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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Vabadussõda[1] Estonian War of Independence | ||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의 일부 | ||
기간 | ||
1918년 11월 28일~ 1920년 2월 2일 | ||
장소 | ||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러시아 북서부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에스토니아 공화국 [[라트비아 제1공화국|]] 라트비아 공화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영국 북서군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 ]][[틀:국기| ]][[틀:국기| ]] | 발트 향토방위군 [[자유군단|]] 자유군단 |
지휘관 | ||
요한 라이도네르 | 요아킴 바체티스[2] | |
결과 | ||
에스토니아의 승리 타르투 조약 체결 에스토니아의 독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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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8년 11월 28일에 일어나 1920년 2월 2일에 끝난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발트 향토방위군 간의 전쟁이다.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의 일부이다. 에스토니아가 승리하여 러시아와 발트 향토방위군 세력이 에스토니아에서 축출되고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유지되었다.2. 서막
1918년 11월 말, 에스토니아 방면 공세의 주력을 맡을 붉은 군대 제7군이 에스토니아 방면으로 이동했다. 22일 제7군이 에스토니아 북동부 나르바 시의 독일군 부대를 공격하여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의 전선은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 북부 전선에서 7군 소속 제6소총사단은 12월 24일 에스토니아 육군 소속 신편 4연대와 5연대가 방어하는 타파를 점령하고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불과 34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남부에서는 17일 붉은 군대 제49라트비아인소총연대가 발가를 점령하고 24일 타르투도 점령했다. 29일에는 에스토니아 볼셰비키 지도자 얀 안벨트가 친소 꼭두각시 정부인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을 수립했다.3. 과정
2분만에 보는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
탈린에서 에스토니아 독립기념일 첫 축하 행사를 진행하는 에스토니아군들 1919년 2월 24일 |
붉은 군대 제7군은 3월 15일 오늘날 에스토니아 남동부 세토마, 바스첼리나, 래피나를 점령했다. 에스토니아 2사단은 28일 반격하여 페체리를 수복했다.
1919년 5월 라트비아 인근에서 교전 중인 에스토니아 육군들 |
3.1. 발트 향토방위군과의 전쟁
1919년 6월 라트비아 북부에서 행군하는 에스토니아 제3 보병대대 |
독일군은 라트비아 국가군 조직을 파괴했고 1919년 4월 16일 임시 정부는 친독일 괴뢰 정부인 라트비아 임시정부로 대체되었다. 라트비아 임시정부는 안드리예프스 니데라가 이끌었다. 울마니스는 증기함 사라토프를 타고 피난을 갔다. 제6예비군단은 소비에트군을 격퇴하고 5월 23일일 리가를 점령한 후 북쪽으로 진격을 이어갔다. 이들은 에스토니아군에게 북부 라트비아 점령을 끝낼 것을 요구했다.[3]
1919년 2월 에스토니아 남부 발가의 에스토니아 육군 장갑열차 |
에스토니아 제3사단은 리가를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7월 3일 에스토니아군이 리가 외곽에 도달했을 때 협상국의 요구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울마니스 정부가 리가로 돌아왔다. 독일군은 라트비아에서 떠날 것을 지시받았고 발트 향토방위군은 라트비아 임시정부의 지휘에 편입되어 붉은 군대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협상국의 지시를 피해 해산된 제6예비군단은 철수하는 대신 독일 괴뢰 라트비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고용한 서부 러시아 의용군으로 들어갔다. 1919년 19월 서부 러시아 의용군이 리가를 공격하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다. 라트비아 정부가 도움을 요청하자 에스토니아는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2개의 장갑열차를 보냈고, 적군으로부터 라트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루반스호 북부에 방어군을 지원해주었다.
4. 타르투 조약
타르투 조약 협상에 참석한 에스토니아 대표단의 일부 (왼쪽에서 오른쪽):얀 포스카, 얀 수츠, 빅터 무트 |
가을에 북서군은 백검 작전을 개시해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고자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무기를 제공했고 영국 해군과 에스토니아군이 작전 지원을 하면서 1919년 9월 28일 북서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에스토니아는 협상국의 요구로 인해 북서군을 지원했다. 에스토니아군은 크라스나야 고르카 요새에 육해군합동공격을 개시했고, 에스토니아 제2사단은 옐리카야 강에 놓인 교량들을 파괴하려고 했으며 에스토니아 제3사단은 피탈로보를 향해 진격했다. 북서군은 페트로그라드로부터 16km 떨어진 지역까지 진군했으나 붉은 군대는 나르바 강까지 백군을 몰아낸다. 백군의 불신으로 인해 에스토니아 최고사령부는 무장해제를 하고 북서군의 남은 병력을 국경 지역에 구금했다.
소비에트 제7군과 제15군은 붕괴된 백군을 추격하면서 나르바 강 일대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거점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첫 전투가 11월 16일 루가 강에서 발발했는데 120,000명의 적군과 40,000명의 에스토니아군이 충돌했다. 반복되는 공격을 통해 붉은 군대 제7군은 소소한 성과를 거두었다. 11월 말 적군이 병력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에 전선의 상황은 고요해졌다. 에스토니아를 평화 협상에 나오도록 압박하기 위해 12월 7일 적군은 공격을 재개했다. 12월 16일 붉은 군대 제15군의 선봉부대가 나르바 강을 건너면서 에스토니아군의 상황이 위급해졌고, 에스토니아 최고 사령부는 전투 기간 동안 제1사단을 보충하고 제3사단의 본진을 보냈다. 35,000명의 붉은군대 군인들이 사망한 이후 붉은 군대는 12월 말 전투 능력을 소진했다.
11월 19일 얀 투니손이 이끄는 새 정부는 다른 발트해 국가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소비에트 러시아와 회담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협상은 12월 5일 재개되었고, 주요 의제는 영토 문제에 관한 논쟁이었다. 12월 내내 회담이 이어졌고 양측은 그들만의 영토에 대한 요구를 주장했다. 협상 와중에도 나르바에서 전투는 이어졌다. 1919년 12월 31일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1920년 2월 3일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이 조약으로 에스토니아군은 이반고르드와 패초리를 포함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5. 볼셰비키 및 소비에트에 의한 학살
자세한 내용은 소비에트의 전쟁범죄 문서 참고하십시오.볼셰비키 및 붉은 군대,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에 의한 에스토니아인 대량 학살도 발생했다.
[1] '자유 전쟁'을 뜻한다.[2] 라트비아인으로, 라트비아식 이름은 유쿰스 바치에티스였다.[3] 제6 예비군단의 목적은 에스토니아를 독일 지배 하의 괴뢰국에 편입시키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