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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ece5b6> 역사 | 오국부 | 금 추존 황제 | 동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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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 고려-여진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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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여진어 | 여진 문자 | 루거우차오 | |
민족 | 여진족 | |
지리 | 연운 16주 | |
낭설 | 여진족 신라인설 | |
기타 | 송원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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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1]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동하·후금이나 청나라 같은 왕조들은 사실은 신라인의 혈통이라는 주장.[2]2. 내용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하나는 여진족이 자신들의 국가 이름을 금(金)나라라고 한 것은 금태조가 신라에서 온 완안함보의 후손이라고 하는 《금사(金史)》의 기록을 근거로 자신이 신라의 후예 김(金)씨라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3], 다른 하나는 후금(청나라)을 세운 만주족의 추장 누르하치가 자신의 성으로 삼은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뜻'이라는 주장이 있다.신라사랑설은 논할 가치도 없는 낭설이지만, 금사 함보 관련설은 의외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금나라의 사서인 금사(金史)에 신라 혹은 고려에서 이주한 (말갈계로 추정되는) 완안함보가 금나라의 시조였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고려 교체기 시기 한반도에 있던 함보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고려를 떠나 여진족 중 한 무리로 들어간 이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먼 훗날 그의 후손이 금나라를 세웠다라는 설은 학계에서도 거론되고 있지만, 문제는 이게 여진족이 신라인이라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는 것.
깨알같이 누르하치도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8월에 "조상의 나라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한 바 있었다.[4] 그러다 보니 여기서 더 나아가 여진족 자체가 중국의 한족과는 정체성이 다르고[5] 만주원류고 등에서 자신들의 시조 중 일부가 신라에서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 역시 한민족 아니냐는 좀 황당한 주장도 있는데, 한국 사학계에서는 여진족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교류를 많이 한 민족으로는 보고 있으나 한민족으로 인정하고 있진 않다.
애초 일부의 주장일 뿐더러, 그게 맞다 쳐도 지금 스웨덴 왕가의 시조인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가 프랑스인이라고 해서 현대 스웨덴의 역사를 프랑스사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여진족의 정체성을 한민족과 결부짓는 것을 무리로 여길 수밖에 없다. 애초에 말도 안 통하고, 발해 멸망 이후 한민족이 요동·만주 지역의 패권을 상실하면서 이 지역이 한족과 몽골족의 엎치락 뒤치락 대결장이 된 이후부턴 여진족과 한반도 국가 사이의 동질 의식도 딱히 없었다.
2.1. 애신각라 신라 사랑설
'애신각라 = 신라 사랑'설은 한 개인이 기사에 쓴 잘못된 내용으로 이것이 퍼진 것이 원류이며 인터넷 환경 특성상 오늘날에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가끔 나타난다. 애신각라(愛新覺羅)에서 신(新)·라(羅)가 절묘하게 신라의 공식국호 표기용 한자와 겹쳐서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6]애신각라는 만주어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Aisin-gioro)를 음차 표기한 것이고, 아이신은 '쇠', 기오로는 '허리띠'란 뜻인데 동시에 '씨족'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즉, 아이신기오로는 "금 씨족/쇠 씨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사실 철기 시대에 쇠나 금은 중요한 금속이기도 했고.
조선, 중국쪽 사서에선 누르하치와 일족들의 성씨를 동(佟, 童)으로 기록했는데 이를 보아 훗날 누르하치가 과거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의 계승의식을 가지고 주변 여진족들을 통합하고 후금을 건국하면서 부족의 성씨를 금(金)으로 바꾼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이 황당한 애신각라 신라 사랑설 때문에 후술된 금사 함보설 관련 내용들조차 일반인들에겐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오인되는 등 재야 사학계에서조차 비판거리가 되기도 한다. 참고로 현재 중국에선 아이신 교로의 미라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플로 그룹은 알 수 없으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하플로 그룹들은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중국에서는 아이신 교로 씨의 후예로 '자칭'하는 자들이 있어 유전자 검사를 했다고 하나 이들이 정말 아이신 기오로 씨의 후예가 맞는지를 검증할 수가 없으니 확신할 수 없는 정보이다.
2.2. 금사 구절 관련
결론부터 말하자면 금나라 황실 시조가 한반도 출신이라는 것은 여러 문헌들로 교차검증이 된다. 우선 수백년에 걸쳐 꾸준히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흥미롭지만, 당대 본인들부터가 그렇게 생각했던 게 가장 중요하다. [7]일단 금 시조 함보 관련 내용은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함보가 고려[8]에서 만주로 넘어와 여진족 일부 세력인 복간수 완안부 추장이 되었고, 세월이 흘러 함보의 후손이 금 태조가 되어 나머지 여진족 세력을 규합해 금나라를 건국했다는 건 교차검증이 가능한 제법 신뢰도가 있는 내용이다.
다만 여기선 여진족 신라인설을 다루니 여진족의 정체성 문제에만 집중해보자면, 상식적으로 국왕 한 명 내지는 국왕 주변의 소수 친위세력들만으로 여진족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신라인으로 바뀌었을 리도 없고[9][반론][11]
반론: 왕의 신하가 어느 민족 출신인지가 그렇게 중요했더라면 이성계가 여진족 이지란을 측근으로 두었으니, 동청례, 김충선, 벨테브레 같은 외국인 신하들도 있었으니 조선은 한민족의 나라가 아니라는 소리도 할 수 있다. 이성량, 이여송도 고려 출신이니 명나라는 한족 왕조가 세운 한족의 나라가 아니게 되는가? 고구려도 발해도 이민족을 지배하던 다민족 국가였으니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리고 역사계승인식이야말로 한민족계 국가뿐만 아니라 그냥, 애초에 그 어떤 나라를 계승한다고 선포한 적이 없으니 이걸로 따질 수 없다.
문화와 언어도 다른 상황이라 금과 고려 사이에 어떤 혈통적인 동질감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믿고 그렇게 실행하는 것이다. "섞였으니 아니다"라고 하면 역으로 무굴 제국도 티무르 제국도 사실 몽골계가 아니라고 우길 수 있다.
그리고 고려는 통일신라의 후신이기는 하나 고구려의 계승을 천명하고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등 신라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녔다고 보긴 어려우며, 신라-고려와 여진족은 활동 지역마저 한반도 중남부와 만주로 갈려 사실상 남남이었다. 허나 어차피 기록상 함보는 신라인으로도, 고려인으로도 기록되니, 신라말, 고려초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진족이나 금나라는 당대 고려와 상당히 대립하였다. 고려도 종종 북방에 쳐들어가 예방전쟁을 수행했고, 여진도 세력이 강성해졌을 땐 되레 고려에 칭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허나 이것도 같은 민족끼리도 하던 것과 다를 게 없다. 고구려와 신라처럼 서로 잘 나갈 때 서로를 으뜸이라고 해서 복속시키려던 것과 같다. 사실 한민족 각국이 크는 과정도 촌락 하나하나 복속시켜서 컸기도 하고. 누르하치도 각기 다른 혈통의 여진 부족들을 무력으로 복속시켜서 통일을 한 뒤에서야 만주족이라고 통합했고, 칭기즈 칸도 무력으로 여러 부족을 복속시켜서 몽골 제국을 만들었다. 남북한 사이에, 삼한 사이에, 일본 전국시대 여러 나라들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서로 다른 민족이 되는 게 아니잖는가.
당대에도 금나라 황실이 신라-고려계 혈통이란 사실은 알려졌기 때문인지, 일부 관련있는 자들이 사교적 수사의 일환으로 이런 혈통을 내세워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호십문(胡十門)은[13] 갈소관 사람으로 아버지 달불야는 요나라를 섬겨 태위가 되었다. (중략) 호십문은 족인들을 불러 모아 모의하여 말했다.
"우리의 먼 조상의 형제 세 사람이 함께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의 대성황제(大聖皇帝)의 할아버지는 여진으로 들어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고려에 남았다가 고려에서 요나라로 귀부하였다. 나와 황제는 모두 세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시조의 형 아고내(阿古迺)가 고려에 머물렀는데, 호십문이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스스로 아고내의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다.
- 열전 4 시조 이하 여러 아들, 종실/ 국역 금사 3권 83쪽
한편, 금나라 내에서도 이게 정리가 확실히 안 된 모양인지 일부에선 한족과 친분성을 내세웠다 반박당하기도 했다."우리의 먼 조상의 형제 세 사람이 함께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의 대성황제(大聖皇帝)의 할아버지는 여진으로 들어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고려에 남았다가 고려에서 요나라로 귀부하였다. 나와 황제는 모두 세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시조의 형 아고내(阿古迺)가 고려에 머물렀는데, 호십문이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스스로 아고내의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다.
- 열전 4 시조 이하 여러 아들, 종실/ 국역 금사 3권 83쪽
4년(1216년) 2월에 당시 상서성이 보고하였다.
"요동선무부사 완안해노가 말하기를, 참의관 왕회(王澮)는 일찍이 본조(本朝 금나라)가 고신(高辛 중국 한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후손인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을 계승하였으니 황제(黃帝 중국 한족의 전설상 시조이자 신)의 후예라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서를 내려 유관부서에 물었고 장행신(張行信)은 보고하여 말하였다.
"시조실록(始祖實錄)을 살피건대 단지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일컬었을 뿐이고 고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왕회가 말한 것을 돌아보건대 다만 광망(매우 잘못된)한 언어일 뿐입니다."
황제(금나라 선종宣宗)는 그(장행신)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 열전 제45 장행신/ 국역 금사 4권 214~215쪽
즉, 여진족 신라인설은 불합리한 소리지만, 당시 금나라 황실은 자기들의 부계 혈통 조상이[14] 고려에서 왔다는건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금과 고려는 당대 상당히 대립하기도 했지만[15] 결과적으로 여요전쟁처럼 큰 전쟁까지 이어지진 않았다.[16] 참고로 이후 금나라는 몽골 제국에 멸망당한다."요동선무부사 완안해노가 말하기를, 참의관 왕회(王澮)는 일찍이 본조(本朝 금나라)가 고신(高辛 중국 한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후손인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을 계승하였으니 황제(黃帝 중국 한족의 전설상 시조이자 신)의 후예라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서를 내려 유관부서에 물었고 장행신(張行信)은 보고하여 말하였다.
"시조실록(始祖實錄)을 살피건대 단지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일컬었을 뿐이고 고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왕회가 말한 것을 돌아보건대 다만 광망(매우 잘못된)한 언어일 뿐입니다."
황제(금나라 선종宣宗)는 그(장행신)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 열전 제45 장행신/ 국역 금사 4권 214~215쪽
종합하자면, 여진족의 왕조 자체는 대대로 한반도 출신이라고, 금나라와 수백년 뒤의 청나라 때도 거듭 언급했을 만큼 일단 본인들부터가 이 사실을 중시했다. 허나 고구려가 한민족이 세운 한민족의 국가지만 다민족 구성이었던 것처럼, 명나라가 한족이 세운 한족 국가지만 다민족 구성이었던 것처럼, 피지배 민족과 지배 민족이 다른 나라를 세웠다.
3. 기타
- 비슷하게 요나라 왕족들의 성씨인 야율씨가 고구려의 고씨였다는 유사역사학적인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학문적 근거는 빈약하며, 애초에 요나라는 거란족 국가였다. 참고로 거란 항목에도 나오지만, 요나라가 고조선이나 고구려 계승 드립을 쳤다는 소리는 문장 오독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역사를 계승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땅에 거란국가가 세워졌다는 소리에 가깝다.[17] 게다가 애초에 요나라가 친 고조선 드립은 기자조선을 말하는 거라 환빠들이 써먹기도 난감하다.
- 정작 조선을 증오하는 환빠들은 이성계를 여진족이라고 깐다. 일명 이성계 여진족설인데 이것 역시 근거가 희박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다만 이 설을 차용할 경우 묘하게도 이는 다수 환빠들이 신봉하는 여진족 신라인 설에 의해 결국 이성계는 신라인으로 다시 환원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게 된다.
- 만주원류고에서는 해당 속설을 통해 신라는 만주족의 역사일 수 있다며 만주족 버전 환빠짓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만주족은 금나라가 생기기 전 "국가"라고 불릴 만한 정치체계를 마땅히 가지지 못해서 역사 콤플렉스가 존재했다는 의견이 있다. 콤플렉스까진 아니더라도, 실제 편찬 목적 중 기록이 적은 만주족의 역사를 모아 학사들에게 논하게 하고 만주인의 뿌리 의식을 최대한 고증하여 당시 청나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도 있었다. 여기서 만주족 스스로 신라나 백제를 거론한 점에서 생각보다 한반도 지역이 만주와 교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서도 숙신, 읍루, 물길 등 많은 것 중 하나로 거론한거고, 애초에 학계에선 만주족과 한민족간 교류성을 긍정하지 동질성을 긍정하진 않는다.
- 일본에서도 일본 황실의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가설이 존재했다.[18] 딱히 물증은 없지만, 일본에 전해지는 스사노오, 아메노히보코 설화 등 때문에 추측성 가설도 나오는 모양. 이는 일제강점기 일선동조론에 악용되기도 했다. 다만 황실이 아니라 하타 씨 등 신라계 도래인 가문은 고대 일본에 실제로 있었다.[19] 사실 신라와 왜(일본) 사이가 나쁜 것과는 별개로 서로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인적·물적 교류는 많았다. 한편, 일부 일본인들은 일본 출신 호공이나 그 지역 출신일 수도 있는 석탈해 등의 기록에 근자감(?)을 보이기도 한다.
4. 대중매체에서
- 역사스페셜에서 관련 내용을 2009년 9월 6일 방영하였다.
- 소설 '초원의 별'은 본 가설을 바탕으로 집필된 소설이다.
-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아주 짤막하게 등장한다. 신라 부흥을 꿈꾸는 두두을과 그가 데리고 온, 신라 왕족의 후예인 부용이 황룡의 대업을 거론하면서 여진족 신라인 설을 언급했다. 훗날 두두을의 언급에 의하면 이의민을 새로운 황제로 내세우고 신라의 후예인 금나라의 협력을 받고자 했다는 것. 진짜로 금나라 시조가 신라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고려시대에 '그런 전승'이 존재했던 것 자체는 사실이므로 이 정도 언급이나 발상은 고증에 완전히 어긋난 것은 아니다. 다만 작중 금나라는 작중 갈등요소와 사건전개를 만드는 장치로만 등장할 뿐이며, 그외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아 여진족 신라인설이 비중이 큰 드라마는 아니다. 이는 두두을이 이의민을 부추기기만 했을 뿐 어떻게 대업을 이루고 또한 앞으로 올 난세를 어찌 극복할 것인지에 이의민에게 가르침을 준 적이 별로 없었기에 그런 것. 때문에 극중에서 크게 언급도 안되다 두두을의 사망과 함께 완전히 거론이 사라진다.
-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마의태자 이야기와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 이야기를 작가가 나름의 상상력으로 섞어서 각색했다. 신라인 문제와 고려인 문제의 언급을 각각 고려해서 나온 장면으로 보인다. 다만 해당 장면에서의 천추태후의 아들은 자신의 혈통은 고려지만 여진족과 함께 나고 자란 여진인이라고 말하기는 한다. 사실 이렇게 혈통과 정체성을 별개로 보는 것이 더 고증에 맞다.
5. 같이 보기
[1] 환빠 등 유사 역사학자들도 상당수 포함. 반대로 말하면 한국 주류 사학계에선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2] 여기서부터 핀트가 안 맞는 게, 청나라는 금나라의 후신을 자처하긴 했지만 황실이 금나라 황실의 계보에서 유래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남송의 장수였던 악비가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항목 참고. 사실 네이처 지에는 청나라 황실은 몽골 태생이라는 학설도 있다. 한마디로 근거가 빈약한 주장만 난무하는 상황.[3] 여기서 더 나아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인 소위 마의태자 혹은 그 후손이 신라 부흥을 위해 만주로 가서 여진족 세력들을 규합하였으며 그의 5대(?) 후손인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웠다는 가설도 있다. 물론 완안아골타는 항목에도 있듯 마의태자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인물이다. 나말여초 기간 유명했던 신라인 중 한 명이 마의태자 김일이었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 민간에서 떠돈 루머 정도로 추정하기도 한다. 애초에 정사에선 중국 쪽이든 한국 쪽이든 전혀 언급이 없다.[4] 다만 당시 조선이 건주여진을 믿지 못한 것(그러니까 원군을 핑계로 조선을 꿀꺽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고, 원군을 보내줄까 말까 간보던 명나라 눈치도 보여 거절했다.[5] 이거야 맞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까지 싸잡아 '중화민족'이란 개념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 사실 이런 다민족 국가 체제의 실질적 원조가 청나라였으니 아이러니하다.[6] 참고로 신라의 공식 국호는 지증왕때 선포된 '新羅'가 맞지만, 실제 발음은 '실라/시라'에 가까웠다고 보고 있다. 고유어에 적당한 한자 표기를 맞춘 것(이를테면 국호의 로마자 표기를 'Türkiye'로 정하듯이).[7] 금나라로 한정시켜 봐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황실이 한반도 지역과 일부 연관은 있다는 점에서 사교적 얘기거리로 친분을 나눌 수는 있는 정도 수준.[8] 시기상 나말여초 무렵 인물이라 사서에 따라 '신라'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사실 왜냐 일본이냐 버마냐 미얀마냐 터키냐 튀르키예냐 타령처럼 국명이 바뀌면서 일정기간 생긴 현상으로 보는게 자연스러울 것이다.[9] 일본의 천황가에 백제인의 피가 섞였다고 일본이 백제계 국가라거나 천황가가 백제계 가문이라는 얘기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해외 서적에서는 실제로 초창기 왕가를 백제계 가문이라고 한다. 그냥 백제계 피가 "섞인"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정복자 윌리엄도 엄연히 노르만인 계통이라고 밝히는 마당에 이걸 백제계라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말대로라면 원 간섭기 고려는 짤 없는 몽골계 국가다. 부계가 고려인인데 어떻게 몽골계가 되나? 현대적으로 주장해보자면, 아버지가 케냐 사람인 하와이 출신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했으니 그 기간 미국은 케냐 역사라는 황당한 소리랑 비슷하다.[반론] 미국의 경우는 애초에 왕정 국가가 아니니까 지도자 혈통은 대통령직의 고려 요소가 아니지만 전근대 동아시아 왕정 국가에서는 이게 매우 중요했다. 아래 굳이 왕회가 금나라 황가를 한족이라고 우기려던 게 그 증거. 덤으로 이런식의 역사왜곡 시도는 당나라 당시에 선비족 황가를 한족이라고 왜곡할 때도 있었고 해외 역사학계 논문을 찾아보면 검증되는 사실이다. 오바마 때는 오히려 미국 시민권자의 혈통이니 문제 없지만 속지주의 떡밥으로 출생지 때문에 미국 시민인지가 논쟁거리였다.[11] 참고로 당연하지만 여진족 내에도 여러 부족이 있었다. 그리고 여진족은 한국의 남북국 시대에 발해가 흡수하지 못한 말갈족 중 하나인 흑수말갈에 뿌리를 두고 있다.[12] 실제로 백제가 그랬다. 국성을 부여씨로 하고, 국호도 남부여로 칭한 적이 있어 중앙정부 차원에서 부여 계승의식을 꾸준히 보여주었다. 물론 그 백제조차 집권층이 그런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일반 대중들은 무관한 편이었다.[13] 갈소관을 금 태조에게 바치며 귀부하였다. 자신을 아고내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14] 모계는 당연히 여진족이다. 즉, 엄밀히 따지면 혼혈.[15] 윤언이가 사대하라는 금나라 보고 "지들 황제 조상이 고려 출신인데 어떻게 고려한테 이럴 수 있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허나 이것도 같은 민족끼리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고구려와 신라처럼 서로 잘 나갈 때 서로를 으뜸이라고 해서 복속시키려던 것과 다를 게 없다. 사실 한민족 각국이 크는 과정도 촌락 하나하나 복속시켜서 컸기도 하고.[16] 물론 금나라 건국 직전엔 고려의 여진 정벌로 대판 싸우긴 했다. 이것 때문에 양쪽이 모두 피를 봐서 서로 충돌을 자제한 것도 있다.[17] 때문에 서희한테 '우린 대놓고 국명부터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인데 왜 니들이 우리 선조 땅 차지하고 있음?'이라는 식으로 역드립을 당하기도 한다.[18] 이전 버전에 신라계와 백제계가 덴노가를 이어갔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두루 실려있고 이후 남북조, 전국시대, 명치유신,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식의 주장이 있었는데 사실 여부가 미지수다. 출처가 있다면 링크 바람.[19] 심지어 진구황후나 오진 덴노, 소가씨도 신라 출신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