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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사우디 전쟁

파일:오스만 제국 국장.svg 오스만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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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이라크-사우디 전쟁
3.1.1. 1797년 네지드 원정 (투와이니)3.1.2. 1799년 네지드 원정 (알리 파샤)3.1.3. 카르발라 습격 (1802년)3.1.4. 국지전
3.2. 이집트-사우디 전쟁

1. 개요

오스만-사우디 혹은 오스만-와하비 전쟁은 오스만 제국 및 그 제후국들과 와하브파사우드 왕조 (디리야 토후국 & 네지드 토후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개전 원인은 하나피파와 와하브파 간의 교리적 차이 외에도 후자의 메카 점령, 카르발라 습격 등 공격적인 팽창 정책이 큰 요인이었다. 전쟁은 18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오스만 제국 말엽인 20세기 초까지 벌어졌으며, 오스만 측은 2차례 사우디 국가를 멸망시켰으나 결국 부활하여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2. 배경

1727년에 세워진 디리야 토후국 (1차 사우디 국가)은 1773년, 국왕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가 리야드를 정복한 후 네지드 지역의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1780년대 들어 사우디 군대는 이라크 변경 지대를 습격했고, 이는 이라크 맘루크 왕조의 근심을 자아냈다.

3. 전개

3.1. 이라크-사우디 전쟁

파일:Al-thwaini_campaign_in_Arabia.svg.png

1786년 사우디령 카심 태수 후질란 빈 하마드가 하일에서 바스라로 향하던 상단을 공격해 물품을 빼앗고 상인들을 죽였다. 이에 문타피크 부족정 투와이니는 문타피크, 주바이르 등의 군대와 남하하여 타누마를 대포를 동원한 포위 끝에 함락했고 성내의 와하비인 170여명을 살해했다. 뒤이어 부라이다를 포위하던 도중, 바그다드에서 축출된 우바이드 부족장 술레이만 앗 샤위가 망명을 청해오자 투와이니는 포위를 풀고 회군하였다. 한편 투와이니와 합류하기 위해 아흐사에서 북상하던 칼리드 연맹장 압둘무흐산 앗 사르다흐는 앗 다하나에 이르렀을 무렵 투와이니의 회군 소식이 닿자 역시 회군했다. (1787년) 이후 바스라를 장악했던 투와이니는 바그다드 총독 술레이만 파샤에게 패배하여 쿠웨이트로 피신했다. 1788년, 투와이니는 재차 사우디령 네지드로 진격했다가 패배하여 사프완으로 회군하였다.

3.1.1. 1797년 네지드 원정 (투와이니)

계속해서 바스라를 노리던 투와이니는 디리야로 향하였고, 압뒬아지즈 국왕은 그를 존중하며 말과 낙타 무리 및 자금을 주었으나 군사 지원은 거부했다. 한편 술레이만 파샤 역시 투와이니가 와하비 세력과 합세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투와이니가 연락 해오자 그를 사면하였다. 한편 사마와 및 시리아 사막 일대가 와하비 공격에 자주 노출되고 아랍 베두인 부족들이 조금씩 와하비 선교에 넘어가자 조정은 술레이만 파샤에게 직접 공격을 명했으나 그는 자신이 고령이고 바그다드 및 그 일대의 요새화 하느라 바쁘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사죄 조서를 보내며 명을 회피했다. 그는 맘루크 군은 사막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단독으로는 와하비 세력을 소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가택연금에 놓여있던 투와이니는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술레이만 파샤에게 문타피크 부족장 지위 회복을 대가로 대와하비 원정을 이끌겠다고 자원했다. 조정과의 불화에 불안하던 술레이만 파샤는 즉각 수용하여 5만 쿠루쉬 (피아스터), 낙타와 말 각각 1백마리, 예복 1백벌을 하사했고 투와이니는 이를 주민들에게 나눠준 후 바그다드를 떠났다. 그는 문타피크, 다피르 부족 및 바스라와 주바이르 일대에 동원령을 내려 3개월간 군대와 무기를 모았고 술레이만 파샤에 지원 요청 서신을 보냈다. 투와이니는 또한 칼리드 연맹장 바라크 이븐 압둘무흐산 앗 사라다흐에게 연락했고, 그 역시 알 마하쉬르 부족을 제외한 바니 칼리드 군대를 모아 북상했다. 원정군은 자흐라에서 합류했다.

이후 자흐라에서 3개월 더 군대를 정비하며 쿠웨이트, 바레인, 주바이르에서 보급품을 받은 투와이니는 군대를 양분했다. 선발대는 탄약 및 보금품과 쿠웨이트 선박에 올라 카디프로, 자신과 본대는 다가오는 여름 전에 사막을 건너 알 아흐사로 향하기로 했다. 자리야에 주둔하던 와하비 군대의 지휘관 무함마드 빈 마이칼은 두려움에 움 라비아로 철수한 후, 주군 압둘아지즈에 원군을 요청했고 후자는 조카 하산 빈 미샤리 휘하의 증원군을 보냈다. 뒤이어 인근 앗 타프에 당도한 투와이니는 서두르지 않기로 하고 해안의 앗 샤바크 샘으로 향했다. 그후 압둘아지즈는 아들 사우드 왕자를 파견했다. 그는 라우다 타흐나트를 거쳐 하파르 알 아타쉬에 주둔했고 네즈드 부족들에게 가족들과 바니 칼리드령 샘들에 주둔할 것을 명하는 등 투와이니의 진격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1797년 6월, 앗 샤바크에서 병사들과 함께 진을 치던 투와이니가 홀로 있게 된 틈에 칼리드 연맹의 노예 맘루크 타이스가 투와이니를 뒤에서 급습했다. 창으로 어깨 사이가 관통된 투와이니는 즉시했다. 일설에 의하면 타이스는 와하비 신봉자였고, 암살을 위해 입대했다 한다. 타이스 역시 곧 처단되었고, 투와이니의 시신은 아흐사의 아마이르 섬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원로들은 투와이니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커피와 차를 요구하다 동생 나시르를 임시 지도자로 세우며 죽음을 인정했다. 투와이니의 죽음이 공표되자 칼리드 연맹장 바라크는 사우디 군에 가담했고, 혼란에 빠진 원정군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임시 지도자 나시르의 노력에도 흩어져 북쪽으로 도주했다. 그 와중에 보금품 대부분이 방치되어 하산 빈 미샤리는 대포와 화약, 낙타 3천 마리, 양 수만 마리 등을 얻고 추격에 나서 원정군에 큰 인명 손실을 입혔다. 사프완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돌린 나시르 휘하의 군대에는 말 몇 필만이 남아있었다.

3.1.2. 1799년 네지드 원정 (알리 파샤)

승전 후 1797년 말엽, 사우디 군은 이라크령 움물 압바스를 습격했다. 사우디 세력이 제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고 여긴 조정은 더욱 이라크 측을 압박했다. 1798년, 술레이만 파샤는 사위 알리 파샤에게 디리야 공격의 교두보로써 저번에 배신한 알 아흐사 공격을 명령했다. 그해 10월에 5천여 예니체리 및 구식 대포와 1만여 아킬, 우바이드, 샴마르, 문타피크, 다피르 부족 보조군과 함께 출정한 알리 파샤는 바스라로 남하했다.[1] 한편 사막 자문으로 무함마드 베이 앗 샤위가 알리 파샤를 동행했다. 1799년 1월, 원정군은 바스라에 집결했다. 알리 파샤는 자흐라로 남하했고, 쿠웨이트에서 선박을 대여하여 중량 보급품을 우카이르로 운송하며 자신은 본대와 함께 육로로 남하했다.

본대에서는 낙타 1만 마리가 물과 경량 보급품을 날랐는데, 극심한 더위로 여럿이 쓰러지면서 자주 오아시스에서 쉬어야 했다. 게다가 전쟁에 미숙하던 알리 파샤는 자신이 의지했던 부족장들을 푸대접했고, 많은 이들은 원정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붕괴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알리 파샤는 무바라즈의 사후드 성채[2]와 아흐사의 호푸프 성채[3] 외에는 마주친 소규모 거점들은 모두 점령할 수 있었다. 다만 카티프 성채[4]는 2달의 공성전 후에야 점령했다. 특히 사후드 성채는 술레이만 빈 무함마드 빈 마지드의 지휘 하에 계속 버텼다. 원정군은 성벽에 균열을 내었음에도 대포가 충분히 강하지 않아여 결정타를 가하지 못하고 포위를 풀었다.

보급품은 빠르게 고갈되었고, 피로와 갈증이 축적된 병사들의 불만이 커졌다. 특히 사우드 측이 호푸프 북쪽의 도로를 차단하고 우물마다 소금을 뿌려 식수로 쓸 수 없게 하는 청야전술에 나섰다는 소식이 닿자 군심은 폭동 직전에 이르렀다. 이에 (사우디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은) 무함마드 베이 앗 샤위의 조언 하에 알리 파샤는 철수에 나섰다. 도중에 더 많은 낙타들이 쓰러져 죽었기에 나르지 못하게 된 무기들은 파괴되거나 흙에 묻혔다. 또한 강한 모래 폭풍까지 불자 원정군은 우선 옛 기지인 샤바크에 머물렀다. 한편 실제로 디리야에서 출정한 사우드 왕자는 샤바크 북쪽의 싸즈를 장악하고 원정군의 퇴로를 막았다. 이후 샤바크에서 북상한 원정군은 싸즈에서 사우디 군과 승자 없는 정찰전을 벌이다 포병대 및 부족들의 활약으로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이후 양측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휴전 협상을 벌였다. 하무드는 휴전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다며 반대했지만, 알리 파샤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1799년 봄의 협상에서 알리 파샤는 사우디 군의 알 아흐사 철수, 이라크 순례자들에 대한 환대, 약탈한 대포들의 반환, 배상금 납부 등의 조건을 걸었다. 원정이 실패한 마당에 당연히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요구였기에 사우드 왕자는 묵살했다. 뒤이어 압둘아지즈 왕은 '룸 (오스만)의 땅이 아니고' 그만한 노력의 가치가 없는 알 아흐사에서의 철수 단독 조건 하에 휴전을 제안했고, 알리 파샤가 결국 승인하며 6년의 불가침 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알리 파샤는 사우디 사절단과 함께 바그다드로 돌아갔고, 술레이만 파샤는 조약을 비준했다. 8개월 간의 원정 중 이라크 측이 그나마 걷은 승리는 문타피크 족장 하무드가 네지드의 수바이 부족을 습격해 다수의 양과 낙타를 빼앗은 것 뿐이었다. 알리 파샤의 회군 후 압둘아지즈는 알 아흐사에 입성하여 이라크 측과 협력한 부역자 전원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뒤이어 그는 카티프도 공격, 처절한 전투 끝에 함락하며 아라비아 반도 동부를 완전히 정복했다.

3.1.3. 카르발라 습격 (1802년)

하지만 양측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799년 말엽, 시아파인 카자일 부족이 나자프 근처에서 마주친 네지드 상단 중 3백여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사우디 측이 배상금 (دية)을 요구하자 술레이만 파샤는 당시 메카 순례 후 이라크로 돌아오던 압뒬아지즈 빈 압둘라 앗 샤위에게 디리야를 들러서 문제의 해결을 논의하게 했다. 하지만 술레이만 파샤는 배상금 납부 혹은 이라크 경내 네즈드 부족들의 방목 허가 모두를 거부했다. 압뒬아지즈 역시 유프라테스 서안 (아나 ~ 바스라)의 영토를 요구하는 등 무리수를 두어 협상은 실패했다. 1801년 말 (혹은 1802년 봄), 사우드 왕자는 1만 2천의 기병대와 북상하여 카르발라를 기습 공격했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쉬아 명절인 이둘 가디르를 맞아 나자프의 이맘 알리 성지로 향하여 도시가 거의 비어 있었다.

사우디 군대는 밤중에 도착했고, 주민들은 성문을 걸어 잠갔지만 사우디 군은 하나의 문만 집중 공격하여 소규모 전투 끝에 돌파했다. 와하비 교리에 입각하여 사우디 군대는 남아 있던 2천 ~ 5천여 주민 중 대부분을 시장과 주택들에서 학살하고 후세인 영묘의 돔을 무너뜨렸다. 시아파에 대한 보복과 적대감으로 사우디 군은 후세인 영묘 자체를 비롯하여 여러 유서 깊은 예배당과 돔, 무덤들을 파괴했다. 또한 보석이 박힌 대문, 카펫, 목걸이, 촛대 등의 귀중품을 약탈했다. 그들은 에메랄드, 루비 등의 보석들로 치장된 후세인의 관과 돈, 무기, 옷, 가구, 금, 은, 치장된 쿠란 등 돈이 될만한 것은 모두 가져갔다. 사우디 군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8시간 가량 단시간에 최대한의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후, 알리 파샤의 토벌군이 당도하기 전에 4천 마리가 넘는 낙타에 전리품을 실어 빠르게 디리야로 돌아갔다.

카르발라의 후세인 성지에는 이슬람권 각지에서 바쳐 수세기간 축적된 보화가 있었다. 티무르도 이곳만큼은 약탈하지 않았고, 나디르 샤 역시 후세인과 알리 성지에 자신이 인도에서 약탈한 막대한 재물과 개인적인 재산을 기증했다. 따라서 사우드 가문은 그 엄청난 보화에 대한 멸시와 갈망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비록 수니파이긴 했지만 양대 쉬아 성지들에 대한 관리의 의무도 있던 오스만 조정은 사우디 세력에 대한 토벌을 결심하게 되었고, 바그다드 총독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한편 성지의 파괴에 크게 분노한 카자르 왕조파트 알리 샤 카자르 역시 바그다드 측에게 이라크를 통해 사우디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5] 술레이만 파샤는 이란측 군사 지원을 거절한 대신 이란 측이 제공한 5백여 발루치 가족들을 배치하여 카르발라의 수비를 강화했다.

3.1.4. 국지전

1807년에는 사우디령 네지드 부족들이 재차 이라크 변경을 침탈하자 바그다드 총독 알리 파샤는 힐라를 거쳐 알 와르디야에 주둔하며 정찰대를 보냈다. 한편 사우디 군은 나자프를 공격했지만 요새화된 성벽과 넓은 해자 때문에 함락하지 못했자 가지아 부족을 공격해 가축을 빼앗았다. 이후 카자일 부족도 공격했고 사마와에서는 단순 약탈 뿐만 아니라 숲을 파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뒤이어 바스라로 향하여 주바이르의 부족들과 국지전을 벌이다가 회군했다. 1808년, 사우드가 재차 카르발라를 공격했으나 저번 사태 후 수비가 강화된 상태였기에 이번에는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후 사우디는 이집트 군의 침공에 대한 대비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더이상 이라크를 공격하지 못했다. 20여년간 이어진 사우디-이라크 전쟁은 승자 없이 마무리되었고, 새로운 방면에서의 전선이 나타나게 된다.

3.2. 이집트-사우디 전쟁



[1] 파르스 알 자르바가 샴마르, 하무드가 문타피크 부족, 이브라힘 앗 타키브가 잔여 부족들 이끔[2] 카스르 앗 사후드 / 후슨 알 무바라즈[3] 쿠트 알 호푸프[4] 이브라힘 빈 우파이산이 항전[5] 나름 압박도 가했으나 1803년 들어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을 침탈하며 대러시아 성전에 몰두해야 했기에 사우디에 대한 보복은 뒷전으로 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