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2:26:02

이라크 맘루크 왕조

1. 개요2. 명칭3. 역사
3.1. 하산 파샤3.2. 아흐마드 파샤3.3. 술레이만 파샤 아부 라일라3.4. 우마르 파샤
3.4.1. 바스라 함락 (1776년)
3.5. 압둘라 파샤
3.5.1. 내전과 바스라 회복
3.6. 大 술레이만 파샤
3.6.1. 바스라의 반란 (1787년, 1788년)3.6.2. 건설 사업3.6.3. 이라크-와하비 전쟁3.6.4. 카르발라 습격 (1802년)3.6.5. 사망과 후계
3.7. 알리 파샤
3.7.1. 압둘라흐만 파샤의 난3.7.2. 말년과 죽음
3.8. 小 술레이만 파샤3.9. 글리윈 전투 (1813년)3.10. 사이드 파샤3.11. 다우드 파샤
3.11.1. 카자르 왕조의 침입 (1821년)3.11.2. 베두인 부족 문제3.11.3. 근대화 개혁 추진3.11.4. 바그다드 공방전 (1831년)
4. 여담

1. 개요

아랍어 مماليك العراق
영어 Mamluk dynasty of Iraq

1704 / 1749 ~ 1831년간 오스만 제국에 명목상 복속한 채로 이라크를 다스린 조지아계 맘루크 정권. 이란 세력의 침공[1]을 격퇴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쇠퇴하던 이라크에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시작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재정비 후 정벌되어 멸망하였다.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왕조처럼 근대 이라크 국가의 시초로 여겨진다.[2] 바그다드에 남아있는 전근대 건물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보수/신축된 것이다.

2. 명칭

왕조라기 보다는 '국' 혹은 '정권' 정도의 표현이 어울리는 이집트 맘루크 왕조나 북인도 노예 왕조와 달리 이라크 맘루크 왕조는 10명 모두가 창건자 하산 파샤와 가족으로 얽혀 있어 진정한 왕조로 볼 수 있다.

3. 역사

17세기 후반부터 이라크는 지방에서는 아랍/쿠르드 부족들이, 도시에서는 예니체리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등 통치 체계가 와해되고 있었다. 1668년에야 오스만 령으로 수복된 바스라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특히 바그다드는 무역의 쇠퇴로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3.1. 하산 파샤

그러던 1704년, 오스만 조정은 47세의 조지아계 시파히 출신으로 고등 교육을 받고 우르파디야르바크르 등지의 태수를 지내며 현지 부족들을 제압한 하산 파샤를 바그다드 총독에 봉하였다. 하산 파샤는 현지 부족들을 제압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했다. 이후 그는 땔감과 식자재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고 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다. 우선 바그다드에 여러 주택과 학교들을 세우는 등 인프라 구축에 나섰고, 현지 수니파 학자들이 학업을 지속하도록 후원하였다.

그러면서도 관내 쉬아 성지들에도 관심을 기울여 1705년 카르발라의 후세인과 알 압바스 성지를 방문, 인근 관개 수로를 정비하는 등 이라크 각 도시들의 재정비에 나섰다. 카르발라와 나자프 사이의 카라반사라이인 칸 알 함마드 성채와 바그다드의 앗 사라이 모스크[3] 역시 이때 보수되었다. 그가 행정 치소로 삼은 바그다드 동안의 앗 사라이 모스크 일대는 자디드 하산 파샤라 불리게 되었다. 1708년에는 잠시 자립했던 무가미 부족에게서 바스라를 수복, 자신의 수하를 왈리로 봉하였다.

하산 파샤의 치세로 이라크는 수세기 만에 안정을 회복했다. 동시에 그는 트빌리시의 노예 시장에서 조지아, 체르케스계 아동들을 매입한 후 바그다드에서 맘루크 및 관료로 훈련시켜 기존의 예니체리 군부를 견제하고 수비력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노예 구입 및 훈련을 담당하는 이즈 다이라 시 (إيج دائرة سي), 즉 내부 부서란 조직을 만들었다. 술레이만 파샤 아부 라일라[4] 등 이때 양성된 맘루크들은 한세기 이상 이어진 맘루크 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1716년, 하산 파샤는 신자르야지디 부족들을 격파하고 복속시켰다. 같은해 그는 바그다드에 다리를 세우고 조정의 요구에 따라 5백의 병력을 오스트리아 전선에 파병했다.

1718 ~ 1719년, 바그다드와 사마라 일대에 역병이 돌아 수천의 사람이 죽었으나 곧 지나갔다. 1721년, 조정으로부터 이란 고원의 새 세력인 아프간계 호타키 왕조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명을 받은 하산 파샤는 도시 주변에 참호를 팠다. 1722년, 마침내 조정이 아직 호타키 조가 장악하지 못한 이란 고원을 장악하라 명하자 하산 파샤는 남부 전선 사령관을 맡아 베두인 보조군과 함께 자그로스 산맥을 넘었다.[5] 그해 말엽, 케르만샤를 장악한 하산 파샤는 하마단 진격을 준비하던 1723년 사망하여 바그다드 인근의 알 아다미야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계승한 아흐마드 파샤[6] 역시 부친의 정책을 이어받아 정권의 기반을 강화했다.

3.2. 아흐마드 파샤

우선 부친의 원정을 이어가 이미 협상이 진행 중이던 하마단을 접수한 아흐마드 파샤는 나하반드까지 점령한 후 바그다드로 회군하였다. 다만 이란 서부에 대한 오스만 지배는 오래 가지 못하여 7년만인 1730년, 나디르 샤가 자그로스 산지를 대부분 수복한다. 1732년, 나디르 샤가 이라크를 침공하자 하산 파샤는 무함마드 파샤 실라다르로 대체되어 알레포 및 콘야 태수를 지내다가 1736년 재차 바그다드에 봉해져 1747년 사망 시까지 재임했다.

그가 바그다드 총독을 지낸 것은 1723 ~ 32년, 1736 ~ 1747년까지 20년으로, 부친과 비슷하다. 또한 부친을 이어 조지아 맘루크 친위대를 2천명까지 확대시켜 추후 맘루크 정권의 토대를 강화했다.한편 1732년, 아흐마드 파샤는 평소 즐기던 사자 사냥 중 창을 던졌으나 부러져 사자에게 죽을 위기였는데 재무관 맘루크이던 술레이만 파샤가 나서 사자를 죽여 주군의 목숨을 구했다. 그 대가로 아흐마드 파샤는 딸 아딜라 카툰을 술레이만 파샤에게 결혼시키고, 재상인 카히야에 봉하여 사실상 후계자로 삼았다.

3.3. 술레이만 파샤 아부 라일라

아흐마드 파샤의 사후 조정은 맘루크 정권의 세습을 막고자 그랜드 와지르 출신의 니샨즈 아흐메트 파샤를 바그다드 총독으로 파견했고, 아흐마드 파샤의 사위 술레이만 파샤는 바스라 태수로 전임되었다. 하지만 1748년 니샨즈 아흐메트 파샤가 이집트로 전근한 후 부임한 신임 총독 티르야키 하즈 메흐메트 파샤가 제대로 퉁치하지 못하여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사자, 술레이만 파샤는 조지아 맘루크 부대와 함께 북상했다. 술탄의 명에도 그가 진격을 계속하자 힐라디와니야 등의 지휘관들은 대항을 포기했고, 바그다드에서 예니체리 부대가 사라이 (궁전)를 포격하는 등 3일간 봉기를 일으키자 메흐메트 파샤 역시 도주하였다.

이후 주민들의 환영과 함께 입성한 술레이만 파샤는 무혈 쿠데타로써 바그다드 총독에 올랐다. (1749년 10월) 오스만 조정 역시 내키지 않았지만 그를 인정했다. 술레이만 파샤는 밤에 나가는 것을 좋아해 아부 라일라라 불렸다. 그의 부인 아딜라 카툰은 동생 아이샤 카눔의 남편 아흐마드 아가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며 남편을 꼬드겨 처형시켰다. 이후 아이샤 카눔은 압둘라 파샤와 재혼한다. 문타피크 등 여러 부족들을 제압하고 바스라를 완전히 바그다드 정권 하에 둔 술레이만 파샤는 1762년, 약 6개월간 와병한 끝에 사망했다.

13년에 이르는 그의 치세동안 이란은 내전 상태였기에 이라크는 안정적이었다. 한편 술레이만 파샤의 사후 7인의 맘루크들의 총독 후보에 올랐는데, 그들 간의 대립은 거의 전쟁에 이를뻔 했으나 울라마 (학자들) 및 유지들이 중재에 나서 조정에게 선택을 맡기기로 했다. 얼마 후, 조정은 당시 바스라 태수이던 알리 파샤를 임명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알리 파샤는 1763년, 바스라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관 건설을 허가했다.[7] 하지만 그는 7인 중 유일하게 캅카스 출신이 아니었고 페르시아계였기에 불만을 자아냈고, 2년만에 6인 중 하나이자 아흐마드 파샤의 아들인 우마르 파샤가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였다.

3.4. 우마르 파샤

정변 후 바그다드의 울라마와 유지들은 조정에 서신을 보내어 알리 파샤가 이라크를 이란에 넘기기로 공모했다고 고발하며, 우마르 파샤의 인정을 청했고 윤허되었다. 한편 여장을 하고 민가에 숨었던 알리 파샤는 집 주인의 신고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1764년 우마르 파샤는 유프라테스 중류에서 자립한 쉬아 카자일 부족의 셰이크 함무드 알 하마드를 제거하고 1768년 문타피크, 우바이드 부족의 난을 진압하는 등 이라크를 평정했다. 그는 전임자들처럼 오만, 유럽 상인들과의 무역을 진흥했다.

그후 평화가 유지되던 1772년, 바그다드에 역병이 돌아 다수가 사망하던 차에 일부 가문들이 시내에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으며 혼란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진압할 병력이 부족하여 역병이 사그러진 후에도 한동안 약탈이 계속되었다. 1774년에는 바스라에 아브 자프지르란 역병이 돌았고,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8] 태수 쉴레이만 아가는 병자 및 발병 구역들을 격리하고 위원회 및 기병대를 구성해 치료약이라 여겨진 마늘을 먹게 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9]

3.4.1. 바스라 함락 (1776년)

상황이 호전되던 1775년, 잔드 왕조 군주 카림 칸의 동생 사디크 칸이 바스라를 공격해왔다. 맘루크 태수 술레이만 아가의 강한 저항에도 가뭄과 기근으로 주민들이 개, 고양이,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먹는 지경에 이르며 여럿이 사망하는 등 상황이 어려워졌다. 오만, 영국측 원군도 바스라 구원에는 살패하고 회군하였다. 그러자 술탄 압뒬하미트 1세는 아스피나크지 무스타파 파샤를 새 바그다드 총독에 봉하며 모술 총독 술레이만 파샤 등을 함께 파견했다.

폐위된 우마르 파샤는 도시를 떠나던 도중 무스타파 파샤의 군대에게 살해되었고[10], 그의 수급은 조정에 보내졌다. 하지만 무스타파 파샤는 바스라에 보낸 원군이 카자일 부족에게 격퇴되자, 술레이만 아가에게 항복을 명하였다. 이로써 14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1776년 바스라는 점령되어 술레이만 아가 등은 쉬라즈로 유배되었고 잔드 군대는 상점들을 약탈했다.[11] 한편 바스라 함락에 분노한 조정은 9개월만에 새 바그다드 총독으로 현지 맘루크 출신의 미르미란 (대장) 카브키 압디 파샤를 봉하였고, 해임된 무스타파 파샤는 겁에 질린 채로 코스탄티니예를 향하다가 디야르바크르에서 살해되어 수급이 조정에 보내졌다.

3.5. 압둘라 파샤

콘야, 트라브존, 디야르바크르 등의 총독을 역임한 압디 파샤는 바그다드 부임 직후, 바스라 구원에 나섰으나 실패 후 해임되었다.[12] 몇 주에 걸친 압디 파샤의 짧은 임기 후 아흐마드 파샤의 또다른 사위[13]인 압둘라 파샤가 바그다드 총독에 봉해졌다. 그는 우선 자산, 바드란 등 일부 실지를 회복하고 잔드 조에 붙은 쿠르드계 후국들을 응징했다.[14] 그러나 그의 재무관 무함마드 아젬이 바스라 원정을 위해 조정에서 하사한 재물을 횡령한 후 업무에 썼다고 위조하는 등 내각은 부패한 상태였다. 점차 측근들에게 정무를 맡기던 압둘라 파샤는 1778년 초엽 사망했다.

3.5.1. 내전과 바스라 회복

사후 그의 측근 살림 에펜디가 일시적으로 집권했고, 무함마드 아젬 및 이스마일 카히야 등이 반발하며 바그다드 주민들까지 파벌로 나뉘어 5개월간 내전을 벌였다. 무함마드 아젬과 이스마일 카히야는 각각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조정에 보냈지만, 정작 조정은 키르쿠크 태수 카르쿠클리 하산 파샤를 새 총독에 봉하였다. 1778년 중반, 바그다드에 입성한 그는 기존 인사들을 대부분 용서했지만 성채에 있던 무함마드 아젬은 파샤를 칭하며 베두인 부족들과 연대해 맞서다가 패한 후 잔드 왕조로 망명했다.

1779년, 카림 칸의 사후 잔드 조가 내전에 휩싸이자 문타피크 부족장 타메르는 바스라 총독 알리 모하마드 칸의 복속 요구를 거부하고 그를 전사시키는 공을 세웠다. (파딜리야 전투) 후임 총독인 모하마드 알리 칸 역시 조공 및 1~3대 칼리파 저주를 요구하다가 베두인 연합군에 패하고 전사했다. (아부 할라나 전투) 이후 바스라의 사디크 칸이 내전 참가를 위해 철수하자, 하산 파샤는 휘하의 누만 베이를 바스라 태수에 봉하였다. 그는 수니파 교리를 회복시키고 성벽을 재건했다.[15]

3.6. 大 술레이만 파샤

파일:منارة_جامع_النعمانية.jpg파일:43_바그다드.jpg
1791년에 세워진 술라이마니야 모스크 & 마드라사. 미나렛 옆의 돔은 누만 에펜디의 영묘이다.

한편 일시적으로 잔드 조의 정권을 잡은 자키 칸은 3년간 쉬라즈에 갇혀 있었던 술레이만 아가를 석방했다. 바스라 인근 하위지야에 다다른 그는 자신의 통치가 번복된 적이 없다며 지배권을 요구했지만 효력이 없자 조정에 상소했다. 동시에 문타피크 부족장 타메르가 카자일 부족과 싸우다가 눈에 화살을 맞고 죽었고 사촌 투와이니 앗 사으둔이 계승했다. 한편 기다림 끝에 조정의 책봉을 받은 술레이만 아가는 베이로 승격되며 바스라 태수가 되었다. 그 무렵 이란에서 돌아온 무함마드 아젬이 디얄라에 진을 세우고 바그다드를 습격하며 길을 막는 등 밤낮으로 위협했음에도 하산 파샤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여론의 불만이 쌓였다. 분노한 주민들은 결국 하산 파샤를 축출하고 이스마일 카히야를 임시 총독으로 선출핶다. 밤을 틈타 카르크를 통해 도주한 하산 파샤는 디야르바크르에 이르러 병사하였다. 1780년 가을, 조정은 바스라의 술레이만 베이를 바그다드 총독에 봉하였고 그는 술레이만 파샤로써 입성했다.

우선 무함마드 아젬을 제거했고 유프라테스 중류의 카자알 부족 역시 제압했다. 1782년에는 쿠르드계 바반 후국을 공격, 친이란 군주 마흐무드 칸을 축출하고[16] 이브라힘 칸을 대신 임명했다. 1786년 이라크에는 극심한 가뭄 (카스바크, خصباك)으로 인한 기근과 역병이 돌았고, 바그다드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나 술레이만 파샤는 이를 진압하였다. 주모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투옥되었다. 같은해 사우디령 카심 태수 후질란 빈 하마드가 하일에서 바스라로 향하던 상단을 공격해 물품을 빼앗고 상인들을 죽였다. 이에 투와이니는 문타피크, 주바이르 등의 군대와 남하하여 타누마를 대포를 동원한 포위 끝에 함락했다.[17] 뒤이어 부라이다를 포위하던 도중, 바그다드에서 축출된 우바이드 부족장 술레이만 앗 샤위가 망명을 청해오자 투와이니는 포위를 풀고 회군하였다.[18]

3.6.1. 바스라의 반란 (1787년, 1788년)

이후 둘은 카자알 부족장 하마드 알 하무드를 초청해 연대했고, 주바이르에 주둔하며 바스라에도 병력을 보냈다. 이에 바스라 태수 이브라힘 베이가 갑자기 군대가 모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주바이르로 오자, 투와이니는 그를 체포했다. (1787년 봄) 그후 투와이니는 5천의 병력으로 바스라 및 그 함대를 무혈 접수하였다.[19] 투와이니는 식량을 비축하고 독점업자 30여명을 처형하는 등 시장을 통제하여 바스라의 기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특히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 파이루즈의 감독 하에 도둑을 처형할 교수대 13개를 설치했고 병자들을 주거지에서 격리했으며 프랑스 주재원과 협상하여 프랑스 의료진의 왕진을 받았다. 또한 투와이니의 지배 하에 대외무역이 활성화되었기에 바스라의 기근은 곧 해결되었다. 투와이니는 조정에 바스라 태수직의 공식 임명을 청했지만 '반란 일으킨 아랍인'에 대한 책봉은 없었다. 셀림 3세는 사절로 파견된 바스라의 무프티를 죽이려 했고, 그는 야밤에 도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787년 가을, 술레이만 파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고 투와이니의 경쟁자인 카압 부족장 하무드와 연합했다. 이에 투와이니는 그외에도 아랍, 페르시아인은 물론 바반 후국 등 쿠르드 지원군까지 합쳐 6천여 병력을 편성했다. 한편 남하 도중 술레이만 파샤는 카자일 부족을 잔혹히 격파했고, 카자일 부족장 하마드 알 하무드는 패잔병과 함께 투와이니에게로 피신했다. 그러자 부친의 원수를 받아준 것에 분노한 투와이니의 조카 하무드 빈 타메르는 불만을 품고 전투 직전, 술레이만 파샤에게 망명했다. 뒤이어 벌어진 바스라 인근의 움물 한타 전투에서 양측 모두 대포까지 동원하여 4일간 격돌했다. 부족 연합군은 1천 이상, 맘루크 군은 5백여 명이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패배한데다 부상까지 입은 투와이니는 다른 두 부족장들과 쿠웨이트 토후국에 망명하여 자흐라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투와이니는 사죄 서신을 보냈지만 술레이만 파샤는 거부하고 하무드와 무스타파 아가 알 쿠르디를 각각 문타피크 부족장 및 바스라 태수에 봉했다.

동시에 바스라에는 무거운 벌금형에 내려졌고, 남은 해동안 생필품 등에 대해 관세가 2배로 매겨졌다. 할당된 벌금을 내지 못한 주민들은 고문과 감금에 처해졌고, 여인들은 벌금 마련을 위해 혼수품과 가구까지 팔아야 했다.[20] 한편 술레이만 파샤는 무스타파 아가 휘하에 일단의 맘루크와 비정규군인 레벤드 남기고 회군했다. 하지만 1787년 말엽, 바스라의 신임 태수 무스타파 아가는 장교들을 매수 및 포섭하고[21] 투와이니에게 부족장 복위를 약속하며 반란을 꾀했다. 이에 술레이만 파샤는 투와이니에게 화해 의사를 전하고 무스타파 아가에게 우바이드 부족장 무함마드 앗 샤위를 통해 서신을 전달하며 경고하개 했다. 동시에 그는 바스라 주둔 기병대의 바그다드 이전을 명하고 제독 무스타파 히자지에게 무스타파 아가를 무혈로 사로잡되, 불가하다면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말각되어 무스타파 아가가 무스타파 히자지를 죽였고,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선포했다. (1788년 1월)

소식을 들은 술레이만 파샤는 신속히 군대와 남하했고,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무스타파 아가는 동생 마루프 아가 및 50여 튀르크 기병대와 최대한 많은 재물을 챙겨 쿠웨이트령 자흐라로 망명했다. 가만히 있다가 부자가 된 쿠웨이트의 셰이크 압둘라 알 사바는 망명자들과 재물을 인도하라는 술레이만 파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술레이만 파샤는 셰이크와 친분이 있던 바스라의 영국 동인도 회사 주재부에 중재를 부탁했지만, 침공 가능성에도 압둘라 알 사바는 손님을 지키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맞섰다.[22] 한편 이 와중에 쿠웨이트령 자흐라에 망명객으로 있던 투와이니는 문타피크-다피르 부족의 군대를 모아 1788년, 사우디로 진격했다가 패배한 후 쿠웨이트와 바스라 사이의 사프완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무스타파 아가와 자흐라에서 합류한 후 바스라를 공격했지만, 신임 태수 겸 문타피크 부족장 하무드가 주바이르 부족군과 함께 사프완에서 격파하였다.

그후 투와이니는 후제스탄의 카압 부족장 가드반 빈 무함마드에게 망명했고, 무스타파 아가는 쿠웨이트에서 말을 팔고 무스카트를 거쳐 메카로 향했다. 이때 압둘라 알 사바는 무스타파 아가에게 재물의 일부를 남기라 조언했고, 그가 떠난 후 술레이만 파샤에게 망명객들이 몰래 떠났다며 해당 재물을 바쳤다. 이에 만족한 술레이만 파샤는 바그다드로 회군했다. 한편 한동안 다시 망명 생활을 하던 투와이니는 알 아흐사로 향하여 외조카이기도 한 칼리드 연맹장 자이드 빈 아리아르에게 지원을 청했으나, 그는 하무드와의 전쟁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도전이라며 거부하였다. 따라서 투와이니는 디리야로 향하였고, 사우디 국왕 압둘아지즈 역시 그를 존중하며 말과 낙타 무리 및 자금을 주었으나 군사 지원은 거부했다. 결국 다시 쿠웨이트로 돌아온 투와이니에게 셰이크 압둘라는 술레이만 파샤에 용서를 빌 것을 제안했다.

그 무렵 술레이만 파샤 역시 투와이니가 와하비 세력과 합세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참모들에게 그와 연락하게 했다. 결국 투와이니는 요구대로 바그다드로 와서 용서를 빈 후 파샤와 술탄의 사면을 받았다. 술레이만 파샤는 투와이니를 우대하며 바그다드 마즐리스 (통치위원회) 위원으로 봉했다. 다만 이후로도 가택연금에 놓이는 등 감시를 받았다. 격동의 1780년대가 지나고 1790년대 중반까지는 한동안 이라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동안 술레이만 파샤는 우바이드 부족장 하즈 술레이만 베이 앗 샤위와 쿠자아 부족 및 나시리야의 문타피크 부족 등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염려했는데, 다행히 술레이만 베이는 1794년 암살되었다. 하무드 휘하의 문타피크 부족은 더이상 바스라를 위협하지 않았다.

3.6.2. 건설 사업

파일:79_바그다드.jpg
술라이마니야 마드라사 & 모스크

치세 중 술레이만 파샤는 여러 건설 사업을 벌였다. 우선 바그다드 성벽을 재건했고, 주변에 참호를 둘렀다. 시내에는 총독궁을 세웠고, 쇠락해 있던 상점들을 복원했으며 1791년에는 술라이마니야 마드라사를 건립하였다.[23] 또한 쇠락해 있던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를 세관의 카라반사라이로 개조했고, 거기서 얻은 수익은 술라이마니야 마드라사의 운영비로 설정했다. 무스탄시리야 시장 역시 유대인 상인이자 재무관인 이븐 다니엘에게 매각되었다.

그외에 쿠블라니야 모스크와 수크 사라진 (샌들 시장)이 보수, 알파들 모스크 및 쿨라파 (수크 알 가잘) 모스크가 재건되었으며 무르자니야 마드라사가 확장되었다. 쿨라파 모스크에는 이성, 물리적 과학을 가르치는 근대 학교도 더해졌다.[24] 시내 외에도 바그다드 북쪽 외곽의 알 아와이디야의 티그리스 강변에 궁전을 세웠고 쿠트, 아마라, 바드라, 만달리에 성채를 건립했으며 주바이르의 성벽 및 성채를 재건했다. 이렇듯 그가 남부 지방의 방비에 신경 쓴 이유는, 당시 사우드 왕가 휘하 네지드와하비 부족들이 이라크 부족들을 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6.3. 이라크-와하비 전쟁

파일:Al-thwaini_campaign_in_Arabia.svg.png

1790년대 들어 사마와 및 시리아 사막 일대는 그들의 공격에 자주 노출되었다. 또한 와하비 교리의 선교 역시 이따금씩 이라크 수니파 부족들을 끌어들이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조정은 술레이만 파샤에게 직접 공격을 명했으나 그는 자신이 고령이고 바그다드 및 그 일대의 요새화 하느라 바쁘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사죄 조서를 보내며 명을 회피했다. 그는 맘루크 군은 사막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단독으로는 와하비 세력을 소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한편 가택연금 하에 놓여 있던 투와이니는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술레이만 파샤에게 문타피크 부족장 지위 회복을 대가로 대와하비 원정 및 문타피크 방목지 방어를 맡겼다고 자원했다.

조정과의 불화에 불안하던 술레이만 파샤는 즉각 수용하여 5만 쿠루쉬 (피아스터), 낙타와 말 각각 1백마리, 예복 1백벌을 하사했고 투와이니는 이를 주민들에게 나눠준 후 바그다드를 떠났다. 그는 문타피크, 다피르 부족 및 바스라와 주바이르 일대에 동원령을 내려 3개월간 군대와 무기를 모았다. 그리고 투와이니는 술레이만 파샤에 지원 요청 서신을 보냈고, 이에 응답하여 파견된 증원군과 자흐라에서 합류했다. 또한 칼리드 연맹장 바라크 이븐 압둘무흐산 앗 사라다흐에게도 연락하자, 그 역시 알 마하쉬르 부족을 제외한 바니 칼리드 군대를 모아 합류했다. 이후 자흐라에서 3개월 더 군대를 정비하며 쿠웨이트, 바레인, 주바이르에서 보급품을 받은 투와이니는 군대를 양분했다. 선발대는 탄약 및 보금품과 쿠웨이트 선박에 올라 카티프로, 자신과 본대는 다가오는 여름 전에 사막을 건너 알 아흐사로 향하여 디리야 공격에 앞서 우선 보급을 받기로 했다.

1797년 봄, 원정군이 남하하자 자리야에 주둔하던 사우디 지휘관 무함마드 빈 마이칼은 두려움에 움 라비아로 철수한 후, 주군 압둘아지즈에 원군을 요청했고 후자는 조카 하산 빈 미샤리 휘하의 증원군을 보냈다. 뒤이어 인근 앗 타프에 당도한 투와이니는 서두르지 않기로 하고 해안의 앗 샤바크 샘으로 향했다. 그후 압둘아지즈는 아들 사우드 왕자를 파견했고,[25] 네즈드 부족들에게 가족들과 바니 칼리드령 샘들에 주둔할 것을 명하는 등 투와이니의 진격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해 6월, 앗 샤바크에서 병사들과 함께 진을 치던 투와이니가 홀로 있게 된 틈에 칼리드 연맹의 노예 맘루크 타이스가 투와이니를 뒤에서 급습해 죽였다.[26] 타이스 역시 곧 처단되었고, 투와이니의 시신은 아흐사의 아마이르 섬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27]

투와이니의 죽음이 공표되자 칼리드 연맹장 바라크는 사우디 군에 가담했고, 혼란에 빠진 원정군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임시 지도자 나시르의 노력에도 흩어져 북으로 도주했다. 그 와중에 보금품 대부분이 방치되어 하산 빈 미샤리는 대포와 화약, 낙타 3천 마리, 양 수만 마리 등을 얻고 추격에 나서 원정군을 다수 살상했다. 사프완에서야 한숨을 돌린 나시르의 휘하에는 말 몇 필만이 남아있었다. 1797년 말엽, 사우디 군은 이라크의 메카 순례길에 놓인 움물 압바스를 습격했다. 연이은 습격으로 사우디가 오스만에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고 여긴 조정은 술레이만 파샤에게 더욱 압력을 가했고, 그는 후계자로 여기던 맏사위 알리 파샤에게 디리야 공격의 교두보로써 저번에 배신한 알 아흐사 원정을 명하였다.

그해 10월에 5천여 예니체리 및 구식 대포와 함께 남하한 알리 파샤는 1799년 1월까지 바스라에 1만여 아킬, 우바이드, 샴마르, 문타피크, 다피르 부족 군대를 집결시켰다.[28] 그외에 사막 자문으로 무함마드 베이 앗 샤위가 알리 파샤를 동행했다. 원정군은 저번 원정처럼 자흐라로 향해 쿠웨이트에서 선박을 대여했고, 우카이르로 중량 보급품 운송했다. 알리 파샤가 이끈 본대에서는 낙타 1만 마리가 물과 경량 보급품을 날랐는데, 극심한 더위로 여럿이 쓰러지면서 자주 오아시스에서 쉬어야 했다. 게다가 전쟁에 미숙하던 알리 파샤는 자신이 의지했던 부족장들을 푸대접했고, 많은 이들은 원정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붕괴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그래도 일단 알리 파샤는 무바라즈의 사후드 성채[29]와 아흐사의 호푸프 성채[30] 외에는 마주친 사우디 거점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2달간 항전한 카티프 성채[31] 외에는 큰 저항이 없었지만, 사후드 성채는 술레이만 빈 무함마드 빈 마지드의 지휘 하에 계속 버텼다. 원정군은 성벽에 균열을 내었음에도 대포가 충분히 강하지 않아여 결정타를 가하지 못하고 포위를 풀었다. 보급품은 빠르게 고갈되었고, 피로와 갈증이 축적된 병사들의 불만이 커졌다. 특히 사우드 측이 호푸프 북쪽의 도로를 차단하고 우물마다 소금을 뿌려 식수로 쓸 수 없게 하는 청야전술에 나섰다는 소식이 닿자 군심은 폭동 직전에 이르렀다. 이에 (사우디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은) 무함마드 베이 앗 샤위의 조언 하에 알리 파샤는 철수에 나섰다. 도중에 더 많은 낙타들이 쓰러져 죽었기에 나르지 못하게 된 무기들은 파괴되거나 흙에 묻혔다.

또한 강한 모래 폭풍까지 불자 원정군은 우선 옛 기지인 샤바크에 머물렀다. 한편 실제로 디리야에서 출정한 사우드 왕자는 샤바크 북쪽의 싸즈를 장악하고 원정군의 퇴로를 막았다. 이후 샤바크에서 북상한 원정군은 싸즈에서 사우디 군과 승자 없는 정찰전을 벌이다 포병대 및 부족들의 활약으로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이후 양측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휴전 협상을 벌였다. 1799년 봄의 협상에서 알리 파샤는 사우디 군의 알 아흐사 철수, 이라크 순례자들에 대한 환대, 약탈한 대포들의 반환, 배상금 납부 등의 조건을 걸었다. 원정이 실패한 마당에 당연히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요구였기에 사우드 왕자는 묵살했다. 뒤이어 압둘아지즈 왕은 '룸 (오스만)의 땅이 아니고' 그만한 노력의 가치가 없는 알 아흐사에서의 철수 단독 조건 하에 휴전을 제안했고, 알리 파샤가 결국 승인하며 6년의 불가침 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알리 파샤는 사우디 사절단과 함께 바그다드로 돌아갔고, 술레이만 파샤는 조약을 비준했다. 8개월 간의 원정 중 이라크 측이 그나마 걷은 승리는 문타피크 부족장 하무드가 네지드의 수바이 부족을 습격해 다수의 양과 낙타를 빼앗은 것 뿐이었다. 그는 휴전은 일시적일 것이라며 원정 지속을 주장했지만, 이미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후였다. 한편 알리 파샤의 회군 후 압둘아지즈는 알 아흐사에 입성하여 이라크 측과 협력한 부역자 전원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뒤이어 그는 카티프도 공격, 처절한 전투 끝에 함락하며 아라비아 반도 동부를 완전히 정복했다. 양측의 불안한 휴전은 역시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3.6.4. 카르발라 습격 (1802년)

1799년 말엽, 시아파인 카자일 부족이 나자프 근처에서 사우드령 네지드 상단과 조우, 그들 중 3백여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사우디 측이 배상금 (دية)을 요구하자 술레이만 파샤는 당시 메카 순례 후 이라크로 돌아오던 압뒬아지즈 빈 압둘라 앗 샤위에게 디리야를 들러서 문제의 해결을 논의하게 했다. 하지만 술레이만 파샤가 배상금 납부 혹은 이라크 경내 네지드 부족들의 방목 허가 모두를 거부하며 협상은 실패했고, 압둘아지즈 역시 유프라테스 서안 (아나 ~ 바스라)의 영토를 요구하는 등 무리수를 두었다.

1802년 4월, 사우드 왕자는 1만 2천의 기병대와 북상했다. 그는 대부분의 카르발라 주민들이 무함마드알리의 후계자 지위를 공표했다는 쉬아 명절인 이둘 가디르를 맞아 나자프의 이맘 알리 성지로 향하여 도시가 거의 빈 틈을 노려 기습에 나선 것이었다. 사우디 군대는 밤중에 도착했고, 주민들은 성문을 걸어 잠갔지만 사우디 군은 하나의 문만 집중 공격하여 소규모 전투 끝에 돌파했다. 시장과 주택들에서 남은 주민의 대부분인 2천 ~ 5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기습 점령 후 와하비 교리에 입각하여 사우디 군대는 쉬아 성지를 파괴하였다. 시아파에 대한 보복과 적대감으로 후세인 영묘의 돔을 무너뜨리고 자체를 비롯하여 여러 유서 깊은 건물들과 무덤들울 파괴하였다.

카르발라의 후세인 성지에는 이슬람권 각지에서 바쳐 수세기간 축적된 보화가 있었다. 티무르도 이곳만큼은 약탈하지 않았고, 나디르 샤 역시 후세인과 알리 성지에 자신이 인도에서 약탈한 막대한 재물과 개인적인 재산을 기증했다. 따라서 사우드 가문은 그 엄청난 보화에 대한 멸시와 갈망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에메랄드와 루비 등의 보석들로 치장된 후세인의 관과 보석이 박힌 대문, 카펫, 목걸이, 촛대, 돈, 무기, 옷, 가구, 금, 은, 치장된 쿠란 등 돈이 될만한 귀중품은 무엇이든 약탈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8시간 가량, 단시간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힌 사우디 군대는 알리 파샤의 토벌군이 당도하기 전에 4천 마리가 넘는 낙타에 전리품을 실어 빠르게 디리야로 철수하였다.

비록 수니파이긴 했지만 양대 쉬아 성지들에 대한 관리의 의무도 있던 오스만 조정은 사우디 세력에 대한 토벌을 결심하게 되었고, 바그다드 총독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한편 성지의 파괴에 크게 분노한 카자르 왕조파트 알리 샤 카자르 역시 바그다드 측에게 이라크를 통해 사우디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32] 우선 네지드 북부 카심 지역에 보복으로 습격을 가한 술레이만 파샤는 이란측 군사 지원을 거절한 대신 5백여 발루치 가족들의 배치는 수용하여 카르발라의 수비를 강화했다. 따라서 1808년, 사우드가 재차 카르발라를 공격했으나 저번 사태 후 수비가 강화된 상태였기에 이번에는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후 사우디는 이집트 군의 침공에 대한 대비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다시 이라크를 침공하지 못했다.

3.6.5. 사망과 후계

1802년, 80세의 술레이만 파샤는 와병하였다. 병세가 심해지자 그는 대신들을 불러 논의한 끝에 맏사위 알리 파샤를 후계자로 정했고, 대신들에게 그에 복종하며 조언을 올리라 명령하였다. 사후 장지로 술라이마니야 마드라사와 아부 하니파 모스크가 거론되다가 결국 기존 파샤들이 묻힌 후자로 결정되었다.[33] 이후 바그다드와 이라크 각지에서 장례 예배가 열렸다. 한편 그의 사후, 차녀 사라 카툰과 결혼한 小 술레이만 파샤 역시 주요 인사 중 하나가 되었다.

3.7. 알리 파샤

본래 알리 아가였던 그는, 1795년 아가들의 봉급을 3천에서 5백 쿠루쉬로 줄이는 등 사치스러운 아흐마드를 죽인다. 이듬해 알리 아가는 술레이만 파샤에게서 카트쿠다와 다마드 직위를 받아 파샤로 승진했고, 대장군인 미르미란이 되었다. 그는 1799년의 원정 후로 아파크, 문타피크, 카자일, 주바이르, 자와지르, 카샴, 둘라임, 줄라이하 부족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라크 변경을 습격한 사우디령 아나자 부족을 응징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1802년, 바그다드의 역병을 틈타 사우디 군이 카르발라를 습격했을 때도 대처했고 같은해 술레이만 파샤의 사후 계승했다.

하지만 예니체리 대장 아흐마드 아가[34]는 반발하여 술레이만 파샤의 다른 사위 살림 베이에게 그가 더 총독의 자격이 있다고 꾀어 음모를 꾸몄다. 이후 그는 알리 파샤에게 바그다드 주민들은 언제든 민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 자신이 성채를 맡아 치안을 유지하겠다 하였고, 알리 파샤는 배신 의도를 알지도 못한 채로 승낙했다. 성채를 장악한 아흐마드 아가는 바로 반란을 일으켰고, 알리 파샤는 궁지가 몰린 순간 아흐마드 아가가 피살되며 반란은 끝났다. 알리 파샤는 잔당을 사면하며 사태를 마무리하였다. 1803년과 1806년에 사우디 군이 나자프, 힐라 일대를 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정권을 공고히 한 알리 파샤는 친히 탈아파르로 출정하여 납세를 거부하던 발바스 쿠르드 후국과 신자르의 야지디 세력 역시 복속시켰다. 이후 사우디 측과 내통하던 무함마드와 압둘아지즈 앗 샤위 형제들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한 그는 1805년에 재차 출정하여 샤미야의 카자일 부족을 복속시켰다. 쉬아 부족들의 통제를 위해 힐라에는 칼리드 알 카히야, 바쉬 아가, 압둘라흐만 파샤 등이 배치되었다. 다만 자심 베이 앗 샤위가 하부르 강을 넘어 도주하자, 알리 파샤는 압둘라흐만 파샤와 무함마드 파샤에게 추격하게 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불화로 알 바트에서 압둘라흐만 파샤가 무함마드 파샤를 죽였고, 그 세력을 체포하여 키르쿠크로 향했다.

3.7.1. 압둘라흐만 파샤의 난

알리 파샤는 우선 압둘라흐만 파샤를 사면했으나, 그가 다쿠크에서 파괴와 약탈을 자행한 것을 키르쿠크 태수가 보고하자 알리 파샤는 친정을 결심했다. 우선 압둘라흐만 파샤의 동조자라 여겨진 칼리드 알 카히야, 하지 압둘라 아가[35] 등을 성채에 가두고 서기 무함마드 알 파이디 역시 해임하여 조카 술레이만 베이로 교체했다. 압둘라흐만의 파샤 직위 역시 해제했고 수감자 중 칼리드 알 카히야와 하지 압둘라 아가에게 각각 사형과 추방형을 내렸다. 이후 알리 파샤가 군대와 북상하자 압둘라흐만은 사죄하며 재차 사면을 청했지만, 묵살되었다. 이에 압둘라흐만은 구라이르 부족장 하마드 알 후세인과 우바이드 부족장 다민 알 무함마드 등을 포섭했고, 알리 파샤의 동맹인 바반 후국의 칼리드 파샤가 그를 공격했지만 알튼 쿠브리에서 패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한편 1백의 기병대와 돌파한 칼리드 파샤의 동생 압둘아지즈 베이는 알리 파샤와 합류하여 소식을 전했다. 승전 후 압둘라흐만이 이라크 북부를 약탈하자 알리 파샤는 서둘러 진격했고, 그가 직접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압둘라흐만은 기습에 놀라 바지얀을 통해 술라이마니야 쪽으로 도주했다. 동시에 구라이르 부족이 시리아 방면으로 도주하자 알리 파샤는 샴마르 부족장 파리스 알 자르바와 아킬 부족에게 추격을 맡겼고, 그들은 기습 공격으로 구라이르 부족을 격파했다.[36] 키르쿠크에 있던 알리 파샤는 승전보를 접한 후 출정했다. 이에 압둘라흐만은 카자르 조에 구원을 청했고, 이에 파트 알리 샤가 사면을 권했지만 알리 파샤는 그대로 진격하여 반군을 격파했다. 압둘라흐만의 군대는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며칠간 이라크 북부에서 잔당 소탕을 벌인 알리 파샤는 거의 5개월 간의 원정을 마치고 바그다드로 회군했다.

3.7.2. 말년과 죽음

한편, 압둘라흐만과의 전쟁 당시 포로가 된 술레이만 베이는 카자르 조에 포로로 넘겨졌는데, 문타피크 부족장 하무드의 중재로 송환될 수 있었다. 이에 알리 파샤는 하무드에 예를 갖추고 조정에 상주하여 술레이만 베이에게 미르미란 (대장군) 및 파샤 칭호를 주었다. (1807년) 그후 예복과 카히야 칭호도 내리며 2인자로 삼았다.

몇달 후, 이번에는 사우디령 네지드 부족들이 재차 이라크 변경을 침탈하자 알리 파샤는 힐라를 거쳐 알 와르디야에 주둔하며 정찰대를 보냈다. 한편 사우디 군은 나자프를 공격했지만 요새화된 성벽과 넓은 해자 때문에 함락하지 못했자 가지아 부족을 공격해 가축을 빼앗았다. 이후 카자일 부족도 공격했고 사마와에서는 단순 약탈 뿐만 아니라 숲을 파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뒤이어 바스라로 향하여 주바이르의 부족들과 국지전을 벌이다가 회군했다. 술레이만 파샤는 람 부족장 아라르 압둘아알과 싸워 복속시키고 약탈한 후 바그다드로 회군했다. 힐라의 알리 파샤는 자신과 이견을 보인 자비드 부족장 하탑 앗 샬랄을 그 사촌인 후세인 알 반다르로 교체한 후 회군했다.

1804년, 조지아의 바투미에서 마다드[37] 베이란 자가 당도하자 알리 파샤는 동향인이라며 우대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 원한으로 무스타파 알 아바자 등 8~9인과 공모하였고, 1807년 8월에 새벽 예배 중이던 알리 파샤를 피습했다.[38] 중상을 입은 알리 파샤는 얼마 후 피를 토하며 향년 45세로 사망했다. 도주했던 암살범들은 붙잡혀 살해된 후 바그다드에 조리돌림 되었다. 사후 조카 술레이만 파샤가 계승했다.

3.8. 小 술레이만 파샤

인격적이고 공정했던 20대 중반의 술레이만 파샤에게는 안타깝게도 시대적 흐름이 그의 편이 아니었다. 즉위 후 그는 부패 근절을 위해 노력했고 취득세, 몰수형 등을 폐지했으며 형벌은 사형만을 남겨두었다. 또한 자신이 압바스 왕실의 후예라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술레이만 파샤는 야지디, 다피르 부족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조정은 그가 바그다드 에얄레트를 벗어나 함부로 군사 활동을 했다며 비판했다. 그가 전임자들이 약속한 돈을 바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무함마드 사이드 에펜디 등의 지역 유지들이 상소한 결과 조정은 할라트 에펜디에 바그다드 총독 임명권을 주어 파견했고, 후자는 바그다드로 향하였다.

술레이만 파샤에게 정책 변경을 요구했으나 설득에 실패한 할라트 에펜디가 모술에서 압둘라흐만 아가, 압둘라 아가 등 1만여 군대를 모아 남하하자 술레이만 파샤 역시 출정하여 맞섰다. 이어진 전투에서 술레이만 파샤는 압둘라흐만 아가를 격퇴하는 등 우세를 점했으나, 밤중에 군대가 흩어지자 15명의 아가들과 함께 디얄라 강을 건너 도주했다. 그는 사막을 떠돌다가 문타피크 부족장 하무드와 합류하기로 하여 재차 남하했으나, 도중 다파파 부족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수급은 압둘라흐만 아가에게 보내졌고, 1810년 11월에는 코스탄티니예에 이르렀다. 바그다드에 개선한 할라트 에펜디는 大 술레이만 파샤의 맘루크 출신인 압둘라 아가를 새 총독에 앉혔다.

3.9. 글리윈 전투 (1813년)

이로써 문맹이지만 성품은 좋은 압둘라 파샤 앗 투툰지가 바그다드 총독이 되었다. 하지만 한달도 안되어 압둘라흐만 아가 등은 大 술레이만 파샤의 19세 아들 무함마드 사이드 베이를 지지하며 반기를 들었고, 예니체리 부대와 바그다드 성채를 장악했다. 시내에는 재차 불안이 감돌았고, 가게 주인들은 약탈을 우려하여 물품을 집으로 옮겼다. 압둘라 파샤는 강 건너편 카르크의 자부르, 아킬 부족 등을 동원해 시가전에 나섰다. 5시간의 전투 끝에 패배한 압둘라흐만 아가는 영국 영사관에 숨었다가 도주했고, 잔당들도 각자의 집에 틀어박혔다. 다만 이후로도 분란이 지속되었는데, 이는 맘루크 정권이 내분으로 약해져 중앙집권 회복이 다가오도록 하려는 할라트 에펜디의 농간이었다고도 한다.

특히 1812년 봄, 부총독 타히르 아가에게 부친의 유산을 몰수당한 사이드 베이는 바그다드를 떠났다. 압둘라 파샤는 그에게 안전을 약속하며 돌아오라 설득했고, 사이드 베이는 파샤와 친한 주바스라 영국 영사 리치와 돌아왔다. 하지만 타히르 아가는 계속 사이드 아가를 적대하며 조정에 압둘라 파샤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로써 보통 샤왈 달에 오던 책봉 칙령 대신 세금 독촉서만이 왔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사이드 베이로 인한 것이라 여긴 압둘라 파샤는 역시 그를 적대하기 시작했고, 암살까지 계획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이드 베이는 그해 8월, 재차 바그다드를 탈출해 부친의 동맹이던 문타피크 부족장 하무드에 의탁하였다. 고령의 하무드는 시각을 상실했지만 통찰력이 있었고, 곧 자심 베그 앗 샤위 역시 망명해왔다.
이후 타히르 베이가 서면으로 질책하자 하무드는 밀린 세금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망명객 인도는 에둘러 거부했다. 압둘라 파샤는 전쟁을 고민했고, 맘루크들의 충성심이 흔들릴 것이라는 측근들의 조언에도 그는 타히르 아가의 강경책에 따라 직접 사이드 베이를 데려오기로 했다. 1812년 가을, 압둘라 파샤는 튀르크-쿠르드-베두인 등으로 구성된 3천여 기병과 더 많은 수의 보병과 함께 출정했다. 원정군에는 보급품 수송대 및 바스라에서 보낸 8척의 선박도 있었다. 압둘라 파샤는 둘라임 부족을 복속시키고 팔루자에서 보급품을 얻은 후 힐라를 거쳐 디와니야로 남하했다. 이에 하무드는 2만 대군을 모아 수크 슈유크에 주둔했다. 양과 질 모두에서 불리했던 하무드와 사이드 베이는 파샤 측 맘루크 장교들에게 大 술레이만 파샤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편지를 보내며 높은 관직을 약속하는 등 심리전에 나섰다.

1813년 1월, 양측은 글리윈 강변에서 격돌했다. 근 반세기 간 이라크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에서, 파샤 군대가 우세한 화력으로 문타피크 군대를 대부분 흩어지게 하며 기선을 잡았다. 하지만 하무드와 사이드 베이의 주력군은 계속 버텼고, 하무드의 아들 바르구쉬는 정예 병력과 열심히 싸웠다. 특히 살레흐 앗 타메르가 라비아 부족장을 전사시키며 기세를 올렸고, 사이드 베이가 조정의 책봉을 받았다는 미확인 소문이 퍼지며 파샤 진영은 흔들렸다. 파샤측 부족들이 진영을 약탈하며 전향했고, 맘루크들도 뒤따랐다. 불과 2백의 병력만이 남은 압둘라 파샤는 철수하려 했지만 알리 앗 타메르에게 포위되자 하무드의 동생 무함마드의 설득에 하루 뒤 항복하였다.[39] 이후 포로들은 수크 슈유크로 옮겨졌다. 다만 이틀 후, 바르구쉬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자 분노한 하무드의 동생 라쉬드가 압둘라 파샤 및 타히르 아가 등을 교수형에 처했다.[40] 향년 50세였다.

3.10. 사이드 파샤

승전 후 1813년 3월, 사이드 베이는 하무드와 2천 병력을 대동하고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사이드 '파샤'는 우선 파리스 알 자르바 대신 자심 앗 샤위를 밥 알 아랍에 봉했고, 하무드가 약탈로 인한 피해를 보고하자 바로 다음날 바스라의 재정으로 갚아주었다. 또한 하무드가 자샤암 부족의 여인과 결혼하자 함단 마을 및 바스라 등 샤트 알 아랍에 접한 곳들의 수조권을 주었다. 이는 매년 양 2만 마리에 달하는 수준이었고, 이라크 전체 세수의 1/3에 달했다. 아직 어린 편이었던 사이드 파샤는 여러 대소사를 하무드와 논의한 후에야 결정할 정도로 그에 의지하였다. 여타 부족들은 이라크의 실세가 된 하무드를 '술탄'이라 지칭하며 경외하였다.

한편 문타피크 & 우바이드 부족의 득세와 샴마르 & 카자일 부족의 소외는 후자의 반발로 이어졌다. 특히 사이드 파샤가 샴마르 부족장 파리스에게 기존의 파샤들이 자지라 제1의 부족장 지위를 보장하고 매년 국고에서 선물을 주는 등의 특권을 폐지하자 분노한 그는 바그다드를 떠났다. 1814년 샴마르 부족은 바그다드와 모술, 알레포 간의 도로를 차단했다. 나머지 제국 지역들과의 카라반, 파발 등이 막혀버리자 이라크 지역은 혼란에 빠졌다. 동시에 샴마르-카자일 연합군은 힐라를 포위하고 다른 유프라테스 강변 도시들을 약탈했다. 이에 사이드 파샤가 정규군 및 문타피크-다피르-우바이드 부족으로 구성된 토벌군을 보냈고, 이들은 2달 이상의 치열한 전투 후에야 반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하무드 외에도 사이드 파샤의 모친 나비 카눔 역시 인사권을 행사하는 등 정치에 관여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사위 다우드 파샤를 해임하도록 압박한 후 하지 압둘라 알 쿨루시를 카히야레 봉했다. 하지만 후자는 부패와 사치 등의 암울한 상황을 목도하곤 4달만에 사임했고, 하마디 알 알루지 등의 아첨꾼이 카히야에 올랐다. 이렇게 바그다드 정권이 타락해 가자 만달리, 나자프, 카르발라 등지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大 술레이만 파샤의 사위이자 부당하게 해임된 다우드 파샤 하에 맘루크 장교들 등 반정부 세력이 결집했다. 1816년, 몰래 키르쿠크로 떠난 그는 조정에게서 바그다드 총독으로 책봉을 받은 후 군대를 모아 남하했다.

사이드 파샤는 하무드를 소환했고, 그는 5천[41] 기병과 함께 당도했다. 1817년 1월, 양측은 바그다드의 무아담 성문 밖에서 격돌했다. 초전은 사이드 파샤의 승리였고, 다우드 파샤는 재정비를 위해 북쪽으로 물러났다. 승리를 자신한 사이드 파샤는 문타피크 부족 측에 해산을 명했다. 하지만 성내에서 다우드 파샤를 지지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다우드 파샤는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하였다. (1817년 2월) 사이드 파샤는 전의를 잃고 모친의 집에 숨었다가 예니체리 대장인 사이드 알리위 아가에게 발각되었다. 알리위 아가는 나비 카눔의 면전에서 그를 도끼로 난자함 후 목을 베었다. 이로써 大 술레이만 파샤의 26세 아들은 매형에 의해 잔혹한 최후를 맞았다. 그후 50세이던 다우드 파샤가 바그다드 맘루크 정권의 마지막 왈리 (혹은 와지르)에 올랐다.

3.11. 다우드 파샤

트빌리시 출신으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납치되어 바그다드에 팔렸다. 무스타파 베이 알 루바이 등 여럿을 거쳐 大 술레이만 파샤가 그를 구매하여 훈련시켰고, 행정 관료로 두각을 드러내자 인장 관리인인 마흐르다르로 봉한 후 사위로 삼았다. 1817년 집권 후 다우드 파샤의 최우선 과제는 아직 건재했던 하무드와의 대결이었다.

그는 우선 고령인 하무드의 약화를 기다리며 표면상 예의를 갖추었다. 하무드는 1819년 사우드 왕가의 몰락 소식을 전했고, 1820년에는 다우드 파샤의 아들 투순의 할례식 후 선물을 동봉한 사절을 보낶다. 다우드 파샤는 사절단에 연로한 하무드 대신 새 아미르가 필요하지 않나 떠보기도 했지만 통합과 충성이 중요하다는 답을 받자 체제가 공고하다 여겨 더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3.11.1. 카자르 왕조의 침입 (1821년)

1818년, 카자르령 케르만샤 총독 샤자데는 바반 후국의 내분에 개입하며 술라이마니야, 만달리, 바드라의 세 방면에서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에 다우드 파샤는 2달간 협상하여 샤 바반에 술라이마니야를 넘기는 조건의 휴전을 맺었다. 하지만 1821년, 바반 후국의 압둘라 파샤가 샤자데에 망명했다. 샤자데는 샤 바반 대신 그를 술라이마니야의 주인으로 선포하며 카나킨 등 변경을 습격하다 압둘라 파샤에 군대를 주었다. 압둘라 파샤는 자프 부족의 호스로 베이와 함께 술라이마니야로 진격했고, 다우드 파샤는 조정에 구원을 칭했다. 이후 1만 5천의 알바니아인 군단이 파견되자 다우드 파샤 욕시 무함마드를 아가 휘하의 병력을 보내어 합세시켰다. 이라크-알바니아 군대는 1821년 10월, 압둘라 파샤의 카자르 군과 술라이마니야 근처에서 격돌했으나 패배했다.

기세를 몰아 샤자데가 바그다드 근처의 하바브에 이르자 많은 바그다드 주민들이 팔루자나 힐라 등지로 피난을 가는 등 난리가 났다. 바그다드와 불과 20km 거리인 칸 바니 사드에 당도한 카자르 군대는 바그다드 근교를 약탈했다. 풍전등화에 몰린 이때, 남쪽에서 역병이 몰려와 북으로 퍼졌다. 샤자데 역시 이에 감염되는 등 카자르 군도 피해를 입었고, 진격은 정체되었다. 그후 다우드 파샤는 나자프의 시아파 지도자인 셰이크 무사 카시프 알 기타에게 중재를 청했고, 카자르 군은 철수했다. 샤자데는 케르만샤로 돌아간 직후 사망했다. 그를 계승한 호세인 미르자 역시 부친의 과업을 이루고자 군대를 모아 이라크를 재침했으나, 바그다드 북쪽의 샤흐르반에 이르러 또다시 역병이 퍼지자 저번처럼 결국 철수했다. 이로써 이라크는 크나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3.11.2. 베두인 부족 문제

의례적인 교류 외에 하무드는 계속해서 바그다드 관료들이 문타피크 영지에 들어오면 축출하는 등 위세를 과시했고, 1823년에는 파샤의 특사인 이브라힘 베이 알 압둘잘릴을 무려 한달이나 기다리게 한 후 만나는 등 거만한 모습을 보였다. 문타피크 부족의 내분과 약화를 위해 하무드와 경쟁이 될 만한 대체자를 물색하던 다우드 파샤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셰이크 아질 빈 무함마드를 새 문타피크 부족장에 봉하며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하무드는 카압 부족장 가이트 빈 가드반과 동맹하고[42] 두 아들 마지드와 파이살을 보내 바스라를 포위했다. 이에 태수 아지즈 아가는 카압 부족에 유지들을 사절로 보내어 휴전을 청했고, 카압 부족이 승낙하여 모하므라로 회군하자 문타피크 군대 역시 철수했다.

1825년에는 카르발라에서 반란이 터졌고, 다우드 파샤는 술레이만 미라코르 휘하의 정규군 (바샤위) 및 샴마르 부족장 사푸크 휘하[43] 병력을 보내 토벌에 나섰다. 치열한 전투 도중 사푸크는 총기 파열로 머리에 부상을 입은 후, 술레이만 미라코르와 다투고는 신자르로 회군하였다. 1826년, 사푸크의 지원으로 아질은 선물 공세 및 공약들과 함께 문타피크 부족을 장악했다. 축출된 함무드는 쿠웨이트로 망명했다가 바스라 인근 사막으로 돌아온 후 아질에게 사로잡혀 바그다드로 보내졌고, 다우드 파샤는 그를 가택연금에 처했다. 함무드는 맘루크 정권이 끝나던 1831년에 최소 8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하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1827년, 사푸크가 나흐르 이사에서 정규군이 샴미르 부족을 공격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3.11.3. 근대화 개혁 추진

1830년 기준 다우드 파샤의 직속 병력은 약 1만 2500명이었다. 그중 1천 7백의 카라지 부대와 1천 5백의 보병, 5백의 포병, 5백의 궁병으로 구성된 친위대는 대부분 튀르크인 혹은 맘루크였다. 그와 함께 아킬 부족에서 징집된 아랍 군대도 5천여 있었다. 따라서 바샤위 정규군은 다민족 혼성 부대였다. 다만 튀르크 병사들은 훈련도 및 장비의 질이 낮았고, 베두인 병사들은 임무보다는 약탈에 눈이 팔려 때로는 자기편도 약탈하는 용병 수준의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당시 탄지마트 개혁이 진행 중이던 오스만 본토처럼 다우드 파샤 역시 신식 군대 편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과거 나폴레옹의 부하로, 보나파르트 정권 붕괴 후 케르만샤 총독 샤자데의 교관으로 있던 프랑스인 데포에를 영입했고 유럽의 기술자들을 데려와 소총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또한 근대화의 일환으로 아랍어와 터키어로 발간된 이라크의 첫 신문사 겸 인쇄소인 이라크 저널을 설립했으며 학자 및 작가들을 후원하여 문화 및 교육 진흥에 힘썼다. 그외에 수로를 청소, 보수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집트에 이어 또다른 아랍 근대 국가가 설립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조정은 곧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44]

3.11.4. 바그다드 공방전 (1831년)

1826년, 근대화에 나서던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신식 군대 편성을 위해 이스탄불에서 예니체리 부대를 학살한 후 각지 총독들에게도 숙군 작업을 명령했다. 그해 여름, 바그다드에도 명령이 당도했아나 다우드 파샤는 칙령을 숨긴 채로 예니체리 부대를 설득하여 그들을 새 군대로 재편하였다. 전말을 접한 술탄은 1828년에 그를 명령 이행에 실패했다며 비판했다. 그러던 1830년, 러시아와의 전쟁이 터지자 술탄은 각지의 총독들에게 할당된 병력 및 물자 파견을 요구했다. 하지만 다우드 파샤는 할당된 역할 수행을 거부했고, 조정은 이를 독립 시도 및 불복종이라 여겨 사디크 에펜디를 바그다드로 보내 다우드 파샤의 해임을 선포했으나 파샤는 사절을 죽이며[45] 강경히 대응했다. (1830년 가을)

다우드 파샤는 술탄의 사절을 죽였다는 사실을 대중에게서 은폐하려 했고, 그가 와병 중이라며 매일 의사와 시종을 보내는 등 연기했다.[46] 하지만 결국 진실은 알려졌고, 중앙집권화에 나서고 있던 술탄에 있어 이란의 침공과 역병, 연이은 반란으로 쇠약해진 이라크에 대한 직접 지배 확립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었다.[47] 따라서 술탄은 알레포 총독 알리 레자 파샤에게 신식 군대를 모아 이라트의 맘루크 정권을 일망타진하도록 명하였다. 1831년 2월, 정규군 및 사푸크 등의 베두인 부대 등 원정군을 편성한 알리 르자 파샤는 이라크로 진격했다. 다우드 파샤는 방어를 준비하려 했으나 마침 타브리즈발 역병이 덮쳤고 티그리스 강이 범람하여 홍수까지 벌어지는 등 악조건이 연이어 터졌다. 다우드 파샤는 병자를 격리하는 등 긴급 조치를 시도했으나, 성직자들이 파트와 (법률 해석)를 내어 이슬람에 위배된다고 항의해 실시되지 못했다. 따라서 병은 골든 타임을 놓치며 순식간에 퍼졌고, 한달 후에야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모술에 당도한 알리 르자 파샤는 태수 카심 파샤 알 아므리, 사푸크, 아킬 부족장 술레이만 알 간남 휘하의 선발대를 보내어 바그다드를 포위하게 했다. 도시를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올 무렵, 선발대가 바그다드 외곽의 카지미야에 당도했다. 카심 파샤는 바그다드의 울라마 및 유지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술탄에게 귀순하고 다우드 파샤를 축출할 것을 요구했다. 원래부터 다우드 파샤와 대립하던 울라마를 주도로 여론이 기울자 다우드 파샤는 하비바 카눔의 집에 숨었다가, 다음날 도시 지도부의 요구에 따라 大 술레이만 파샤의 아들 살리흐 베이의 집으로 옮겨져 새 총독을 기다렸다. 이후 카심 파샤와 선발대가 무혈 입성하자 주민들은 따뜻하게 맞았고, 총독궁까지 배웅했다. 카심 파샤는 알리 레자 파샤에게 최대한 빨리 와서 정권 이양을 받으라 청했고, 총독궁에 마물며 다우드 파샤의 신병 인도를 기다렸다. 한편 사푸크는 시가지 동부에 집을 구했다.

그러던 6월, 점령군이 약탈을 자행하자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고 맘루크와 카르크 거주 아킬 부족들로 구성된 군중이 궁을 에워싸고 서로 대립하며 소란을 피웠다. 다음날, 아킬 부족장 술레이만 알 간남은 모술 군대가 재물고를 부수고 약탈한 것을 언급하며 카심 파샤에 대한 지지를 거두었다. 이후 총독궁을 포위 중이던 군중이 궁에 진입하여 약탈에 나섰고, 도중 카심 파샤는 피살되었다. 사푸크는 티그리스 강을 건너 도주했고, 점령군은 성밖으로 후퇴했다. (1831년 6월) 혼란이 가중되자 현지 유지들과 학자들은 술탄에게 다우드 파샤 혹은 살리흐 베이의 총독 임명을 청하는 서신을 보내며 요구된 연공 증대[48] 및 배상금 남부를 이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편 시내의 주민들과 다우드 파샤의 맘루크들은 성의 수비를 준비했다.

7월 초엽, 바그다드에 당도한 알리 르자 파샤의 본대는 근처 앗 술라이크 과수원에 주둔하며 도시를 포위했다. 바그다드 내에는 프랑스인 교관 데포에 및 맘루크들이 지휘하는 정규군, 상인들이 주도한 민병대가 수비를 맡았다. 다만 몇 주간의 국지전 후 9월이 되자 봉쇄로 인해 버티기 어려워진 주민들 사이에 불만이 커져 갔고, 조정에 귀순하라는 포위측 설득의 영향력도 커졌다. 따라서 9월 14일의 밤, 상인 하지 칼릴의 주도 하에 주민들이 남문을 열며 도시는 점령되었다. 물가는 안정을 찾았고, 상점들이 다시 열었으며 범죄가 사라져 주민들은 환호했다. 성채에 있던 다우드 파샤는 이스탄불로 송환되는 조건 하에 항복하였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다우드 파샤 외의 주요 맘루크들을 학살한 알리 르자 파샤는 약속대로 사면을 청하는 편지와 함께 그를 보내면서도, 호송단에 탈출 시도시 사살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술탄 앞에서 뛰어난 언변과 법에 대한 지식 등 개인적 매력으로 그를 감화시킨 다우드 파샤는 가족과 함께 부르사로 유배되었다. 남은 재산으로 여생을 보내던 그는 1832년 말엽, 메흐메드 알리가 아나톨리아로 진격하는 등 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보스니아 총독과 이스탄불 국무위원회 의장, 1839년 앙카라 총독 등을 역임하며 중용되었다. 1844년에는 메디나예언자 모스크 관리인이 되어 신앙과 교육에 헌신하다가 1851년에 사망한 후 바키 묘원에 안장되었다.

4. 여담

한편 맘루크들의 내전 시에 그들은 각자 상점회에 지원을 청했는데, 이는 맘루크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바그다드의 상점가를 고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스만 조정과 현지 성직자 계층과의 공조가 절실했던 기존 파샤들과 달리 맘루크 파샤들은 자립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승 구도의 확립과 라이벌 맘루크 가문들의 형성으로 분파주의와 내분이 만연해졌고, 여기에 베두인 반란과 이란의 침공 등이 겹치며 19세기 들어 파샤의 권위는 점차 하락했다.

1831년, 조정의 직접 지배를 확립한 알리 르자 파샤 역시 결국 남아있는 맘루크들과 협치해야 했다. 따라서 그는 小 술레이만 파샤의 딸과 결혼했다.


[1] 나디르 샤 (1734, 1743년), 카림 칸 (1776년)[2] 둘다 유럽계 무슬림 세습 왕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이집트의 경우 식민 지배를 거쳐 완전 독립까지 얻는 등 더 오래 지속되었다.[3] 보수 후 하산 파샤 모스크로도 불렸다[4] 하산 파샤의 손녀 아딜라 카툰과 결혼한 후 3대 바그다드 맘루크 파샤로 즉위한다[5] 타브리즈 방면은 반 태수 압둘라 파샤 알 쿠브를리, 간자 방면은 에르주룸 태수 이브라힘 파샤 실라다르가 말았다[6] 하산 파샤가 오스만 관료의 딸 아이샤 카님과 결혼하여 얻은 아들. 그외에 두 여자 형제 (파티마 카님, 사피야 카님)가 있었다. 아이샤 카님은 1717년 사망한다[7] 같은해 1724년생인 술레이만 아가가 바스라 태수가 되었다. 그는 여러 행정 개혁을 단행한다[8] 그중에는 순니 학자 셰이크 아흐마드 바쉬 아얀도 있었다.[9] 또한 그는 대추야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10] 티그리스 강을 건너 서안의 카르크에 이르렀을 때에 그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설득된 무스타파 파샤는 군대를 밤중에 습격하여 죽이게 했다. 우마르 파샤는 호위대와 밤새 강렬히 저항한 후 모술을 향해 도주했다. 하지만 도중 말이 넘어져 쓰러졌는데, 수행원들은 그걸 모른채 가버렸기에 목이 부러진 우마르 파샤는 그대로 죽었다. 이후 추격대 중 하나가 목을 베어 무스타파 파샤에 바쳤다.[11] 이때 아편이 모두 몰수되었다고.[12] 이후 다시 여러 지역의 태수직을 전전한다[13] 차녀 아이샤 카눔의 남편[14] 술레이만 파샤 알 바반의 아들 칼레드 파샤의 목을 베어 바그다드에 효수했다고.[15] 한편 같은해 타메르는 쿠자아 부족과 싸우다 죽으며 사촌 투와이니가 계승한다[16] 그는 이란으로 망명함[17] 성내의 와하비인 170여명 살해됨[18] 한편 투와이니와 합류하기 위해 아흐사에서 북상하던 칼리드 연맹장 압둘무흐산 앗 사르다흐는 앗 다하나에 이르렀을 무렵 투와이니의 회군 소식이 닿자 역시 회군했다[19] 제독 겸 태수 이브라힘 에펜디는 배에 태워 무스카트로 보냄[20] 아이까지 2토만에 팔았다는 증언도 있다[21] 돈과 선물 공세[22] 그러면서 망명객들이 쿠웨이트에 있는 한 바스라를 공격할 일은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술레이만 파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23] 마드라사는 아직도 경찰서 옆에 남아있다[24] 셰이크 야흐야 알 와타리, 셰이크 압둘라 알 마우실리, 후자의 아들 무함마드 에펜디 등이 가르쳤다. 건물은 1957년 여왕 알리야 거리 (현 알 줌후리야 거리) 공사 시에 철거되었다[25] 그는 라우다 타흐나트를 거쳐 하파르 알 아타쉬에 주둔했다[26] 창으로 어깨 사이를 관통시킴. 일설에 의하면 타이스는 와하비 신봉자였고, 암살을 위해 입대했다 함[27] 원로들은 투와이니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커피와 차를 요구하다 동생 나시르를 임시 지도자로 세우며 죽음 인정함[28] 파르스 알 자르바가 샴마르, 하무드가 문타피크 부족, 이브라힘 앗 타키브가 잔여 부족들 이끔[29] 카스르 앗 사후드 / 후슨 알 무바라즈[30] 쿠트 알 호푸프[31] 이브라힘 빈 우파이산이 항전[32] 나름 압박도 가했으나 1803년 들어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을 침탈하며 대러시아 성전에 몰두해야 했기에 사우디에 대한 보복은 뒷전으로 밀린다[33] 토요일 두후르 (정오) 예배 전에 안장됨[34] 알 이니슈리야[35] 전 바스라 태수[36] 이때 우바이드 부족장이 전사함. 또한 이라크 북부를 약탈하며 축적한 전리품도 탈취함[37] 혹은 마다르 베이 알 아바디[38] 1번째 라카아의 2번째 절을 할 때에 마다드 베이가 단검을 들고 난입해 놀래키고 압바스 아가 알 마흐라다르가 상체를 내리쳤다. 이후 마다드 베이 등 일부는 램프가 깨져 어두워진 틈에 도주했다.[39] 알리는 압둘라 파샤가 임명한 부족장 나즘 알 압둘라를 친히 죽임[40] 이후 동생의 독단적인 처단에 분노한 하무드는 그를 추방한다. 한편 교수형 후 매장된 시신들은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고 조각이 나는 수모를 겪는다[41] 혹은 1천 5백[42] 가이트는 동생 무바라크와 타메르를 파견함[43] 150명의 기병과 수천의 보병[44] 사실 다우드 파샤 본인도 세금에 있어 신민들에 가혹했고, 불공정한 모습을 보이는 등 문제가 있었다[45] 앗 사폰지야에 머물던 그를 밤중에 친위대가 암살함.[46] 또한 시내를 도는 행사에 술탄 서절 의복을 입힌 사람을 내세워 사디크 에펜디가 살아있는 척 위장했다.[47] 1830년 들어 이집트 픅이 시리아도 요구하며, 자칫하다 아랍 전역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조정을 감돌았다[48] 1천 포대에서 2천 포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