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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5 20:43:01

알가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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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가잘리[1]
الغزالي | Al-Ghazali
본명 아부 하미드 무함마드 빈 앗투시이 알가잘리
أَبُو حَامِدٍ مُحَمَّدُ بْنُ مُحَمَّدٍ ٱلطُّوسِيُّ ٱلْغَزَالِيُّ
Abū Ḥāmid Muḥammad ibn Muḥammad aṭ-Ṭūsiyy al-Ġazzālīy
출생 1058년
셀주크 제국 이란 투스
사망 1111년 12월 19일
셀주크 제국 이란 투스
직업 학자
분야 철학, 신학, 논리학, 법학
종교 이슬람(샤피이파)

1. 개요2. 생애3. 사상과 의의
3.1. 역비판3.2.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의 조화3.3. 알가잘리가 과연 이슬람 황금기를 끝장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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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철학자.

원래는 대학에서 사변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였으나 후에 수피즘에 심취한 이후 <철학자들의 부조리>라는 책을 저술하여 본인이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치던 이슬람 사변 철학을 공격했다. 이러한 공격은 이슬람 사변 철학에 반감[2]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장기적으로 이슬람 사변 철학의 몰락을 가져왔다.[3] 또한 알가잘리의 수피즘 옹호는 수피즘이 이슬람세계에 퍼져나가는데에도 기여했다. 오늘날의 와하브파에서 그가 수피즘에 심취했었다는 이유로 그의 기여도를 대단히 축소시킨 이유 때문인지 그의 저작이 남긴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리스 철학의 이슬람 접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무조건 배척한 것은 아니고 그리스-로마의 수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받아들였다.

2. 생애

그의 부친은 투스[4]에서 양털을 가공하는 장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알가잘리와 그의 동생 아흐마디에 대한 무리한 교육비 투자로 알가잘리의 부친은 결국 재산을 탕진했으며, 형제는 생계 문제를 위해 공부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투스와 니샤푸르의 니자미야 학원에서 이맘 알 주와이니의 문하에서 이슬람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셀주크 제국의 명재상이자 동향 출신인 니잠 알 물크의 눈에 띄어 33세에 바그다드에 있는 니자미야 학원의 교수로 발탁되는데, 그 당시의 학자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오른 셈이었다.[5] 그는 법학과 신학에 관한 논문을 썼고, 철학의 여러 주제에 정통했으며, 그의 법적 결정은 권위있는 것으로 존중받았다.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동시에 정치적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당시 칼리프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튀르크계 군인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세한 지침과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를 지원했던 셀주크 제국수니파 이슬람 왕조로,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시아파 이스마일파들이 세운 파티마 왕조와 대치 상태에 있었고 수니파 칼리파를 보호하던 입장이었다. 이는 파티마 왕조의 알 아즈하르 대학의 이스마일파 신학자들이 신플라톤주의 사변철학에 바탕을 둔 쿠란 해석을 바탕으로 셀주크 제국의 종교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시아파에는 이스마일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아 12이맘파에서도 무함마드 투시란 인물이 수니파의 사힛 알 부카리를 모방하여 나름 고증작업을 거친 하디스 편집본을 출간하자,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 물크는 혹시나 압바스 칼리파의 권위와 셀주크 제국이 과거 우마이야 칼리프조처럼 종파 갈등으로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알가잘리는 후원자들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1091년 출간한 <철학자들의 부조리>라는 책에서 이스마일파 이븐 시나, 그리고 그의 스승이었던 (그리고 시아파로 추정되던) 알 파라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의 저서 <철학자들의 부조리>는 시아파 철학자 이외에도 수니파 철학자였던 알 비루니까지 저격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했던 것과 다르게, 그는 명예를 누리면 누릴수록 더욱 회의감을 느꼈다.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로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강의를 지속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서구 학자들은 당시 이슬람 사변철학을 열심히 공부하던 알가잘리가 후원자들의 눈치 때문에 다른 사변철학자들을 공격하면서 양심의 가책이나 학문의 회의를 느낀 것이 아닌가 해석하기도 한다.
거의 6개월 동안 나는 세속적인 욕망이 가져다주는 매력과 영생에 대한 충동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나는 어느 쪽으로든 결론을 내야 했다. 하나님이 나의 혀를 말라붙게 만드는 바람에 강의를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끼는 제자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강의에 나섰으나, 내 입에서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나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언어장애로 인해 나는 상심에 빠졌고, 음식과 물을 소화하고 흡수할 기력마저 잃었다. 나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

갑자기 강의실에서 말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다니, 알가잘리가 심리적으로 예민한 사람이었을까? <철학자들의 부조리>를 출간한 다음 해 1092년 그를 지원하던 니잠 알 물크가 암살당했다. 든든한 후원자가 사망하고 자신이 가르치던 바그다드 니자미야 학생들이 광신도가 되어 시장에서 주먹다짐을 하고 다니고 다른 대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는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슬럼프에 빠지기 쉬웠다. 이 기간동안 알가잘리가 새로 출간한 책마저 혹평 속에 묻히고 말았다.[6] 의사마저도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체념하자, 1095년 알가잘리는 대학을 뛰쳐나가 10년 동안 유랑하는 수피의 삶을 살게 되었다. 10년 동안의 유랑 생활이 끝난 후에는 교수로 복직했다. 니샤푸르에서 다시 교수직을 얻은 그는 샤리아수피즘 사이의 균형과 조화에 관련한 정교한 이론을 확립했다. 자신도 철학자 출신이었으나 후원자들의 요청에 따라 과학과 철학을 공격하면서 명성을 쌓았던 그는 수피가 된 이후에야 "신의 섭리를 단순히 이성만으로 알 수 없다"는 신비주의를 통해, 자신의 아노미를 정반합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그가 수피즘과 수니파 신학을 조합하는데 여생을 바쳤던 것 역시 이런 정반합의 노력으로 해석 가능하다.

3. 사상과 의의

알가잘리는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그의 "아슈아리 학파(Ash'ari Aqeedah)"는 그의 신학과 논리를 계승하여 파티마 왕조의 이스파일마 사변 철학 학파들 그리고 셀주크 제국 내 잔존하던 시아파 12이맘파 잔당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스마일파의 이슬람 사변 철학 학파는 결국 파티마 왕조가 몰락하고 살라흐 앗 딘이 알 아즈하르 대학을 수니파 대학으로 개조하면서 몰락했다. 알가잘리 때문에 무타질라 학파가 하루아침에 망한 것은 아니었다. 무타질라 학파는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지역과 알 안달루스에서 유행했는데, 호라즘 지역의 무타질라 학파는 몽골 제국의 침략 와중에 말 그대로 전멸했다. 알 안달루스의 무타질라 학파에서는 이븐 루시드가 나와서 직접 알가잘리의 <철학자들의 부조리>에 반박하는 책인 <부조리의 부조리>를 내면서 나름 선전하는 듯 했으나, 이븐 루시드 역시 보수 성향 학자들의 공격을 받아 숙청당했다.

3.1. 역비판

몽골 제국이 호라즘을 침공해 초토화시킬 무렵 무타질라 학파와 대립하던 아슈아리 학파 또한 다른 학파로부터 공격을 받아 몰락하기 시작했다. 한발리파이븐 타이미야는 "아슈아리 학파는 그리스 철학을 가지고 다른 그리스 철학을 공격하는 학파일 뿐이다."라고 공격한 것이다.

중세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가장 소중한 개념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이었다. 그리고 불교연기법의 영향을 받은 중앙아시아 무슬림들 역시 원인결과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했다. 무슬림 의사나 철학자들은 불이 천쪼가리를 태우는 원인이라고 분석하면, 샤피이파 아슈아리 학파 신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사기이자 가짜라고 주장했다. 사건 A와 B가 연속적으로 발생해다고 해서 그것이 A와 B의 원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반박은 쿠란이나 하디스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라 그저 프로불편러 행각에 불과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븐 타이미야는 아슈아리 학파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못마땅했다기보다는 중세 당시 아랍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튀르크인들의 지원을 받아 아슈아리 학파가 어용화된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더 컸다. 아슈아리 학자들이 과학을 불신앙의 원인이라고 비판하면서 "우리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매우 상이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간섭할 수도 있음을 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람이 참수당한 후에도 살아 있게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긴 것에서 보듯 아슈아리 학파의 철학 비판 자체가 갖가지 미신에다가 궤변 범벅이었고, 쿠란과 하디스에서 제대로 된 근거를 도출한 것이 아니었다. 성묘 숭배를 미신이자 우상숭배로 보고 비판하던 이븐 타이미야가 아슈아리 학파의 철학 비판을 공격한 것은 그가 아슈아리 근본주의자들보다 더 근본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아슈아리 학파의 주장이 궤변이었기 때문이다.

3.2.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의 조화

알가잘리는 수피 신도들이 기존 이슬람 사회와 융화될 수 있는 명확하면서도 타당한 이유를 제공했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전통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 수피들을 영험한 무당으로 보고 수피즘으로 개종하곤 했는데, 셀주크 제국 시대 들어서 이렇게 갓 수피즘으로 개종한 튀르크 무슬림들이 중동 각지에 정착하면서 아랍인이나 페르시아인들과 이런저런 문화적 갈등을 겪던 상황이었다. 보수 성향 샤피이파 학자였던 그가 수피즘을 포용함으로서 튀르크인들이 중동 이슬람권 각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수피즘과 수니파의 조화 관련한 그의 사상은 중세 세파르딤 유대교의 거두 마이모니데스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마이모니데스는 알가잘리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은 무시했지만 그 외 알가잘리가 수피즘의 이론화 관련한 책에서 상당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신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향한 충동은 다양한 종교에서 발견되는 현상이고, 이들은 대개 내면의 정화와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의해 경직된 도그마를 버리라고 설교했다. 유대교 신비주의 역시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과 마찬가지로 기성 교단과 어떻게 화해할지 문제가 고민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마이모니데스가 알가잘리의 이론을 참고하면서 그는 유대교 신비주의와 랍비 유대교 사이를 조화시킬 발판을 마련했다.[7]

3.3. 알가잘리가 과연 이슬람 황금기를 끝장냈는가?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 철학과 신학을 너무 잘 집대성한 덕분에 후대의 이슬람 신학자들이 할게 없어져서 이슬람 신학을 몰락시킨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닐 디그래스 타이슨 등이 무슬림 사회의 과학적 성과가 폭망인 이유로 알가잘리가 이슬람 신학을 집대성하면서 수학을 듣보잡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발언하여 까이기도 했다. 십자군 시대를 전후로 하여 무슬림 사회 내 소수자들에 대한 박해가 증가하고,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거치며 이슬람 신앙이 경직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연히 오랜 시간을 두고 제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탓으로 콕 집어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리고 알가잘리는 과학과 철학을 무시한게 아니라 신의 섭리를 단순히 이성만으로 알 수 없다고 신비주의를 더 강조한 것에 가까우며[8]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것이 분명히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근본주의적 종교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어기고 교육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얘기하려다가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예시를 든 것이 문제. 정작 와하브파같은 근본주의자들은 알가잘리를 싫어한다.[9]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에서 선교용으로 출간한 책들만 보면 알가잘리가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 알 수 조차 없다.

상술한 이런저런 현대 사회의 정치사회적 이유 때문에 본연의 분야인 이슬람 신학과 철학에서 위대한 영향력을 남긴 인물이지만 이슬람사 밖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가 근래 들어서 상술한 닐 디그래스 타이쿤[10] 같은 해당 분야 비전문가들이 어설프게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의 시조"를 찾는답시고 인지도가 오른바 있다. 물론 이슬람관련 학자들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 일반을 비롯한 인문학계에서는 굉장히 질색하고 곤란해하는 관점이다. 애초에 근현대 이슬람 극단주의는 서구 제국주의와 보편 칼리파 제국의 붕괴, 이슬람 세계의 지정학적 분열과 경제적 저개발, 세속주의 표방하는 족벌 독재 vs 민주주의에 기생하는 극우 종교적 포퓰리즘의 적대적 공존 같은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근현대의 사회문제와 엮여있지, 무슨 800, 900년전 신학자 한사람한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알가잘리와 비슷한 문맥에서 좀 많이 어설프게 아는 비전문가들에겐 와하비즘의 사상적 직계 시조쯤 취급받는 이븐 타이미야 또한 구원론이나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보면 무슨 근현대 알카에다의 때이른 시조 따위가 아니라 몽골 침략으로 아바스조 칼리파가 말발굽에 다져진 육편이 되던 당대 시대적 문맥에서 충분히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신학자였다. 애초에 근현대 이슬람 극단주의 같은 거대한 세계사적 문제를 특정 역사적 인물이 전부 만들어냈다는게 비전문가적 환상에 가깝다.

[1] 라틴어로는 알가젤루스 (Algazelus / Algazel).[2] 이는 칼리프 알 마문무타질라 학파를 공식 교리로 삼고, 이슬람 사변 철학에 반대하는 자들을 대한 탄압한 것과도 일정부분 연관되어있다. 보수적 이슬람 학파인 한발리파의 시조 이븐 한발도 이 시기에 투옥되었다 풀려났는데, 이는 이븐 한발을 성자로 만들고 이슬람 사변 철학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3] 이븐 루시드의 "부조리의 부조리"같은 책이 반박서로서 출판되기도 했으나, 이슬람 사변 철학에 대한 반감으로 널리 수용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븐 루시드의 철학은 기독교권에서 널리 수용되었다.[4] 피르다우시니잠 알 물크 등 페르시아인 지성들이 탄생한 도시[5] 당시 바그다드와 니샤푸르에 세워진 니자미야는 각각 3,0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당대 최고 규모의 학교였다.[6] 이스마일파를 비판하는 책을 냈는데, 신경쇠약에 걸린 상태에서 대충 쓴 나머지 제대로 된 출처 없이 그냥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카더라 통신 이야기만 잔뜩 담아 이스마일파 교리 비판서를 냈다. 당연히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조리돌림했고, 알가잘리는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7] 비교하자면 동유럽을 중심으로 한 아슈케나짐 사회에서는 유대교 신비주의와 랍비 유대교 사이의 조화 관련한 논의가 실패하고 근본주의-신비주의 성향 하시딤 유대교와 합리주의 성향의 리타임 유대교가 서로 완전히 갈라졌지만 세파르딤 사회에서는 신비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이 서로 화해하는데 성공했다.[8] 다만 알가잘리는 이슬람 사변 철학에 기운 자들을 "배교자"로 규정했는데, 이 "배교자" 낙인은 꾸란에 따르면 이들이 죽음으로 처벌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알가잘리의 입장을 단순히 신비주의를 좀 더 강조한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과학, 의학 등이 이교적 요소가 배제되는 한에서 교육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고는 해도, 이슬람권의 역사에서 이성주의적 이슬람 사변 철학에 사형선고를 내릴 논리적 구조를 알가잘리가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후원자였던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의 왕비 등등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매우 우려했기 때문에 자신의 저작 저작 시야사트나마에 “여성은 절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은 바 있었는데, 알가잘리 역시 니잠에게 지원사격을 하기 위해 “여성은 집 안에서 집안일이나 하며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을 남겨서 서구 학자들이나 이슬람 온건파들에게 더 욕을 먹기도 했다.[9] 알가잘리가 수피라고 싫어하는 것인데, 정작 이븐 타이미야와 (그리고 그의 직계 제자 이븐 알 카임 알 자우지야도) 역시 이런저런 수피 교단과 친분이 두터웠다. 이븐 타이미야가 주로 비판한 것은 이븐 알 아라비같은 급진 성향의 수피였다.[10] 이슬람 역사, 신학하곤 눈곱만큼도 관계 없는 천체물리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