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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4:07:24

인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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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
2.1. 종교2.2. 물리학
3. 창작물에서4. 여담5. 관련 문서

1. 개요

/ Causality[1]

모든 일이나 행동이 반드시 모종의 이유나 원인, 즉 '인과(因果)'가 있기에 발생하며 그런만큼 아무런 인과 없이 생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불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이다.

위키백과에서 '모든 일은 원인이 있으며 원인 없이는 어떠한 현상(결과)도 일어나지 않으며 이 원인의 결과의 규칙적인 관계를 인과관계 또는 인과성이고 어떤 원인에선 어떤 결과가 필연적으로, 즉 법칙에 따라 일어날 때 이 법칙을 인과율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고 양상[2], 가능성[3], 필연성[4], 확실성[5], 개연성[6], 우연[7], 확률[8]와 연관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자연세계를 합리적으로 가정하는데 이는 '내부 원인에 의해 발생한 인과관계로 물리적 우주의 모든 현상이 발생하고, 그 결과로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수학적 표현이 바로 자연법칙이다. 흔히 말하는 결정론은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우주 만물은 절대적으로 인과법에 의존하고 지배된다'는 견해에 해당된다.

<칸트의 인과론에 대한 연구 1 - 제2유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선 제2유추의 원칙은 '모든 변화들은 원인과 결과의 결합법칙에 따라 발생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설명

인과율 자체는 불교에 근간을 둔 용어지만 단순하게 보면 '어떤 현상이 아무런 이유없이 벌어지진 않는다.'라는 것 자체는 역사상 세계적으로 인식되어왔던 개념이다. 당장 한국에만 해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의 뜻이 인과율과 일맥상통하며 기회비용도 개념적인 부분에서 어느정도 겹치며 물리학은 아예 모든 개념과 식이 인과율에 기반하고 있다. 빛보다 빠를 수 있는 phase velocity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거나, 2가지 해가 나왔을 때 인과율에 위배되는 해 하나를 (물리적 직관을 통해) 버린다거나 하는 예는 많다. 확률론적 양자역학의 등장 이후로 그 입지가 좀 애매해졌긴 하지만 양자역학도 단순히 보자면 물리학에 비해 좀더 확률적인 관점에 중점을 뒀을뿐인지라 인과율 자체를 완전히 떨쳐낸건 아니다.

데이비드 흄의 인과율 비판은 인-과의 실체성 부정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제1원인론이란 인과율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어 생겼을 때, 최초로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담론이다. 종교적으로는 그것이 이라고 정의내리곤 한다.

불교에서는 세계의 모든 것들의 근본이치 중 하나이자[9] '세계의 모든 것들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는' 인과율의 지배가 있다고 보고 있고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과율(=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볼 수 있고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원인과 결과를 합쳐 '인과'라 부르며 이 둘(원인과 결과)를 별개로 보지 않고 그 사이에 존재할 조건들 역시 배제하지 않는다.[10] 원인은 연을 사이에 두고 결과를 맺고, 모든 결과는 다시 원인과 연결된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불교는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모든 원인과 결과를 유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이 두 시점을 합쳐서 보면 이 세계에 우연은 존재치 않고 결과가 곧 원인이고 원인이 곧 결과에 해당된다. 이러한 인과율의 적용을 현재의 삶에 그치지 않고 내세로까지 확장해 이번 삶에서 악업을 행하면 다음 생에 좋지 못한 존재로 태어난다고 설파한다.

인과의 원리는 단순히 세계에 적용되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적용하면 스스로의 존재 역시 끊임없는 변화하는 존재이고 우연히 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11] 삼계(三界)에서 말하는 색계와 무색게 속에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고 바로 여기에 관련된 법칙이 연기라 보았고 그러므로 불교에선 선악의 행위가 주는 결과를 크게 무시하지 않으며 곧 이를 통해 인과응보의 정당성을 설명한다.[12]

고대 인도에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을 이야기했다. 인도 철학 체계를 보면, 인생의 고통과 한계들로부터 해탈을 얻고자 하며 인과율도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되었다. 인도에서는 인간에게 여려 근본적인 물음, 그 중에서 인과율과 관련해 '인과율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을 던졌다. 이러한 물음은 얼핏 보면 서양의 근본적인 물음과 같아 보이나 고대 인도인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목적은 서양처럼 세계를 향한 호기심 충족이 아닌 속박을 극복하는 수단을 발견하고자 함이었다.[13]

근본적으로 인도 내에선 강이론과 약이론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인과론이 존재한다. 강인과론은 바로 결과라는 것이 이미 원인 안에 존재하며 그 포함관계가 외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고[14] 약이론은 결과는 원인과 별개로 보는 것으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결과가 그 출현 이전에 이미 원인 속에 별개의 존재로 있다고 보는 것으로 이들은 어떤 새로운 실재는 생성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5] 샹키아-요가와 베단타 철학자들은 이런 약이론을 받아들여 어떻게 세계 전체가 단순히 시원적인 프라크리티의 전변(샹키야)이거나 브라흐만의 화현(베단타)인가를 설명할 수 있었다. 강이론과 약이론은 변화에 책임이 있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인도 철학의 시도였다.

서양에서는 세계 전체에 걸쳐 가장 일반적인 관계로 예전부터 그 이해를 둘러싸고 서양에서는 유물론관념론 사이의 세계관상의 대립이 벌어지게 되었고 변증법적 이해와 형이상학적 이해의 대립도 나타났다. 서양 철학에서 이것의 논의는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 철학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문제 설정은 주체와 객체의 이분에서 비롯되었고 현대의 철학계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남아 있다.

유물론에서는 현상이 인간의 의지나 의식과 독립되어 객관적인 인과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인과적 연관은 보편적 성격을 갖고 어떠한 최종적인 결과를 갖지 않는 결과는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어떠한 최초의 원인을 지니지 않는 원인은 있을 수 없는 거와도 같다. 즉 어떠한 현상이라도 그 현상의 원인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과 별개로 그 자체로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유물론적 인과율을 보았을 때 어떤 하나가 원인으로 다른 하나를 결과로 낳기 위해서는 원인이 결과보다 앞서야 하고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켜야 하며 마지막으로 원인이 결과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킬 것 등의 특성이 있어야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인과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객관적 실재가 갖는 법칙성으로 법칙은 대상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양식이며 안정적이고 반복적이고 본질적이며 필연적인 관계들을 의미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의 인과관계에서의 원인은 어떤 법칙적 지배관계 속의 원인만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관계에 있어서 원인은 결과를 조건 지우는 전제, 토대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양적인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의 원인을 뜻한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 인과적, 법칙적 인식의 객관성은 실험(일반적으로는 실천)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다. 결국 원인-결과의 관계는 객관적인 세계 속에 다양한 사물의 복잡한 상호 관련의 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반드시 고정되어 있는 관계가 아니며 원인과 결과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원인-결과의 관계는 인간의 의식과는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성립하고 있으며 인간의 실천으로 검증된다고 보았다. 철학사적으로 보면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 등 원자론자들이 맨 먼저 객관적 인과관계를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관념론에서는 원인-결과의 관계를 다분히 주관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개개인의 해석을 통한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으로부터 인과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모든 현상의 인과적 제약을 부정한다. 인간이 주체의 틀로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으로 관념론자들은 과학에 있어서 현상의 발생 원인이나 현상이 원인을 갖고 있는 것와 같은 문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상들 간의 의존관계에만 집중하며 인과성을 함수적인 성질로 이해한다. 현대의 많은 관념론 철학자들은 원인이라는 말을 철학 용어에서 제외하며 인과율을 함수적 법칙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현상 A와 B가 의존관계에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결과를 원인의 함수로 보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선 유물론의 관점에서 본 인과율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당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자연물의 운동과 변화를 받아들여 자연발생적으로 변증법적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무수한 자연물로 이루어진 세계에 있어서 근원적인 물질을 찾고자 했다. 즉 이들은 근원적인 물질들의 변화에 따라 만물이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자연에 있어서의 인과관계의 법칙을 받아들였고, 모든 사물의 근원을 '원자'로 해석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고 원자론적인 유물론으로 이행했다.

고전역학적 개념에서 라플라스적 혹은 기계론적 형태의 결정론은 거시적 대상의 외적, 역학적 혹은 기계적인 운동의 연구 위에 생겨났다. 라플라스가 이야기한 그 유명한 라플라스의 악마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느냐 아니냐를 이야기할 때 가상의 존재로 상정되는 초월적 존재다. 굳이 정의하자면 임의의 한순간에 우주 전체의 상태를 완전히 알 수 있다면 우주의 과거에서 시작해 미래까지를 알 수 있다는 논리로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개념은 양자역학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뉴턴의 물리학을 위시한 고전 역학에서 연역적인 궁극개념 즉 인과율의 종착점과 같은 의미의 개념이었다.

경험론자였던 존 로크는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알 때 우리가 대상의 분명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보았다. 이는 모든 관념은 대상에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거와 같다.[16] 그렇기에 로크는 관념을 바르게 갖는 것, 즉 대상을 정확히 아는 것에 있어 원인과 결과의 관계의 이해를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며 최고의 원인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는 생각하기 위해 우리가 기본적으로 타당하고 인정해야 할 두 가지 원리를 모순율과 충족이유율이라고 보았다. 모순율은 어떤 주장이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 이는 거짓이고 이에 반대되면 참이라는 주장이다. 충족이유율은 어떤 사실도 참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마땅한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충족이유율의 원리는 모든 존재는 그것이 존재할 충분한 이유와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단순히 논리 뿐만이 아닌 실제적인 영역으로 적용되어 모든 것들이 마땅히 살아 있는 원인을 가진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세계는 유한한 존재들의 집합체이기에 수많은 어떤 것들의 존재는 세계가 존재함을 증명하고 세계의 그 어떠한 것도 없는 것에서 스스로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데 이러한 이유를 들어 라이프니츠는 현재 존재하는 세계는 그 이전에 순간에 존재했던 세계의 결과로써 존재하며 현존하는 세계는 앞으로 오게 될 세계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한 술 더 떠서 세계의 존재를 만족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인의 원인이 되는 최종적 존재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 존재를 신으로 보았다.

데이비드 흄 이전의 스콜라 철학자 혹은 데카르트는 인과관계를 필연적인 것을 보았다. 이것은 기계론적 인과율의 담습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흄은 공간적으로 인접하며 시간적으로 연속하는 두 대상의 인상이 반복될 때, 우리가 이행의 인상을 받으며 이 이행의 인상에 대응하는 관념이 바로 인과 관념이다. 이 인상의 반복 속에서 두 대상을 함께 연상하는 습관이 생겨나고 그 습관에 따라 미래에도 그러리라는 기대가 생기며 이 기대 속에서 주관적 신념이 생겨나고 이 신념을 토대로 인간은 인과 관념의 필연성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 관념이 필연적이지 않는 개념적 관념이라고 주장했다.[17] 흄은 인과성이라는 것은 감각과 관념 같은 기계적 혹은 습관적 결합에 불과하고 이를 근거로 한 예건이 결합을 기대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흄의 이러한 사상은 인과 개념에 있어서의 필연성 개념의 문제를 부각시키고 이 필연성 개념의 분석을 통해 인과개념을 정의하려 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며 인과성 개념이 비정형적이라는 결론은 곧 그것의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 또한 의의가 있다.

흄에게 있어 경험은 곧 지각이고 원인-결과의 관계는 경험으로부터 직접 도출해낼 수는 없고, 그것은 같은 방식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에 의해 유사한 원인에서 유사한 결과를 기대하는 순간 인간 심리의 소산이며 주관적인 상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흄의 자연에 관한 인과적 지식은 필연적이며 보편타당한 지식, 즉 절대적인 지식이 되지 못한다.[18]

이마누엘 칸트는 앞서 서술한 흄의 '인과적 연관의 존재가 감각의 관습적 결합'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이와 같은 위기를 해소했다. 칸트는 인과적 연관의 존재가 성격상 필연적이나 그렇다 해서 그것이 객관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19] 인과성은 인간의 감각 속의 선험적이고 생득적인 범주와 같고 인과율은 이성의 대상으로 선천적인 만든 거와도 같다. 인과율이 확실하게 된 이유는 인과율이 이성적 시스템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기에 인간의 사고방식이 인과율에 따르는 이유와도 같고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은 자연현상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한 보편적 방식이며 여기서 인과법칙이 선천적이라 함은 인과율은 경험을 초월하며 경험에 앞선 것으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인간에게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법칙인 것와 같다.

근대에 들어와 자연법칙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갈릴레이와 캐플러는 이 인과율의 개념을 다시 문제 삼았다.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고전역학에 영향을 받아 정해진 인과성을 자연과 사회에 상정했고 기계적 결정론을 이야기했는데 이들은 우주에 유일한 인과 연쇄만이 존재하며, 사회현상도 그러한 역학적 원인에 따른 결과라고 본 것이다. 그러한 시각 속에서 모든 현상은 본질의 구별 없이 인과 연쇄에만 연결되어 모든 현상이 필연적이고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봤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변증법적 결정론에서는 각각의 구체적인 원인-결과의 관계는 결코 독립적으로 완결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쇄되어 있고 객관적 세계의 여려 가지 사물, 현상의 보편적이고 복잡한 상호 관련의 하나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본다. 인과성은 이러한 상호 관련의 한 측면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며 이 때만에 이러한 입장에서는 객관적 우연이 인정된다. 기계론적 결정론의 인과만이 숙명론에 빠지게 되는 것에 비해 여기에서는 개인의 주체적 행동이 실천하는 역할을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는 의의가 존재한다.

19세기까지의 고전 물리학에 의하면 모든 자연현상은 기계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었으나[20] 양자론적 사고, 즉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인과법칙에 의의가 제기되었다. 양자역학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입자의 위치 및 속도(운동량)과 시간, 공간적 기술이 불가능한 단계에 직면했다. 특히 미시적 세계에 관해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흔히 알고 있던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어 확률의 개념이 중시되었고 이를 통해 이때까지 보편타당하다고 보았던 인과율의 개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21]

어떤 상태(원인)에서 다른 상태(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의 법칙성을 말한다. 동양에선 '원인 때문에 결과가 발생한다'는 일종의 동기론적 관점에서 부각되었다.

2.1. 종교

종교가 창조된 목적에는 인과율을 설명하기 위함도 크다. "죄를 지으면 사후에 벌을 받는다"와 같은 신앙 역시 인과율에 따른 것이다. 한편, 많은 종교에서 이란 존재는 인과율을 따르지 않는다. 신은 그 자체가 이유이고, 신이 생겨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의 신은 인격을 가졌기에 악인의 행동을 보면 인간처럼 분노하지만 동시에 악인에 대해 오랜 집행유예 기간을 가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현세에서 인과율적 존재, 즉 신을 확인함으로써 악인 스스로가 죄를 뉘우쳐 다른 이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신에게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예수와 같이 못박힌 강도의 예).

반대로 사탄, 즉 악마는 현세의 악인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결국 끝까지 뉘우치지 않도록 유혹함으로써 (여기서 악마 스스로가 악인의 선택 자체를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권속 즉 자신을 섬기는 것을 택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한다.

2.2. 물리학

물리학에서도 인과율(causality)을 쓴다.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인과율은 보통 말하는 그 인과율보다 좀 더 축소된 의미로 쓴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사건이라도 과거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긴 한데 현대 물리학에 이르러 이야기가 좀 복잡해졌다. 소위 국소성(locality)이라는 개념이 대두됐는데, 정의를 쓰자면 주어진 시간 동안 빛보다 빠르게 가지 못하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두 지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 시간 동안 물리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표기대로 하자면, 4차원 시공간의 어떤 두 점 x,yx, y에 대해 만약 (xy)2<0(x - y)^2 < 0이라면[22] 각 두 점에서 생긴 사건들은 서로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좀 더 시각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는 광원뿔 바깥에 있는 점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어떤 거라도 주어진 점에서 일어난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보통 알려진 인과율이라는 단어와 별로 상관 없어 보이는 이 개념이 인과율과 깊은 관련을 갖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만약 별개가 아니라고 가정하면 적당한 관성 좌표계를 선택하여 미래에 벌어진 사건이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상식에 어긋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인과율이 깨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로부터 소위 타임 패러독스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니, 그 전에 원인과 결과 관계를 따지는 것을 중시하는 과학에서 인과율의 위배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 그 중에서도 양자장론에서는 국소성과 인과율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주어진 이론이 타당한가아니면 불쏘시개인가를 판별하는 도구로 쓰인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폴 디랙의 방식 대로 전자를 설명하는 방식[23]을 안 쓰고 양자장론적 방법으로 기술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자세한 건 양자장론 참고. 사족으로, 잘 알려진 스핀-통계 정리와 CPT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조건 중 하나이다. 또한 EPR 역설의 핵심에 쓰이는 개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시공간을 통과하면 과거로 갈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현대 물리학의 틀을 부정하는 것이다. 상대성이론보다 먼저 있는 것이 대전제이자 금과옥조인 인과율이기 때문. 물론 그런 상상이 불가능한 건 결코 아니라서 여러 과학자나 과학도들이 그런 소재의 SF 소설을 썼다.

인간에게 알려진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는 공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블랙홀사건의 지평선 내부이다. 사건의 지평선 내부는 외부에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는데, 물리학적인 정보가 오갈수 없다는 건 사건의 지평선 내부가 외부 공간과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는 독립적인 공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3. 창작물에서

인과율에 영향을 줘서 과거나 미래가 바뀌었다는 반전이 있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대체역사물부터 타임 패러독스물까지 다양한 장르가 존재한다.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4. 여담

원인이 결과에 얼마나 관련있는지에 대한 비율(比率)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령 "네가 강아지에게 간식만 안줬어도 지각은 아마 하지 않았을 거야. 물론 우리가 조금 늦게 나온 것도 있긴 하지만 강아지 간식 준 것의 인과율이 70%정도라고 나는 생각해!" 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때의 '율'은 원인이 결과에 어느정도의 영향을 끼쳤냐(%/)가 아닌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위의 내용처럼 원인이 있으면 결과의 법칙으로 이해해야 한다.

5. 관련 문서



[1] 이 단어는 '인과율'과 같은 법칙 외에도 '인과관계', '인과성'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2] 사물이 존재하는 그 양식을 존재의 확실함의 정도에서 본 분류. 그 존재가 있음직한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어떠한 상황에도 반드시 존재하는가 하는 점으로 분류된다. 판단을 말할 때에는 개연적, 실연적, 필연적으로 나뉜다.[3] 있을 수 있는 것. 일어날 수 있는 일. 형식적 가능성과 실재적 가능성이 존재한다. 전자인 형식적 가능성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을 후자인 실재적 가능성은 일정한 조건이나, 때로는 인간의 실천에 따라 현실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가능성이라고 말할 때는 항상 그것이 현실화되는 조건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4]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애매하지 않고 반드시 일어나는 것. 필연성의 객관성을 부정하거나 또한 일의 존재 결정적인 것, 우연성과 기계적으로 대립시키거나 하는 사고방식도 있으나 필연성은 사물의 본성에 근거를 둔 객관적인 것이고 우연한 일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 밖에 논리적인 필연성도 있다.[5] 어떤 일이 의심을 품을 여지도 없는 필연성을 지니는 것. 또한 그것에 관해서 갖는 확신. 객관적인 필연성이 주관 가운데에 반영될 때 확실성이라고 부른다.[6]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아직 인식되지 못한 경우나 여려 조건이 얽혀 있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일어나지 않는가는 우연적이라 할 수 있다. 개연성이란 이때의 있을 듯함을 말하는 것, 즉 가능성과 우연성이 서로 얽힌 것이 개연성이다. 이를 수량적으로 표현한 것이 확률로 논리학에서 개연성의 상대어로 필연성이라는 말이 쓰인다. 흔히 귀납주리적 결론의 성격은 개연적이라 하고 연역추리적 결론의 성격은 필연적인가를 말한다. 한편 문학의 영역 안에서 개연성의 상대어는 필연성이 아니라 전기성이다. 흔히 고대소설의 결점으로 불리는 것이 전기성으로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실을 기술할 때 사용된다.[7] 필연에 대립되는 용어로 마치 원인 없이 멋대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나 무인원은 아니다. 필연성과 우연성을 분리시키면 불가지론이나 숙명론에 빠지게 된다. 필연성을 우연성과 구별하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으로 어떤 당연한 문제에 관하여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연이라 할 현상을 다시 분석하면 거기에서도 또한 필연과 우연을 볼 수 있다. 필연과 우연은 상대적 구별이며, 무엇을 당장의 주요한 문제로 삼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필연성은 항상 우연성을 수반하고 있다. 예시로 인간은 죽는다는 현상은 필연이나 언제 어느 곳에서 사고로 죽는 것은 우연에 해당된다.[8] 수량적으로 나타난 개연성. 어떤 특정한 현상이 일어날지 혹은 일어나지 않을지를 확실히 알 수 없을 때 그 현상을 우연 사상이고 이 우연 사상이 일어난다고 예상되는 비율의 확률이다.[9] 나머지는 인연과 상의 상관성. 인연은 세계만물의 변화는 인과 연, 즉 원인과 조건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예시로 새싹이 트는 데에는 씨앗이라는 직접적 원인뿐 아니라 적당한 온도와 수분, 햇빛 등의 간접적 조건들도 똑같이 필요하다와 같다)을 뜻하고 상의상관성은 만물은 인과의 법칙을 따르나 사물은 다시 서로가 의존해서 존립하는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인과, 인연, 상의상관성이라는 이 3가지의 이치들을 잘 관찰하면 만물에는 일정한 법칙이 내재되어 있고 이런 법칙성이 바로 만물의 본질인 것을 알게 된다.[10] 그 사이의 조건들을 불교에선 연이라고 정의한다.[11] 불교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스스로의 변화에 집착하는 것은 근본을 보지 않고 형상에 집착하는 거와 같다. 그러므로 연기론을 통한 이 인과율을 통해 자신이 없다는 무아를 알게 되면 자신만을 아는 집착하는 삶이 아닌 그 이상의 삶을 보게 된다.[12] 한 마디로 불교에서 인과율은 '이 세계 어떠한 것도 단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은 없다'라는 연기의 원리로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다가기가 어렵고 특유의 추상성을 개선치 못한 탓에 불교에서 관련 가르침을 설파할 때 여려가지 어려움이 존재했다고 한다.[13] 고통이 있다는 첫째 진리가 인간의 속박의 상태로 보았고 두번째 진리는 이러한 속박이 바로 연생된 것, 세번째 진리는 무명과 취착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다. 네번재 진리는 팔정도를 따르면 해탈할 수 있다였다.[14] 결과는 새로운 실재이며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던 실재의 인과력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나야야-바이쉐시카와 프리브하카라 미맘사 체계에 의해 주장되었으며 다원론적 형이상학을 유지한다. 인도말로는 사트카리야바다이며 한국말로 번역될때 인증유과론으로 번역되기도 했다.[15] 한국에선 인중무과론으로 번역되었다.[16] 그렇다 해서 모든 관념이 직접적인 경험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17] 이는 언제나 맞아 떨어진다는 기계론적 인과율을 적용시킬 수 없기 때문으로 흄은 이렇게 인과적 연관의 객관성을 부정했다.[18] 다만 이러한 흄의 사상은 스스로를 회의론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히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면 내일의 태양이 다시 뜰 거라는 사실 역시 인과율에 의해 확신되지 못하는 것이 되고 이러한 식으로 과학적 사실들이 모두 회의론적 시각에 내몰리게 되었다.[19] 이는 칸트식 구성주의로 연결된다.[20]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인과율 역시 마찬가지로 나름의 절대성을 갖고 있었다[21]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인정되었고 원자의 운동은 확률적으로 움직이기에 라플라스의 악마 조차 미래를 완전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게 되었다.[22] 여기서 메트릭은 (1,1,1,1)(1, -1, -1, -1)로 잡았다. 4차원 시공간의 기하에서는 '서로 다른 두 점의 거리가' 0이 되기도, 음수가 되기도 한다.[23]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썼던 것처럼 파동함수를 상태와 (거의) 동일시하여 기술하는 방식[24] 광속을 넘는 소립자를 이용한 명중 대상을 존재하는 시간 축까지 거슬러 올라가 없애버리는 인과율 말소 병기 '초고속 시간 역행 소멸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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