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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사우디 전쟁

파일:오스만 제국 국장.svg 오스만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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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이라크-사우디 전쟁
3.1.1. 1797년 네지드 원정 (투와이니)3.1.2. 1799년 네지드 원정 (알리 파샤)3.1.3. 카르발라 습격 (1802년)3.1.4. 국지전
3.2. 히자즈-사우디 전쟁3.3. 이집트-사우디 전쟁
3.3.1. 와디 앗 사프라 전투 (1811년)3.3.2. 메디나 함락 (1812년)3.3.3. 메카 접수 (1813년)3.3.4. 투루바 전투3.3.5. 쿤푸다 전투 (1814년)

1. 개요

오스만-사우디 혹은 오스만-와하비 전쟁은 오스만 제국 및 그 제후국들과 와하브파사우드 왕조 (디리야 토후국 & 네지드 토후국 & 리야드 토후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개전 원인은 하나피파와 와하브파 간의 교리적 차이 외에도 후자의 메카 점령, 카르발라 습격 등 공격적인 팽창 정책이 큰 요인이었다. 전쟁은 18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오스만 제국 말엽인 20세기 초까지 벌어졌으며, 오스만 측은 2차례 사우디 국가를 멸망시켰으나 결국 부활하여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2. 배경

1727년에 세워진 디리야 토후국 (1차 사우디 국가)은 1773년, 국왕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가 리야드를 정복한 후 네지드 지역의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1780년대 들어 사우디 군대는 이라크 변경 지대를 습격했고, 이는 이라크 맘루크 왕조의 근심을 자아냈다.

3. 전개

3.1. 이라크-사우디 전쟁

파일:Al-thwaini_campaign_in_Arabia.svg.png

1786년 사우디령 카심 태수 후질란 빈 하마드가 하일에서 바스라로 향하던 상단을 공격해 물품을 빼앗고 상인들을 죽였다. 이에 문타피크 부족정 투와이니는 문타피크, 주바이르 등의 군대와 남하하여 타누마를 대포를 동원한 포위 끝에 함락했고 성내의 와하비인 170여명을 살해했다. 뒤이어 부라이다를 포위하던 도중, 바그다드에서 축출된 우바이드 부족장 술레이만 앗 샤위가 망명을 청해오자 투와이니는 포위를 풀고 회군하였다. 한편 투와이니와 합류하기 위해 아흐사에서 북상하던 칼리드 연맹장 압둘무흐산 앗 사르다흐는 앗 다하나에 이르렀을 무렵 투와이니의 회군 소식이 닿자 역시 회군했다. (1787년) 이후 바스라를 장악했던 투와이니는 바그다드 총독 술레이만 파샤에게 패배하여 쿠웨이트로 피신했다. 1788년, 투와이니는 재차 사우디령 네지드로 진격했다가 패배하여 사프완으로 회군하였다.

3.1.1. 1797년 네지드 원정 (투와이니)

계속해서 바스라를 노리던 투와이니는 디리야로 향하였고, 압뒬아지즈 국왕은 그를 존중하며 말과 낙타 무리 및 자금을 주었으나 군사 지원은 거부했다. 한편 술레이만 파샤 역시 투와이니가 와하비 세력과 합세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투와이니가 연락 해오자 그를 사면하였다. 한편 사마와 및 시리아 사막 일대가 와하비 공격에 자주 노출되고 아랍 베두인 부족들이 조금씩 와하비 선교에 넘어가자 조정은 술레이만 파샤에게 직접 공격을 명했으나 그는 자신이 고령이고 바그다드 및 그 일대의 요새화 하느라 바쁘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사죄 조서를 보내며 명을 회피했다. 그는 맘루크 군은 사막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단독으로는 와하비 세력을 소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가택연금에 놓여있던 투와이니는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술레이만 파샤에게 문타피크 부족장 지위 회복을 대가로 대와하비 원정을 이끌겠다고 자원했다. 조정과의 불화에 불안하던 술레이만 파샤는 즉각 수용하여 5만 쿠루쉬 (피아스터), 낙타와 말 각각 1백마리, 예복 1백벌을 하사했고 투와이니는 이를 주민들에게 나눠준 후 바그다드를 떠났다. 그는 문타피크, 다피르 부족 및 바스라와 주바이르 일대에 동원령을 내려 3개월간 군대와 무기를 모았고 술레이만 파샤에 지원 요청 서신을 보냈다. 투와이니는 또한 칼리드 연맹장 바라크 이븐 압둘무흐산 앗 사라다흐에게 연락했고, 그 역시 알 마하쉬르 부족을 제외한 바니 칼리드 군대를 모아 북상했다. 원정군은 자흐라에서 합류했다.

이후 자흐라에서 3개월 더 군대를 정비하며 쿠웨이트, 바레인, 주바이르에서 보급품을 받은 투와이니는 군대를 양분했다. 선발대는 탄약 및 보금품과 쿠웨이트 선박에 올라 카디프로, 자신과 본대는 다가오는 여름 전에 사막을 건너 알 아흐사로 향하기로 했다. 자리야에 주둔하던 와하비 군대의 지휘관 무함마드 빈 마이칼은 두려움에 움 라비아로 철수한 후, 주군 압둘아지즈에 원군을 요청했고 후자는 조카 하산 빈 미샤리 휘하의 증원군을 보냈다. 뒤이어 인근 앗 타프에 당도한 투와이니는 서두르지 않기로 하고 해안의 앗 샤바크 샘으로 향했다. 그후 압둘아지즈는 아들 사우드 왕자를 파견했다. 그는 라우다 타흐나트를 거쳐 하파르 알 아타쉬에 주둔했고 네즈드 부족들에게 가족들과 바니 칼리드령 샘들에 주둔할 것을 명하는 등 투와이니의 진격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1797년 6월, 앗 샤바크에서 병사들과 함께 진을 치던 투와이니가 홀로 있게 된 틈에 칼리드 연맹의 노예 맘루크 타이스가 투와이니를 뒤에서 급습했다. 창으로 어깨 사이가 관통된 투와이니는 즉시했다. 일설에 의하면 타이스는 와하비 신봉자였고, 암살을 위해 입대했다 한다. 타이스 역시 곧 처단되었고, 투와이니의 시신은 아흐사의 아마이르 섬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원로들은 투와이니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커피와 차를 요구하다 동생 나시르를 임시 지도자로 세우며 죽음을 인정했다. 투와이니의 죽음이 공표되자 칼리드 연맹장 바라크는 사우디 군에 가담했고, 혼란에 빠진 원정군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임시 지도자 나시르의 노력에도 흩어져 북쪽으로 도주했다. 그 와중에 보금품 대부분이 방치되어 하산 빈 미샤리는 대포와 화약, 낙타 3천 마리, 양 수만 마리 등을 얻고 추격에 나서 원정군에 큰 인명 손실을 입혔다. 사프완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돌린 나시르 휘하의 군대에는 말 몇 필만이 남아있었다.

3.1.2. 1799년 네지드 원정 (알리 파샤)

승전 후 1797년 말엽, 사우디 군은 이라크령 움물 압바스를 습격했다. 사우디 세력이 제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고 여긴 조정은 더욱 이라크 측을 압박했다. 1798년, 술레이만 파샤는 사위 알리 파샤에게 디리야 공격의 교두보로써 저번에 배신한 알 아흐사 공격을 명령했다. 그해 10월에 5천여 예니체리 및 구식 대포와 1만여 아킬, 우바이드, 샴마르, 문타피크, 다피르 부족 보조군과 함께 출정한 알리 파샤는 바스라로 남하했다.[1] 한편 사막 자문으로 무함마드 베이 앗 샤위가 알리 파샤를 동행했다. 1799년 1월, 원정군은 바스라에 집결했다. 알리 파샤는 자흐라로 남하했고, 쿠웨이트에서 선박을 대여하여 중량 보급품을 우카이르로 운송하며 자신은 본대와 함께 육로로 남하했다.

본대에서는 낙타 1만 마리가 물과 경량 보급품을 날랐는데, 극심한 더위로 여럿이 쓰러지면서 자주 오아시스에서 쉬어야 했다. 게다가 전쟁에 미숙하던 알리 파샤는 자신이 의지했던 부족장들을 푸대접했고, 많은 이들은 원정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붕괴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알리 파샤는 무바라즈의 사후드 성채[2]와 아흐사의 호푸프 성채[3] 외에는 마주친 소규모 거점들은 모두 점령할 수 있었다. 다만 카티프 성채[4]는 2달의 공성전 후에야 점령했다. 특히 사후드 성채는 술레이만 빈 무함마드 빈 마지드의 지휘 하에 계속 버텼다. 원정군은 성벽에 균열을 내었음에도 대포가 충분히 강하지 않아여 결정타를 가하지 못하고 포위를 풀었다.

보급품은 빠르게 고갈되었고, 피로와 갈증이 축적된 병사들의 불만이 커졌다. 특히 사우드 측이 호푸프 북쪽의 도로를 차단하고 우물마다 소금을 뿌려 식수로 쓸 수 없게 하는 청야전술에 나섰다는 소식이 닿자 군심은 폭동 직전에 이르렀다. 이에 (사우디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은) 무함마드 베이 앗 샤위의 조언 하에 알리 파샤는 철수에 나섰다. 도중에 더 많은 낙타들이 쓰러져 죽었기에 나르지 못하게 된 무기들은 파괴되거나 흙에 묻혔다. 또한 강한 모래 폭풍까지 불자 원정군은 우선 옛 기지인 샤바크에 머물렀다. 한편 실제로 디리야에서 출정한 사우드 왕자는 샤바크 북쪽의 싸즈를 장악하고 원정군의 퇴로를 막았다. 이후 샤바크에서 북상한 원정군은 싸즈에서 사우디 군과 승자 없는 정찰전을 벌이다 포병대 및 부족들의 활약으로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이후 양측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휴전 협상을 벌였다. 하무드는 휴전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며 반대했지만, 알리 파샤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1799년 봄의 협상에서 알리 파샤는 사우디 군의 알 아흐사 철수, 이라크 순례자들에 대한 환대, 약탈한 대포들의 반환, 배상금 납부 등의 조건을 걸었다. 원정이 실패한 마당에 당연히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요구였기에 사우드 왕자는 묵살했다. 뒤이어 압둘아지즈 왕은 '룸 (오스만)의 땅이 아니고' 그만한 노력의 가치가 없는 알 아흐사에서의 철수 단독 조건 하에 휴전을 제안했고, 알리 파샤가 결국 승인하며 6년의 불가침 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알리 파샤는 사우디 사절단과 함께 바그다드로 돌아갔고, 술레이만 파샤는 조약을 비준했다. 8개월 간의 원정 중 이라크 측이 그나마 걷은 승리는 문타피크 족장 하무드가 네지드의 수바이 부족을 습격해 다수의 양과 낙타를 빼앗은 것 뿐이었다. 알리 파샤의 회군 후 압둘아지즈는 알 아흐사에 입성하여 이라크 측과 협력한 부역자 전원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뒤이어 그는 카티프도 공격, 처절한 전투 끝에 함락하며 아라비아 반도 동부를 완전히 정복했다.

3.1.3. 카르발라 습격 (1802년)

하지만 양측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799년 말엽, 시아파인 카자일 부족이 나자프 근처에서 마주친 네지드 상단 중 3백여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사우디 측이 배상금 (دية)을 요구하자 술레이만 파샤는 당시 메카 순례 후 이라크로 돌아오던 압뒬아지즈 빈 압둘라 앗 샤위에게 디리야를 들러서 문제의 해결을 논의하게 했다. 하지만 술레이만 파샤는 배상금 납부 혹은 이라크 경내 네즈드 부족들의 방목 허가 모두를 거부했다. 압뒬아지즈 역시 유프라테스 서안 (아나 ~ 바스라)의 영토를 요구하는 등 무리수를 두어 협상은 실패했다. 1801년 말 (혹은 1802년 봄), 사우드 왕자는 1만 2천의 기병대와 북상하여 카르발라를 기습 공격했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쉬아 명절인 이둘 가디르를 맞아 나자프의 이맘 알리 성지로 향하여 도시가 거의 비어 있었다.

사우디 군대는 밤중에 도착했고, 주민들은 성문을 걸어 잠갔지만 사우디 군은 하나의 문만 집중 공격하여 소규모 전투 끝에 돌파했다. 와하비 교리에 입각하여 사우디 군대는 남아 있던 2천 ~ 5천여 주민 중 대부분을 시장과 주택들에서 학살하고 후세인 영묘의 돔을 무너뜨렸다. 시아파에 대한 보복과 적대감으로 사우디 군은 후세인 영묘 자체를 비롯하여 여러 유서 깊은 예배당과 돔, 무덤들을 파괴했다. 또한 보석이 박힌 대문, 카펫, 목걸이, 촛대 등의 귀중품을 약탈했다. 그들은 에메랄드, 루비 등의 보석들로 치장된 후세인의 관과 돈, 무기, 옷, 가구, 금, 은, 치장된 쿠란 등 돈이 될만한 것은 모두 가져갔다. 사우디 군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8시간 가량 단시간에 최대한의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후, 알리 파샤의 토벌군이 당도하기 전에 4천 마리가 넘는 낙타에 전리품을 실어 빠르게 디리야로 돌아갔다.

카르발라의 후세인 성지에는 이슬람권 각지에서 바쳐 수세기간 축적된 보화가 있었다. 티무르도 이곳만큼은 약탈하지 않았고, 나디르 샤 역시 후세인과 알리 성지에 자신이 인도에서 약탈한 막대한 재물과 개인적인 재산을 기증했다. 따라서 사우드 가문은 그 엄청난 보화에 대한 멸시와 갈망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비록 수니파이긴 했지만 양대 쉬아 성지들에 대한 관리의 의무도 있던 오스만 조정은 사우디 세력에 대한 토벌을 결심하게 되었고, 바그다드 총독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한편 성지의 파괴에 크게 분노한 카자르 왕조파트 알리 샤 카자르 역시 바그다드 측에게 이라크를 통해 사우디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5] 술레이만 파샤는 이란측 군사 지원을 거절한 대신 이란 측이 제공한 5백여 발루치 가족들을 배치하여 카르발라의 수비를 강화했다.

3.1.4. 국지전

1807년에는 사우디령 네지드 부족들이 재차 이라크 변경을 침탈하자 바그다드 총독 알리 파샤는 힐라를 거쳐 알 와르디야에 주둔하며 정찰대를 보냈다. 한편 사우디 군은 나자프를 공격했지만 요새화된 성벽과 넓은 해자 때문에 함락하지 못했자 가지아 부족을 공격해 가축을 빼앗았다. 이후 카자일 부족도 공격했고 사마와에서는 단순 약탈 뿐만 아니라 숲을 파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뒤이어 바스라로 향하여 주바이르의 부족들과 국지전을 벌이다가 회군했다. 1808년, 사우드가 재차 카르발라를 공격했으나 저번 사태 후 수비가 강화된 상태였기에 이번에는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후 사우디는 이집트 군의 침공에 대한 대비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더이상 이라크를 공격하지 못했다. 20여년간 이어진 사우디-이라크 전쟁은 승자 없이 마무리되었고, 새로운 방면에서의 전선이 나타나게 된다.

3.2. 히자즈-사우디 전쟁

샤리프 마수드 빈 사이드는 와하비 신도들의 하지 참가를 금지시키며 사우디와 마찰을 빚었다.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샤리프 무사에드 역시 같은 노선을 유지했으나, 1769년 압둘아지즈가 네지드에서 사로잡아 디리야로 압송된 샤리프 만수르 등 히자즈 포로들을 몸값 요구 없이 풀어주자 마침내 하지 참가를 허가했다. 1771년에는 샤리프 아흐마드 빈 사이드가 디리야 측에 히자즈 학자들을 대상으로 와하비 교리를 설명할 학자들의 파견을 요구했고, 이에 압둘아지즈는 셰이크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라 알 후세인과 함께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의 펀지를 보냈다. 논의와 서신 교환 후 샤리프 아흐마드와 메카의 학자들은 와하비 교리에 공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샤리프 아흐마드가 폐위되고 조카 수루르 빈 무사에드가 집권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샤리프 수루르는 디리야 측의 하지 참가 요청에 방문세를 납부하라 명시했고, 압둘아지즈는 이를 거부했다. 와하비 순례객들은 1782년에야 샤리프에게 많은 선물을 바친 후 하지를 행할 수 있었다. 1787년 샤리프 수루르의 사후 계승한 동생 갈립은 1789년, 네지드의 패자에 오른 사우디 측에 재차 와하비 교리 설명을 부탁했다. 이에 압둘아지즈는 17년 전과 같은 학자 및 서신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샤리프 갈립과 학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그후 샤리프 갈립은 와하비 신도들의 메카 출입을 금지했고, 이로써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790년, 샤리프 갈립은 사우디에 대한 선제 공격에 나서며 동생 샤리프 압둘아지즈 휘하 1만 병력을 파견했다. 샤리프 압둘아지즈는 디리야를 향해 진격하던 도중 샤크라 서쪽의 사르 지역에 있는 카스르 바삼에서 사우디 수비대의 저항에 부딪히자 성채를 포위했다. 히자즈 군대는 4달간 성채를 함락하지 못했고, 압둘아지즈는 알 아흐사 전선이 바쁜 와중에도 사우드 휘하 지원군을 보냈다. 이에 샤리프 압둘아지즈는 슈아라로 물러나 메카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듬해 봄 샤리프 갈립이 직접 출정하여 슈아라를 포위했다. 하지만 한달 간의 공성전에도 역시 함락되지 않았고, 마침 핫즈 순례 기간이 다가오자 샤리프 갈립은 원정군과 함께 그의 존재가 절실했던 메카로 철수했다. 1795년에는 샤리프 푸하이드가 이끄는 히자즈 군대가 리야드 서남쪽 방면의 와디 마살에서 사우디에 복속한 하디 빈 카르말라 휘하의 카흐탄 부족을 공격해 격파하고 학살을 벌였다. 승리 후 샤리프 나세르 빈 야흐야가 이끄는 히자즈 군대가 재차 파견되었고, 주마니야에서 카흐탄 부족과 맞섰다. 소식을 들은 압둘아지즈는 우타이바, 무타이르, 사훌, 수바이아, 아즈만, 다와시르 부족 등으로 구성된 원군을 보냈다. 이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사우디 군대가 히자즈 측에 3백여 전사자를 안기며 승리했고, 다수의 가축[6] 및 여러 문의 대포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1797년 샤리프 갈립은 다시 군대를 모아 히자즈와 네지드의 경계인 카르마에서 사우디 군과 대결했으나 역시 패배했다. 이로써 디리야 토후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한 그는 와하비 신도들의 핫즈 참가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다. 1802년 샤리프 갈립은 튀르크, 이집트, 모로코 등 다국적 용병을 포함한 군대와 함께 카르마와 비샤로 출정했으나 역시 압둘아지즈에게 패배했고 일대가 사우디령이 되며 히자즈 중심부가 온전히 노출되었다. 여기에 일부 부족들이 사우디에 복속하며 반기를 들자 샤리프 갈립은 매부인 아드완 부족장 우스만 이븐 압둘라흐만 알 무다이피를 디리야에 사절로 보내어 휴전을 맺었다. 다만 히자즈로 돌아온 우스만은 돌연 사우디에 충성 서약을 하며 친사우드 부족들과 봉기했다. 샤리프 갈립은 토벌에 나섰으나 우스만은 그를 격파한 후 역으로 타이프를 점령했다. 압둘아지즈는 우스만을 타이프와 히자즈의 아미르로 봉하며 현지 부족들에게 지원할 것을 명했고, 샤리프 갈립은 메카로 철수했다

뒤이어 히자즈 완전 정복을 결심한 사우드는 대군과 함께 출정하여 타이프에서 우스만과 합류했다. 1803년의 핫즈를 앞두고 샤리프 갈립은 오스만 조정에 서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핫즈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후 사우드가 메카로 진군하자 샤리프 갈립은 동맹인 샤리프 압둘 무민에게 도시를 맡긴 채로 제다로 피신했고, 후자는 높은 지위를 대가로 와디 앗 사일에 주둔하던 사우드에게 항복했다. 이를 수용하고 메카에 무혈 입성한 사우드는 오스만 술탄 셀림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이단적 건물과 세금을 혁파했으며 핫즈 순례단이 악기를 가져오지 않도록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총독들에게 일러두라 말했다. 메카 대사원에서는 주민들에 대한 안전 보장과 와하비 교리가 낭독되었고, 묘지에 있던 돔들은 파괴되었다. 메카 점령 후 사우드는 제다를 포위했는데, 요새화된 성벽을 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포위를 풀고 메카에 수비대를 배치한 후 회군했다. 1803년, 사우드가 떠난 후 샤리프 갈립은 메카로 진군해 무혈 입성하고는 사우디 주둔군에게 안전한 철수를 보장했다. 뒤이어 그는 우스만이 있던 타이프를 포위했는데, 히자즈 상실을 앞두고도 디리야 조정은 압둘아지즈가 쿠르드 인에게 암살된 여파로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1805년 샤리프 갈립은 다시 다국적으로 구성된 1만 병력을 편성해 아시르의 친사우드 아미르인 압둘 와합 아부 눅타를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히자즈 군대는 오스만 제국이 지원해 준 대포와 무기 상당수를 적에게 뺏겼고, 6백의 전사자 중 대부분도 튀르크 인이었다. 압둘 와합 아부 눅타는 전리품의 1/5를 디라야로 보냈다. 같은해 사우드는 메카 북쪽의 와디 파티마에 성채를 세워 히자즈 군대의 움직임과 보급로를 통제하게 했고, 압둘 와합 아부 눅타를 군사령관에 봉하며 제다로 진군시켰다. 뒤이어 사우디 대군이 메카로 향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고, 중과부적이라 느낀 샤리프 갈립은 메카 아미르 직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디리야 토후국에 복속했다. 얼마후 바다이 빈 무다얀이 이끄는 사우디 군대가 메디나를 포위한 후 점령하고, 얀부 역시 접수하며 히자즈 전역이 빠르게 사우디 령으로 병합되었다. 이로써 디리야 토후국은 아라비아 반도 주요부를 석권하며 최전성기를 맞았다.

3.3. 이집트-사우디 전쟁

샤리프 갈립은 말리키파 무프티인 사이드 무흐신 이븐 압둘라 알 하무드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내 술탄에게 디리야 토후국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는 메카 함락 시까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우드는 1806년부터 메카 순례단을 이끌었다. 그는 주로 메디나 인근에 네지드 순례객들을 집결시킨 후 남하하며 히자즈, 아시르, 하일 등지의 인원을 모았다. 메카에 당도한 후에는 자선을 베풀고 샤리프 갈립과 예물을 교환했으며, 카바에 키스와를 씌웠다. 사우드는 또한 우타이비 부족장 파라즈 빈 샤르안, 장군 마수드 빈 무다얀, 얀부 총독 자베르 빈 자바라를 북부로 파견해 압둘라 파샤 알 아젬이 이끄는 시리아 순례단의 히자즈 진입을 막았다. 오스만 조정은 본래 다마스쿠스 총독들로 사우디 세력을 멸하려 했으나, 오히려 사우디 군대가 시리아의 보스라까지 습격하는 등 그들이 무용지물이라 여겨지자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에게 연락하기로 결심한다.

3.3.1. 와디 앗 사프라 전투 (1811년)

1807년 12월, 마흐무트 2세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수복을 지시했다. 이에 메흐메드 알리는 후계자로 낙점한 차남 투순 파샤 휘하의 원정군을 준비했다. 1811년 10월, 투순 파샤의 1만 4천 이집트 군이 얀부에 상륙하자 3백에 불과했던 현지 사우디 병력은 저항 없이 항복했다. 수비대장은 도주했고, 투순 파샤는 얀부를 보급 거점으로 삼은 후 남하하여 2시간의 전투 끝에 바드르를 점령했다. 사우디 군대는 메디나 인근 와디 앗 사프라 (알 카이프)로 철수했고, 사우드는 아들 압둘라와 함께 1만 8천의 보병 및 8백의 기병을 모아 합류했다. 12월, 투순 파샤의 1만여 병력이 와디 앗 사프라에 당도해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압둘라는 마수드 빈 무다얀을 인근 언덕에 주둔시켜 포위를 방지했고, 이집트 군과 정찰전을 벌였으나 32명을 잃으며 패배했다. 이후 압둘라는 파이살 빈 마수드와 하바브 빈 카히산에게 기병 지휘권을 주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자 양측 모두 손실을 입었고, 베두인 부대가 패퇴했으나 사우디 진영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게 3일간 밀고 밀리던 싸움이 이어지던 끝에 압둘라는 언덕에 있던 마수드 빈 무다얀에게 기병 돌격을 명했고, 예상하지 못한 기습에 이집트 진영은 무너져 도주했다. 이집트 군은 6백의 전사자와 7문의 대포를 포함한 다수의 무기를 잃었고, 사우디 측도 카흐탄 부족장 하디 빈 카르말라 등 6백여 명을 잃었다. 다만 이후 추격을 통해 압둘라는 이집트 군에 4천 이상의 전사자를 더 안겼다.

3.3.2. 메디나 함락 (1812년)

패전 후 얀부로 철수해 요새화한 투순 파샤에게는 가용 병력이 3천에 불과했고, 그는 부친에게 장군들간 다툼 때문에 패했다며 지원을 청했다. 메흐메드 알리는 큰 손실에 놀랐지만, 원정을 포기하지 않고 2만의 병력을 보내주었다. 지원군 중에서는 토마스 케이트 (이브라힘 아가) 휘하의 대포 18문과 야전포 3문을 포함한 포병대도 있었다. 1812년 가을, 투순 파샤는 2만 대군과 함께 진격해 와디 앗 사프라를 무혈 점령했다. 이에 주하이나, 하르브 부족 등이 오스만 조정에 귀순을 표하며 협력했다. 10월, 이집트 군은 3일간 낮에 쉬고 밤에 행군한 끝에 메디나에 당도했다. 메디나에 배치된 마수드 빈 무다얀 휘하 7천의 사우디 병력은 보름 가량 성을 나와 전초전을 벌였지만, 토마스 케이트에게 밀려나 성내로 철수했다. 높은 셩벽과 함께 요새화된 메디나에 대해 투순 파샤는 혹여 예언자 모스크가 훼손될까 우려하여 포격을 금했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주민들에게 집에서 나오지 말 것을 주둔했다. 이후 투순 파샤가 수로를 끊자 성 내부에는 역병이 돌아 수비대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동시에 이집트 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땅굴을 팠고, 비록 첫 시도는 저지되었지만 11월의 두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이로써 성벽 일부가 붕괴하자 이집트 군은 틈새로 돌격했고, 불과 50명 만을 잃으며 1천여 수비대를 전사시켰다. 그후 잔여 1천 5백여 사우디 군은 인근 성채로 피신해 농성했다. 성채가 암벽 위에 세워져 땅굴 작전이 불가하자, 투순 파샤는 공격하지 말고 계속 포위하게 했다. 결국 3주 후 식량이 바닥난 사우디 군은 안전한 철수를 대가로 무기 및 보급품을 두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하지만 토마스 케이트는 약속을 어기고 공격해 도주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을 학살했다.[7]

3.3.3. 메카 접수 (1813년)

이로써 메디나는 7년만에 오스만 령으로 회복되었고, 소식이 전해지자 카이로에서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한편 성채에서 항복할 당시 사로잡힌 사우디 장군 마수드 빈 무다얀은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투순 파샤는 토마스 케이트를 메디나 총독에 봉했고, 더욱 내륙의 하나키야를 점령해 추후에 있을 디리야 원정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뒤이어 1813년 1월에는 무스타파 베이가 이끄는 별동대가 남하하여 메카를 점령했고, 샤리프 갈립은 이집트 군에 합류해 타이프 공격을 도왔다. 점령 후 타이프의 아미르 우스만 알 무다이피를 인계받은 샤리프 갈립은 그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냈고, 역시 처형되었다. 이로써 히자즈가 평정되자 오스만 조정은 투순 파샤를 제다 총독에 봉했다. 메흐메드 알리는 1812년 8월 카이로 떠나 1813년 초에 제다애 당도했고, 샤리프 갈립은 제다에서 그를 맞았다. 둘은 함께 메카로 향하여 서로의 이익에 반하지 않기로 서약했다. 하지만 메흐메드 알리는 돌연 샤리프 갈립을 체포해 코스탄티니예로 압송했고, 마흐무트 2세는 그를 테살로니키로 유배 보냈다.[8]

3.3.4. 투루바 전투

히자즈를 평정한 후 무스타파 베이는 전통적으로 히자즈와 네지드의 경계로 여겨지던 타이프 동쪽의 투루바를 공격했으나, 알 바쿰[9] 부족에게 격퇴되었다. (1813년 8월) 당시 알 바쿰 부족을 이끈 섭정인 갈리야 알 바카미야는 당대에 흔치 않던 여걸로, 막대한 재산을 빈자에게 나눠주며 징집했고 자신의 저택에 부족장들을 모아 작전을 논의하는 등 대이집트 항전을 이끌었다. 패배한 이집트 병사들 사이에서는 갈리야가 와하비 수장이거나 마녀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와 함께 투루바에서의 승리로 패배를 거듭하던 사우디 측의 사기가 올랐다. 따라서 사우드는 투루바를 요새화하고 히자즈의 친사우드 부족들에게 수비 병력을 지원하게 했다.

같은해 10월, 메흐메드 알리는 타이프에 주둔하던 투순 파샤에게 2천 병력을 주어 재차 투루바를 공격하게 했다. 진군 도중 이집트 군은 우타이바, 나시라, 바누 사드 부족들의 습격을 받았다. 투순 파샤는 그들을 산지까지 추격해 절반을 복속시켰다. 다만 그 과정에서 많은 보급품을 잃었고 병사들의 피로가 누적되었다. 따라서 이집트 군이 투루바에 당도했을 때에는 3일치 식량밖에 없었고, 바로 공격에 나섰으나 수비대는 갈리야의 독려 하여 버텼다. 다음날 투순 파샤는 재차 공격을 명했으나 병사들이 대놓고 항명하자 장교들 역시 너무 지쳤다며 타이프로 회군할 것을 조언했다.

이로써 이집트 군이 철수하자 사우디 군은 추격에 나서 7백여명을 전사시키고 보급품 및 무기를 탈취했다. 4일의 교전 끝에 타이프에 당도할 때까지 이집트 군은 물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며 사망자가 속출했고, 1백여 기병대가 사우디 추격대를 격퇴한 덕에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투루바의 사우디 군은 이집트측 보급부대를 습격하며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교통로를 위협했다. 이렇듯 히자즈에 대한 패권이 위협을 받자 메흐메드 알리는 직접 출정했다.

3.3.5. 쿤푸다 전투 (1814년)

히나키야와 투루바에서 오스만 군이 연패를 하며 사기가 저하되자 메흐메드 알리는 사우디 측을 교란하고, 히자즈를 자주 습격하던 아시르 부족들을 응징하기 위해 아시르 북부의 항구 도시 쿤푸다 공격을 지시했다. 쿤푸다는 또한 예멘 침공의 거점이 될 수도 있었다. 1814년 3월, 후세인 아가와 사임오글루가 이끄는 1천 5백의 오스만 군대는 40척의 함대를 통해 7일에 걸쳐 쿤푸다로 나아갔다. 아시르의 아미르 타미 빈 슈아이브는 쿤푸다의 성벽을 강화하고 5백의 수비대를 배치해 두었다. 다만 가장 가까운 우물이 3시간 거리의 산지에 있었기에 주민들은 전투 전에 대부분 피난했다. 오스만 군이 성을 포위한 후 포격을 가하자 수비대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후 오스만 군의 대부분은 쿤푸다에, 산지의 우물에는 150명의 알바니아 부대가 배치되었다.

다만 한달 후 타미 빈 슈아이브가 1만에 달하는 병력과 수복에 나섰고, 그는 우선 우물을 공격했다. 알바니아 부대는 일부가 교전하고 나머지는 저항 없이 도주했다. 이에 혼란이 엄습하자 후세인 아가와 사임오글루는 항구의 선박들로 피신을 지시했다. 따라서 방어선은 무너져내렸고, 사우디 군대는 성내로 진입하여 병사들과 인부들을 보이는대로 죽였다. 아비규환 속에서 함대가 성급히 출항하며 미처 타지 못한 많은 병사들이 바닷가에서 학살되었고, 제다로 향하던 함대 역시 물과 식량이 부족하여 추가로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사우디 군은 군마 5백필, 천막 1천개 등의 전리품을 얻었고 타미 빈 슈아이브는 아시르를 재통합했다. 쿤푸다 전투가 한창이던 1814년 4월, 사우드가 병사하고 압둘라가 계승했다.

그 무럽 메흐메드 알리는 메카와 타이프에서 2만 대군을 모아 아비딘 베이에게 주어 바하의 자흐란 부족을 토벌하게 했다. 아비딘 베이는 저항을 마주하지 않고 바하에 당도했다. 바하에는 자흐란 부족장 바크루쉬 빈 알라스가 있었고, 곧 타미가 1만의 구원병이 접근했다. 이집트 군은 성 근처에서 타미에 맞섰으나 1천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했고, 타이프로 철수했다. 뒤이어 타미와 바크루쉬가 타이프를 포위했고, 성안에 있던 투순 파샤는 수비로 일관했다. 사태를 들은 메흐메드 알리는 20기의 기병만을 대동하고 출정해 산에 올라 타이프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휘하 기병이 사우디 정찰병을 생포하자 메흐메드 알리는 적군에 대해 심문한 후, 바크루쉬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그렇게 전달된 서신에서 대규모 이집트 구원병이 당도한다는 메흐메드 알리의 허장성세를 믿은 사우디 군대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따라서 메흐메드 알리는 6월에 투순 파샤와 함께 메카로 돌아갈 수 있었다. 타이프 포위전 후 병력을 증원받은 아비딘 베이는 같은해 9월, 재차 바하 원정에 나섰다. 우선 타이프 남쪽의 자흐란 부족을 토벌해 복속시킨 그는 네지드와의 교통로를 파괴한 후 사막에 주둔했다. 이에 바크루쉬 역시 타미가 보낸 아시르 병력과 함께 그 남쪽에 주둔했다. 이집트 군이 참호를 파거나 초소를 두지 않은 것을 파악한 바크루쉬는 이른 아침에 기습 공격을 가했고, 잠을 자던 알바니아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나마 마후오 베그가 수백의 병력과 저항했지만 결국 압도되었고, 이집트 군은 패주했다. 그나마 후세인 베이가 후방에서 엄호하여 전멸을 면했고, 바크루쉬는 이틀간 추격하며 막사와 회기 등의 전리품을 얻었다. 전투 결과 사우디 측은 불과 60명을 잃은 반면 이집트 군은 보병 8백과 기병 80명을 잃었다. 이집트 군은 타이프와 4시간 거리인 리예에 이르러 타이프에서 보낸 구원병과 합류했고, 이에 사우디 군대는 철수했다.

인근 메카에 있던 메흐메드 알리는 아비딘 베이에게 반격을 명했지만, 병사들 중 절반 가량이 타이프로 향하며 무산되었다. 쿤푸다에 이어 바하 원정이 역시 연이어 실패하며 이집트 군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용맹한 아비딘 베이 역시 군대가 싸우려 하지 않으며 사우디와의 전쟁은 헛수고일 거라 한탄했다.


[1] 파르스 알 자르바가 샴마르, 하무드가 문타피크 부족, 이브라힘 앗 타키브가 잔여 부족들 이끔[2] 카스르 앗 사후드 / 후슨 알 무바라즈[3] 쿠트 알 호푸프[4] 이브라힘 빈 우파이산이 항전[5] 나름 압박도 가했으나 1803년 들어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을 침탈하며 대러시아 성전에 몰두해야 했기에 사우디에 대한 보복은 뒷전으로 밀린다[6] 이븐 간남에 따르면 낙타 3만 마리와 양과 염소 20만 마리[7] 이는 베두인 동맹 부족들에 충격을 안겼다.[8] 샤리프 갈립은 1816년 여름에 병사한다.[9] 히자즈와 네지드에 걸친 부족답게 반농반목 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