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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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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보3. 에피소드

1. 개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연보

년도 사건
<colbgcolor=#fff,#191919> 1788년 <colbgcolor=#fff,#191919> 2월 22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로 단치히가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자 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1797년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했다. 아버지가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친구 집에 쇼펜하우어를 맡겼고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년 간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다. 훗날 쇼펜하우어는 이 시기가 매우 행복했다고 추억한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프랑스어를 확실히 익히길 원했고 결과에 만족스러워했다.
1799년 프랑스에서 돌아와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4년 간 공부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1800년 아버지와 함께 하노버, 칼스바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했다.
1803년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은 상인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신부 랭카스터의 집에서 머물며 영어를 익혔다.
1804년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다. 쇼펜하우어는 여행 도중에 사색하며 많은 일기를 썼는데 진지한 고민이 많았다. 단치히에서 상인 실습을 시작했으나 무관심했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문학, 수학, 역사 등을 독학했다.
1805년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자살한 걸로 추정됨.
1806년 아버지 사망 후, 가족이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만 함부르크에 남아서 상인 실습을 지속했다. 쇼펜하우어는 몰래 근무지를 이탈하여 골상학으로 유명한 프란츠 요제프 갈의 공개강연을 들으러 가기도 했고 아버지의 희망대로 상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1807년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한 후에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라틴어그리스어를 엄청난 열정으로 학습했다. 고전어를 가르친 교사들은 쇼펜하우어가 미래에 뛰어난 고전학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쇼펜하우어는 1년도 못가 김나지움을 자퇴했다.
1808년 쇼펜하우어는 에어푸르트를 방문했다. 마침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국제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어느 극장에서 나폴레옹이 주최한 연극들이 공연되었는데 쇼펜하우어는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는 나폴레옹에게 욕설을 해대더니 연극이 끝난 후에는 나폴레옹에게 극찬을 해대느라 호들갑떠는 여성관객들(지위 높은 귀족여성들)을 쇼펜하우어는 신랄하게 비난했다.
1809년 괴팅겐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함.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를 두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언어학, 법학, 역사, 비교해부학, 생리학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여해서 공부함. 집에 돌아와서도 사색하며 꼼꼼히 공부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학교의 몇몇 천박한 교수들의 강의보다도 이미 죽고없는 과거의 위인들이 남긴 작품들이 더 가치있을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강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과 논평을 많이 썼으며 몇몇 교수들의 의견을 비판하고 논리적으로 박살내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습득한 당대의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810년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의 강의를 들었다. 슐체에게 특히 플라톤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스승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침.
1811년 어머니가 당시 독일 문학계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설득은커녕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감명받아 자상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 대학교로 전학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생리학, 시학, 어류학, 식물학, 조류학 등 여러 강의를 들음.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당대의 유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일기에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특히 피히테에 대해서는 "대중 앞에서 웅변을 토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심오한 사상가인 척하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했다. 반면에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 잘 통한 일도 있었는데 바로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의 강의였다. 볼프가 주도하는 고대 그리스 역사와 철학 강의에 쇼펜하우어는 존경심을 표했다.
1812년 플라톤, 임마누엘 칸트 등 여러 사상가를 본격적으로 탐구함.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의 영국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지만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1813년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연합군과 프랑스 제1제국 대육군의 전쟁이 재발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서 루돌슈타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이 논문을 예나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증정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고 괴테는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괴테는 가끔 쇼펜하우어를 자기 집에 초대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1814년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했다.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이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나 편지교류는 가끔했다.
1816년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실험을 토대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괴테는 제자에게 비판받은 이 일을 베를린의 친구 슐츠에게 편지로 알렸고 약간 언짢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다.
1818년 일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자신의 책이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던 쇼펜하우어는 1년 동안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자신의 책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동시대 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느리(오틸리에)와 친분이 있던 자기 여동생의 편지를 통해 괴테가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았다. 책 출판을 기념삼아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1819년 봄에는 나폴리를 방문했다. 나폴리에서는 영국 청년들과 교류했다. 쇼펜하우어는 영국을 평생 동안 동경했으며 영국인들조차 쇼펜하우어가 영국인인 줄 알 정도로 완벽한 영어발음을 구사했다. 어머니가 파산위기에 처하자 속히 귀국하여 도와주웠으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낭패를 겪고 말았다.
1819년 베를린 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했다.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다.
1820년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 시범 강의에서 통과함. 당시 50살이었던 노련한 헤겔이 쇼펜하우어와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다. 강의 계획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만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끝남.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꾼, 대중들의 두뇌를 해치는 넌센스 삼류작가, '철저히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자기 책에서 독일 젊은이들과 자기 세대 사람들이 헤겔의 이론을 공부하느라 두뇌를 손상시켰고 인생을 허비했다며 매우 한탄하고 있다. 더군다나 헤겔의 이론은 당대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라는 것을 대학교에서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여겼고 교수들의 파벌 자체를 증오했다.[1]
1822년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환경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서 배우고 기록했다.
1823년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옴. 여러 질병과 청각장애를 겪었는데 가장 울적한 시기를 보냈다. 뮌헨에서 겨울을 보냈다.
1824년 가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덴에서 체류함. 쇼펜하우어는 "멀쩡히 잘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수준이 대등하다고 여기는 인간들과 가급적 사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일기에 쓰며 고독한 심정을 드러냈다. 겨울에 데이비드 흄의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등을 번역할 계획이었으나 도와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악평이 좀 나오기도 했으나 작가 장 파울은 호평했다.
1825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우울한 나날 속에서 스페인어를 열심히 학습해나갔다. 번역가로서 스페인어책을 번역하기도 함. 언어능력만큼은 나날이 좋아졌는데 예전에 익힌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외에 스페인어에도 매우 익숙해졌다.
1831년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833년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함. 유행이 지난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애완견을 데리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고 혼잣말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쇼펜하우어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쯤에 쇼펜하우어는 여동생과 어머니와 편지교류를 했고 작품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1835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세상을 떠난 괴테를 위해 기념비 건립 계획을 세웠다. 쇼펜하우어는 당국에 괴테 기념비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인류를 위해 온몸으로 활동한 정치인들, 군인들, 개혁자들같은 위인들을 기념하려면 전신상으로 해야하지만 머리를 써서 기여한 문학가, 철학자, 과학자들을 기념하려면 흉상을 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완성된 괴테의 전신상 기념비는 매우 볼품없었고 훗날 미술사학자 프란츠는 이 기념비에 대해 '국가적 재앙'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1836년 자연과학이 증명해낸 것과 자신의 학설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진했다.
1837년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 A판(1판)을 B(2판)판보다 중시하여 칸트전집 출판에 개입했다. 칸트전집 출판에 관여한 로젠크란츠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1판 원고를 실어 출판했다.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8년 모친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72살의 나이로 사망함.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9년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함.
1840년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학술원은 '이 시대의 대단한 철학자들'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함. 이후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판정'이라 취급했고 이 판정에 반론하는 글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헤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841년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함.
1842년 여동생 아델레를 20년만에 만남.
1844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이 완성됨. 제1판의 재판과 함께 출판함.
1845년 <소품과 부록(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시작함.
1846년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를 만나 제자로 지냈는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열혈 추종자다. 특히 법조인들이 열혈팬이 되었는데 이들은 <관념론의 잘못된 근거>에 "세계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번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판사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1847년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 번역을 비판하며 가급적 해설서도 참고하지말고 그 나라 언어를 배워서 원서를 볼 것을 강조한다.
1849년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남. 여동생 아델레가 사망함.
1851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소품과 부록>를 수 년간 집필한 끝에 출간함.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고 많이 팔려나갔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1853년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포드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소개하여 최초로 영국에 쇼펜하우어를 알림. 독일의 여성 언론인 린트나가 이를 다시 독일어로 번역하여 베를린의 포스신문에 발표하였다.
1854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겔의 '교수 파벌' 때문에 독일 철학계가 오염되었다고 엄청난 비판을 하며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려는 것은 인생낭비에 불과하니 자신의 사상과 칸트의 사상을 공부하라는 충고를 한다.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40여년 간 독일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기극을 사람들이 눈치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칸트 이후에 등장한 간사한 사기꾼들이 써낸 철학서적들과 한심한 논쟁들을 통해 하나의 진리라도 밝혀졌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하찮은 철학교수라 불렀던 셸링이 사망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겐의 반지'의 헌정본을 보냈다. 쇼펜하우어가 바그너를 알게 됨.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혹평을 받고 냉대받았으나 개의치않고 기뻐했다.
1855년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를 제시함.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함.
1857년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본 대학교와 브레슬라우 대학교에 개설됨.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이 영국, 프랑스에 번역됨. 쇼펜하우어는 이 시절의 심정을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8년에 이 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박람회를 구경했다. 유럽에는 매우 드문 오랑우탄 한 마리가 전시되었다. 자주 찾아가서 관찰했으나 관찰할 기회를 너무 늦게 만났다며 한탄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오랑우탄을 볼 기회를 꼭 잡으라고 촉구했다.
1858년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가 열렸고 신문 기사에도 생일파티 소식이 실렸다. 유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뒤늦게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1859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출간됨.
1860년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폐렴 증상을 겪었고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사망했다.[2]

3. 에피소드

25세의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의 살롱에서 만난 인물 중 괴테에게 가장 매혹되었다. 이들의 만남은 예나의 어느 연회장에서 이루어졌다. 연회에 참석한 여성 몇몇이 쇼펜하우어를 놀려대며 궁시렁대는데도 쇼펜하우어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은 채로 사색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 고상하게 보이는 괴테가 킥킥대는 여성들에게 다가가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여성들의 대답을 들은 괴테는 이렇게 타일렀다. "쇼펜하우어를 그냥 놔둬.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도무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해질 테니까." 괴테는 쇼펜하우어만 자신의 집으로 조용히 불러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를 매우 존경했고 괴테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생각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오랜 세월 동안 과민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6살이던 시절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우는 아들"을 산책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발견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을 집에 버리고 떠났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에 살 때는 잠자다 미미한 잡음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서 권총을 집어들었다. 그 이유는 1848년 3월 혁명 당시 '폭도'[3]들이나 도둑들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수염을 면도해주는 이발사도 전혀 신뢰하지 않았었다. 전염병에 민감하여 결벽증도 있었던 것 같다. 외식하러 갈 때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잔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준비한 잔을 가져가서 사용했다. 자신의 재산 관련 계산서나 수표에도 결코 독일어를 쓰지 않았다. 자신의 지출 내역 관련 기록은 영어로 기록했고 자신의 사업 서류들을 그리스어라틴어로 쓰기도 했다. 자신의 귀중품들을 비밀 장소에 숨겨뒀고 강도를 피하려고 가짜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자신의 채권들을 엉뚱한 문서에 숨기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이런 성향을 인정하고 절망하기도 했고 졸렬한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성향으로 추정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동안 고전 철학과 고전 문학을 집중해서 읽었다. 또 철학ㆍ과학ㆍ문학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읽었다. 이탈리아 작가들 중에는 단테, 아리오스토, 마키아벨리 등도 좋아했지만 특히 페트라르카를 가장 좋아하며 그의 시는 무척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책에 대한 피상적인 해설서나 엉터리 번역서들을 경멸했다.그러면서 쇼펜하우어 본인은 번역 활동을 해서 독자들에게 해외 서적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괴테의 파우스트 구절을 영어로 번역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세르반테스돈키호테스페인어로 읽었고 스페인 작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치만 헤겔 같은 교수들이 영국 사상가들의 책을 제대로 연구도 안하며 엉터리 번역서나 참고하는 사기꾼들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번역을 주로 혐오했던 것은 사실이다.

쇼펜하우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로베르트 호른슈타인이라는 음악가가 1855년에 쇼펜하우어 자택을 방문했다. 이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회상》이라는 책을 남겼다. 호른슈타인은 이 책에서 스승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호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다른 예술가나 예술 분야의 권위자들을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 때였다. 소설가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동네 주민들에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청년 시절부터 입어 온 유행이 지난 외투를 입고 다녔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모습과 쇼펜하우어의 애완견인 푸들 '아트만'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항상 이런 식의 차림으로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며 산책을 했다. 칸트의 성실한 산책 이야기가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듯 애완견과 같이 산책하는 쇼펜하우어의 모습이 마치 인격이 좋은 주인과 충직한 애완견처럼 보여서 유명해졌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웬만하면 평안한 기분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산책을 꼬박꼬박 했다. 쇼펜하우어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닐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걷던 동네 주민들은 가끔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매일 점심밥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다고도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피안》에서 쇼펜하우어와 플루트에 대해서 언급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 사실은 쇼펜하우어가 청년 시절부터 악보를 술술 읽고 모차르트 음악 연구에 몰두한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음악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음악 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인 것이다. 바그너는 베토벤 기념 논문인 '베토벤'에서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문학이나 조형 예술 등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명쾌하게 음악이 다른 예술 분야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이렇게 썼다.…"

덴마크의 사상가 쇠렌 키르케고르의 '절망'이라는 말과 쇼펜하우어의 '고뇌'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키르케고르는 말년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키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일기 속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감격적인 글들이 남아있다. 키르케고르의 《순간》이라는 책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 맹목적인 낙천주의, 근대과학의 오만함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키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공통점이다. 키르케고르는 죽기 2년 전에, 그러니까 1853년 정도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50년대 중반의 일이다. 독일 브레슬라우 대학교의 켈바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자연과학의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쇼펜하우어에 대한 비평과 책들이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쇼펜하우어 책의 일부가 편역되어 떠돌았고 프랑스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적 보다는 통속적이고 명쾌한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는 '소품과 부록'라는 책이 더 인기를 끌었다. 쇼펜하우어의 자택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도 이 시기에 쇼펜하우어를 방문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존경과 칭찬의 편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사람도 꽤 있었다. 1858년에는 쇼펜하우어의 70살 생일 잔치가 열렸고 이 때에 쇼펜하우어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절친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괴테의 며느리였던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책 출판에 대한 축하 편지를 썼다.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여동생과도 친했고 쇼펜하우어가 젊었을 때부터 괴테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를 응원해준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 편지를 받고 오틸리에 괴테에게 감격에 찬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법률고문관으로 재직한 프리드리히 드루그트는 쇼펜하우어의 논문과 저서들에 감격하여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수제자가 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는 쇼펜하우어 사후에 유고를 정리하여 《토론의 법칙》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쇼펜하우어 전집을 출판했다. 사법관이었던 아담 도스라는 사람은 어린 나이인데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와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변호사 빌헬름 그비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격하여, 먼저 찾아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쇼펜하우어와 친해진 사람이었다.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의 유언을 집행했고 쇼펜하우어 집안의 유산을 유언에 따라 잘 처리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평한 화강암을 이용해 묘비를 만들어 줄 것을 생전에 희망했고 묘비에다가 자신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새기지마라고 말했다. 이 묘비는 현재 프랑크푸르트 시립 중앙묘지에 묘비는 잘 안장되어있다.이후에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전기를 최초로 쓰기도 했다. 이 시기에 조각가 엘리자베스 네이가 찾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대리석으로 만들 흉상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 흉상을 보고 쇼펜하우어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 흉상의 진품은 현재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시의 네이미술관에 있다.[4]

어느날 쇼펜하우어는 폐렴 증세가 있었으나 평소대로 일찍 기상하여 쾌활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가정부는 항상 그랬듯이 집안을 환기시키느라 창문을 열어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분쯤 지나서 거실로 들어온 주치의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쇼펜하우어를 발견했다. 1860년 9월 26일 쇼펜하우어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 앞에서 거행된 장례식의 참가인원은 별로 없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모였다. 어느 개신교 목사가 장례식을 주관하며 추도문을 낭독했고 이어서 쇼펜하우어의 절친인 빌헬름 그비너가 준비한 추도문을 낭독했다.
한 세대가 지나도록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함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이방인으로만 여겨지던 이토록 희귀한 고인의 관은 실로 비상한 감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누구도 고인의 혈육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인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살았고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고인의 앞에 있는 무엇이든지 그렇듯 일평생 고독을 감내한 고인을 이토록 뒤늦게나마 위로해줄 수 있기를 삼가 기원합니다. 죽음의 캄캄한 어둠에 파묻혀 외롭게 방치되는 친구나 적을 바라볼 때조차 우리의 눈은 즐길 수 있는 향락거리를 찾기도 하지만, 이윽고 우리의 다른 모든 감정은 '생명의 원천들을 알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소진됩니다. 지식은 고인과 언제나 함께하면서 고인을 장수하도록 도와준 친구였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고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한 고인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껍데기 같은 외면들을 무시했을뿐더러 그러한 자신의 태도가 자신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킬 가능성마저 개의치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심장을 지닌 이 심오한 사상가는 흥겹게 놀다가 돌연히 성난 아이처럼 일평생 쉬지 않고 내달리면서 고독했고 오해받았으되 스스로에겐 진실하기만 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더불어 그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교육마저 충분히 받은 고인의 모험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인은 자신이 누리던 그런 (특히 아버지로부터 받은) 특혜에 언제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유일한 소망은 그런 특혜에 보답하는 것이었고 그런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명을 추구하느라 평생 애썼습니다. 고인은 세상에서 설정했던 목표를 오랫동안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고인의 이마에 씌워진 월계관은 고인의 인생이 황혼에 접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고인에게 수여된 것입니다. 고인의 확고한 신념은 애초부터 고인의 영혼에 뿌리박힌 것이었습니다. 고인은 오랜 세월 동안 남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꿋꿋하게 고결한 길을 걸었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에스드라스(Esdras)에 기록된 "진리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위대하고 우월하다"는 명제를 명심하여 고생하다가 어느덧 백발노인이 된 것입니다.

[1] 토론의 법칙, 최성욱 역 참조. 해설:쇼펜하우어는 "대중을 현혹하는 협잡꾼 헤겔과 그 일당"이라는 식으로 매번 비난했다.[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역, 2015, 연보 참조.[3] 쇼펜하우어는 에드먼드 버크와 유사한 정치적 입장을 지녔고 3월 혁명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던 군인들을 걱정할 정도였다.[4]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07, 권기철 역, 생애 해설 에피소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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