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닉제
이인제의 선거포스터 목록 목록을 보면 3번의 민자당 소속 출마 말고는 전부 소속당이 다르다
2008년에 만들어진거라 이미지에는
2008년 최저득표율로 당선되었을 당시 개표 방송 영상. 당선자 치고는 득표율이 상당히 낮다.[1][2] |
이인제의 당적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번 | 당적 변경 | 시기 | 사유 |
1 | 통일민주당 → 민주자유당 | 1990.1.22 | 3당합당에 따른 소속변경 |
2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1995.12.6 | 당명변경 |
3 | 신한국당 → 국민신당 | 1997.10.10 | 대선 경선불복에 따른 탈당 및 신당창당, 독자세력화 |
4 | 국민신당 → 새정치국민회의 | 1998.9.28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패배로 독자세력화 실패 후 여당 합류 |
5 |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 2000.1.20 | 당명변경 |
6 |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 2002.12.1 | 대선 경선불복에 따른 탈당 |
7 | 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 | 2005.12.7 | 자민련-국민중심당간 합당 합의에 따른 선도탈당[3] |
8 | 국민중심당 → 민주당 | 2007.5.11 | 대선후보 출마 목적 |
9 | 민주당 → 중도통합민주당 | 2007.6.4 | 중도개혁통합신당(김한길계)과 합당 |
10 | 중도통합민주당 → 민주당 | 2007.8.13 | 김한길계 집단탈당 후 당명변경 |
11 | 민주당 → 통합민주당 | 2008.2.17 |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 |
12 | 통합민주당 → 무소속 | 2008.3.17 | 총선 공천탈락 불복 |
13 | 무소속 → 자유선진당 | 2011.11.16 | 충청권 정치세력 결집 |
14 | 자유선진당 → 선진통일당 | 2012.5.29 | 당명변경 |
15 | 선진통일당 → 새누리당 | 2012.11.16 | 흡수합당 |
16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2017.2.13 | 분당 후 당명변경 |
굵은 표시가 자의적인 당적 변경이다. 같은 합당에 의한 당적 변경이래도 1번이나 9번의 경우 소속 의원이었기에 합당에 끌려가는 종속관계여서 자의적 변경에서 제외했고, 4번, 11번, 15번처럼 자신이 당 대표나 지도자인 상황에서 합당을 결행한 경우에는 자의적 변경에 포함시켰다. 그래도 총 16번의 당적 변경 중 8번이 자의적 변경이다.(...)
사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단순 당명변경 등 당적을 옮긴 횟수로 매도된 부분도 없지않아 있다 그를 변명(?)해주기 위해 이부분을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 1번 : 통일민주당에서 민주자유당으로의 당적변경은 3당 합당에 따른 것으로 초선의원인 이인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당시는 보스정치가 심했기에 보스가 결정하면 그냥 따라야했다. 같은 당 동료의원인 노무현, 김정길처럼 탈당할 수도 있지만 저 둘의 이후 정치행보(부산에서 낙선 낙선 낙선...)를 보면 현명한 선택이었고[4], 어차피 3당합당에 반대하여 탈당한들 당적변경 리스트에 올라가긴 똑같다.(...) 사실 3당 합당으로 인한 당적변경은 당적변경 횟수에 포함시키지 않는 편이다. 그냥 이인제라(...) 카운팅해주는 것이지, 이걸 당적변경으로 카운팅하면 김무성도 당적변경이다.
- 2번 : 민정계를 숙청한 김영삼 대통령이 당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단순히 당명과 로고를 바꾼 것이다. 이 역시 일반적으로 당적변경에 카운팅하지 않는다.
- 3번 : 뭐라 변명할 수 없는 이인제 탈당 전설의 시작.(...)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가 경선불복하고 탈당하여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한 것이다. 다만 후술된 것처럼, 탈당이 이 한번으로 그쳤다면 오늘날의 전설적인 불사조 이인제의 명성은 없었을 것이다. 6번 사례에서 같은 짓을 또 해서 철새 이미지가 완전히 못박힌 셈[5].
- 4번 : 1번과는 달리 명백히 본인이 당 대표인 상황에서 당을 해산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다만, 이인제도 나름대로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독자세력화를 시도했으나 기초단체장 1명, 그것도 고향인 논산시장 1명 당선시키는데 그쳐서 절망적인 상황이긴 했다. 친정인 신한국당의 후신 한나라당으로 가자니 당시 당권을 쥔게 바로 그 이회창이라 입당시켜 달라 해도 거부할게 분명했다.
이회창 : 너 이 생퀴!! 여기가 어디라고 와?!
- 5번 : 2번과 똑같다.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의도로 확대개편되어 당명을 변경한 것이니 당적변경이라 하기 힘들다. 사실 여기까진 철새 이미지가 크진 않았다.
- 6번 : 이인제의 철새 이미지를 크게 부각시킨 경우.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하였고, 이에 따라 노무현을 도저히 지지할 수가 없어서 탈당했다고 본인도 스스로 밝혔다. 노무현같은 급진좌파를 절대 지지할 수 없었다나...(...) 다만 탈당까진 좋은데 한나라당을 가자니 안받아줄게 뻔해서(이때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또 이회창이었다.) 지역정당인 자유민주연합을 선택했다.
- 7번 : 탈당이긴 한데 좀 사정이 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겨우 4석 얻고 몰락한 자민련은, 심대평 충남지사측이 창당한 국민중심당과 지역정당 경쟁에서 압도당하고 있었다. 때문에 최후의 자민련 당 대표 김학원은 심대평과의 협의를 통해 국민중심당 주도의 양당합당을 약속하고, 이를 위해 당 대표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3명을 먼저 탈당시켜 국민중심당에 합류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때문에 이인제 외에 류근찬, 김낙성 의원도 같이 탈당하여 국민중심당으로 이적한다. 단, 이후 김학원-심대평 합의가 파기되면서 김학원은 자민련을 국민중심당에 합당시키지 않고 한나라당에 바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8번 :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충청지역정당 노선을 고집했던 심대평과의 갈등으로 당시 중도세력 통합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민주당으로 이적한다.
대권을 향한 그의 굳은 의지
- 10번 : 9번 상황에서 김한길계가 도로 탈당(...)하면서 민주당 지도부가 당명과 로고를 원상복귀시킨 경우로 역시 카운팅되지 않는다. 다만, 이인제는 민주당을 그대로 접수하여 대선에 나선다. 만약, 경선에 졌다면 또 어디론가 탈당했을 수도...
- 11번 : 제17대 대통령 선거 참패 후 대통합민주신당의 손학규와의 협상을 통해 당을 통합시킨다. 단, 협상 자체는 당 대표인 박상천이 주도했고 이인제는 민주당의 당세가 워낙 기울어졌기에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지라 당적변경 카운팅에 포함시키긴 애매하다. 일단은 포함시키는 쪽이 대부분.
- 12번 : 명색이 대선후보였지만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이 공천을 안 줘서(...) 탈당했다.
솔직히 주고 싶겠냐?보통 공천불복 후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하는 경우도, 이후 당적을 옮기지 않고 복당하는 전제하에 당적변경 카운팅을 안하지만 이인제는 민주당에 복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기쯤 오면 이인제의 철새 이미지가 워낙 확고하게 못박힌 탓에 또 철새짓을 했다고 욕먹기보다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웃음거리나 되고 말았다.
- 13번 : 드디어 이회창과 해후했다! 사실 이는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인데, 이인제는 민주당을 탈당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3년여동안 무소속이어서 많은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이회창은 창조한국당과 연합해 만든 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연대가 문국현 의원직 상실로 해체된데 이어, 당 운영과정에 불만을 품은 심대평의 이탈과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2010년 재보궐선거의 참패 이후 당세를 어떻게든 늘리고 충청지역 정치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 14번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이 거의 멸망(...)하고 이회창, 심대평이 정계은퇴를 하면서 마지막 남은 거물 정치인인 그가 당을 떠앉게 된다. 이인제는 나름대로 당을 살려보려는 의지에서 당명을 선진통일당으로 바꾼다. 역시 당적변경 카운팅에 포함되진 않는다.
- 15번 : 이명수 의원이 당을 탈당하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의 입지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상황에서 전략적 판단으로 새누리당에 당을 흡수통합시킨다.
- 16번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비박계가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바른정당을 창당하자, 새누리당은 당명을 공모하여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이때 이인제는 의외로(?) 친박계에 붙어 잔류하였다. 단순한 당명 변경이고 이인제 본인도 낙선한 상태이기 때문에 당적변경에 카운팅되지 않는다.
이처럼 당적변경 16회 중 단순 당명변경(2, 5, 9, 10, 14, 16)인 경우와 소속의원으로서 당 지도부의 통합 결정에 따른 경우(1번, 7번)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이인제의 당적변경 횟수는 7~8회라 할 수 있다. 아래 내용이 있는 TV조선 강적들의 경우 11번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합당을 자의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7회로 정리한 것이고, 양당 합당 과정에서 이인제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보는 쪽에서는 8회로 본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인제의 이미지를 완전히 철새정치인으로 못박아버린 가장 중요한 당적변경 이력으로는 3, 4, 6번을 꼽는 경우가 많다. 즉,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 불복하여 탈당한 뒤, 민주당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민주당 경선에 불복하여(...) 탈당함으로써 양대 정당을 모두 적으로 돌려버린 데다 한번 통수치고 튀어서 들어간 데에서 또 통수치고 튀었다는 배신자 이미지가 완전히 고정되어 버린 셈. 불복으로 인한 탈당만 3번인 것을 보면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듯하다. 이제는 탈당을 하든, 또 뭔 짓[6]을 하든 간에 이인제 또그러냐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 편이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대표적인
2012년에는 딴지일보에서 기네스북에 '당적 변경 횟수 세계 신기록' 부분에 이인제를 등록시켜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기네스북측에서 그런 기록은 취급 안하는데다가 하더라도 본인이 신청 해야한다면서 반려시켰다.(…) 그나마 당적 변경의 '원칙'(?)이 있다면 원내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계 정당(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과 친노가 주류를 이루는 민주당계 정당에는 간 적이 없다[7]는 것.
2014년 3월경 R모 웹에서 "당원증 콜렉터"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
2014년 10월 1일에 방송된 TV조선의 <강적들> 47회에서 이인제 의원의 당적변경을 전격 분석(...)한 바 있다.
이러한 이력과 충청도 간판 정치인중 하나라서 그런지, 같은 충청도 출신인 굽시니스트[11]의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는 준주인공급으로 나온다.
2016년 4월 13일 SBS 선거방송인 2016 국민의 선택의 바이폰중 '절대뱃지를 찾아서'에서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후보에게 패배함으로서
그가 몸담았던 새누리당 역시 선거에서 참패하여 정당브레이커로서의 징크스도 어느 정도는 이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새누리당은 여러 의미로 지지기반이 튼튼한 당이라, 문자 그대로의 정당 브레이킹은 피닉제라고 해도 무리라는 게 일반적인 중론... 이었는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진행상황에 따라서는
한편, 낙선 다음날 낙선 소감을 트위터로 밝혔는데 밑에 달린 멘션이 네다칰.... 칰은 디시인사이드 야구 갤러리에서 (충청도 연고지인) 한화 이글스의 비하, 조롱 목적으로 쓰이는 용어이며, 특히 프로필 사진이 LG 트윈스인 것으로 보아 한화의 비칭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후 이인제가 낙선 사례를 트위터에 올렸는데, 리트윗 중 하나가 이인제 눈물을 거둬~(...)
헌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오히려 낙선이 신의 한수가 아니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12월 11일 친박계 모임인 <혁신과 통합 연대>의 공동대표로 추대되었다! 비박계의 당 수습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들도 친박계가 거부하면서 결국 새누리당 비박계가 탈당하여 바른정당을 만들게 되었는데, 새누리당이 정치적으로 분당된 것이라 이인제는 정당 브레이커로서의 업적(?)을 하나 더 쌓게 되었다. 또한 새누리당도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여 당적변경 기록도 갱신. 그 와중에 MBC '대선주자를 검증한다'에 이인제가 나왔는데 피닉제라는 별명이 과분하지만 마음에 든다고 했다....
[1] 저렇게 되려면 최소 4명 이상의 후보가 경합인 상태여야 한다. 예로들자면 27-25-24-23(4명인 경우), 이 때 후보가 무려 10명이 넘었다..[2] 사실 이것보다 더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 사례도 있다. 바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남 공주/연기 지역구의 정진석 후보가 25.2% 득표율로 당선이 됐다. 후보가 무려 10명이 나오는 바람에 낮은 득표율로 당선이 된 것.[3] 다만, 이인제 포함 3인의 선도탈당 후 양측의 합의가 파기되어 자유민주연합은 마지막 대표 김학원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흡수된다.[4] 다만, 현명한 선택이라는 개념은 다소 조심스럽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당시 3당 합당에 불복하여 탈당한(당시의 보스정치 정국을 생각하면 사실상 쫒겨난 것이나 다름없다) 뒤 꼬마민주당시기를 거쳐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신민주연합당으로 들어가 일종의 곁방살이를 하면서 부산에서 낙선낙선낙선의 고통스러운 시기를 거쳤던 노무현이 결국 어떤 자리 까지 올라갔는지 생각해 보자(...). 사실, 당시 통일민주당의 상도동계 정치인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인물이 노무현이고, 노무현의 정치적 성공에 있어서 3당 합당 불복을 통해 보여준 정치적 선명성에 대한 호감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다. 즉, 보스정치 상황에서 보스의 결정에 불복한다는 것은 곧 속해있던 정치적 세력을 떠난다는 의미였고, 초선의원이었던 이인제가 이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딱히 비판받을만한 일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남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고, 탈당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 결과적으로 보면, 전자는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이었던 데 비해 후자의 선택은 하이 리스크 초 하이 리턴의 선택이었던 셈이다.[5] 이인제와 비슷하게 철새라는 평을 들은 김민석(정치인)의 사례만 봐도,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행동이 조금씩 잊혀지고 이인제만큼 철새의 대표주자로 조롱당하고 있지는 않고, 나름 재기의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6] 2016년 12월,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후, 역시 웃음거리가 되었다. 전례를 보아 경선 패배를 하게되면 불복으로 인한 탈당이 일어날지가 주목된다.[7] 통합민주당에 있을 때는 참여정부가 당시 역대 최대 격차로 침몰하면서, 친노의 발언권이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고, 당시 당의 수장도 친노와 관련이 없는 손학규였다.[8] 엄밀히 말하자면 한나라당이 당명을 변경하여 새누리당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정당이라고 보면 된다. 아깝다 궁극의 당원증 컬렉터가 될 수 있었는데[9]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 당시 노무현에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냐는 등 색깔론으로 집요하게 공격하였다.[10] 사실, 김한길 전 의원 역시 이인제와 타이 기록이긴 하지만 김한길은 모두 민주당계 정당 내에서의 이동이라 이인제보단 이쪽으론(...) 덜 인정받는다.[11] 대전 출신이다.[12] 특히 계룡의 경우 지난 19대 선거 때는 김종민에게 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