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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talo-Turkish War1911년 9월 29일부터 1912년 10월 18일까지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었던 페잔과 트리폴리타니아 일대(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2. 배경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무능한 술탄들의 연이은 즉위로 쇠약해져 망국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미 알제리, 튀니지, 이집트, 키프로스를 상실하였고, 발칸 국가들은 사실상의 독립 상태에 있었다. 리비아 역시 해안 지역만 오스만 직할령이라 할 수 있었고, 내륙 지역은 수피 종단인 세누시야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한편 1870년 리소르지멘토 (이탈리아 통일) 후 이탈리아 왕국은 다른 열강들처럼 해외 식민지 건설을 추진하였고, 그 주요 대상은 지중해 건너의 리비아였다. 1878년 오스만 제국의 대러시아 패전과 베를린 회담 때부터 이탈리아는 튀니지를 얻은 프랑스, 키프로스를 얻은 영국과 물밑 접촉을 하며 리비아 진출을 꾀하였다. 마침내 1887년 이탈리아는 영국의 이집트 지배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영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밀약을 체결하였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패배로 한동안 혼란에 빠졌던 이탈리아 왕국은 국내 혼란을 잠재우고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더욱 집요하게 오스만 제국령 리비아를 노리게 된다.
1902년에는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승인하는 대가로 프랑스 역시 이탈리아의 리비아 지배를 지지한다는 밀약을 맺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호의를 보인 것은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동맹에 있어
다만 지오반니 지올리티 총리는 오스만 제국이 삼국동맹의 일원인 독일의 동맹인 것을 감안하여 민족주의자들의 침공 주장을 애써 묵살하였다. 대표적으로 1911년 오스만령 알바니아의 봉기 당시 지오반니 총리는 개입을 거부하였다. 다만 그해 4월 모로코의 아가디르 위기 때에 독일이 프랑스와 협상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리비아 침공을 결심하였다. 독일은 우선 대화를 해보자며 설득했고, 오스트리아는 리비아 침공으로 오스만 제국이 더 약화된다면 발칸 반도의 불안이 극대화되어 유럽의 힘의 균형이 깨질 것이라 경고했지만 이미 삼국협상 측의 지지를 얻어낸 이탈리아 측의 의지는 확고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를 포함한 이탈리아 사회당 역시 전쟁 반대를 외쳤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오스만 조정에 최후 통첩을 보내었다. (1911년 9월 27일) 오스만 조정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재로 (영국령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통치권을 평화 이양하되 명목상의 지배권이라도 지키려는 의사를 타진했지만, 지오반니 총리는 이를 거부하고 29일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3. 전쟁 진행과 결과의 요약
이탈리아는 오스만령 리비아의 해안에 쉽게 상륙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오스만 제국군의 연이은 저항에 막혀 내륙 지역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교착 상태가 계속되어 전쟁이 1년째 지속되었지만 이탈리아가 전쟁 중에 획득한 지역은 몇 개의 해안 지대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때 이탈리아군의 병력이 오스만군의 2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중 발칸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가 패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은 당시 여러 강대국들이 이권을 가져가기 위해 노리고 있을 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생각은 없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자 비교적 우방국에 속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조차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리비아 침략을 방관했으며, 이해관계가 겹치지 않아 제일 사이가 괜찮은 독일까지도 오스트리아의 눈치를 봐서 방관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 홀로 맞서는데 한계가 있어 리비아를 넘겨주어야 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이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오스만 본토에 가까운 도데카니사 제도에 상륙하여 점령했다. 결국 발칸 전쟁을 치르던 와중에 이탈리아까지 위협해오자 오스만 제국은 어쩔 수 없이 리비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점령한 도데카니사 제도는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한테 반환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통치했다.
4. 상세 전황
4.1. 리비아 해안 지대
오스트리아와의 협상이 실패한 후 이탈리아는 곧바로 함대를 발진시켰고, 이미 선전포고 전날 밤부터 트리폴리 근해에 출몰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함대는 10월 3일부터 항구를 포격했고, 다음날부터 1천 5백의 수병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당시 리비아 주둔 오스만 군대는 전부 예멘의 반란 진압에 투입된 상태였기에 겨우 군사경찰 정도만 있었고, 10월 5일 (혹은 10일)에 트리폴리는 손쉽게 점령되었다. 그후 2만의 이탈리아 군대는 해안 곳곳에 상륙하여 토브룩, 데르나, 쿰스를 점령했고 10월 19일에는 하루 간의 전투 끝에 벵가지를 점령했다. 다만 10월 23일, 트리폴리 인근의 샤르 앗-샤트에서 현지 아랍 기병대의 기습으로 5백여 이탈리아 군이 섬멸되었다. 그중 포로로 잡힌 3백여명은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분노한 이탈리아 군은 바로 다음날, 트리폴리 인근 메흐시야 오아시스 마을을 공격해 4천에 달하는 주민 중 상당수를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1백여 주민이 피신한 모스크를 그대로 방화하는 만행도 저질렀고, 이에 다른 유럽 국가들이 비판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피살당한 자국 군인 사진을 게시하며 학살을 정당화하는 추태를 보였다.벵가지 방면에서도 2만의 세누시-오스만 군대가 밤낮으로 이탈리아군 주둔지를 습격했고, 11월 30일에는 대대적인 습격에 나섰다. 이후 보병과 군함이 증원된 벵가지 주둔 이탈리아 군은 12월 14-15일 오스만 군의 2차 대공세를 함포 사격의 도움으로 격퇴했으나 여러 문의 야포를 상실했다. 데르나 남쪽에서도 3천 5백여 세누시-오스만 군이 반격을 준비했다. 이에 이탈리아 군은 10만으로 증설되었고, 인류 첫 정찰기 및 폭격기까지 동원되었다. 해군 전력이 전무해 제대로 증원군을 보낼 수 없던 오스만 측은 엔베르 베이, 무스타파 케말 베이, 알리 페트히 베이, 누리 베이 등의 장교들을 의사나 기자 등으로 위장시킨 채 파견하여 현지 무자헤딘들을 훈련시켰다. 여기에 10대의 오스만 황자 (무라트 5세의 손자)인 셰자데 오스만 푸아드도 파견되어 황실의 지지를 전달했다. 무스타파 케말 베이는 작전 도중 포탄의 파편에 눈을 다치기도 했다. 이집트와 튀니지 쪽에서 보낸 민간 지원 덕에 세누시-오스만 군대는 저항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에 이탈리아 군은 이집트발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토브룩과 메르사 마트루 사이의 이집트령 도시인 시디 바라니를 점령하고 해안을 봉쇄했다. 12월 4일, 이탈리아 군은 잠깐의 포격 후 토브룩에 상륙해 쉽게 도시를 점령했다. 하지만 12월 22일, 무스타파 케말과 엔베르 베이가 조직한 1천의 세누시 군대가 새벽에 토브룩 인근 나두라 언덕을 습격했다. 무방비 상태이던 이탈리아 군은 기관총 3정과 탄약을 둔 채로 도주했고, 이후 세누시 군은 이탈리아측 지원군마저 격퇴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세누시 지휘관 셰이크 무베라가 전사하긴 했지만, 이로써 이탈리아 군은 한동안 토브룩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다. 승리 이후 무스타파 케말은 데르나 전선으로 재배치되었고, 그가 조직한 1천 5백의 세누시 군대는 1912년 3월 3일에 데르나 인근에서 참호를 파던 이탈리아 군을 습격해 거의 포위에 성공했으나 원군이 다가오자 철수했다. 그해 9월 14일, 이탈리아 군은 엔베르 베이가 지휘하는 데르나 인근 세누시 진영을 공격해 격전 끝에 승리했다. 이후 전선은 고착화되었고, 이탈리아의 지배력은 트리폴리 인근 10-15km 일대 외에는 해안 거점들에 국한되었다.
4.2. 지중해 전역 (도데카니사 제도)
1911년 11월 5일, 이탈리아는 리비아 병합을 선포했으나 여전히 지배력은 해안에 국한되었다. 1912년 5월, 리비아 전선이 고착화된 대신 이탈리아 군은 빠르게 에게해로 진출하여 로도스 섬을 비롯한 12개의 도서를 점령했다.1912년 1월 7-8일,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함대는 홍해의 쿤파다 해전에서 8척의 오스만 함대를 괴멸시켰다. 2월 24일에는 이탈리아 함대가 베이루트 항에 정박해 있던 8척의 오스만 함선들을 모두 침몰시켰고,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홍해와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7월 18일에는 이탈리아 해군의 어뢰함이 다르다넬스 해협까지 출몰했다.
4.3. 우시 조약 (1차 로잔 조약)
장기화된 게릴라전에 지친 이탈리아는 발칸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다른 열강들의 압력을 받아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에 나섰고, 1912년 10월 18일에 우시 조약 (혹은 1차 로잔 조약)을 체결했다. 다만 이미 그 10일 전에 1차 발칸 전쟁이 터져 오스만 제국이 대대적인 위기에 처하자, 이탈리아는 약속했던 로도스 반환을 이행하지 않고 그대로 영유했다.[2] 한편 조약에서 트리폴리와 벵가지 주민들은 자체적인 나이브와 카디를 선출해 오스만-이탈리아 정부의 상의 하에 임명되는 것을 보장받았으나 이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5. 매체에서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The Great War Redux 모드에서는 이탈리아 왕국이 중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찍어 이 전쟁을 시작한다. 오스만 제국으로 플레이할 경우, 중점 채택과 동시에 리비아의 도시들이 이탈리아에 점령된 상태로 시작하는데, 미리 주변 지역에 사단들을 배치해두었다가 역으로 포위하면 매우 쉽게 이길 수 있다. 만일 진다면 도데카니사 제도가 할양되어 협상국과 싸울 때 매우 골치아파지니 주의해야 한다.반면 이탈리아 왕국으로 플레이할 때에는 해군을 풀어 제해권을 잡고 이집트 태수국과 오스만령 리비아의 국경에 사단을 상륙시킨다. 그 후 오스만 사단을 포위하면서 진행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