게 투표했던 비주류 보수표가 친박연대로 대거 이동하는 바람에[8] 비례대표에서 겨우 6.8% 밖에 건지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9] 한편 지역구에서는 나름대로 유력 인사들을 모아 총선을 치렀지만, 충청권 외의 모든 지역구들에서 다 낙선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지역정당 이미지가 완전히 굳어져버리고 말았다.[10] 자민련이나 국민의당 등이 지역정당이라며 비아냥을 받긴 하지만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자민련은 충청도 외에도 강원도, 경상북도, 심지어는 수도권에도 진출에 성공하여 의석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었고, 국민의당은 대표 안철수김성식서울특별시에서 의석을 획득한 것에 더해 나름 비례대표 표는 전국적으로 고르게 받았다는 점에서 자유선진당보다는 사정이 많이 나았다.[11]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민련과 국민의당은 각각 20석을 가볍게 넘겨 원내교섭단체를 단독으로 구성했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2.1.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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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구 || 이름 || 당시 경력 || 비고 ||
서울 종로 정인봉 전 국회의원[12]
서울 중 신은경 전 KBS 9시 뉴스 앵커 [13]
서울 용산 이인숙 전 서울여고 교사
서울 광진 갑 김준교 전 이회창 대선후보 사이버 보좌역
서울 광진 을 김홍준 성균개발 대표이사
서울 중랑 갑 강병진 환경일보 대표이사 불출마
서울 중랑 을 이용휘 한미준 공동대표
서울 성북 을 김학원 전 브레이크뉴스 논설위원 불출마
서울 강북 을 임강신 2002년 대선 이회창후보 교육분과위 부위원장
서울 노원 병 조종만 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법률특보 불출마
서울 은평 갑 조일호 전 서울시의원
서울 은평 을 정두형 이산건축설계사무실 회장
서울 서대문 을 이문용 전 자민련 김종필 총재 경제특보 불출마
서울 마포 갑 진영환 마노아스틸하우스 부사장 불출마
서울 양천 갑 강삼재 전 국회의원[14]
서울 강서 갑 백철 이회창 총재 정책특보
서울 강서 을 김백중 이회창 총재 정책특보
서울 구로 갑 정순주 민주정치연구소 이사장 불출마
서울 구로 을 한형교 구로 상공회의소 부회장
서울 금천 장영호 전 서울시의원
서울 영등포 을 이일희 전 서울시의원 불출마
서울 강남 을 신대철 이회창 총재 경제특보
서울 송파 갑 송성주 에듀웰빙타임스 대표 불출마
서울 송파 병 이재권 고려고속관광 대표
서울 강동 갑 박용규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부산 중,동 오경석 중, 동구 재향군인회 이사
부산 부산진 갑 최우원 아시아철학회 공동회장
부산 부산진 을 황백현 발해투어 대표
부산 해운대,기장 갑 이병희 전 이회창 대선후보 유세특보
부산 사하 을 조양득 전 부산시의원 불출마
대구 중,남 곽성문 현 국회의원[15]
대구 동 을 정동희 실천연대 대표
대구 북 갑 구본항 전 대구시의원
대구 수성 갑 신영길 한국건강웰빙센터 대표 불출마
대구 수성 을 김점호 전 한국경제기획연구원 연구위원 불출마
대구 달서 을 박영린 계명대 겸임교수 불출마
인천,중,동,옹진 장동학 전 미주상공인 총연합회 부회장 불출마
인천 남 을 민만기 한국청년회의소 중앙회장
인천 연수 김성중 인천대 교수
인천 남동 을 김석우 삼환운수 대표
전 남동구의회 의장
인천 부평 갑 권순덕 이회창 총재 특보
인천 부평 을 조용균 전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인천 계양 갑 김유동 전 프로야구 선수
인천 계양 을 박희룡 전 계양구청장
인천 서,강화 갑 신호수 전 인천시의원 불출마
광주 동 구봉우 축산경제신문 호남취재본부장
대전 동 임영호 전 동구청장 당선
대전 중 권선택 국회의원
대전광역시 행정부시장
당선[16]
대전 서 갑 백운교 전 충청남도지사 비서실장
대전 서 을 이재선 전 국회의원[17] 당선
대전 유성 이상민 현 국회의원[18] 당선[19]
대전 대덕 김창수 전 대덕구청장 당선
울산 중 이철수 울산포스트 대표 불출마
경기 수원 권선 손종학 전 수원시의원
경기 수원 팔달 고병진 전 한나라당 화서동 협의회장 불출마
경기 수원 영통 임희수 자유선진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경기 성남 수정 김경수 경원대 교수
경기 의정부 을 송우근 전 육군 대령
경기 안양 만안 홍두화 전 안양시의원
경기 안양 동안 갑 고강 KOMA 기술개발 대표
경기 부천 원미 갑 안동선 전 국회의원[20]
경기 부천 소사 전덕생 부천시의회 부의장
경기 광명 갑 임종금 광명시의회 의원
경기 양주 동두천 이상원 전 양주시의회 의장 불출마
경기 안산 상록 갑 김석균 전 대한청소년문화진흥원 이사장 불출마
경기 안산 상록 을 강성식 한신대 외래교수 불출마
경기 고양 덕양 갑 이국헌 전 국회의원[21]
경기 고양 덕양 을 전병태 경기컴퓨터시스템 대표 불출마
경기 고양 일산서 김형오 명지대 교수
경기 구리 조재호 현대로템 수석연구원
경기 남양주 을 조정무 전 국회의원[22]
경기 오산 박동우 오산제일신용협동조합 이사장 [23]
경기 하남 유성근 전 국회의원[24]
경기 이천,여주 이희규 전 국회의원[25]
경기 안성 이병호 법무사
경기 김포 김두섭 전 국회의원[26]
경기 광주 이건희 전 경기도의원
강원 춘천 류종수 전 국회의원[27]
강원 원주 유영돈 전 영월군의원
강원 속초, 고성, 양양 황정기 한국산업발전연구원 수석연구원
강원 홍천, 횡성 원종익 강원도의회 부의장
강원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이부균 전 강원지방병무청장
충북 청주 상당 김현문 전 청주시의원
충북 청주 흥덕 갑 최현호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대외협력특보
충북 청주 흥덕 을 오효진 전 청원군수
충북 제천,단양 정우택 전 세명대학교 대학원장 [28]
충북 청원 장한량 전 민주당 충북도당위원장
충북 보은, 옥천, 영동 이용희 국회부의장
현 국회의원[29]
당선
충북 증평, 진천, 괴산, 음성 송석우 농협중앙회 축산경제대표이사
충남 천안 갑 도병수 전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 수석검사
충남 천안 을 박상돈 현 국회의원[30] 당선[31]
충남 공주, 연기 심대평 충청남도지사
현 국회의원[32]
당선
충남 보령, 서천 류근찬 전 KBS 보도본부장
현 국회의원[33]
당선
충남 아산 이명수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당선[34]
충남 서산, 태안 변웅전 전 국회의원[35]
충남 논산, 계룡, 금산 신삼철 조달청 차장
충남 부여, 청양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당선
충남 홍성, 예산 이회창 국무총리
전 국회의원[36]
자유선진당 총재(당대표)
당선
충남 당진 김낙성 현 국회의원[37] 당선
전북 전주 완산 갑 이강욱 자유선진당 전북도당 부위원장
전북 전주 완산 을 박종헌 전 전주시의원 불출마
전북 익산 갑 박윤배 자유선진당 전북도당 부위원장 불출마
전북 남원, 순창 황의돈 자유선진당 전북도당 부위원장
전북 진안, 무주 ,장수, 임실 박병관 전 전북지역사회복지연구소장
전남 나주, 화순 이광웅 자유선진당 광주광역시당 부위원장
경북 안동 김윤한 신현학 국무총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경북 구미 갑 임경만 구미시의회 의원
경북 영천 송두봉 전 민주국민당 경북도당위원장
경북 상주 도현기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특별보좌역
경북 군위, 의성, 청송 전병오 전 이회창 대선후보 특보
경남 창원 을 박덕문 자영업 불출마
경남 통영 고성 이복근 전 경남은행 지점장 불출마
경남 사천 이순근 뉴라이트 국민연합 상임고문
경남 김해 갑 옥반혁 경상남도의회 의원
경남 밀양, 창녕 박한용 전 국정원 경제조정관
경남 산청, 함양, 거창 김홍업 농촌총각장가보내기 운동본부 후원회장
제주 제주 갑 현영대 21세기 중앙포럼 이사 불출마
제주 제주 을 강창재 전 부산동부지청 고등검찰관
제주 서귀포 을 오영삼 전 남제주군의원
재보궐선거
지역구 이름 당시경력 비고
경북 경주[2009] 이채관 전 국회 정책연구위원
경기 안산 상록 을[2009] 장경우 전 국회의원[40]
충북 증평, 진천, 괴산, 음성[2009] 정원현 한국 귀금속보석단체장 협의회 회장
충남 천안 을[2010] 박중현 천안시의회 의원

3. 제18대 국회와 원내교섭단체 구성

자유선진당은 2008년 촛불집회에서는 여당을 비판하는 등, 제3지대 위주로 "보수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세우려고 했다.

2008년 8월 6일, 당시 3석의 문국현의 창조한국당선진과 창조의 모임이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었다. 이때 선진을 교섭단체명의 앞으로 하는 대신 1년씩 교대를 하는 원내대표는 4개월만 권선택 의원이 하고, 문국현 의원이 2009년 1년짜리 원내대표를 맡기로 하였다.[43] 다만 창조한국당의 이한정 의원[44]과 이를 승계한 시민세력 출신 유원일 의원은 여기에 불참하였다. 그리고 이 선택은 문국현 의원의 정치 생명에 결과적으로 큰 악수가 되었다.[45] 자유선진당이 교섭단체를 자치하면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보건복지부를 감사)의 위원장은 자유선진당에게 넘어갔고, 이는 자유선진당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했음에도[46] 18대 국회 내내 이어졌다. 당시 각 분과 위원장은 한나라당 11명[47], 민주당 6명[48], 자유선진당 1명이었다.

창당 초기에 있던 강삼재, 김혁규, 이상돈, 전원책 등의 인사들은 이회창 총재와의 노선 차이[49]로 인해서 탈당했다. 특히 전원책 변호사는 단 4일만에 대변인직을 사퇴했다.[50]

2009년 8월 30일, 갑작스러운 심대평 대표의 탈당 선언[51]으로 19석이 되면서 창조한국당과 합쳐도 20석이 안되어 교섭단체 해체 위기에 처했다. 부족한 1석을 급히 채우기 위해 소속만 창조한국당일 뿐 사실상 독자 행보를 보이고 있던 유원일 의원과 접촉했으나 성향이 달랐기에 거절당했고, 무소속 이인제 의원에게 입당을 제의했지만 무산되었다. 거기에다가 창조한국당의 문국현마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는 바람에 결국 이로부터 이틀 후인 9월 1일, 원내교섭단체는 해체되었다.

이후 이회창은 스스로 비판받던 '제왕적 총재'직에서 물러나, '총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게 2010년 3월,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3개월 앞두고의 일이었다. 이 와중에 탈당한 심대평은 잠깐 자신의 정당인 국민중심연합을 차려 자유선진당에서 일부 인사를 뺏어가 자유선진당을 상대로 경쟁했다. 이후 정부의 세종특별자치시 건설 계획 수정안(즉, 행정기관 이전 취소)에 반발해 소속 의원들의 전원 사퇴서를 결의했으나 이회창 대표의 측근[52]이영애 의원(비례대표)이 수정안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퇴서를 찢어버리는 해프닝을 빚는다.

4. 2010년 지방선거의 참패

충청북도에서 도지사 후보 공천도 하지 못하는 등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충청도의 자존심'을 슬로건으로 2010년 지방선거를 치른다.

그리고 결과는 참패. 서울특별시, 충청남도, 대전광역시 세 곳에 광역단체장 후보를 냈지만, 대전의 염홍철 후보만이 유일하게 당선되었고[53][54] 충남은 당 원내대표를 지낸 박상돈 후보가 민주당의 풍운아 안희정 후보에게 역전패당하면서[55] 대전 자민련 인증을 확실히 했다. 그나마 염홍철 후보[56]가 민선 3대 전직 시장으로서 제4회 지선에서 '아깝게' 패배할 정도로 나름 기반이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서울에서 히든카드로 출마한 지상욱 후보[57]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보다 득표율이 낮았다.[58]

또한 앞서 말했듯이 충청북도지사는 후보도 하나 못 내는 꼴을 겪었다. 거기에 충남에서도 기초단체장 절반을 다른 정당들에 내주기까지 했다.[59][60] 그래도 충북에서는 3곳의 지역(보은군수·옥천군수·영동군수)을 확보했으나, 이것은 이용희 의원의 남부 3군 세력권이었으므로 의미가 크지 않다.[61]

이런 참패 속에 이회창이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나는 듯 했지만 1주일 만에 도로 복귀했고, 박상돈 전 원내대표의 도지사 출마로 치러진 2010년 7월천안시 을 보궐선거에서는 14%의 지지율로 3위에 그치는 등(선거는 한나라당이 승리)[62] 같은 선거에서 역시 참패한 은평구창조한국당[63] 함께 공멸할 징조를 보인다. 한편 당의 생명을 걸었던 세종시 문제는 결국 한나라당 친박의 힘으로 수정안이 부결되었으나 이것은 친박계의 승리였지 선진당의 승리가 아니었다.

이후 존재감을 잃고 당 내에서 다선 의원이었던[64] 변웅전을 대표로 추대했지만 소리 없이 묻혔고 2011년 9월 8일, 지방선거 당시 탈당했으나 공주에서만 승리를 거둔 심대평의 국민중심연합과 다시 신설합당을 하고, 이름도 '자유선진당' 그대로 가기로 결의했다. 덤으로 무소속 이인제 의원도 같이 입당하여 어느 정도 세를 불렸다.

5. 19대 총선에서의 참패

총선 광고
심대평, 이인제, 변웅전이 요리사로 출연한 총선 광고

이런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맞이하게 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에서 심대평이회창이 내분까지 일으키는 최악의 상황에서 선거를 치렀다. 이회창 전 총재는 4선 출마가 아닌 불출마를 선언했고[65], 이에 반발해 탈당하라는 발언까지 나오는 등 사실상 심대평의 독자 세력 선거였고, 여기에 6선에 도전하던 이인제가 거드는 형국이었다. 여기에 이상민, 이용희, 권선택 등 민주당 출신 인사들은 다시 선진당에서 나가고 야권 대통합이라는 가치를 내세운 민주당으로 되돌아가버려서 사실상의 사망 선고를 받았다.[66][67]

이런 상황에서 자유선진당은 50석 이상을 얻겠다는 허황된 꿈에만 빠져 있었다. #

한 마디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자민련이 얻었던 의석을 재현하겠다는 뜻인데,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는 뻔할 뻔자. 과거 자민련이 50석이 되는데 일조했던 대구광역시는 이미 철저한 새누리당 지지세로 돌아선 뒤였고[68], 수도권전라도제주특별자치도는 애초에 택도 없고, 그나마 비벼볼 언덕인 충청권조차도 제대로 잡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19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의 공천 신청자라곤 겨우 32명이었다. 따라서 50명 당선은 애초에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 결과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원래 연기군 출신 의원이던 심대평 대표가 민주통합당이 내세운 전국구 거물 이해찬 前 총리에게 큰 차로 밀려 떨어진 것 포함, 달랑 5석 밖에 건지지 못했다. 17대 총선 당시 자민련의 4석보다 1석 많기는 한데, 그때 자민련은 비례대표 3% 득표에 실패, 즉 4석이 다 지역구였다. 반면 2012년 자유선진당은 지역구는 3석으로 줄었고,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간신히 3.2%를 차지해서 2석을 추가했다.

※ 당선 의원
충북에서는 역시나 이용희 의원이 민주통합당으로 돌아가버리면서 힘을 못 쓰고 전멸했고[70], 정당 득표율에서는 통합진보당에도 밀리는[71][72] 한심한 꼴만 자꾸자꾸 겪었다.[73] 4년 전 5석이나 쓸어담은 대전광역시는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에게 모조리 뺏겼으며, 당의 존립 기반이라는 충남에서도 천안과 공주 등 도시권은 민주당에, 농촌권은 새누리당에 다 뺏기고 말았다.[74]

5.1.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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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구 || 이름 || 당시 경력 || 비고 ||
서울 종로 김성은 전 종로구의원 사퇴
서울 중구 조순형 현 국회의원[75] 불출마
서울 용산 김관국 신라건설 대표 공천취소[76]
서울 광진 을 김홍준 자유선진당 서울시당 부위원장
서울 도봉 을 박영대 전 우석대학교 총학생회장
서울 노원 갑 김철수 한국외국어대학교 학군단 교수부장
서울 노원 을 이기재 전 노원구청장
서울 강서 갑 백철 전 자민련 강서 갑 지구당위원장
서울 금천 임부재 전 금천구의원
서울 관악 갑 김용섭 자유선진당 당대표 정책특별보좌역
부산 북,강서 을 조영환 전 올인코리아 대표
대구 중,남 조병기 영남문화연구소 대표
대구 동 갑 정해은 자유선진당 대구시당 부위원장 불출마
대구 서 정재현 생활법률무료상담소장
대구 수성 을 이원기 전 한국투자증권 직원
대구 달서 갑 김동국 전 경북대 강사
대구 달서 을 김원이 전 자유선진당 대구시당위원장
대구 달성 서보강 전 대구시의원 사퇴
인천 연수 윤형모 전 인천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인천 부평 갑 이수일 전 국토통일원 정책보좌관
인천 부평 을 이근호 꾸메푸메 어린이집 대표 권한대행
인천 서,강화 을 민우홍 전 인천시의원
광주 동 구봉우 축산경제신문 호남취재본부장
대전 동 임영호 현 국회의원[77]
대전 중 권선택 현 국회의원[78] [79]
대전 서 갑 송종환 자유선진당 청년위원장
대전 서 을 이재선 현 국회의원[80]
대전 유성 송석찬 전 국회의원[81]
대전 대덕 이현 민변 대전충청 지회장
울산 동 김지준 전 울산시의원
세종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
현 국회의원[82]
경기 성남 분당 갑 홍관희 고려대학교 교수
경기 안양 만안 문갑돈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이사
경기 부천 소사 전덕생 전 부천시의원
경기 안산 단원 을 백남오 에스엘하이테크 대표
강원 춘천 류종수 전 춘천시장 불출마
강원 태백,영월,평창,정선 류승규 전 국회의원[83]
충북 청주 상당 김종천 자유선진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충북 청주 흥덕 갑 최현호 충청북도 해병대 전우회장
충북 제천,단양 정연철 전 국회 보좌관
충북 청원 박현하 전 대전광역시 정무부시장
충남 천안 갑 강동복 전 충남도의원
충남 천안 을 박상돈 전 국회의원[84] [85]
충남 공주 윤완중 전 공주시장
충남 보령,서천 류근찬 현 국회의원[86]
충남 아산 이명수 현 국회의원[87] 당선[88]
충남 서산,태안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 당선
충남 논산,계룡,금산 이인제 현 국회의원[89] 당선
충남 부여,청양 홍표근 전 충남도의원
충남 홍성,예산 서상목 전 국회의원[90]
충남 당진 김낙성 현 국회의원[91]
전북 전주 덕진 백병찬 포천 중문의과대학교 객원연구위원
전북 정읍 김정기 자유선진당 문화예술 특보
전북 김제 완주 박용호 호남발전연구원장 불출마
경북 안동 김윤한 전 지방신문협회장 불출마
경북 영양,영덕,봉화,울진 장갑호 대구대학교 겸임교수
경남 창원 마산합포 한경수 창원중앙로터리 분과위원장 불출마
경남 사천,남해,하동 김일수 사회봉사 40년
제주 제주 을 강정희 전 은빛마을노인복지센터 근무

5.2. 총선 패배와 문제점

이 총선 패배는 스스로 자멸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애초에 텃밭이라는 충청남도에서도 30%대 후반의 허약한 지지도가 2010년 지방선거 이래 계속되어 왔고, 그 이후 2년 간 자유선진당은 충청권의 자존심 운운 이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한 게 없었다.

사실 회심의 수가 딱 하나 있었다. 친이와의 연대. 심대평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배신자로 찍혀서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김무성을 끌여들여 실제로 40여석의 3번 정당으로 선거를 치르려고 했었다. 그리고 김무성에게 전권을 넘기기로 약속까지 한 모양. 그러나 김무성이 중간에 대의를 위한 총선 불출마와 백의종군을 선언하면서 불발되었다. # 비밀 해제 MB 5년 사실상 자유선진당의 입장에서는 골든타임이었지만 그대로 실패하고 만 것.

그 밖에도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의 예를 보듯이 자유선진당도 비슷한 성향의 정당인 새누리당과의 연대로 충청권에서 자유선진당 단일 후보를 내고, 그 이외 지역들은 새누리당에게 양보하던가, 아니면 반대로 수도권에서 일정 지역구를 양보받는 대신 자유선진당도 충청권 일부를 양보해주던가 하는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책이라던지 대북 이슈를 선점해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새누리당에서 지속적으로 제의했지만 김무성과 친이계의 합류만 기대하던 자유선진당은 모두 거절했고, 후자의 경우는 박선영 前 의원이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로 단식 투쟁을 벌이는 등 대북 이슈 자체는 먼저 선점했지만 자유선진당은 여기에 거의 관심도 주지 않았고, 그마저도 후반 가서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여기에 대거 동참하는 바람에 결국 이 이슈조차도 뺏기고 말았다. 실제 자유선진당 인사들 중 여기에 그나마 관심을 보인 것은 이회창[92]이었고, 그 이외에 관심을 보였거나 지원해준 것은 전부 한나라당만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는 원칙을 지키는 보수 야당과 제3의 선택이라는 스탠스 하에 새누리당 정권(이명박/박근혜)에 계속 반대하는 스탠스를 취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선진당은 민주당/제3지대 의원도 여럿 섞여 있는 등 은근히 성향도 불분명했으니 새누리당과는 입장에 차이가 있어 새누리당과의 연대는 무리였을 수도 있다.

재보궐 선거에서도 자유선진당은 2008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연기군수와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태안군수만 승리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산시장에서 0.6% 차로 패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연기군은 심대평의 오랜 텃밭이고, 서산시·태안군 지역구는 19대 총선에서 선진당이 승리한 3곳 가운데 하나였다는 거다. 재보궐이 터지는 원인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좋지도 않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공천 과정도 엉망이었다.

6. 총선 후

5월 20일, 말 그대로 올 것이 왔다. 이회창 前 대표가 탈당을 선언했다. 당내 두 축 중 하나인 이회창 前 대표의 탈당으로 자유선진당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았으며, 미미하게나마 남아있던 非충청권의 세도 완전히 상실되었다. 심대평 대표야 칠순을 넘긴 고령인데다가 자신과 자신의 세력이 주도한 19대 총선에서 참패를 했으니 재기 불능.

이런 상황에서 껍데기만 남은 당을 이인제가 접수했다. 자유선진당은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게 되어 자유선진당이란 이름은 19대 국회 시작을 앞둔 5월 29일로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영문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선진통일당은 대선 과정에서 정운찬 전 총리 영입과 일종의 역할론을 펼쳐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끝내 이회창 前 대표와 함께 새누리당과 협력 노선을 구축하더니 아예 11월에는 새누리당과 합당하여 소멸된다. 합당에 반발한 일부 인사들은 민주통합당으로 들어갔다.

7. 출신 인사들의 분포

2020년대 들어서 자유선진당 출신 인사들의 분포는 다양하다. 크게는 국민의힘(심대평, 이인제, 이명수, 지상욱, 한현택 등)과 더불어민주당(황인호, 박용갑, 이용희 등)으로 양분된 상태다. 심지어 친박신당(곽성문 등) 등으로도 인사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만큼 자유선진당의 인적 구성이 다양했다는 소리이다.

한때 바른정당바른미래당에서 자유선진당 세력을 흡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새누리-선진 합당 후 선진계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대거 공천 배제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이동한 것. 실제로 이 당시에 모든 충청권 광자단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승리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때 비노계의 일원으로서 국민의당으로 이동했고, 그 후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을 통해 대부분의 인사가 다시 바른미래당으로 이동했다. 또한, 바른정당에서도 주축 유승민부터 이회창과 연이 깊기도 했고, 정당 성향 특성상 캐스팅보트인 수도권과 충청권에 공을 많이 들여야 했기에,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양당에서 선징당을 이어받으려 노력한 두 세력이 합쳐진 바른미래당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성적은 폭망. 이후 바른미래당이 민생당으로 합당된 후 정당의 성격이 바뀌며 연관성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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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 최고위원이었고,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서울 양천구 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2] 대다수의 친박계가 백의종군하거나 친박연대로 간 것과는 대조적이다. 친박 주류인 서청원, 최경환과의 연관성도 적고, 인지도도 없어서 그런지 박근혜 정부에서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을 맡은 것이 전부.[3]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경남지사직을 사퇴하고 2004년에 열린우리당으로 가서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 이후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4] 이용희, 이상민 의원은 당시 통합민주당 소속이었으나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하여 당적을 옮긴 것으로 다른 민주당계 탈당자들에 비해 합류가 늦은 편이다. 이를 두고 이삭줍기라는 비판이 있자 이회창이 이삭줍기가 아닌 보석줍기라고 대응한 건 유명한 일화. 이 두 명은 후일 자유선진당이 몰락할 즈음에 다시 민주당으로 복귀한다.[5]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쪽도 열린우리당 출신이다. 대전광역시장 공천을 못 받자 지방선거를 앞두고 일찍 열린우리당을 이탈한 것.[6] 당시 충남에서 자유선진당이 아닌 지역구로는 민주당의 1석(천안시 갑), 그리고 당시 무소속의 이인제(논산ᆞ계룡ᆞ금산)였다. 대전에서는 민주당이 1석을 차지했다.[7] 보은군·옥천군·영동군이용희. 그나마도 애초에 민주당계 정당에 오래 몸 담은 열린우리당 탈당파 출신이고, 이후에 다시 민주당계 정당으로 가서 사망하는 날까지 쭉 민주당 당적을 유지하였다.[8] 이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영남권의 총선 결과이다. 대선 때는 20% 안팎의 표를 이회창에게 던진 영남에서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의 득표율이 5%도 넘지 못했고, 대신 친박연대가 역시 20% 정도의 득표율을 올렸다. 대선 당시 박근혜 지지층이 일부는 이명박, 일부는 이회창 지지로 갈라졌다가 총선에서는 다시 친박연대로 결집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9] 충남권의 지지세는 보존했으나, 충북을 포함한 나머지 지역들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고 이 때문에 대선 때와 비교하여 득표율이 반토막이 났다. 참고로 직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올린 15.1%의 득표율이 총선 때에도 이어졌다면 최소 4석의 의석이 추가되므로 선진당은 무난하게 원내교섭단체가 될 수 있었다.[10] 그나마 춘천시에서 당선권에 근접하긴 했으나, 결국은 한나라당 현역 의원이던 허천에게 패했다.[11] 당시 비례대표에서는 원내 제 1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보다 많은 표를 받아 전국 2위를 기록, 총 13석이나 획득했다.[12] 16대[13] 박성범 의원의 아내[14] 12, 13, 14, 15, 16대[15] 17대[16] 이후 대전광역시장 역임[17] 15, 16대[18] 17대[19] 이후 19, 20, 21대 총선 당선[20] 12, 14, 15, 16대[21] 15대[22] 16대[23] 이후 경기도의원 당선[24] 16대[25] 16대[26] 14대[27] 14, 15대[28] 충북도지사를 역임한 정우택과는 동명이인이다[29] 9, 10, 12, 17대[30] 17대[31] 이후 천안시장 역임[32] 17대[33] 17대[34] 이후 19, 20, 21대 총선 당선[35] 15, 16대[36] 15, 16대[37] 17대[2009] [2009] [40] 11, 13, 14대[2009] [2010] [43] 창조한국당의 세력이 미미했지만 사실 아쉬운 쪽은 자유선진당이었기 때문에 원내대표 임기를 길게 정해준 것.[44]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45] 당시 언론에선 문국현의 정치적 자살이라 평하기도 했다.[46] 18대 국회 후반기 상임위 재구성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의석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자신들 몫으로 보건복지위를 가져올 것을 주장했으나, 야당들이 반대했고, 결국 민주당과 합의를 거쳐 후반기에도 보건복지위를 선진당 몫으로 주기로 했다.[47] 운영위(홍준표), 정무위(김영선), 기재위(서병수), 정보위(최병국), 국방위(김학송), 행안위(조진형), 문광위(고흥길), 외통위(박진), 국토위(이병석), 예결위(이한구), 윤리위(심재철)[48] 법사위(유선호), 교과위(김부겸), 지경위(이종걸), 농수산위(이낙연), 환노위(정장선), 여성위(신낙균)[49] 강삼재는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희대 동문이었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이상돈은 국민의당 소속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다.[50] 이상돈 교수의 글에 따르면 자신은 대변인직을 받은 대신 비례대표에 공천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상돈 교수는 당선권 내에 공천될 것이라고 믿었다가 공천 결과가 다르게 나오자 실망한 것 같다.[51]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 충청권 총리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이회창 총재와의 불화가 있었다.[52] 판사 출신이었다.[53] 이 곳은 염홍철 전 시장과 박성효 현 시장의 리벤지 매치였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에 염홍철 시장(열린우리당) 휘하에 있던 박성효 정무부시장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 지선에 나오면서 사이가 험악해졌다. 그 상황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과 "대전은요" 발언을 통해서 박성효가 이겼다.[54] 다만 박성효가 대전광역시장을 4년간 하면서 각종 사업들을 호구 마냥 털려서 평판이 상당히 나빴던 것 덕분에 염홍철의 복귀가 먹힌 점도 있다. 이 시절의 행보 때문에 박성효는 이후로도 대전시장에 꾸준히 출마는 했지만, 족족 낙선하였고, 결국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출마하지 않았고, 현재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 상태다.[55] 이후 박상돈은 체급을 낮춰 천안시장 선거에 도전했고, 첫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두 번째 도전에서 당선되었고, 이후 8회 지선에서도 출마해 당선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56]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전시장에 당선되었으나, 2004년에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했고, 2006년에 열린우리당 디버프를 제대로 받아서 낙선하고, 2008년에 권선택, 이상민 등과 비스무리한 시기에 자유선진당 입당.[57] 배우 심은하의 남편. 대표적인 이회창 라인으로 뽑힌다. 이후 합당 과정에서 새누리당에 합류하며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중구·성동구 을에 공천을 받아서 당선되지만, 이회창 전 총재가 바른정당으로 당적을 옮길 때에 동행한다.[58] 이후 지상욱은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다가,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중구·성동구 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원내에 입성했다. 이후 바른정당에 입당하고 현재는 바른미래당, 새로운보수당을 거쳐 국민의힘 소속이다.[59] 선진 7, 한나라 4, 민주 3.[60] 심대평의 국민중심연합이 공주시 단 1곳에서 승리한 게 전부였다.[61] 이 지역들의 별명이 이용희 나라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용희 의원과 같은 당이면 사실상 누구나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당선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용희 전 의원이 정계를 은퇴한데다가 이용희 의원의 아들 이재한을 상대로 연거푸 승리를 거둔 박덕흠이 내리 4선을 해버린 지금 시점에서는 옛날 이야기지만...[62] 이 때 당선자는 빙그레 회장 김호연. 18대 총선 당시에는 패했지만 이번에는 승리했다.[63] 은평구 을 지역구 의원이 문국현인데, 문국현이 비리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은평구 을에서 내리 3선을 했던 한나라당 후보이자 친이계 실세 이재오 특임장관이 당선되었다.[64] 당시 3선. 물론 7선의 조순형과 5선의 이용희라는 두 거물이 있었지만 민주당계 출신이던 이 둘은 나서지 않았고 이들 다음으로 선수가 높았던 변웅전 의원이 대표로 추대되었다.[65] 다만 이회창이 비록 당 내에서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이었다고는 해도 중간에 공기업 사장을 하느라 지역구를 비운 홍문표에 비해 인지도나 인기나 위상이 더 강력했기 때문에 출마했어도 승리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66]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 이회창 지지를 선언한 자민련 의원들이 줄줄이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을 생각하면 비슷하다.[67] 이 때 김창수도 복당을 시도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혼자만 복당이 거부되었다. 당시 대덕구 당협위원장이던 박영순과 사이가 나빴던 것이 원인으로 추정.[68] 당시에 TK를 상징하는 인물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박근혜였으니 말 다했다.[69]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70] 다만 이용희 의원의 아들 민주당 이재한낙선했는데, 당시에는 지역구 세습에 따른 비판이 더 컸기 때문에 새누리당의 정치 신인 박덕흠이 당선됐다. 또한 옥천군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모친 육영수 여사의 고향인지라 새누리당이 표를 좀 더 얻은 것도 있다. 이 구도는 지금도 굳어져서 20대 총선에서도 또 이재한 후보가 박덕흠 의원에게 패했고, 21대 총선에서는 아예 공천조차도 받지 못했다. 박덕흠이 3선 중진이 된 것은 덤. 이후 22대 총선에서는 사면되고 출마했지만 이번에도 물먹었다.[71] 물론 진보 세력과 참여계가 통합하면서 지지율이 쏠린 것과 선진당의 민주당 출신 의원들과 이회창계가 이탈한 것을 감안해야 한다.[72] 심지어 통합진보당이 충북에서 지지율이 높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73]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썰린 자유민주연합을 생각하면 쉽다.[74] 훗날 명색이 텃밭이라는 호남에서 민주당에 완전히 썰려버린 민생당과 유사하다. 두 당 모두 지난 총선 때 돌풍을 일으켰다가 내부 계파 갈등이 일어나 지방선거에서 완패한 후 다음 총선 때 더욱 크게 참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75] 11,12,14,15,16,17,18대[76] 국민생각과 이중당적[77] 18대[78] 17,18대[79] 이후 민주당 복당 후 대전시장 역임[80] 15,16,18대[81] 16대[82] 17,18대[83] 13,14대[84] 17,18대. 다만 2010년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해서 현직 국회의원이 아니었다.[85] 이후 천안시장 역임[86] 17,18대[87] 18대[88] 이후 20,21대 당선[89] 13,14,16,17,18대[90] 13,14,15대[91] 17,18대[92] 이 말인 즉슨 자유선진당에서 이회창을 빼면 정치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93] 당초 불출마를 선언했던 변웅전은 비례대표 4번으로 공천. 만일, 자유선진당 출신 비례대표 의원 1, 3번 중 하나가 사퇴했더라면 승계를 받아 변웅전은 4선을 할 뻔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94] 당초 서울 중구에 조순형 상임고문을 전략공천할 계획이었으나 3월말에 공천을 반납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이 때 그는 왕년의 동지 정대철의 아들인 정호준 지지를 표한다.[95] 그나마도 이진삼은 공천에서 탈락에 반발해 무소속 출마를 했다. 그러나 선진당 홍표근 후보와 아예 한 자리수의 득표율을 득표한 이진삼의 표를 합쳐도 당선자였던 새누리당의 김근태보다 한참 밀렸다. 정작 김근태도 1년만에 의원직을 잃는 바람에 이 자리는 자민련 출신 친박계 거물인 이완구가 차지한 상태.[96] 송석찬 前 의원은 원래는 오랜 동교동계였다. 16대 총선 전후로 새천년민주당 소속. 당시 자유민주연합은 참패하여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했다. 민주 - 자민련, 즉 DJP 연합은 일단은 한번 깨진 상태였으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견제하기 위해 '공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송석찬 후보와 충청권 2명의 의원을 탈당시켜 자민련에 입당시키는 '의원 꿔주기'를 시전한다. 이때 송석찬이 남긴 불후의 유행어'한 마리 연어 되어 (민주당으로) 돌아가겠다'(...) 나중에 자민련의 강창희 의원[101]이 이에 반발해 출당되면서 한 명 더 보내야 했다. 송석찬은 나름 충정으로 맡은 고육지책이었으나, 결국 이로서 철새 정치인으로 이미지도 구긴데다가 설상가상으로 16대 대선 당시 후단협 활동까지 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고 말았다. 그래서 17대 총선에는 나오지도 못 했고[102] , 이후 지방선거에서 구청장 공천도 못 받는 바람에 이리저리 원외 신세를 돌고 고깃집을 운영하다가 이상민 의원이 나간 뒤에야 돌고돌아 간신히 민주당에 복당한 상황이었다.[97] 지방행정가로서의 심대평은 전설을 쓴 인물이었다. 하지만 중앙정치인으로서의 감각은 영 시원찮았다는 것이 중론.[98] 17대 총선에서 전국구 1번을 고수한 김종필 수준이었다.[99] 이해찬 전 총리는 관악구 을에서 13~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100] 이해찬 이후 구민주계 출신 김희철관악구청장이 18대 의원을 지냈고,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대표인 이정희가 단일 후보로 나가나 싶었지만, 여론 조작 논란에 사퇴하고 이상규를 내보내서 이상규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상규는 통합진보당 해산에 따라서 의원직을 잃고,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정태호이해찬의 적인 정동영을 꺾고, 새누리당 후보오신환이 당선되어 27년만에 보수정당 의원이 관악구 을 국회의원직에 앉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