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91919><colcolor=#fff> 아사카와 다쿠미 [ruby(浅川巧, ruby=あさかわ たくみ)] Takumi Asakawa | |
출생 | <colbgcolor=#fff,#191919><colcolor=#191919,#fff>1891년 1월 15일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 |
사망 | 1931년 4월 2일[1] (향년 40세) |
일제강점기 조선 | |
직업 | 임업기사, 도예 연구가 |
가족 |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2] |
주요 업적 | 잣나무 종자의 노천매장 발아촉진법 개발(1924) 조선의 소반(朝鮮の膳) 저술(1929)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 저술(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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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도예학자.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한파 인사였으며 후세 다쓰지와 더불어 조선에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으로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2. 출생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으로 오기 전까지는 야마나시에서 소학교와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아키타현의 대관 영림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경성부 남대문공립심상소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부임하고 있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3]의 권유로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의 임업기사로 일하게 되었다.3. 생애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고안했다. 그는 이를 활용하여 당시 2년이 지나야만 양묘가 가능했던 조선의 소나무들의 양묘 기간을 1년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4] 경기도 광릉수목원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에 있는 1892년생 소나무(盤松)도 1922년 홍파초등학교에 있었던 것을 그가 옮겨 심은 것이다.다쿠미의 주 업무는 양묘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자연스레 조선 사람들과 조선 문물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5] 그러던 가운데 그는 형 노리다카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깊이 공감하고 함께 도자기를 찾아 조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들에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했다. 그는 '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한국에는 한 권으로 묶어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 1996)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조선의 소반에서 그는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미를 발휘하므로 사용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히 봉사하여 세월과 함께 아미(雅美)를 더해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대표라고 칭할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 책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916년 8월 그의 생애에서 큰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찾아왔는데,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만난 것이다.[6] 아사카와 다쿠미의 형 노리다카가 소개하여 야나기와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야나기는 직감적으로 다쿠미가 수집해 놓은 조선 민예품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공예에 눈을 떴다. 결과적으로 다쿠미는 야나기가 공예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해 준 장본인이 된 셈이고, 이후 야나기가 조선미술품을 수집하고 연구함에 있어 최고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아사카와가 경성에 거점을 두고 조선 민예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야나기에게 전수하면 야나기는 일본에서 조선 민예의 이론을 정립하고 전파하는 노릇을 했다. 조선을 통해 민예의 미를 발견한 야나기는 이후 일본 민예로 그 영역을 넓혔다. 조선민족미술관이란 곳을 열기도 했는데 장소 확보와 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야나기가 맡았고 전시품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등의 실무는 아사카와가 도맡았다.[7]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해방 이후 수집품들을 처리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많은 일본 학자들은 한국의 불안한 정세와 미성숙한 학문성적을 신용하지 못하겠다면서 대부분 연구품들을 일본으로 가져갔다.[8] 그러나 이러한 학자들과는 다르게 아사카와 타쿠미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자신들이 수집한 물품 3,000여점을 전부 한국 정부에게 기증하였고 이렇게 받은 것들은 한국 연구가들에게 소중한 연구자료가 되었다.
4. 죽음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서울 망우리 묘지에 묻힌 그의 묘비명
서울 망우리 묘지에 묻힌 그의 묘비명
아사카와 다쿠미는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가 과로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남긴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자신이 살던 경기도 이문리(현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묻혔다가 몇 년 후 망우리공원[9]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망우리 공원에 있는 유일한 일본식 무덤인지라 눈에 쉽게 띈다. 그가 모은 항아리를 본떠 만든 탑이 그의 무덤 앞을 지키는데 산림청에서 무덤을 주기적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5. 평가
당시 한국에서 소반이나 도자기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이었지, 예술품으로 대접받으리라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일본인들 중에도 조선 도자기는 예술품이기에 앞서 사치품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사카와 타쿠미는 그러한 사회적인 시류 속에서도 한국 공예품들을 잘 정리하여 후에 한국 공예 연구를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당시 일본의 많은 연구가들은 조선 문화에 대해 중국 문화의 아류라고 평가절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 문화만의 독창성을 찾아 연구하면서 후세의 연구가들에게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었다.
피곤으로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를 내기 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으로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당대 현실에서 그는 일반적인 일본인들에겐 결코 좋게 평가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인격과 평소 생활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던 지식인들이나 총독부 고위 관료 중 극히 일부는 그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존경했으며 물론 당대 조선인들에겐 거의 숭배에 가깝게 존경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일본인은 그를 대단히 이상한 인물로 여기면서 싫어했다. 일종의 조선 도자기 혹은 조선 소반 오타쿠쯤으로 취급받았다고 보면 된다.
6. 기타
조선 공예품을 사랑함에 그치지 않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도 사랑했던 사람이다. 1914년에 24세로 조선에 부임했을 때 일기에서 '조선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기도 하였고 '내가 조선에 있는 것이 언젠가는 무슨 일에든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사는 한 한국인과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써야겠다'고 결심하여 조선인 마을 온돌방에서 지내면서 바지저고리 차림과 망건을 쓰고 외출했는데 일제의 무단통치가 절정이었을 때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 개인적인 인품도 좋아서 많지 않은 월급으로도 절반을 조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적지 않은 조선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어 졸업시켰다. 이 때문에 그가 죽자 많은 조선인들이 슬퍼하면서 호곡하고 상여를 매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네이버 캐스트: KBS 천상의 컬렉션, 아사카와 다쿠미 - 조선의 소반 구족반)아사카와는 당시 한국 지식인들과도 면식이 있어 1920년대 문예잡지인 ‘폐허[10]’ 활동인들과도 교류하였다.
그가 남긴 일기에서 아사카와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일본에서 보낸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을 당시 동아일보 장덕수 주필에게 넘겨 게재한 적도 있다고 한다.
7. 영화화
일본 핑크영화계 쪽에서 유명한 다카하시 반메이가 2012년 영화로 제작하였다.
줄거리가 전반적으로 약간 루즈하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으나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하다.
8. 관련 문서
[1]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중에 순직[2] 생몰: 1884년 ~ 1964년. 일본의 조각가로 동생 다쿠미와 마찬가지로 그도 조선의 도자기를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1906년 야마나시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1924년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그가 모았던 소장품은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고향인 야마나시현에 형제를 기리는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기념관이 있다.[3] 형인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도 나중에 일본에서 '조선 도자의 신'이라고 불리며 일본 내 조선 도예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하나가 된다.[4] 조재명 전 임업연구원장은 한국 인공림 37%가 다쿠미 선생이 공을 들인 나무라고 했다. #[5] 실제로 그는 당시 조선어를 아주 능숙하게 했다.[6] 해군 장성의 아들로 태어난 야나기는 도쿄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으로서 일본 문예운동의 중심 같은 격의 미술사학자였다. 부친의 후배인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힘을 활용해 조선민족박물관을 설립하고 일본에서 조선의 민예를 이론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으며 총독부 건물 건립 당시 광화문 철거를 반대해 이전시키는 선에서 끝나도록 하기도 했다. 이외에 한국의 문화를 한의 정서로 규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시대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점도 있으나 분명 긍정적인 업적을 남겼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7] 조선민족미술관은 광복 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8] 이 때문에 한일협약에서 문화재반환 문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9] 망우리 공원 묘지는 방정환, 한용운, 이중섭 등 한국 위인들이 많이 묻혔기로 유명하다. 망우리공원은 이문동에서 차로 20분 남짓 거리에 있을 정도로 지척에 있다.[10] 염상섭, 이광수, 나혜석 등 쟁쟁했던 작가, 예술가들이 있었던 그 잡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