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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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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A5ACD><colcolor=#FFD700> 대월(大越) 건평왕(建平王) / 고려(高麗) 화산군(花山君)
작위 대월 건평왕(建平王)
봉호 고려 화산군(花山君)
본관 대월 국성 리씨
고려 화산 이씨
이름 대월 리롱뜨엉(Lý Long Tường 李龍祥)
고려 이용상(李龍祥)
생몰연도 1174 ~ ?

1. 개요2. 생애
2.1. 망국의 황족2.2. 고려로 망명2.3. 몽골군과의 전투2.4.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
3. 과거 베트남에서의 괴소문4. 베트남에서의 인식5. 여담6. 같이 보기

1. 개요

李龍祥(Lý Long Tường / 리롱뜨엉)

리 왕조(李朝, 이조) 대월(大越) 제국의 황족. 고려의 화산군(花山君). 화산 이씨의 시조. 베트남어로는 '리롱뜨엉'이다.

2. 생애

2.1. 망국의 황족

1174년, 대월 제국의 수도 탕롱[1]에서, 리 왕조 대월 제국의 제6대 황제였던 영종(英宗)의 7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황후 여씨(여미아, 皇后 黎美娥)였다.

무능하고 사치스러우며, 부패해 리 왕조의 전성기를 끝내고 나락으로 빠뜨린 최악의 암군이었던 형 고종이 붕어하고, 조카인 혜종이 즉위했다. 하지만 혜종도 무능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1213년, 평해공 이군필, 진일조(陳日照)[2]와 함께 3공(三公)이 되어서 조카 혜종으로부터 국정을 위임받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혜종의 외척이었던 전전지휘사 진수도(陳守度, 쩐투도)가 등장하여 혜종의 신임을 얻고, 혜종으로 하여금 이용상을 비롯한 3공을 대신하여 자신에게 국정을 통솔하도록 했다. 그렇게 진수도는 대월의 권력을 얻게 되자, 전횡을 부리기 시작했다. 진수도가 혜종을 협박하여 황녀인 소성공주에게 양위시킨 다음, 조카인 진태종과 결혼시켜 여제가 남편에게 선양하는 방식으로 진태종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리 왕조 대월이 멸망하고 쩐(진) 왕조 대월이 건국되었다.

진수도는 통국태사(統國太師)가 되어 전권을 장악한 후 자신의 정적은 물론 이용상을 비롯한 리 왕조의 모든 황족들을 죽이려는 시도를 했는데, 리 왕조의 황족들은 진수도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이용상은 진수도의 계략을 간파했다. 이때 이용상이 진수도의 계락을 간파하는 과정을 담은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하나는 혜종의 장례식에 종친들과 황족들이 다 모였을 때, 진수도가 선제의 피붙이들을 도륙했다. 이 위기를 예견한 이용상은 병을 핑계 삼고 나오지 않다가 배를 타고 최측근과 함께 도피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진씨 일족 측에서 이용상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가 마음을 돌리지 않자 그를 제거하려 했고 이를 눈치챈 이용상이 대란을 피해 고려로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1226년, 이렇게 진수도가 리 왕조의 황족들을 냉혹하게 차례로 숙청하는 가운데 이용상은 자신의 일족과 부하들을 데리고 바다로 도망갔다. 이렇게 베트남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사라지고, 리씨 황족들은 대부분 멸족을 당했다.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개성 왕씨를 죽일 때 왕씨의 후손이 성을 바꿔서 목숨을 보전했듯이, 리조 대월의 시대에서 쩐조 대월의 시대로 넘어갈 때, 리 왕조의 후손들은 '응우옌'(완)으로 성을 바꾼 채 목숨을 보전했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현재 베트남에 남아있는 리 왕조의 계보는 쩐 왕조가 기록한 것으로, 여기에 이용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베트남 학계는 쩐조가 전대 리조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이용상 뿐만 아니라 황제와 직계 황손이 아닌 많은 방계 황손들을 누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권신 진수도는 끝내 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쩐 왕조를 건국했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쩐조는 훗날 권신 호계리(胡季犛)에 의해 리 왕조가 멸망한 과정을 똑같이 밟게 되었다.

2.2. 고려로 망명

이용상은 고려측의 기록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용상의 행적을 추정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화산 이씨의 족보인 《화산이씨세보》에 의존하고 있다. 해당 족보는 조선 후기에 완성되어 1920년경에 간행되었다. 때문에 역사적인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없다. 이후 서술되는 이야기는 화산 이씨의 족보 《화산이씨세보》에 있는 일화이다.

바다로 도망친 이용상의 일족과 부하들이 배를 타고 계속 나아간 끝에 도착한 곳은 고려 영토인 황해도 화산(花山)이었다.[3] 이용상이 화산에 도착했을 때 마침 도적들이 백성을 잡아가는 걸 보고서 도적떼를 퇴치하고 사람들을 구해주었고, 옹진현 현령은 이 사실을 조정에 상주했다.

안남국[4]의 왕자가 표류했다는 것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크게 환영하며, 이용상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종은 이용상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다. 이용상은 망국의 왕자를 극진하게 대우하는 고종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고, 이에 고종은 "망국이라는 건 어느 나라도 피할 수가 없다. 내가 언제 망국의 왕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다. 그런데 이용상의 행적을 기록한 다른 사적인 <수항문기적비>(受降門紀蹟碑)[5]에서는 이용상이 몽골군을 격퇴한 뒤에 그 상으로서 식읍을 하사받았다고 전하고 있어 기록상의 차이가 보인다. 위의 ‘도적떼’가 몽골군이라면 얼추 맞아들어간다.

《화산이씨세보》에 적힌 바로는 이용상이 고려에 들어올 쯤에, 고종이 어느날 내전에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큰 새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와 사해 바닷가로 날개를 치고 앉았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더니, 안남국 왕자 이용상이 왔다고 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로부터 6년 뒤에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종은 47년의 재위기간 중 30년 가까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전쟁을 이어갔고, 결국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임시수도인 강화도에서 승하했다.

2.3. 몽골군과의 전투

전반적인 내용은 옹진군 화산동리에 있는 <수항문기적비>[6]에 적힌 내용을 기반한 《화산이씨세보》에서 가져왔다. 고려측 기록에는 이용상과 몽골군과의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다.

1253년 12월, 이용상은 옹진성 동쪽 화산에 살고 있었는데, 고을 수령이 그에게 달려와서 몽골군이 쳐들어왔다고 위급을 호소하며 이를 물리칠 계책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이용상은 수락하여 위효관이라는 사람과 함께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는 수성 전략을 세웠다. 3면에 토성으로 성벽을 쌓고 전면에 목책을 높이 세웠다. 현재 옹진에 있는 화산성이 그것이다. 이용상은 동굴을 파서 땔감과 나무를 비축하고 몽골군이 대포[7]를 쏘면 함께 쏘고, 성벽을 넘으면 돌과 뜨거운 물을 부어서 철저히 방비했다. 몽골군이 5개월 이상 공격했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전투가 오래 계속되자, 몽골 장수는 꾀를 내서 항복하는 체하고 화친을 요구한다며 황금을 가득 담은 상자 5개를 선물로 보내왔다. 이용상과 마을의 수령은 망대를 높이 쌓아 위엄을 보인 가운데 항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몽골군이 상자를 보내오자, 이용상은 이에 의심을 하여 상자를 묶고, 구멍을 뚫도록 명령을 내렸다. 구멍을 뚫어보니 한 사람의 자객이 있었다. 이용상은 그 구멍에 펄펄 끓는 물을 붓도록 명령했다. 자객이 죽고, 그 상자를 금종이로 바른 후 적진에 도로 던져주라고 했다. 몽골군 장수는 상자를 도로 받은 후에 깜짝 놀라 군사를 급히 돌렸다. 그러나 이용상의 지시로 매복한 고려군 병사들이 기습하여 몽골군을 격파하고, 수백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가 중국남북조시대에 존재한다. 당시 동위(東魏)는 서위(西魏)에 맞서 중국 대륙을 통일할 야욕을 갖고, 40만 대군을 이끌고 서위의 요충지를 공격하여 서위군의 기세를 끊으려 했는데, 군사 기지이자 교통의 요충인 옥벽(玉壁)을 지키는 수문장이었던 서위의 장수 위효관(韋孝寬)[8]에 의해 좌절되었다. 위효관이 옥벽에서 일궈낸 화공 방어전술과 이용상의 방어전술에 비슷한 점이 많고, 동위의 항복계략과 몽골의 항복계략이 서로 일치한다. 이로 보아 위효관이라는 인물의 일화를 차용해서 이용상 황자의 후손들이 선조의 업적을 극대화했을 수도 있다.

조선의 의병 장군으로 활약한 곽재우도 비슷한 일화를 남겼으니 어쩌면 이용상과 곽재우 두 사람 역시 공성전의 귀재로 꼽힌 위효관의 묘책을 당시에 실제로 활용 및 응용하여 전투에 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결과물로도 볼 수가 있다. 또한 당시의 논공행상 관련 기사가 남아 있으므로 결론적으로 보면 이용상의 지략과 용맹은 남북조시대의 장군 위효관에 비견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있다.

고종은 보고를 받고 이용상을 포상하여 관직을 높이고 옹진 화산 지방 30리 인근과 식읍 2,000호를 하사했다. 또한 리 왕조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도록 제수를 많이 내리고 화산관의 문미에 수항문(受降門)이란 글자를 써서 내렸다.

2.4.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

1253년, 이용상은 몽골 침략 당시 화산에서 몽골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화산군(花山君)의 작위를 받았다.[9]

더불어 영지도 하사받아 살아가는 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늘상 저 멀리 있는 조국 대월을 그리워해서인지 조국 방향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망향의 아픔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와 후손들의 흔적이 여전히 북녘 옹진군에 남아 있다. 황자가 고향을 보며 그리워하던 망국단(望國壇)과 적과 싸우기 위해 화산에 쌓은 성인 화산성, 조정이 이용상에게 수여한 수항문(受降門)과 그의 망명 및 귀화 사실을 기록한 <수항문기적비>가 있다. 다만 <수항문기적비>는 1903년에 세워진 것으로 수백년은 지나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이용상을 시조를 삼아 본관을 화산으로 삼았다. 그의 맏아들 이간(李幹)은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과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이일청(李一淸)은 안동부사를 지내며 안동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했다.

현재 화산 이씨는 옹진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에 밀집되어 있고, 경상북도 안동시와 경상남도 밀양시, 진주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화산 이씨는 리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공온을 시조로, 중시조를 이용상으로 본다. 이용상은 망명할 때 리 왕조의 계보를 챙겼고, 이 내용은 이용상의 후손이 《화산이씨세보》에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화산이씨세보》에 기록된 리 왕조의 계보와 쩐 왕조가 기록한 리 왕조의 계보가 일치함으로써 화산 이씨가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근거가 되었다.

3. 과거 베트남에서의 괴소문

베트남에서는 19세기까지 요상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조선에 표류한 베트남 황태자 일행을 조선인들이 약탈하고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17세기에 태풍 때문에 표류하다가 베트남까지 떠내려와버린 제주도 어민들을 본 베트남 지방 관리가 저 전설을 언급하면서 내가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제주도 어민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물론 베트남 정부의 호의와 노력으로 어민들은 별탈 없이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부분은 말 그대로 전설이라 정확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베트남에 표류한 제주도 어민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정동유 저 <주영>편의 내용을 보면 '예전에 베트남의 왕자가 조선인들의 손에 죽었으니 나도 너희를 죽여서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말을 한 것은 지방 관리가 아니라 당시의 국왕이었다. 그리고, 통역을 통해(한문을 이용한 필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말을 전해듣고 통곡하는 조선 어민들의 모습을 본 왕비가 농담이었으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달랜 것을 보면, 해당 전설을 진짜 진지하게 믿어서 한 소리라기 보다는 그냥 개드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1770년에 폭풍을 만나 표류했다 돌아온 제주도 선비 장한철의 기록인 <표해록>을 보면 무인도에 표류했던 장한철 일행이 지나가던 중국 상선에게 구조되었는데 그들이 탐라 사람임을 안 중국 상선의 베트남인 선원들이 칼을 빼들고 "우리 왕자를 탐라 왕이 죽였었으니 너희를 죽여서 복수하겠다"고 하여 중국인 선주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조선인들을 조각배에 태워 내쫒았다는 기록이 있다. 즉 뭔가 악연이 있기는 있었다는 얘기.

실제로 광해군 시절 제주목사 이기빈이 제주도로 표류해 온 류큐 왕국의 왕자를 죽였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것이 또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된 <주영>편을 보면 조선 사람이 류큐 사람에게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묻자 류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기도 했다. 조선-류큐 관계 항목 참조.

<주영>편의 내용을 보면, 당시 표류한 조선인 어부들은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받았을 뿐 아니라, 식량이 필요하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쌀 좀 주셈' 해서 얻어먹었는데 아무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농사에 유리해서 식량이 넉넉했던 당시 베트남(대월)의 상황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상당히 호의적인 대우를 받은 것은 분명한 셈. 더구나, 중국 상선이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주는 대가로 1인당 쌀 50석의 막대한 운임을 요구한다. 당시 조선, 특히 논농사가 힘들었던 제주도 어민들의 입장에서는 무지막지한 액수이긴 한데... 예정에 없던 곳에 들려야 하는 상선의 입장에서 보면 바가지를 씌운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리하여 베트남이 그 운임을 대신 내 주고, 조선의 입출국 절차가 까다로울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이 중국배는 조선 사람들이 표류해 온 걸 보고 안타깝게 여겨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주는 거니까 편의좀 봐 주셈' 이라는 증서까지 써 주었다는 점을 볼 때, 당시 표류자들에 대한 베트남측의 대우가 호의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해당 전설을 진실이라고 믿었건 아니건 딱히 조선인들에게 적대감을 보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너희를 죽여서 복수하겠다는 개드립 역시 좀 지나친 농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당시 조선과 베트남은 중국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교류하던 사이였고, 관계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이 전설의 근원이 이용상으로 여겨지는데 바다로 도망친 이용상에 대한 이야기가 베트남에서는 이런 식으로 와전된 듯하다. 어쩌면 쩐 왕조가 리 왕조 부흥 운동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첩보를 통해 이용상이 고려에 망명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리 왕조 부흥 세력이 이용상과 접촉하는 일을 막기 위해 이용상이 고려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내용의 조작된 전설을 퍼트렸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4. 베트남에서의 인식




드라마틱한 사연 때문인지 베트남에서도 나름대로 유명한 인물인 듯.

5. 여담

6. 같이 보기



[1] 승룡(昇龍), 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2] 진일조라는 인물은 베트남의 기록이 아닌 중국 측의 기록인 《제동야어》에 나타나는 인물인데, 아마도 진씨 호족인 진사경(陳嗣慶)인 듯하다.[3] 지금의 옹진 반도 북쪽에 위치한 산쪽인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 있다.[4] 베트남의 별명, 정식 국호는 대월이었다.[5] 1903년에 세워진 비이다.[6] 1903년에 만들어졌다.[7] 이 시기 대포는 화약을 쓰는 대포가 아니라 투석기다. <수항문 기적비>의 건립 시기를 감안하면 고려시대때 공성용 화약무기가 실존했는지의 여부를 딱히 고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8] '효관'은 그의 자(字)이며, 본명은 '관'(寬). 일명 '숙유'(叔裕).[9] 여기서 화산군(花山君)의 화산(花山)은 황해도 금천군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10] 동북공정, 중화민족,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11] 임나일본부설(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 진구황후 한반도 정벌설, 식민지 수혜론, 일선동조론, 내선일체, 일본 극우사관.[12] 이름은 이정원(李挺元) 또는 이승조(李承祖)로, 조선 중기의 도인.[13] 두문동 72현 전설에 나오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