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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6 18:51:56

이시다 미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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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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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츠나리 마시타 나가모리 나츠카 마사이에 마에다 겐이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75px-Ishida_Mitsunari.jpg
출생 1560년 1월 22일
사망 1600년 11월 6일 (향년 41세)
신장 156cm[1]
자녀 3남 3녀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소속 서군
주요 참전 행주대첩, 세키가하라 전투
파일:대일대만대길.svg
대일대만대길
大一大万大吉
[2]
파일:external/www.city.nagahama.shiga.jp/137-6.jpg
또 다른 초상화

1. 개요2. 생애3. 평가4. 자손5. 기타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기 영지이자 측실 요도도노의 고향인 오우미 지방하급 무사 출신이다. 그 영리한 재능으로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의 최측근이 되었지만, 히데요시 사후 유력 다이묘 간 내분이 발생하자 미츠나리는 반(反)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을 결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양 세력은 싸웠으나, 세력 열세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배반이 겹쳐 패배했고, 결국 히데요시 사후 2년 뒤 1600년에 41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연 에도 막부시기에는 평가절하당하고 악역 취급을 받았으나, 현대에는 재평가의 움직임이 있다.

직책은 지부쇼유(治部少輔)[3]로, 이시다 지부쇼유 미츠나리, 줄여서 이시다 지부라고도 한다. 그래서 《간양록》 같은 조선 측 사료에서는 석전치부소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곤 한다.[4] 아명은 사키치(佐吉).

그 밖에 가몬(家紋)은 大一大万大吉(대일대만대길, だいいち・だいまん・だいきち)을 사용했다. 그 의미는 "한 사람이 만인을 위하고, 그 만인이 한 사람을 위한다면 세상엔 복이 오니라".[5]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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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강한 충성심을 가졌고 행정 능력이 뛰어난 정치가로서 도요토미 가문 최후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좋고 싫음을 노골적으로 내색하는 성격 탓에 적을 양산하였고, 결국 주가(主家)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상대방은 일부러 미츠나리의 취향을 맞추려다 마음에 들지 않아 도리어 호통이나 면박을 듣기도 했으며, 이런 미츠나리의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인망은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고,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인망도 인망이지만 당시 근신 중이라 자신이 직접 거병하지 못해서 모리 테루모토에게 도움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 충성심을 인정받았기 때문인지,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미츠나리는 도요토미에 충성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귀한 출신이 아닌데다가 단기간에 많은 다이묘를 휘하에 두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장 중점에 두었어야 할 것은 각 다이묘들을 효율 있게 통제할 방편과 함께 가신들의 분열을 막고 통합을 꾀하는 한편, 도요토미 가문을 향한 확고한 충성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미츠나리는 행정 재능은 좋았고 직속 부하에게는 충성을 받았지만, 융통성 없음을 확실하게 보여준 나머지 가장 중요한 마지막 부분에서 실패하여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으로 향하는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내인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 했으나 가라샤를 자살하게 한 일이나, 원래라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지켜줄 소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과의 갈등이 있다. 가라샤의 일로 대다이묘였던 호소카와는 이를 갈며 동군에 참여했고, 임진왜란 시기부터 이미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비롯해 유력한 다이묘들이 세키가하라 전투 때 죄다 동군에 붙은 점은 미츠나리 본인의 부덕과 인망없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아주 뼈아프다. 막상 시마즈 요시히로가 돕겠다고 나서도 병력이 1,500명 밖에 안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박대하여 사사건건 부딪혔고, 히데요시 생전부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박대했는데도 히데아키가 서군 입장에서 미츠나리를 계속 따르리라고 판단한 것도 패착이었다.

좋고 싫음을 표가 나도록 확실히 하는 성격은 적을 많이 만들고 말았지만, 반대로 미츠나리의 솔직한 성품에 끌린 인물도 많았으며, 미츠나리는 자신의 편에 선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잘 대했기에, 수하 가신들 대부분이 목숨을 바친 것도 특징이다. 최초의 영지 500석을 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영지를 주고서 영입한 와타나베 신노죠는, 히데요시가 2만 석을 줄 테니 자신의 가신이 되라 하자, "10만 석을 주면 생각해 보겠다."라고 했던 인물이었다.

후에 4만 석 영주가 되었을 때는 그 절반인 2만 석을 주고서 시마 사콘을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었다. 이때 히데요시는 '어떻게 사콘 정도나 되는 인물을 영입할 수 있었는가', '주군과 가신의 봉록이 같은 예가 어디에 있는가'라며 놀랐는데도, 나중에 따로 사콘을 불러 "미츠나리를 잘 부탁하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미츠나리 휘하로 참가하였던 무장들의 대다수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가하였는데, 오오타니 요시츠구, 사타케 요시노부 등의 인물들은 인정과 우정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에 서려고 서군에 가담했다.

단, 사나다 마사유키는 일단 자신의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고, 도쿠가와와는 센고쿠 시절부터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더욱이 우에스기와 도쿠가와의 충돌로 도쿠가와가 우에스기에 집중하는 동안 서군이 간토 6주를 재빠르게 쳤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가족 회의서 장남인 사나다 노부유키를 도쿠가와 측으로 보냈다.

전장에서 살아남고 이에야스에게 용서받은 남자들조차 도요토미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미츠나리의 유지를 성실히 지켜,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최후인 오사카 성 전투에 가담했다가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 특히 오타니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에게 도쿠가와와 등을 돌리지 않는 쪽으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미츠나리의 의지가 단호하였기에 오타니 요시츠구도 같이 서군에 가담한 것이다. 결국 오타니 요시츠구는 일생의 친구로서 미츠나리를 이롭게 하려고 목숨을 바친 것과도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로서는 색다른 성격에 색다르게 살아간 남자이며, 싫어한 자에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받았고, 좋아한 자에게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줄 정도로 사랑받았던 남자였다. 실제로 오사카 성 전투에서 수많은 다이묘가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려고 모든 걸 버렸을 만큼 도요토미 가문에 심정적으로 극히 충성하던 사람이 많았고, 미츠나리에 대해서도 좋게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약 미츠나리가 적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알고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면 일본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오시 성 전투의 전후 사정을 다룬 분석이 진행되면서 오시 성 졸전의 책임이 미츠나리가 아닌 히데요시에게 있다는 점이 밝혀져 미츠나리가 재평가되었고, 그 덕분에 '졸장'이라는 기존 평가가 어느 정도 불식되었다. 그렇지만 역시 군재는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문제는 일본 사람들이 전쟁사로서의 일본 전국시대를 인지하는 정도가 낮아서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인 미츠나리의 낮은 지휘력을 잘 모른다는 것. 오시 성 전투 - 행주 대첩 - 세키가하라 전투 등 대규모 전투 3번에서 미츠나리는 들인 노력에 비해 얻은 결과가 불만족스러운 전술을 고집하고, 아군의 전력을 불리한 상황에 억지로 쏟아붓거나[6] 전력상 유리한 전투에서 엄청난 배신자와 이탈자를 내는 등 아군을 전혀 통솔하지 못했으며, 이런 거듭된 졸전에서 볼 때 미츠나리의 군재는 명백하게 평균 이하로 볼 수 있다.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세가 매우 높아 서군에서는 다이묘들이 갈팡질팡한 게 있어서 지휘하기 많이 어려웠으며, 실제로 고쿠다카 최강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으니 전국 다이묘 중 병력을 가장 많이 동원하는 다이묘였다. 어찌어찌해서 쪽수만 간신히 맞춘 것만으로도 미츠나리로서는 대성공인 셈. 물론 행주산성에서의 참패에는 미츠나리의 지휘에도 문제가 있었으니만큼 군재가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임진왜란을 다룬다는 웬만한 일본 사극에도 나오지 않는 흑역사라 그런지 최근의 재평가 과정에서는 은근슬쩍 빠져있기는 하다.

당대의 형국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표면상으로는 266만 석이라고는 하나, 그의 영향력에 들어간 고쿠다카는 이보다 많았으며[7] 더군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만 보더라도[8][9]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맞붙기에는 너무 강력한 상대였다.

4. 자손

슬하에 3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장남인 이시다 시게이에(石田重家)는 세키가하라 전쟁 때 원래 오오타니 군에 지원하려 했으나 도요토미 측에서 이시다한테 인질을 요구해 전쟁 동안 오사카 성에 유처되었다. 세키가하라가 끝난 후 이에야스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쿄토 쥬쇼인이라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절에서 불교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 중 제자인 소신니(祖心尼, 본명은 오나)에게 조카인 오카 키치에몬(岡吉右衛門)을 사위로 소개해줬다. 104세로 현대 기준으로도 매우 장수했다.

차남인 이시다 시게나리(石田重成)는 어린 시절 히데요리의 시동으로 일했다. 세키가하라가에서 서군이 패했을때 츠가루 다메노부(津軽信建)가 보호해주었다. 다메노부는 원래 난부 가의 신하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는데 이 반란으로 아버지 이시카와 다카노부를 잃은 난부 노부나오는 다메노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이 와중에 오다와라 합전이 일어나게 되었고 히데요시는 동북쪽 다이묘들에게 참전하라고 명령, 다메노부와 노부나오 두사람은 모두 참전하였다. 이 때 노부나오가 다메노부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토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츠나리가 중재하여 다메노부는 다이묘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일로 미츠나리에게 큰 은혜를 입은 다메노부는 세키가하라 합전 때 서군에 속했던 아들 츠가루 노부다케에게 미츠나리의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미츠나리 일족은 히로사키 번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시다 시게나리는 스기야마 하치베에(杉山八兵衛)로 개명했고 여동생 다츠히메가 츠가루 다메노부의 며느리가 되어 그연으로 히로사키번의 중신이 되었다. 현재 스기야마 당주는 15대로 현재까지 이어져있다. 그의 후손 중 한 명인 시라카와 토루(白川亨)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해 주로 연구한 역사학자로 미츠나리와 코다이인(네네)은 사이가 좋았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시라카와는 "미츠나리와 네네는 친밀한 사이였고, 반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어머니로서 정치에 개입한 요도도노와 그의 측근을 싫어했다"는 내용이 담긴 연구서{《이시다 미츠나리와 그 일족》(石田三成とその一族)}를 발표하기도 했다.

3남인 이시다 사치키 또는 하치로는 세키가하라 합전 중 그를 보호해준 가신이 서군의 배신으로 죽고, 이에야스가 목숨을 살려줬다. 맏형처럼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장녀와 차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장녀는 이사다 가신인 야마다 하야토노소(山田隼人正)에게 시집갔다. 야마다 하야토노소의 고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 차아노 츠보네(茶阿局)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야마다 하야토노소가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忠輝)의 가신으로 사관하고, 여동생 다츠히메의 도움으로 에도에서 여생을 보냈다.

차녀는 가모 가신인 오카 시게마사(岡重政)에게 시집갔다. 시게마사가 이에야스의 3녀 후리히메(振姬)와의 갈등으로 할복 처분을 받은 뒤 차녀는 오카 가를 떠나고 오바마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둘의 유일한 자식인 오카 키치에몬(岡吉右衛門)은 가모 가신인 마치노 유키카스(町野幸和)가 보호해주고 그와 소신니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키치에몬의 딸 오후리노 가타(お振の方, 미츠나리에게는 증손녀)는 카스가노츠보네의 조카[10]이기도 해서, 이 연줄로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측실이 됐다. 불행이도 오후리는 이에미츠의 첫째 아이 치요히메(千代姫)를 낳은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11] 그 뒤 치요히메는 고산케 오와리 번 2대 번주 도쿠가와 미츠토모(徳川光友)와 혼인했고 오와리 3대 번주가 된 장남 츠나노부(綱誠)와 미노 다카스 번 초대 번주인 차남 마츠다이라 요시유키(松平義行) 등 두 아들을 낳았다. (미츠나리한테는 아니지만) 이에미츠의 혈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건 치요히메의 후손뿐이며, 츠나노부의 후손인 데이메이 황후를 거쳐 쇼와 덴노 이후의 일본 황실에도 이어져 있다.

3녀 이시다 다츠히메(辰姫)는 네네의 양녀가 되었고 후에 다메노부의 아들이자 2대 번주였던 츠가루 노부히라(津軽信牧)에게 시집가서 훗날 3대 번주가 되는 맏아들 츠가루 노부요시(津軽信義)를 낳았다. 정실이었지만 노부히라가 이에야스의 양녀를 정실로 들어 밀려나 33세 나이로 사망했다. 단 츠가루의 가독은 다츠히메의 아들인 노부요시가 물려받는다.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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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출처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2] 이시다 가문 전체가 아닌 미츠나리가 주로 사용했던 가몬으로, 이시다 가문은 화살(並び矢) 가몬을 주로 사용했으며 떡갈나무 등 다양한 가몬들을 사용했다. 최하단의 吉자와 万자의 위치가 서로 바뀌기도 한다. 나머지 설명은 개요 참고 바람.[3] 치부성(治部省)의 차관(次官)으로, 종5위하(從五位下) 관직이고 정원은 1명이다.[4] 미츠나리뿐 아니라, 옛 중국이나 조선 시대에는 특정인을 지칭하여 그 사람의 성과 관직명을 함께 적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예주자사 유비"를 "유예주"라고 적거나, "우의정 이항복"을 "이의정"이라고 적는 식이다. 보통 남의 휘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라 보통은 직위를 붙이거나 자, 호, 건물명, 지역명 등을 붙여서 불렀다.[5] 삼총사의 총사대가 칼을 모으고 외치는 구호 "Tous pour un, un pour tous"(=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와 비슷한 의미다. 공교롭게도 북한주체사상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One for all, All for one(인민 대중 = 수령)" 불교화엄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6] 오시 성에서는(히데요시의 지시였다는 변호는 가능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공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서 노동력을 들여 억지로 수공을 감행해 아군에 피해를 냈고 행주산성에서는 전술상으로 최악의 선택인 단순 축차 투입을 감행해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냈다.[7]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로 전봉 명령을 받게 되면서 원래 영지였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우미를 내놨지만, 히데요시 사후에는 이미 이 땅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이 땅은 간토에서 간사이로 쳐들어 올 이에야스를 견제 및 방어하기 위해 다수의 다이묘들을 박아놓은 것인데, 이들은 히데츠구 사건을 계기로(도쿠가와의 옛 영지를 받은 이들은 대부분 히데츠구와 친분이 있던 자들이었다.) 히데요시에게 등을 돌리고 이에야스에게 붙게 된다.[8]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쉽게 항복하려 들지 않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자신의 친모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으며, 이미 시집가서 유부녀가 된 데다가 나이마저 40살을 훌쩍 넘긴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다시 시집보내는 짓을 했다.[9]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에야스는 항복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 영지에 버티고 수도에 히데요시를 참내하러 갈 생각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먼저 만나러 가는 쪽의 격이 낮아지기 때문. 애당초 전쟁에서 진 것도 아니고, 그와 손을 잡았던 오다 노부나가의 머저리 아들 노부카츠가 멋대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전쟁을 할 명분이 사라져버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에 불과했다. 거기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이었던 만큼 그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히데요시보다 격이 높았으니 자기가 찾아가기에는 자존심도 상했을 테고.[10] 카스가노츠보네와 소신니는 5촌이다.[11] 출산 후 몸이 안좋아졌다고 하는데 출산했을 당시 나이가 최소 13세(현대 일본으로 12세)였을 거라고 한다.[12] 해마다 바치는 공물[13] 세키가하라에서 자웅을 겨룬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그의 투구, 또 하나는 휘하의 맹장 혼다 타다카츠.[14] 호오를 가리는 게 심한 성격이었어도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으면 상대방에게 빡치지 않게 말하는 방법으로 달래서 타협점을 찾았겠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러기엔 너무 붙임성이 없어서, 뭐든지 다 대놓고 말했다. 그러니까 돌려 말하는 걸 못했다는 얘기다.[1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목적은 자신을 압도하는 세력이 아무도 없게만 만들 뿐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적장들은 죄다 영지 삭감으로 처벌을 때웠으나,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단 3명만은 참수형에 처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지나친 탓(처벌을 결정하기 전에 소원을 묻는 질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참수하고 싶습니다라 말했다.)에 살려두면 안 된다는 판단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동군의 핵심 다이묘 중 하나인 가토 기요마사가 극렬히 처형을 주장해서(애초에 가토 기요마사의 동군 가담 조건부터 고니시 유키나가의 처형이었다. 이거 하나 뿐이고 가토 기요마사는 고쿠다카조차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를 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토 기요마사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주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고쿠다카를 몰수 후 가토 기요마사에게 하사하겠다고까지 했다.), 안코쿠지 에케이는 모리 테루모토로 하여금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과 맞붙게 해서 각각 참수했다. 물론 안코쿠지는 원래는 서군의 명목상 맹주인 모리 테루모토가 처형당해야 할 걸 대신 짬처리 당한 것이다.[16] 다녀온 일본인들 말에 따르면 실제 사와야마 성터는 산길이나 다름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