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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4 00:06:04

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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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성
2.1.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2.2. 원인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2.3. 인과엔 방향이 있다2.4. 원인과 결과는 관련되어야 한다2.5. 과학철학적 맥락
3. 고전적인 형이상학 견해들
3.1.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3.2. 데이비드 흄의 인과 회의주의
3.2.1. 전제(1): 인과적 추론의 합리성?3.2.2. 전제(2): '힘'과 '필연적 연결'?3.2.3. 흄의 인과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3.2.4. 관련 문단
3.3. 프리드리히 니체의 '계보적' 분석3.4. 데이비드 루이스의 반사실적 접근
4. 창작물
4.1. 전략인간병기 카쿠고에 등장하는 가공의 무술4.2. 애니메이션 UN-GO의 등장인물4.3. 게임 및 레벨 디자인에서의 인과
5. 관련 문서

1. 개요

/ Causation

'무언가를 일으키는 것'과 '무언가에 의해 일어난 것', 혹은 그 둘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 쉽게 말해 원(因)과 결(果)이다.

예를 들어 선풍기 사망설에 따르면 "선풍기 바람은 사람의 죽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게임 중독법이 발의된 논리에 따르면 "각종 범죄 사고는 게임 중독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과학은 이러한 잘못된 견해들을 바로잡고, 그 대신 자연과 사회에서 정말로 벌어지는 인과 관계를 올바르게 규명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활동이다.

우주와 인간의 역사는 이런 인과 관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짐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고 흔히 인식되고는 한다.

철학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연구된 개념 중 하나이며, 주로 형이상학의 주제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본 위키 페이지에서도 '인과' 개념을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규명 혹은 정의하려는 시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세계를 구축하고 이끄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2. 특성

임의의 순서쌍 (x,y)( x,y )를 두고 그 순서쌍이 인과에 해당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과학, 역사 같은 지식이 충분히 갖추어졌다는 전제하에서 직관적으로 판단 가능한 것 같다.
예시:
  • '큐대에 맞은 당구공 a가 또 다른 당구공 b를 쳐서 b가 굴러갔다': 인과 O
  •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졌다': 인과 X
이때 직관적으로 '인과'에 해당하는 사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인과'에 해당하는 사례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띤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여겨진다.

2.1.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임의의 사물, 사건, 혹은 현상에 관하여 그게 이루어지게끔 한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직관. 즉 그 원인을 따질 수 없는 사물, 사건, 혹은 현상이란 없다. 전통적으로 충분 이유율(The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이라고 불린다. 종종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는 원리와도 엮인다.

그 어떤 사물/사건/현상이 되었든, 설령 그걸 현재의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한들, 원리적으로 그 사물/사건/현상은 규명 혹은 설명이 가능하며, 또한 가능해야만 한다는 직관을 반영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는 과학자들의 격언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다만 충분 이유율은 흔히 유신론의 옹호 논변에서 동원된다는 점에서 논란을 낳고는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라이프니츠가 충분 이유율을 근거로 삼아 소위 '우주론적 신 존재 논변'을 제시한 것이 유명하다.

2.2. 원인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

원인은 그에 대응하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일으킨다고 보는 직관. 즉 원인이 주어졌는데 결과가 뒤따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과 관계는 우연적인 관계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까마귀가 나무에서 날아갔는데 배가 떨어졌다'는 것을 대개 인과로 보지 않는 까닭은 그게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의학에서 특정한 시술이나 투약이 질병을 치료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생각에 기초한다.

2.3. 인과엔 방향이 있다

'인과는 거꾸로 흘러가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 간의 관계는 일방향적이지 쌍방향적이지 않다'는 직관. 이는 곧 형식논리적으로 인과 관계 CC가 반대칭(anti-symmetric)적이라는 논제('xy:(xCyyCx)(x=y)\forall x \forall y: (xCy \wedge yCx) \to (x=y)')로 표현된다.[1]

'원인과 결과는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는 견해는 바로 이러한 직관에 기초한다. 결과가 원인보다 시간상 앞설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의미에서 반대칭성을 띠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여행과 관련된 여러 역설들, 그리고 뉴컴의 역설 역시 이러한 직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다만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반대칭성을 위반하는 인과 관계가 발견된다는 지적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양자역학에서 양자 얽힘 현상과 관련해 '지연된 선택 양자 지우개' 실험이 이렇듯 반대칭성을 위반하는 "역행적 인과"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게 아니냐는 견해가 있다.[2]

2.4. 원인과 결과는 관련되어야 한다

원인과 결과는 그 내재적인 성질에 있어서건, 외재적인 관계에 있어서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직관. 즉 원인과 결과는 서로 충분히 관련되어야만 한다. 두 변인 A와 변인 B 각각이 따로따로 제 3의 변인인 C와 연결된 경우, A와 B는 "충분히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는 구분된다. 거짓 원인의 오류도 참조.

"내재적 성질에서 동떨어진" 것의 사례로는 영혼 간의 관계가 있다. 설령 비물리적인 영혼이 정말로 있다고 한들, 그런 영혼은 물리적인 몸과는 인과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 같다. 하나는 물리적이고 다른 하나는 비물리적이라는 점에서 내재적 성질상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는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공주가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가한 대표적인 비판으로 유명하며, 심리철학의 효시가 된 논변이기도 하다.

"외적 관계에서 동떨어진" 것의 전통적 사례로는 사물들 간에 물리적 거리가 떨어진 경우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는 물리적으로 떨어진 두 사물들 간의 인과, 혹은 원거리 작용(action at a distance)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다만 해당 사례는 만유인력의 발견 이후부터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결국 EPR 역설이 논파됨에 따라 결정적으로 논파되었다고 여겨진다.

2.5. 과학철학적 맥락

인과,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과적 설명 및 인과적 추론은 과학철학의 핵심적 주제이기도 하며, 곧 다양한 과학철학적 개념들과 연관된다.

3. 고전적인 형이상학 견해들

3.1.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3]

아리스토텔레스는 임의의 사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 질문들에 대한 답이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 "왜" 질문에 대한 대답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원인(αἴτιον)"이라고 간주했다.
사물 ''x''의 네 가지 원인:
  • 질료인(material cause): "x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 e.g. "뽀로로 피규어는 합성수지로 이루어져 있다."
  • 형상인(formal cause): 'x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 e.g. "뽀로로 피규어가 된다는 것은 뽀로로 모양을 띤다는 것이다."
  • 작용인(efficient cause): "x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 e.g. "뽀로로 피규어는 일련의 조형 기술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 목적인(final cause): "x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 e.g. "뽀로로 피규어는 뽀로로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인과 목적인이 많은 경우에 일치한다고 보았으며, 이 목적인이 질료인이나 작용인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에도 자연을 설명하는 데 '목적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 맞서 목적론을 옹호하는 논변을 『자연학』에서 제시했다.

현대에도 여전히 목적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일반적이며, "원인"이라고 할 땐 작용인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진화론에서 자연선택에 기초한 설명이 '목적인'과 맥락을 같이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에 관한 찬반 논란이 이루어지고 있다.[4] 어쨌거나 대부분의 과학 분야에서 목적인이 영향력은 거두어졌으나 생물과 진화에 관련된 쪽에서는 아직 논란이 조금 남아있다는 정도.

3.2. 데이비드 흄의 인과 회의주의

데이비드 흄경험주의 철학에 근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인과' 개념을 검토한다. 『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4장-7장에서 제시되는 흄의 결론은 적어도 전통적인 '인과' 개념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상 인과적 추론을 한다. 흄이 드는 대표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원인: 에 얼굴을 담그고 꺼내지 않는다.

결과: 익사한다.

이런 인과적 추론을 할 때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를 받아들이고는 한다:
* 전제(1): 우리는 합리으로 위와 같은 인과 관계를 밝혀낸다.
* 전제(2): 인과는 모종의 (force, power, energy)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물에서 익사하는 까닭은 어떤 화학적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하지만 흄은 위 두 전제 모두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3.2.1. 전제(1): 인과적 추론의 합리성?

전제(1)이 옳다면 "에 얼굴을 담그고 꺼내지 않는다"에서 "익사한다"를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어야 한다. 합리적 추론의 한 가지 후보는 연역추론이다. 하지만 연역추론 같은 선험적(a priori) 추론은 수학엔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인과 관계를 밝혀내는 데는 쓸모가 없다.
최초에 아담이 제 아무리 완벽한 합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들, 물의 유동성투명성만 가지고는 물에서 익사할 수 있다는 것을 추론해 낼 수 없다.
데이비드 흄, 『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23절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귀납추론이다. 하지만 흄은 귀납추론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강력한 증명을 제시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데이비드 흄의 '귀납의 문제' 참조.

이렇듯 연역추론과 귀납추론 모두 원인에서 결과를 추론하는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곧 당초의 전제(1)은 양도 논법에 의해 기각된다. 그렇다면 원인에서 결과는 어떻게 추론되는가? 흄에 따르면 인과적 추론은 순전히 습관(custom, habit) 덕분에 이루어진다. 즉 파블로프의 개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과 관계를 밝혀내는 것은 합리성 덕분이 아니다.

3.2.2. 전제(2): '힘'과 '필연적 연결'?

전제(2)가 옳다면 인과 관계는 원인의 어떤 힘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 힘은 원인과 결과를 필연적으로 연결(necessary connexion)한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맨 얼굴로 물속에 얼굴을 계속 넣고 있으면 반드시 익사하는 것 같다.

흄의 경험주의 인식론에 따르면 오직 경험에 기초한 것만이 유의미한 관념이다. 즉 '힘'이니 '필연적 연결'이니 하는 것도 어떤 경험에서 유래하는지를 밝혀낼 수 없다면 무의미한 허상일 따름이다. 흄은 그런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 보지만 결국 '힘'이나 '필연적 연결'에 대응하는 경험적 인상은 없다고 단정한다. 즉 익사를 일으키는 의 '힘'인 모종의 화학적 성질 같은 관념은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아주 일상적인 사건에서조차 어떤 원인의 힘(energy)이라는 것은 [...]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금세 알아차린다.
데이비드 흄, 『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54절

그렇다면 우리가 "인과 관계"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는 대체 무엇인가? 이는 그저 어떤 두 사건 혹은 관념이 연속으로 일어난다는 것일 따름이다. 시공간적으로 근접해 있거나(contiguous) 닮은(resemble) 사건들을 누차 경험하면 이들 사건들이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고 부르는 것은 고작 이렇듯 상시 달라붙은 사건들(constant conjunction)에 불과하다.

즉 우리는 '물에 맨 얼굴을 담그는 사건'과 '사람이 익사하는 사건'이 어쩌다 보니 연속으로 발생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고서 전자가 '원인', 후자가 '결과'라고 부르는 것일 따름이다. "물에 맨 얼굴을 담그는 것 때문에 사람이 익사한다"에서 "때문에"는 상상력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제(2)는 틀렸다는 것이 흄의 논변이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뒤따르지만, 우리는 결코 두 사건이 엮인 것(tie)을 관찰할 수 없다. 그 사건들은 그저 달라붙은(conjoined) 것처럼 보일 뿐, 결코 연결되지(connected) 않았다.
데이비드 흄, 『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58절

3.2.3. 흄의 인과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

귀납추론에 관한 회의주의와 더불어 이와 같은 흄의 "인과적 회의주의" 또한 서양 철학사에 많은 영향력을 남겼다. 그런 인과 회의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반응들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3.2.4. 관련 문단

3.3. 프리드리히 니체의 '계보적' 분석

3.4. 데이비드 루이스의 반사실적 접근

4. 창작물

4.1. 전략인간병기 카쿠고에 등장하는 가공의 무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로식 방위술 문서
번 문단을
1.2.1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2. 애니메이션 UN-GO의 등장인물

일본어 발음으로는 인가라 불린다. 이름의 유래는 역시 1.

4.3. 게임 및 레벨 디자인에서의 인과

환경(레벨)에 위치한 각 요소들이 서로 연결된 것으로 회사마다 이를 칭하는 것도 제각각이다. 핵심은 여기에 개연성(레벨 디자인)을 더해, 플레이어가 전등 스위치를 켜서 '원인'을 제공하면 불이 켜지든 (고장난 상태라면) 작동이 안 된다는 메시지나 켜졌다 꺼졌다 하든 혹은 스파크가 튀든 간에 상식적으로 그럴듯하게 납득 가능한 사유를 '결과'로서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작동할 것 같은 사물에 사용 키를 눌러도 무반응이거나 그동안 학습했던 것과는 반하는 결과를 보여줄 경우, 플레이어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참고로 퍼즐 요소에서 응용할 일이 많다.

5. 관련 문서


[1] 비대칭적(asymmetric; 'xy:xCy¬yCx\forall x \forall y: xCy \to \neg yCx')인 게 아니라 반대칭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중 하나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원인인 가능성, 즉 '자기 원인(causa sui)'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흔히 기독교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러할 것이라고 간주된다.[2] https://en.wikipedia.org/wiki/Delayed_choice_quantum_eraser[3] http://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causality/ 참조[4] 찰스 로버트 다윈 자신은 연구 저작에서 "목적인" 개념을 사용한 기록을 많이 남겼으며, 또한 진화론을 목적론으로 파악한 아사 그레이(Asa Gray)의 견해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표한 바 있다(Lennox, J. G. (1993). Darwin was a teleologist. Biology and Philosophy, 8(4), 409-421.). 물론 다윈의 입장이 맞는지, 또한 그게 현대 진화생물학에 제대로 부합하는지 여부는 또 전혀 다른 문제다. 스탠포드 철학 백과 참조.[5] 인터넷에 문과와 이과의 생존율 차이라고 한 부분을 조명하는 우스운 짤방이 돌아다니는데, 문과의 경우 어떤 기계를 조작하고 화상을 입자 그 기계의 조작을 그만두기에 생존율이 높지만, 이과의 경우 어라? 하면서 어떤 조건에서 화상을 입는 것인지 계속 실험해 보기에 생존율이 낮다는 것이다. 즉 흄이 제시하는 귀납은 대단히 단순한 종류인데,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는 귀납을 훨씬 고도하게 사용하고 있기에 흄의 설명은 문제가 된다는 주장.[6] 그러나 이 비판 자체가, 흄은 자연의 제일성(uniformity of Nature)에 대해 직접적으로 지적하지 않았으므로, 흄을 똑바로 저격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비판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연의 제일성이란 어제가 그렇듯이 오늘도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귀납논증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흄은 이를 비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확히 얘기해서 흄의 공격은, 자연의 제일성에 대해 가했던 것이 아니라, 귀납논증의 근거 부분이 문제가 있다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흄이 제기한 열거 귀납이 너무 간소하다는 비판은 곧 흄이 자연의 제일성을 공격하였으며 자연의 제일성이 정당화될 수 없다면 귀납적인 실천을 정당화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흄의 정확한 주장은 귀납논증의 근거가 부적당하다는 것이므로 이 비판은 핀트가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 역시 의문스럽다. 흄은 귀납논증의 근거가 부적당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귀납논증의 근거가 곧 자연의 제일성이 아닌가? 그러므로 귀납논증의 인식론적인 근거에 대한 공격과, 자연의 제일성에 대한 공격이 유의미한 차이가 나는 것인가? 싶은 의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