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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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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파일:알베르 카뮈-유서프 카쉬작품.jpg
[[노벨문학상|{{{#white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출생 1913년 11월 7일
프랑스령 알제리 콩스탕틴 주 몽도비
(現 알제리 엘타르프주 알드라안 (الذرعان))
사망 1960년 1월 4일 (향년 46세)[1]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 빌블르뱅
국적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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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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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파일:알베르 카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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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모교 알제 대학교 (철학과 / 학사)
사상 프랑스 실존주의, 프랑스 비합리주의
직업 소설가, 철학자, 저널리스트
신체 176cm[2]
배우자 시몬 이에 (1934년 ~ 1936년, 이혼)
프랑신 포르 (1940년 결혼)[3]
자녀 캐서린 카뮈
장 카뮈
정당

[4]
종교 무종교 (무신론)[5]
대표작 이방인 (1942)
페스트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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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상
3.1. 카뮈의 '부조리'3.2. 시지프 신화
4. 문학5. 어록6. 기타7. 대표작

[clearfix]

1. 개요

파일:알베르카뮈1.jpg

프랑스의 작가, 신문기자, 철학자.

카뮈는 에세이 《TheReverse》에서 그의 전 생애가 여전히 개인의 자유를 깊이 파고드는 동시에 허무주의 철학에 반대하는 데 헌신했다고 썼다. 1957년에는 역대 두 번째로 어린 43세의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6]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평가를 거부했다.[7]

2. 생애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다.[8]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영국령 인도처럼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취급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 이른바 피에 누아르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9]나 어머니[10]도 그 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11].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12] 즉,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13][14]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과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카뮈는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엔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모친은 남편 사후 카뮈와 형을 데리고 친정에 들어간다. 모친은 문맹에 청각 장애를 가진 하녀였고, 카뮈는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외삼촌 두 명과 함께 살았다. 가난으로 중학교도 못갈 뻔 했는데 초등학교 담임이던 루이 제르맹 선생님이 집으로 모친과 할머니를 찾아와 진학을 해야한다고 설득하고 매일 카뮈를 붙잡고 교육시켜 중학교를 장학금을 받고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카뮈는 1957년 노벨상 수상 후 연설문인 '스웨덴 연설'을 '어머니 다음으로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제르맹 선생님에게 헌사한다.

그리고 카뮈는 고등학교에서 평생의 스승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를 만난다. 그르니에는 당시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고 중년 이후에는 소르본 대학교의 미학, 예술학 교수가 된 철학자, 작가이다. 그르니에의 제안으로 카뮈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15] 두 사제는 카뮈가 죽기 전까지 3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 고백이 넘쳐난다.[16]

카뮈는 학생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질병인 결핵이 방해가 되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자동차 수리공 및 신문사 인턴 기자, 가정교사 같은 여러 일로 벌어먹으면서 철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22살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익 운동을 했으며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했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자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면서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된 1940년 12월 3일 리옹에서 알제리 오랑 출신의 프랑신 포르와 결혼했다. 이후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1944년 초에는 대표적인 지하신문 콩바의 편집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나치 점령에서 해방되자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부역 지식인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층은 논쟁으로 들끓었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층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대표적인 논전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 정의론의 격돌이었다. 모리아크는 과도한 숙청을 우려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라는 쳇바퀴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된다." 이에 카뮈는 이렇게 맞섰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광범위한 숙청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는 부역 혐의자가 제대로 된 절차나 재판도 없이 임의로 처형되기도 하고 각종 징계나 불이익등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했다.[17] 때문에 샤를 드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카뮈는 이런 무분별한 폭력뿐만 아니라 드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지만 드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지식인은 브라지야크의 사면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2.1. 알제리 전쟁

그랬던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민족해방전선(FNL)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당대 좌파 지식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범아랍민족주의사회주의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이다.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 측에서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특히 장폴 사르트르 등)은[18]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했다.

그렇다고 우익과 군부에서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카뮈는 알제리에서 자치정부를 세우거나 그에 준하는 자치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우익들에게 알제리는 '신성한 프랑스의 영토'였기에 받아들이기가 힘든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사실상 양측 모두 외면을 했다.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그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것은 그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이방인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1961년에 그를 추모하여 카뮈가 살던 알제리 티파사에서 만들어진 카뮈 문학기념비는 지금까지도 60년 넘게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다. 기념비 맨 밑에 끌로 깎여져 지워진 게 알베르 카뮈 이름.

2000년대 중반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역자 김화영이 알제리에 가서 보았을 때 기념비는 40년 넘도록 관리되지 않았으며 현지인들이 마구 험하게 다루는지 금이 가고 깨지고, 기념비 글귀도 흐릿해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래도, 2019년에 알제리에서 본 이들이 찍은 사진을 봐도 아직은 글도 다 알아볼 수 있고 상태는 나쁘지 않다. 2018년에 찍은 카뮈 기념비

2.2. 사망

카뮈는 죽기 1주 전인 1959년 12월 28일에 스승 그르니에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라면, 아니 그저 단순한 만족감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저에게도 기쁨입니다." 1960년 1월 1일 그르니에가 답한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새해를 시작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변함없는 우정의 증표를 보여주어 나를 자꾸만 놀라게 합니다." 그르니에는 이 편지를 산문집 '섬' 개정판과 함께 부쳤지만, 카뮈는 책을 받아보지 못하고 1월 4일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참고


사고 현장을 촬영한 흑백 영상.

카뮈의 코트에는 전철표가 있었는데 전날 아내와 같이 전철을 타려고 했다. 그런데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가 몰던 차를(갈리마르가 타라고 설득했다고) 타고 가던 길에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냥 전철을 타고 갔다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카뮈는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갈리마르도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원고가 있었다. 그 밖에 전철표 및 지갑, 펜, 메모지같은 것들과 같이.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출판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정식번역되어 출판되었다.

3. 사상

3.1. 카뮈의 '부조리'

그의 사상을 정리하자면, 니체 사상에서 인생론 부분을 구체화 시킨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무너진 것에서 오는 상태로 정의한다. 가령 세상에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어린아이의 고통도 일종의 부조리다. 물론 카뮈 시대 사람들에게 더 일반적인 것은 산타클로스 정도가 아니라 모더니즘에 대한 믿음이 양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라진 것에서 오는 부조리였다. 과학과 이성을 백날해봐야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은 커녕, 모두 전쟁의 잿더미만 남겼다는 분노와 상실감속에 유럽은 있었다.

카뮈는 '부조리'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도 결국 내가 살고자 하는 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살고 싶어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고, 의미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조리를 견디다 못해서 자살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 황당한 일이다. 카뮈는 '철학적 자살' 즉 세상에 대한 나의 신념이 깨졌다고 죽는 것을 가장 어리석은 일로 여긴다. 왜냐면 니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념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잘 살고, 행복하게 살려다 보니까 생긴 것인데 이를 위해서 죽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뒤집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에 관해서 카뮈는 동시대의 실존주의자들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은 저 유명한 장폴 사르트르를 포함하여 대부분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뮈는 이들 후설 계열은 세상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또다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태도, 다시 말해서 종교화 시키려 든다고 비판한다. 그가 특히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이성에 대한 태도이다. 실존주의자들 중에는 이성이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는 중이었다. 이에 대해서 카뮈는 니체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이성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어찌되었든 한개의 관점으로서 각각의 이성은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다시말해 '상대적 이성'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리가 아니므로 폐기하라는 것은 카뮈가 보기에는 허무주의로 직행열차를 타는 것이나 다름없다. 카뮈가 보기에 실존주의자들이 이렇게 무진리를 교리화 시키는 태도가 나오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진리를 찾고 싶다는 욕망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월'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뮈의 비판은 장폴 사르트르에게 특히 모욕적이었다. 프랑스 지성인 대부분이 혐오하는 프랑스 일반 가톨릭 교인들과 별 다를게 없다는 비판으로 다들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그럼에도 카뮈에게 호의적인 대대적인 문학평론을 썼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적 불만은 단 한문장만으로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인내심을 보여줬다.

3.2.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해결 방법에 있어서 카뮈는 사르트르는 물론, 자신이 모티브로 삼은 니체와도 매우 다른 접근을 한다.

니체의 경우에는 초인으로 불리는 것인데, 내가 느끼는 것들은 동물적인 것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가령 내가 느끼는 사랑과 그 감정에 대한 추구는, 인간이란 동물이 진화해오는 과정에서, 그것이 집단생활을 통한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기에 도태되지 않고 유전되어온 형질일 뿐이다. 다만 배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달리 니체는 그렇다고 그게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는다. 니체는 인간의 가장 멋진 점을 상상력이라고 여긴다. 비록 시작점은 생존본능이지만 인간은 결국 자신의 생존을 뛰어넘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 즉 '초인'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듯 상상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그가 '고독'이라 말하는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고독은 내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빠져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독자적인 가치와 세계관을 여러 경험을 쌓으면서 형성해 나가야 된다고 말한다.

이렇듯 큰 맥락에서 니체와 사르트르는 모두 가치관을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작업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내가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그러한 니체의 상상력 추구나 사르트르의 창조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카뮈가 니체나 사르트르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대상으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니체와 사르트르 경우에는 지적이면서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가령 자신들과 같은 혁명적인 지식인이나 예술가 등을 염두에 두고 사상을 전개했다. 반면에 카뮈는 그가 고려하는 사람이 노동자라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사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노동자로서는 니체나 사르트르와 같이 스스로 상상력과 지적인 발랄함을 발휘하라는 조언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입장을 생각한 것은 카뮈가 그러한 집안 출신이고, 많은 블루칼러 일을 해본 경험 때문일 것이다. 카뮈는 이러한 일반 노동자 계급의 시점에서 어떻게 부조리를 타파할지를 고민한 것이다.

카뮈는 '초월'을 추구하는 것에 비판적이다.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결국 내 삶의 경험을 한계 짓는 다는 것이다. 가령 엄격한 교리에 따라서 수행하는 수도자는 이성과의 경험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초월과 영원성과 같이 추상적인 개념의 반대편에는 감각적인 생생한 경험이 있다. 카뮈는 유명한 호색한 돈 후안과 연극배우라는 직업을 예시로 든다. 돈 후안은 눈 앞의 여성만을 열렬히 반복해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영원한 사랑이란 것은 없다. 그저 매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배우 또한 마찬가지인데, 작가와는 달리 연극배우는 자신의 활동을 후세에 남길 수가 없다. 연극을 녹화 기록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배우의 연기는 오로지 매 무대에 오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바로 피자마자 덧없이 지는 꽃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배우는 돈 후안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에 자신의 최대를 담아 '소진'시키며 연기한다.

매 순간을 '소진'시키는 것은 카뮈에게 중요하다. 모든 진리는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감각적 경험 뿐이다. 카뮈가 보기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경험도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가령 화가의 가난한 생활은 은행가가 보기에는 무가치한 경험이지만, 비평가가 보기에는 가장 풍부한 영감의 경험일 수도 있다. 은행가도 비평가도 상대적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경험을 딱히 딱 얼마짜리 경험이다 하고 가치를 매길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카뮈는 재밌는 생각을 하는데, 경험의 질의 차이가 무의미하니까 경험의 '양'이 많은게 좋은 것이란 거다. 그래서 거의 똑같은 수작을 여성에게 피우는 돈 후안이나 거의 같은 연기를 반복하는 배우의 삶이야 말로 지극히 모범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4. 문학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부조리 문학은 주로 블랙/다크 코미디가 대다수이다.

초기 부조리 문학은 대체로 부조리를 매우 괴롭고 혼란스러운 것으로만 표현한다. 때문에 주인공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태도는 기껏해야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이 체념 뒤의 냉소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뮈는 다르다. 그는 오히려 부조리를 그 사람이 살아있고,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다지 나쁘게 여기지를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부조리와 함께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카뮈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반항'이다. 세상이 나를 배반하는 듯하고, 갑자기 모든 친숙했던 것이 외계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이 부조리라면, 카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받치듯 저항하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초기 부조리 문학의 등장 인물들이 멘붕과 넋나간듯한 대사를 늘어놓다 끝나는 반면에, 카뮈의 "이방인" 주인공은 격렬히 반항하는 끝에 죽음을 맞는다. 카뮈의 표현에 따르면 부조리 문학의 인물들은 "철학적 자살"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 주인공은 세상앞의 "사형수"가 되기를 스스로 택하고 앞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세상이란 폭력 앞에 스스로 처형당하기를 택하는 인물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표현한다.

5. 어록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19]
자살이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20]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21]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농(non)'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22]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지성이 아름다움 속에 몸을 던지면 허무로 식사를 하게 된다. 위대함이 목을 죄는 듯한 이 경치들 앞에서는 인간의 사념들 하나하나는 인간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작가는 누구나 자신의 책 속에서 반드시 자신에 관해 글을 쓰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는 식의 생각은 낭만주의가 우리에게 물려준 유치한 발상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이 삶을 사랑한다. 이 삶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보고 싶다. 이 삶은 나의 인간 조건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해준다."뭐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건 없어."라고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만, 분명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 있다. 이 태양,이 바다.젊음이 용솟음치는 이 가슴,소금맛이 나는 나의 몸, 그리고 부드러움과 영광이 노란 빛과 푸른 빛 속에서 서로 만나는 장대한 무대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현존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더 이상 아무것도 미래에 대하여 기대할 것이란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풍경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천박한 풍경일 것이다.
'1분 후에, 1초 후에'하고 그는 생각했다. 올라오던 것이 멈췄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돌들 가운데 섞여 있는 돌이 되어 가슴 가득한 희열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세계의 진실로 돌아갔다.[23]

6. 기타

카뮈의 알제리 독립 반대도 이러한 성향의 일면이라는 분석이 있다. 알제리가 독립해도 새로운 제국주의 집단의 탄생일 뿐이라는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히 알제리 독립을 이끌던 민족해방전선은 친소련적인 급진 사회주의 정당이었고, 카뮈는 이들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노선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7. 대표작



[1]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4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2] 공식 프로필 상에서의 키다. 그의 자세한 신장에 대한 건 밑에 기타 항목 참고.[3] 수학교사 겸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4] 헝가리 혁명을 소련이 강경하게 진압한 것을 두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정당들이 더이상 진정한 공산주의를 추구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며 프랑스 공산당을 탈당했다. 이 때문에 장폴 사르트르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5] 반종교, 반신론적 무신론.[6] 노벨문학상 역사상 최연소 수상자는 1907년의 러디어드 키플링(수상 당시 41세)이다.[7] 그가 실존주의로 불리기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동시대에 활동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이 고정된 진리의 거부를 떠들지만 실제로는 그 고정된 의미의 거부를 또다시 고정된 진리로 만들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그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8] 알제리계 출신으로 유명한 프랑스인은 지네딘 지단이 있다. 아버지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고 불리던 친프랑스 알제리 민병대원 출신으로 용케 프랑스로 이민 온 항만 노동자였다.[9] 이름은 뤼시앵 카뮈. 알베르 카뮈의 증조부(뤼시앵에게는 조부) 클로드 카뮈가 1830년대 즈음에 알제리 해안지대에 정착했다. 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뤼시앵은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한다.[10] 카뮈의 어머니인 카트린 생테스는 1882년 알제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스페인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스페인인이었다. 카뮈는 스페인을 혈통에 의한 자신의 제2의 조국이라 칭한 바 있다.[11] 현대에 아키텐인이나 부르고뉴인이란 말이 없고 다 프랑스인인 것과 같다. 즉 알제리는 프랑스가 지배하는 외지가 아니라, 노르망디나 아키텐과 같은 행정구역들처럼 그냥 프랑스의 일부였다는 것이다.[12] 알제리는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하나의 독립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고, 유사 이래 항상 특정 국가의 일부로 존재했던 지역이다. 쉽게 말해 프랑스는 알제리라는 '국가'를 병합한 게 아니라, 바로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제리라는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이다. 알제리는 국가 상태에서 프랑스에 병합당한 게 아니고 국가였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카뮈가 살았던 당시 기준에서는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계 알제리인', '알제리계 프랑스인' 같은 말은 모두 없었다. 게다가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나 보호령이었던 모로코 등과 달리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본토의 행정망이 그대로 이식되었다. 이것은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 우파가 알제리 독립을 반대한 논리 중 하나였다. 카뮈는 그냥 프랑스의 알제리 지방에서 태어난 프랑스 태생 피에 누아르(Pied-Noir)였다.[13]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이나 페스트는 배경이 각각 현재 알제리의 도시인 알제오랑인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이방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비중으로 나오는 아랍인들을 제외하고 전부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물 설정을 이렇게 한 이유는 결국 알제리도 프랑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배경이 프랑스이니 등장 인물도 프랑스인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당시 알제리의 대도시들은 전부 프랑스계, 유럽계가 주류였고 아랍계가 비주류였다. 페스트에서는 첫 장부터 오랑 시는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14] 알베르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에 의하면, 프랑스 현지에서 유학할 당시 프랑스어로 쓰인 프랑스어 사전(불불 사전)에 예문으로 카뮈와 지드의 문장이 다수 실려 있었다. 이는 카뮈가 사용한 프랑스어가 표준 프랑스어에 적합했다는 뜻이다. 알제리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대국이지만 지리적 연유로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집중 개발되어 있었고 내륙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데, 카뮈 역시 프랑스 본토와 가까운 연안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부모도 프랑스어를 쓰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습득할 환경은 프랑스 본토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현재 알제리의 공용어인 아랍어베르베르어는 당연히 할 줄 몰랐다.[15]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이 알려져 있다. 카뮈의 '섬' 서문에는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이를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는 유명한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16] 이들의 서한집도 번역되어 있다.[17] 프랑스의 소위 나치 청산 과정에서는 추악한 무리수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점령군 치하에서 단지 생존을 위해 독일군에게 몸을 판 여자들을 화냥녀라 하며 광장 한복판에서 머리를 박박 밀고 돌을 던져댔다. 심지어 사적인 감정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나치 부역자로 누명씌워서 처형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장 패탱조차 많은 논란이 있다.[18] 당시 사르트르는 소련을 방문하는 등 공산주의에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카뮈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옛 문학 동지의 정을 생각해서 프랑시스 장송이라는 제자의 서평을 사르트르의 잡지인 '현대' 지에 싣는 형식으로 에둘러서 비판했지만 결국 들통났고, 카뮈도 장송이 아닌 '현대지 발행인(사르트르)' 명의 앞으로 반박문을 편지로 써서 맞서다가 결국 죽을 때까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카뮈 대 사르트르 논쟁 (경향신문)[19] 프랑스의 2차대전 전후 적극적인 나치 부역자 청산을 주장하면서 한 말.[20] 시지프 신화의 첫 두 문장.[21]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 문장.[22] 반항하는 인간. 은 영어의 No에 대응하는 프랑스어다.[23] 행복한 죽음의 마지막 구절.[24] 방대한 양 때문에 나뉘어 출판되었다.[25] 참고로 그의 방계 후손인 세인 카뮤는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탤런트인데 185cm의 장신이다.[26] 5피트 6인치 168cm. https://www.nytimes.com/books/first/t/todd-camu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