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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4 23:15:45

왕건(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 개요2. 작중 행적3. 평가4. 기타

1. 개요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고려 태조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2. 작중 행적

궁예의 폭정에 들고 일어나 역성혁명을 하며 10년 전에 고려를 건국한 왕이며, 1화 기준에서 6년 전인 921년에 큰아들인 왕무를 정윤으로 임명할 때 연우와 왕무를 약혼시켰다.

1화에서 신라를 구하러 출정하면서 임희에게 명을 내려 "둘을 결혼시키기 위해 연우를 데리고 개경으로 오라"고 한다. 그러나 신라를 구원하러 간 전투에서 대패를 하여 실종되었다가, 6화에서 연우의 트릭을 이용한 선필의 연락으로 50여명의 군졸들과 같이 재암성으로 온다. 6년만에 대면한 연우를 앞에 두고서 "어? 어렸을 땐 예뻤는데?"라고 중얼대며 연우를 열받게 한다.[1] 직후 연우의 결혼 연기 요청에 개경으로 올라와서 학관에 입학하고, 적응을 위해 나주 왕후의 처소에 1달에 1주일씩 머무는 조건부로 승낙한다.

이후에 연우가 개경에서 벌이는 활약을 보고 점점 며느리로 삼으려 하는 생각이 확고해지고, 26화에서 최승우를 이긴 연우에게 관직을 내린다. 32화에서는 서경에서 올라온 상소를 보고, 연우에게 "3개월 동안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한 재주로 가서 해결하라"고 보내놓고[2], 그 사이에 연우가 파혼을 위해 김장명을 끌어들인 것을 수습한다.[3]

40화에서 일을 해결하고 보고하러 온 연우가 오빠에게 공을 돌린 것을 행적만으로 알아맞췄으나, 연우가 주목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알아서인지 모른척 넘어가준다. 42화에서 학사들에게 삼년산성에 대한 과거 자료를 구해올 것을 명하고, 45화에서 유금필의 간청을 받아들여 연우에게 유금필을 따라 탕정군[4]으로 같이 가서 조언을 해주라고 명을 내린다. 47화에서 삼년산성 공략에 실패하여 철군하나, 철군 도중 청주에서 견훤이 미리 보내놓은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를 당해 위기에 처하게 되나, 이를 예측한 유금필의 도움으로 물리친다.

전투 이후에 유긍달이 자신의 본거지인 충주로 가서 재정비를 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충주로 가서 충주에서 장군들과 주요 호족들을 모아 후속대책을 논하던 중에, 자신을 지지하는 화엄종 북악파의 수장인 희랑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가져온 희랑의 제자인 지명의 말을 듣고, 안될 줄 알면서도 희랑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 화엄종을 장악하려는 견훤에 맞서 아들인 왕무가 자신이 가겠다 자원하자, 부석사로 보내면서 연우도 물귀신같이 같이 가라 명한다.[5]

연우가 부석사에서 무차대회를 파토낸 직후에 분노한 견훤이 보내는 공세를 청주에서 막아내며, 정윤 일행이 후백제군의 집요한 추적을 뿌리치고 무사히 귀환하자 환영하며 성과를 보고받고 기뻐하며 "상을 주겠다"면서 연우에게 뼈가 있는 말을 남긴다. 직후 개경으로 철군명령을 내려 개경으로 돌아가서 연우를 다시 불러 연우의 명의로 김장명에게 "'왜 김순식이 약조한 물건이 안 오냐고 물어보라'는 편지를 쓰라"고 시킨다. 연우가 학관에서 한 발언을 최언위를 통해 듣게 되고 "그리 되면 좋겠다"고 하면서 원정에서 연패를 하여 안좋아진 고려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민을 한다.

다음날 윤신달이 올리는 보고를 받아보고 왔다고 연우에게 말하면서, 사이비 종교의 탄압을 진언하는 최언위에게 "저들이 사고를 안치는데 괜히 건드렸다 뒷수습이 힘들거라 안 된다"고 말하고, 재정을 확충하여 연달은 "패전으로 손실된 병력을 복구하기를 원한다"는 뉘앙스를 모두에게 말한다.[6] 이후 윤신달에게 표천현에 은광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2천 병력을 이끌고 직접 와서 채굴 계획과 운송 방식에 대해서 자리에 있는 사람들하고 논의한다. 그 와중에 어릴때 아버지가 혼내더라도 표천현에 와봤어야 했다고 말을 해서 김악을 기겁하게 만든다.

이후 국선선발전에 출전하는 연우가 선발전을 준비하기 위해 휴가를 신청하자 승인해주고, 김악이 팔관회에 대해 안좋게 말하자, 자신이 어릴 적에 있었던 경험담을 말하면서 김악의 실언을 유도하여 감봉을 하려 유도한다. 팔관회 도중에 공산에서 전사한 장수 8명의 이야기가 나오자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팔관회가 끝나고 연우가 국선이 되어 극성 팬들에게 시달린 이야기를 듣고 그 광기라면 전쟁에서 통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데, 직후 오어곡성의 장수 6명이 싸우지도 않고 견훤에게 투항했다는 보고와 정윤의 외가인 나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연달아 받고 충격을 받아 주저앉는다.

결단을 내려 항복한 장수들의 가족들을 전원 처형하고, 이후 시간이 흘러 유긍달이 주도하는 소문이 퍼져 왕무와 연우가 파혼을 하게 되는쪽으로 여론이 몰리자 연우에게 절세미남인 왕무하고 결혼을 못하게 되어 너한테 큰 손해가 아니냐며 남자의 정체성이 남아있는 연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리고 혼인 연기때 걸었던 조건인 나주원에 한달에 일주일간 머무르라고 했던 명령을 철회한다. 직후 김악이 지금 나라 사정이 안좋아서 1월 15일에 열리는 연등회를 취소해야 한다 진언하나 축소로 절충한다. 그리고 백제와의 전쟁 향후 방침과 군사 배치에 대해 고심하면서 수세에 몰리면서부터 말했던 견훤이 급사라도 해줬음 좋겠다고 한다. 해가 지나 남아있는 사벌주의 고려 영토의 수비를 강화하면서 역전의 기회를 노리겠다 다짐하고 연등회날 숙부가 건립한 구산사에서 연등회 의식을 하겠다 한다.

그러나 여태까지 연우 앞에서 보였던 행보는 결혼을 꺼리는 연우와 파혼을 추진하려는 호족들을 방심시키려는 행동들이었고, 실은 연우를 큰며느리로 어떤 수를 써서든 들이기 위해 연우와 친하게 지내는 동양원부인에게 지시를 내려 연등회 전날 연우를 구산사에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려 왕무와 같이 빠져나오도록 유도를 한다. 연우가 왕무를 데리고 빠져나오자 우연히 발견했다는 듯 갑자기 큰아들과 연우가 같이 우물 속에서 나왔다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여론몰이를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둘의 혼사를 결론 내겠다고 선언하면서 할아버지가 남긴 책에 쓰였던 방법을 이용해 둘의 결혼을 확정짓는다. 행사가 끝난 직후 임희와 연우를 남겨 따로 면담을 진행하는데, 임희와는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아직 나오지는 않았지만, 임희는 어쩔수 없다는 식으로 납득했고, 연우와 면담을 하게 되었을때 향을 피워 향이 다 탈때까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부처님 앞에서 하면서 연우에게 질문을 해보라 한다.

연우가 자신이 파혼을 위해 노력했던거를 어떻게 알고 있었냐는 질문에는 자신을 도와주고 왕가와의 거래를 독점하는 왕창근이 연우가 립밤 제조를 오지수에게 넘기려 했다는 보고하는거를 받았고, 자신의 본거지인 개경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자신의 눈을 피할수 없다 했다 연우가 이어 자신같은 애매한 집안에서 큰며느리를 들이지 말고 대호족 집안에서 들여야 하는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연우의 조건이 자신이 생각하는거에 딱 맞고, 후계를 조기에 굳혀서 유긍달 황보제공같은 대호족들의 협조를 받기 어렵게 되는거를 원하지 않는다는식으로 대답했고 자신이 시험하는거에 연우가 통과를 했으니 둘은 행복하게 살수 있을거라 했다.[7] 그리고 삼한을 통일하게 된다면 왕무를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고 했다.

3일 후 나주원에서 열린 결혼식에 자신과 정략결혼을 한 17명의 부인들과 같이 결혼식을 진행하며, 임희에게 결혼식이 끝나면 한잔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연우에게 일주일간의 휴가를 준다.

연우가 일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한림원에 가자, 견훤이 거란에 사신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개하며, 발해에서 넘어오는 유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연우한테 은을 빌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면서 그러면 자신의 체면이 살지 않는다면서, 연우가 자원해서 유민들을 받아들이겠다 하자 반색한다. 직후 최선필이 보낸 손긍훈의 망명신청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서 손긍훈의 영지가 견훤의 영역에 있어 데려오기 난감하다 하나, 최언위가 손긍훈이 흥덕왕 시절 효자로 명성높았던 손순의 후손이라는 말을 하자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실패하더라도 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말하면서 이것마저도 떠넘길수 없다고 한림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날까지 방도를 구해오라 명한다. 다음날 연우의 제안을 받아들인 왕무가 대전에서 손긍훈을 구하러 가겠다 자원하자 연우가 작전에 필요한 물자와 인원을 바로 지원해주며, 배웅나와서 서두르라고 말하고 연우가 손긍훈에게 견훤의 말을 듣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끌라는 명령을 내려달라는 청을 들어준다.

이후 큰아들 부부가 손긍훈을 구해오자 개경에서 손긍훈과 그 일족들을 환영하며 연회를 베풀고 사재를 털어 저택과 식량을 하사한다. 그리고 연우가 적은 보고서를 읽고 너무 사실대로 썼다고 지적한다. 이후 천축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로 오는 삼장법사로 불리는 마후라 대사가 입국을 신청하자 받아들이며 공주들에게 환영행사 때 대접할 음식을 만들라 지시를 내리며 자신은 며느리이기 때문에 빠져나가려는 연우에게도 같이 만들라 한다.

연우가 마후라 대사의 고향 음식인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오자 외형만 보고는 이걸 자신이 먹으면 구천이 되는거냐며 돌려서 까며, 연우가 출처를 말하자 나는 듣지 못했다 하면서 연우의 체면을 봐서라도 안보이는 위치에 음식을 놓게 지시를 내린다. 이후 마후라 대사가 카레라이스를 맛있게 먹고 예전에 천축 사람이 온 적 있냐고 물어보자 없다고 하면서 책에서 천축국의 풍속에 대해 읽어서 준비해왔다고 둘러대면서 겉으로는 자상한 시아버지의 이미지로 연우를 불러 자기가 가장 아끼는 큰며느리라며 내가 상에 올리자고 했다고 뻔뻔(...)하게 나온다.

이후 마후라 대사가 연우를 '소년'이라 지칭하자 외국인이 발음을 잘못한 거 아니냐 말하면서 넘기고, 마후라가 연우에게 글을 써서 선물로 남기자 부럽다 한다. 그리고 연우가 마후라에게 한접시 더 드시라고 하면서 뒤끝으로 왕건 자신도 같이 먹는게 어떻냐 묻는 말에 명망 높은 고승마저도 좋은 음식이라고 드시라 권하고, 난감한 상황에 처하자 자신이 먼저 한숟갈 먹고 나서 신하들을 불러서 한숟가락씩 먹이는 졸렬한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연우에게 마후라 대사가 준 글을 자신만 읽어보면 어떻냐 하면서 받아내서 읽어보고는 마후라 대사가 도선 대사같은 승려가 아니었다고 실망한다.[8]

7월이 되고, 견훤의 공세에 진보성이 함락되고 홍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으며, 연이어 들어온 순주성 함락에 대한 보고에 순주성을 책임진 원봉의 좌천을 명한다. 그리고 미래를 알고 있는 연우가 태연하자 이런 상황에서도 똑같아며 놀라며, 이후 견훤의 의심을 받고 있는 최선필이 탈출을 하겠다 하자 임희를 보내 마중을 나가라 명한다. 그리고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동원 가능한 전군을 모아 출진을 하겠다고 명하면서 연우에게도 너의 지략이 필요할 일이 있을테니 같이 가자고 한다.

추수가 끝나고 병력이 전부 모이자 1차적으로 충주에서 집결하자 하고는 수뇌부들과 배를 타고 충주로 내려가며 충주에서 마중 나온 최선필에게 2년만에 만나고 과거에 했던 대우가 립서비스가 아니라는거를 증명하듯이 상보라 부르면서 자신때문에 근거지를 잃게 되어서 마음이 무겁다 하면서 최정혜에게 청혼을 한다. 직후 최선필이 바치는 지도들을 받아서 같이 있는 호족들과 장군들에게 오늘 안에 대오를 정비하라 하고는 내일 사벌주로 들어가겠다 명한다. 이후 사벌주에서 몇달간 백제군과 대치를 하면서 틈을 노리고 있는 와중에 고창의 삼태사가 견훤의 요구를 거절하고 맞서 싸우겠다 하면서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받게 되어 서신의 내용을 회의장에서 공개하면서 이 셋을 무조건 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방안을 논의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후 호족들과 장군들의 의견을 모아온 대표로 홍유와 강공훤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소수의 군사를 남겨두고 가자는 의견을 내미는거를 유금필이 반박하는 가운데, 전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유금필에게 분개한 호족들이 말을 놓자, 예를 지키라고 고함을 지른다. 직후 문관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보자 하고, 호족들과 왕건의 눈치를 봐야 하는 문관들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답을 하는 와중에 연우가 유금필보다 더 강경하게 결전을 주장하자 잘 들었다고 하면서 2년간 견훤에게 연전연패하면서 큰 고통을 겪었고, 자신을 위해 죽어간 이들과 근거지를 버리고 도망간 이들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하면서 견훤과 결전을 하기 위해 모든 군사를 투입하겠다는 명령을 내리면서 연우가 자원한대로 고창성에 가라고 명령을 한다. 이 와중에 왕무가 부인을 사지에 보내는거를 지켜보지 못하겠다고 자신이 대신 가겠다는거를 막으며 바로 출전을 위해 준비하라 명령을 내린다.

이후 견훤과의 결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장을 정리하고 나서 고창성으로 입성하고, 승리에 큰 도움을 준 삼태사에게 큰 상을 내리는거와 함께, 고창을 안동으로 이름을 바꾸고, 홍술의 근거지인 진보성에 의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사방에서 복속을 청하는 호족들의 사신을 일일이 대접해주면서 살이 찐다(...) 그러나 경순왕만 끝내 사신을 보내지 않자 짜증을 내며, 이 와중에 역적인 견훤이 세운 왕이니 바꿔야 한다는 황보제공의 주장을 지나치다고 막고, 개경에 있는 최언위를 불러 국서를 작성케 하여 서라벌로 사신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게 한다.[9]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자 국서를 받은 뒤에 연회를 열게 하나, 자신은 금방 요 몇달간 과식을 너무 해서 쉬어야 한다는 이유로 연회에서 빠지고 뒤로는 신라 사신[10]이 연회장에서 외교 결례를 저지른 것을 보고 받고는 끝까지 참아 넘긴 사람[11]들을 연회가 끝나고 불러들여 신라 진골들은 원래 그런 족속들이라 하면서 자신은 신라를 직접적인 협박 없이 스스로 항복하게 만들고 싶다 말하면서 그에 대한 공작을 명령한다. 직후 명령을 받은 신하들이 물러가자, 안돌아가고 남아있는 연우와 왕무에게 뭔 일이냐고 물어보고, 연우가 폐하의 선대와 신라 조정간의 은원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는 어찌 할 거냐는 질문에 이 건을 물고 늘어지면 통일을 못한다고 하면서 왕무에게도 나중에 왕이 되면 언급하지 말라 지시한다.

그리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중에 대목군을 거치면서 천안으로 개칭하고 황보제공을 천안도독으로 삼아 후백제와의 결전을 위한 전진기지의 건설을 명한다. 그 와중에 유긍달이 그간 나라 사정이 급박하여 노약자들까지 부역에 부득이하게 동원했는데, 이제 대승을 거두어 나라 사정이 나아졌으니 노약자들은 부역을 면제시켜줘야 한다 주장하는거를 받아들이며 개경에서 이를 연계한 연우의 퇴직을 자신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네가 알아서 해결해보라 하면서 연우에게 해결을 떠넘긴다. 그래서 연우가 최치원이라는 대어를 낚아오자 최치원을 출사시키려고 치근덕대었지만 결국에는 실패한다. 그리고는 호족들을 회유해 백제 대호족 공직이 귀순해 크게 기뻐한다.

백제가 바닷길로 개경을 공격할 것이라는 유금필과 연우의 상소를 무시하고 있다가 된통 당하고 연우가 수군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는 걸 허용하고 만다. 절치부심하다가 백제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견훤이 귀순해오자 견훤을 내세워 백제멸망전에 돌입,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일리천에서 대승을 거둬 삼한통일을 완수한다.

그리고는 북벌을 위해 진나라의 석경당과 협력하려 하지만 거절당해 실의에 빠져 건강이 점점 악화된다.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왕무의 대에라도 북진할 수 있도록 준비하던 중 연우에게서 백두산이 폭발한다는 말을 듣고 며느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전국구 사기를 친다. 그러다가 북벌을 계속하라는 등 유언을 남기고[12] 죽은 척했다가 마지막 기력으로 일어나 장난치고 세상을 떠난다.

사후 왕건의 바람대로 946년 백두산 폭발을 이용해 북벌에 성공하여 옛 발해령 대부분을 고려가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임연우를 비롯한 사람들은 왕건이 이때까지 살아있었다면 일이 더 잘 풀렸을 텐데 이 광경을 본 것을 안타까워했다.

원 역사와 달리 임연우 덕분에 왕무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유지하였고, 작중 고려사에서 고려가 칭제건원했다고 언급되기 때문에 왕건이 바라는 것이 며느리 덕분에 모두 이루어졌다. 원 역사에서 욕 먹던 후계자 문제를 며느리로 땜빵해서 무마된 덕분에 원 역사의 비판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본작의 씬스틸러로 매우 가볍고 친근한 캐릭터로 나오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에게 무거운 과업을 턱턱 던져주며, 독자들에게는 시어머니 29명이 문제가 아니라 시아버지가 왕건인 게 문제라는 평을 듣는다. 이 점에서 작가의 전작인 내마속의 제갈량과 비교된다. 왕건이 나오는 매화 댓글마다 제발 한 대만 때려줬으면 좋겠다는 글이 반드시 달리다시피 할 정도. 이 때문에 제목이 잘못되었다며 CAB1이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나, 한편으로 왕건이 죽을 당시 독자들에게 아쉬움을 살 정도로 정이 많이 든 캐릭터이기도 했다. 왕건의 혐성 정도면 사실 덜한 편이라는 옹호(?)도 있었다.

독자들은 왕건이 호족 숙청을 안 하고 죽은 탓에 광종 대까지 개판이 난 걸 잘 알고 있어서[13] 통일 이후 장남인 혜종을 정윤으로 삼았으면서 정작 호족 숙청은 안 하고 죽어 고려 왕조를 수십 년이나 혼란에 빠뜨린 걸 알아[14] 이에 대한 비판이 컸는데, 본작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통일을 한 뒤 대숙청 대신 대륙진출을 시도한 것처럼 발해가 망하자 북진하려 했기 때문에 대숙청을 돌렸다가 외부로 투사할 전력이 남지 않을 것을 우려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원 역사의 왕건도 죽기 몇 년 전까지 북진을 열망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는 납득 가는 해석인데, 왕건은 후삼국시대가 끝나고 7년 뒤 만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세는나이 67세가 전근대 기준으로 상당히 장수한 것임을 고려하면 왕건이 너무 자신의 수명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 뒷배가 빵빵한 정종(定宗)이나 광종을 후계자로 삼지 않고 뒷배가 약한 혜종을 장남이라는 이유로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죽기 전에 장성하고 뒷배가 강한 왕자 몇 명은 암살 또는 숙청하는 것이 더 나았다. 결국 광종이 대숙청할 때 혜종과 정종(定宗)의 아들을 죽이는 결과를 부르기도 했고.

다만 왕건의 생각도 이해 못할 건 아닌 게, 이때는 아직 발해가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동에 발해부흥운동 세력을 비롯한 각종 예맥인들이 많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고려가 이런저런 이유로 수십 년간 내부 기반 다지기에 시간을 쓰는 동안 요나라가 너무 강성해져서 북진할 수 없었고, 이후에도 금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의 라이징으로 인해 요동 일대의 발해인들은 전부 현지에 동화되거나 모두 고려로 남하하면서 요동의 예맥인 집단은 소멸하고 왕조가 바뀐 이후에도 끝내 요동을 수복하지 못하게 된다.[15] 고려의 내부 여건과 국력의 한계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긴 했지만, 타이밍상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미래인이었던 연우가 946년 백두산 폭발을 알고 있어 왕건이 죽기 직전 연우와 작전을 짜지 않았으면 요나라에게서 요동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기다 요나라는 결국 원 역사에서 3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고려를 초토화시키기 때문에 요나라와 언젠가 싸워야 하는 건 필연이 맞았다.

그리고 결혼 세일즈는 일리천 전투에서 전성기 신라도 못해본 대병력을 동원할 수 있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16] 삼국통일전쟁기~나당전쟁기 신라군은 기본적으로 정병 5만에 설오유의 원정군이나 매소성 전투기까지 합쳐도 7~8만이 한계였고 통일신라시대 왕위계승전쟁에서도 동원 병력이 기본적으로 천 단위를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신무왕골품제를 무시하고 결혼 드립을 쳐가며 대군벌이었던 장보고의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다.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이 후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한계까지 영끌에서 동원한 병력이 삼국사기 10만 7천, 고려사 8만 7500명으로 봉건적 군벌 연합이라 가능한 병력 규모이기는 했지만[17] 군재가 견훤, 궁예보다 떨어져서 수적 우세로 적을 압도하는 수밖에 없던 왕건의 입장에서는 후계구도의 안정을 포기하고 결혼팔이를 해가며 병력을 최대한 끌어모으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려인의 특성상 고구려의 옛 강역에 대한 집착이 대단히 강했다. 죽기 1년 전 몸 상태가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전까지도 북벌을 노리고 있었을 정도. 임연우는 석경당이 안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석경당 사후 황위를 물려받은 석중귀가 요나라를 적대할 때가 하필 왕건이 죽기 1년 전이었고, 왕건 사후 고려는 후계자 분쟁으로 내부가 엉망이라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개입하지 못해 946년 백두산이 폭발하고 얼마 뒤 개봉이 함락당하면서 후진이 멸망하고 석중귀가 거란에 잡혀간 것에 대해 여러모로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평했다.

거래와 선동에 매우 능한 인물이나, 석경당이 체면상 요나라를 공격하는 것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거나만부교 사건을 일으키는 등의 오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나마 본편에서는 임연우의 개입으로 만부교 사건 대신 치매가 온 것으로 연기해서 거란 사신들을 속여 만부교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18]

다만 작중에서 왕건의 능력에 대해 일관적으로 묘사되는 문제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잘 나간다 싶으면 방심하다가 말아먹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신라가 항복 가지고 구라를 치자 혹했는데 몇 년간 더 뻗대서 화를 내거나, 태봉 장군 시절에 견훤의 수군을 격파한 기억 때문에 유금필이 예성강 전투를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금필이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나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걸로 착각해서 방비를 소홀히 했다가 견훤에게 역관광당하는 등이 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석경당이 자신의 체면 때문에 거란을 공격하는데 동조할 거라 생각했지만 석경당이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해서 허송세월하기도 했다. 신라는 뭐 자존심 빼면 시체인 나라였으니 그렇다 쳐도 본인이 잘 나갈 때 방심하다 당하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임연우의 평에 따르면 너무 정치적인 인간이라서 정치적으로 보면 안 되는 사안까지 정치적으로 판단했다가 오판하는 거라고.

원 역사에서는 후계자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고려 초기 혼란을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본작에서는 임연우 덕분에 해당 문제가 없어져서 그로 인한 비판은 안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작중 고려사에서 임연우 덕분에 후삼국을 통일하고 북벌에 성공했다고 칭송하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아 왕건이 며느리 하나는 잘 봤다는 평을 들었을 듯하다. 작중 고려사에서 임연우는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는 구절과 본기(本紀)에 분류될 정도로 한국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의 정치 권력을 행사한 황후로 기록에 남았는데,[19] 이는 왕건이 임연우를 비선실세가 아니라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고 공식적인 정치 회의에서도 불러 논의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정치적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고려하면 왕건이 임연우를 얼마나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는지 알 수 있다. 작중에서 임연우와 사기 건으로 죽이 잘 맞는 것도 그렇고 정치적 후계자는 사실상 임연우나 다름없다는 평.

4. 기타

유긍달의 수국 게이트로 인해 정덕왕후가 왕정(원 역사 문원대왕)을 사위로 삼으려다 광주원군을 대신 사위로 삼았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자식들의 혼인관계 및 후손들이 원 역사와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중 고려사에서 왕무가 40년을 재위했고 왕무 사후 왕무의 아들이 황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왕무의 후손이 황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공산 전투(927) 당시 부인이 14명이었다가 점차 늘어나서 사망 당시 29명이 되는 것으로 서술되는데, 궁예 생전부터 여색을 밝혀 여러 부인이 있었다고 본인이 말했기 때문에 918년 즉위 전에도 신혜왕후장화왕후 외에 여러 부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27년 당시 낙랑공주 유씨와 대목왕후 황보씨가 10대 초중반으로 묘사되는 건 이 때문으로 보인다.[20][21]

미신을 좋아하지만 미신에 휘둘리지는 않으며, 미신을 이용해 사람을 선동하는 것에 능하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초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다 패망한 궁예의 사례를 알고 있어 본인 스스로의 능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도선대사의 이름을 빌려서 일을 진행하였다. 임연우가 예언한 백두산 폭발을 이용한 북벌도 도선대사의 이름을 빌려서 공작을 했을 정도.

한때 주군이었다 배신한 궁예에 대해서는 다소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신라 말 전국에 도적들이 들끓어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개성 왕씨 가문은 송악만 간신히 건사하는 상황이었지만 궁예와 견훤은 전국의 도적들을 소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당대 권력가들과 달리 청렴하고 여색을 밝히지도 않아 마땅히 따를 만한 인물이었다고 한다.[22] 관심법도 원래는 정말로 죄를 지은 신하들이 증거인멸하고 뻗대니까 궁예가 처벌하기 위해서 든 명분이었다고. 그러나 전란의 시대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점차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관심법으로 신하들을 잡아 넣는 것도 점점 지나쳐져 정말로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죽는 신하가 나오기 시작하자 두려움이 폭발한 신하들이 궁예를 죽이는 선택을 했다고 한다.[23] 이 때문에 임연우에게 미신을 이용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얼빠 기질이 있어서 미남미녀를 대놓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단순히 미녀를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미남인 거 가지고 자뻑하면서 오랜 친구였던 임희의 외모가 젊은 시절부터 별로였다고 디스하기도 했고, 임연우의 외모가 그리 예쁘지 않다고 대놓고 디스하는 말을 여러 번 하거나, 대광현이 고려로 올 당시 대광현이 잘생겼다 들었다며 소문을 내기도 했다.[24]


[1] 물론 일러스트 상으로는 어마어마한 미소녀이지만, 초반에 나온 연우의 자기평가에서는 '평범한데 살짝 매력이 있는 정도'라고 했고, 임희, 임연객 등 가족들도 용모가 평범하다고 묘사되는 등 연우의 외모는 평범에서 조금 위 정도의 설정이다. 그래서 본인도 미중년이며 특히 왕후들은 모두 절세미인에 그 자식들까지 미남 미녀인, 그야말로 '아름다운 일족'의 수장인 왕건의 눈에 찰 정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 이때 왕무도 시간 간격을 두고 북방을 순시하고 오라 지시를 하여, 연우와 둘이 같이할 수밖에 없게 하도록, 연우에게 호위병을 적게 배정하는 식으로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짜놓았다.[3] 독자들의 생각으로는 현재 견훤하고 싸워야 하는데 후계가 왕무로 기울게 되어버리면 결혼동맹으로 끌어들인 호족들의 협조를 받기 어렵게 되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했다 추정되고 있다. 이 추측은 맞아떨어져서 74화에서 왕건이 인정한다.[4]충청남도 아산시(온양시)[5] 그 화의 베댓이 "일반적인 아버지면 아들을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는데, 왕건은 며느리까지 같이 보내면 알아서 같이 기어나오고 황금까지 주워오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했다.(...)[6] 연초에 임희가 연우를 나주원에 보내면서 "현재 국가예산의 8할을 국방비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7] 외가가 멸문당해 처지가 곤궁한데 임희나 연우가 그런 왕무를 외면할수 있을 사람이 아니라 말했다.[8] 하지만 연우로서는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봤으니 영험한 고승은 맞다.[9] 이 와중에 연우가 흉통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것을 보고 나서는 나도 과식을 너무 해서 그런 거 같다고 말을 해서 연우를 부끄럽게 만든다.[10] 아찬 김굉이 사신으로 왔으며, 이 사람은 마의태자와 같이 항복을 결사반대한 사람이다.[11] 왕무 연우 유긍달 최선필 최언위[12] 이때 연우에게 죽음을 앞두고 괴로웠는데, 연우 덕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두려움이 없어졌다며 감사를 표했다. 연우가 소나무 숲에서 혼자인 줄 알고 자신이 전생했다고 크게 외친 적이 있기 때문.[13] 당장 혜종과 정종(定宗)의 재위기간이 매우 짧았던 이유가 호족 문제 때문이며, 이 때문에 광종이 대숙청을 빡세게 돌려야 했다.(안 했으면 육조시대오대시대 고려판이 되었을 것이다) 호족 숙청은 광종 대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아 장기적으로는 현종 대까지 간다.[14] 왕건 사망 당시 혜종에 대해 제 나름대로 이런저런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정종(定宗), 광종의 기반에 비하면 혜종의 기반은 너무 부족했고 하다못해 혼맥도 훨씬 약했다.[15] 중국 조선족연해주 고려인조선 후기~일제강점기에 이주한 집단이다.[16] 왕건의 친위 세력에 합류한 수십만 호(戶)의 발해 유민과 견훤의 대신라 외교 정책에 반감을 가진 친신라 호족들의 합류도 주요 원인이었다.[17] 전근대에는 중앙집권제보다 봉건제 쪽이 더 병력 동원력이 높았다.[18] 이후 요태종이 안심하고 후진을 공격하다가 백두산 폭발을 노리고 고려가 공격해 요동 수천 리를 빼앗아가자 분노한 요태종이 오보를 한 사신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작중 요사 고려전에 나온다. 요태종은 안 그래도 원 역사에서 이 즈음에 죽는데 화병까지 겹쳐서 더 빨리 죽었다고.[19] 원 역사에서 황제가 아님에도 본기에 분류된 인물은 여후뿐이며,(측천무후는 한때 진짜로 황제라서 본기에 분류된 거라 제외) 공치(共治)라는 표현은 수문제-독고가라, 당고종-측천무후 때나 나타난 일이다.[20] 단, 낙랑공주는 935년에 경순왕과 혼인했기 때문에 고증오류가 아니나 대목왕후는 남편인 광종이 925년생이라 명백한 설정오류다. 차라리 작중 오리지널 인물인 나주원공주처럼 대목왕후의 언니인 쪽이 더 고증에 맞다.[21] 사실 고려사에 나오는 왕건의 부인들은 부인들의 서열 순으로 표기한 거지 혼인 순서대로 표기한 것이 아니라 사서에 나오는 왕자녀들은 실제 출생년도가 사서의 순번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22] 강비 외의 후궁도 두지 않았으며, 궁예 생전에도 여색을 밝혀 여러 부인을 두던 왕건은 다소 눈초리를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책임 지고 모두 부인으로 거두어서 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23] 학계에서는 궁예의 배경이 청주 구백제계에 가까워서 고구려계와 이해관계 차이로 갈등을 빚은 게 근본적인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왕건의 말도 딱히 틀리지는 않았을 듯하다.[24] 물론 대광현의 외모 가지고 칭찬한 건 수만 명에 달하는 타국 유민들이 오는 것에 주민들이 반감을 가져서 이미지 좋게 하려고 한 것도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이때 왕건의 언행은 그냥 얼빠 그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