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 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 |||||||||||
초대 사와 노부요시 | 2대 이와쿠라 도모미 |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 5대 이노우에 가오루 | ||||||||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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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 6대 이토 히로부미 | 7대 오쿠마 시게노부 | 8대 아오키 슈조 |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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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 13대 니시 토쿠지로 |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 ||||||||
15대 아오키 슈조 | 16대 가토 다카아키 | 17대 소네 아라스케 | 18대 코무라 주타로 | 19대 가토 다카아키 | ||||||||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 21대 하야시 타다스 |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 23대 코무라 주타로 | 24대 우치다 고사이 | ||||||||
25대 가쓰라 다로 | 26대 가토 다카아키 |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 28대 가토 다카아키 |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 ||||||||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 32대 모토노 이치로 | 33대 고토 신페이 | 34대 우치다 고사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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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 37대 마츠이 케이시로 |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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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 43대 사이토 마코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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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 45대 히로타 고키 | 46대 아리타 하치로 | 47대 하야시 센주로 | 48대 사토 나오타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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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 52대 아리타 하치로 | 53대 아베 노부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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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 55대 아리타 하치로 |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 58대 도고 시게노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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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 60대 타니 마사유키 |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 62대 스즈키 간타로 | 63대 도고 시게노리 | ||||||||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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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 65대 요시다 시게루 | 66대 가타야마 데쓰 | 67·68대 아시다 히토시 |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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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 78대 이시바시 단잔 | 79·80대 기시 노부스케 |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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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89·90대 미키 다케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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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 92·93대 아이치 기이치 | 94대 후쿠다 다케오 |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 97대 키무라 토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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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 99대 고사카 젠타로 |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 103대 오키타 사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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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 105대 소노다 스나오 |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107·108대 아베 신타로 |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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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대 우노 소스케 |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 112대 나카야마 타로 |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 115대 무토 카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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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 117대 가키자와 고지 | 118대 고노 요헤이 |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 121대 오부치 게이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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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 126대 다나카 마키코 |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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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 132·133대 아소 다로 |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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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 140대 에다노 유키오 |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 142대 겐바 고이치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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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 145·146대 고노 다로 |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 150대 기시다 후미오 |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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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 153대 이와야 다케시 | }}}}}}}}}}}} |
시이나 에쓰사부로의 역임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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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87·88대 외무대신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27-34대 중의원 의원 시이나 에쓰사부로 椎名悦三郎 | Shiina Etsusaburo | |
출생 | 1898년 1월 16일 |
이와테현 이사와군 미즈사와정 | |
사망 | 1979년 9월 30일 (향년 81세) |
학력 | 킨조 중학교 (졸업) 제2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학과 / 학사) |
가족 | 차남 시이나 모토오[1], 삼촌 고토 신페이[2] |
정당 | |
의원 선수 | 8 (중) |
의원 대수 | 27, 28, 29, 30, 31, 32, 33, 34 |
지역구 | 舊 이와테 2구 |
악력 | 자유민주당 부총재,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 중의원 의원 (제27-34대 / 舊 이와테현 제2구) 내각관방장관 (제2차 기시 개조 내각) 통상산업대신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사토 1차 개조 내각) 제87-88대 외무대신 (제3차 이케다 개조내각) - (제2차 사토 제2차 개조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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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시이나가에 양자로 입적하기 전 이름은 고토 에츠사부로 (後藤悦三郎)였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일본국 외무대신으로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1898년 이와테현 이사와군에서 고토(後藤)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고토 히로시는 고토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 미즈사와군 촌장직을 역임했고 이와테현 현의원을 10년간 맡았다. 시이나의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유년시절을 꽤 빈곤하게 보내야했고, 당초 에츠사부로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할 계획이였고, 고등소학교 4년차에 상경해 골동품점에 거주하고 일하면서 야학을 다녔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같은 이와테 출신의 선배의 하숙처에서 생활했다.이후 아버지의 소개로 이웃마을 가네가사키정의 대의사 시가 와타리(志賀和多利, 1874~1945)의 서생[3]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후 도쿄 치요다구의 킨죠중학교 편입시험에 합격해 3년간 재적하였고, 졸업 이후 경제 사정이 나아진 이와테현의 본가로 돌아왔다. 그뒤 제2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동시에 만철 초대 총재를 지낸 고토 신페이의 누나의 본가인 시이나가에 양자로 들어가며 이름도 고토 에츠사부로에서 시이나 에츠사부로로 바꾸게 된다.
도쿄 제국대학 재학 중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졸업 이후인 1923년 농상무성[4]에 들어갔고, 1925년에 농상무성이 농림성과 상공성으로 분리된 뒤에는 상공성(현 경제산업성)으로 자리를 옮겨 기시 노부스케 아래에서 만주국 통제 과장, 산업부 광공사장을 지냈다.
1939년 일본으로 귀국한 에츠사부로는 상공성 총무국장 신분으로 당시 군부가 장악하고 있던 기획원에서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전시경제통제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3년 군수성이 신설되자 군수성 총동원 국장과 육군 사정장관, 총동원국장을 역임했고 1945년 종전과 함께 직위에서 물러났다. 1947년 그의 상관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A급 전범 용의자로써 수감되었고, 그 밑에서 일을 했던 에츠사부로는 공직추방 명령을 받게된다. 그 뒤로 고향으로 내려와 모리오카시에 섬유공업 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지만, 극심한 경영난으로 인해 1952년 회사가 도산하고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2.2. 정치 경력
1951년 공직추방이 해제된 시이나는 종전 직후 부터 생각하고 있던 정계 진출 시도를 하게 되고, 1953년 치러진 제26회 중의원 선거에서 이와테현 2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나 전체 6위로 낙선했다. 당초 그는 자유당의 간사장을 지내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를 찾아가 입당 및 지역구 공천을 논의했으나 승낙되지 않자 자유당 선거 대책 위원장이었던 오자와 사에키[5]를 찾아갔으나, 공교롭게도 오자와는 시이나가 출마하려 했던 이와테 2구의 중진 의원이었고, 결국 공천이 거절되자 무소속으로 도전했지만 참패했다.2년 뒤인 1955년, 일본민주당의 간사장이 된 기시 노부스케의 초청으로 일본민주당 후보로 다시 입후보하였고, 기시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당선되었다.
기시 내각에선 경리국장과 내각관방장관을 지냈으며, 이케다 내각에선 자민당 정무 조사회장, 통상산업대신을 거쳐 1964년 외무대신에 올랐다.
2.3. 외무대신 시절
사토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을 지내면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일본측 대표로서 대한민국과 교섭하였고, 1965년 2월 18일, 방한하였다. 한일 협상 자체는 시이나가 정계에 입문 하기 전인 1951년부터 논의되어 왔던 것이고 독도 영유권 문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나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는 양국에서 별 문제삼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하고 있었다.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 협상을 위해 한국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였을때 일본의 과거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발언하며 매스미디어를 통해 한국 여론의 진정에 기여했으나, 사회당 등 야당의 반대와 한국에서의 산발적인 시위가 잇따랐고,[6] 양국의 야당, 신문,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이에 앞서 시이나에 대해 정확한 목적을 설명하지 않고 방한한것에 대해 일본 헌법 73조 위반에 해당한다는 불신임 결의안이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제출되었으나, 귀국 이후 해당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1966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외무대신으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5년 무역 협정과 민간 항공 협정을 협상하였다.
외무대신에서 물러난 1974년, 김대중 납치 사건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다시 험악해지자 그해 9월 시이나는 다나카 총리의 요청에 따라 방한하여 이 문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시이나는 박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사건 재발 방지책, 한국 수사 협력, 조총련의 반한 활동 단속 등을 약속하는 다나카의 서한을 박정희와 대한민국 정부에게 전달했다. 이 회담으로 한일 관계의 악화는 수습되어 한국 내 반일 시위는 종식되었다.
이 외에도 자민당 부총재 시절인 1973년 중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시이나를 정부 특사로 임명해 대만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 파견시켰다.
시이나는 중화민국 민의대표와의 좌담회에서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를 유지한 뒤 중일 정상화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으나, 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오히라 마사요시는 대만과의 관계가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는 시이나의 뜻과 상관 없이 일본-중화민국 조약 파기와 대만-일본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2.4. 자민당 부총재 시절과 시이나 재정
1966년 자민당 총무회장에 오른 시이나는 사토 개조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했고, 1970년 가와시마 쇼지로 부총재가 급사하자 가와시마 휘하의 의원들의 추천을 받아 기존 가와시마파(교우클럽)를 흡수해, 가와시마파가 시이나파로 확장 되면서 세를 불려 나갔다.1972년 4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가 후쿠다 다케오를 누르고 자민당 총재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8월, 시이나는 다나카에 의해 자민당 부총재로 기용되었다.
다나카 내각은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정책의 실패와 금권정치에 대한 비판을 받은 뒤 책임을 지고 1974년 12월 사퇴를 표명하였으며, 다나카 가쿠에이의 후계를 둘러싸고 시이나는 대파벌의 우두머리인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를 배제하고, 당내 중도 파벌에 속한 미키 다케오를 새총재로 선출하였는데, 이를 시이나 재정(椎名裁定) 이라고 한다.
시이나가 미키를 총재를 선임한 이유는 우선 시이나가 당내 개혁론자이기도 했으며, 당시 당내 요직으로 분류되는 간사장, 총무회장, 정조회장을 각각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스스무,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파의 야마나카 사다노리 등 거대 파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와중에 부총재 자리만 소수 파벌인 시이나파의 영수인 시이나 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7]
당 내 쟁쟁한 인사들을 제치고 얼떨결에 자신이 총재로 선출된는 미키는 청천벽력이라고 중얼거렸으며, 언론들도 시이나가 총재직에 관심을 보이려는것 아니나는 것을 문제삼아 일제히 그를 비판했다.
사실 이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다나카는 시이나에게 잠시 당권을 맡기고, 오히라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운뒤 자신의 스캔들 의혹을 풀고 총재직에 복귀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이나는 오히라를 설득하는데 총력을 다했는데 오히라가 뜻을 접지 않고 오히려 기자들에게 시이나가 총재직에 관심을 보인다고 폭로해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시이나는 다나카에게 "지금 국민들이 뿔나있는데 자꾸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라고 다나카를 거의 반협박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다나카가 한발 물러선뒤 자민당 총재인 미키 다케오가 예상대로 총리직에 선출되게 된다.
시이나는 미키 내각에서도 부총재로 있었으나 이후 정치개혁의 속도 및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커진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전 총리 및 여러 정치 인사에 대한 처분을 두고 더 강경하 개혁 드라이브를 걸려던 미키와 갈등을 빚었으며, 1976년 5월에는 다나카파, 후쿠다파등과 함께 미키 퇴진에 공감한다. 이후 미키는 1976년 12월 제34회 중원선에 자민당이 창당 후 처음으로 단독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는 패배를 거두자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시이나는 애초에 미키를 총리로 올리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미키 총리의 사퇴 이후 후쿠다 내각이 들어서면서 부총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5. 은퇴 및 사망
1976년 12월 치러진 34회 중원선은 시이나가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 1978년 1월 16일에 팔순을 맞이했다.1978년 10월, 차기 중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밝혔고, 자신의 지역구를 차남 모토오(1930-2007)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다. 이후 모토오는 중의원 의원으로 4회 당선되고, 참의원 의원으로도 2회 당선되며 2004년까지 정치활동을 한다.
노인성 결핵과 하반신 근위축증으로 인해 1979년 6월부터 입원치료를 받는다. 사망 23일전인 1979년 9월 7일에 중의원이 해산되면서 시이나의 24년 중의원 의원 임기도 막을 내린다. 의회 해산으로 인해 치러질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동년 10월 7일로 일정이 잡했다. 시이나는 의회 해산 23일 이후이자 차기 선거 일주일 전인 1979년 9월 30일, 입원중이던 도쿄 신주쿠구 게이오기주쿠대학 부속병원에서 향년 81세로 사망했다. 중의원 임기는 의회 해산으로 끝날때까지 다 채우면서 새로운 의원이 뽑히기 전이라는 절묘한 시점에 사망했다.[8]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51 - 1955 | 정계 입문 |
| 1955 | 입당 |
| 1955 - 1979 | 합당[9] 정계 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이와테 2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2,823 (4.7%) | 낙선 (6위)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37,947 (13.5%) | 당선 (4위) | 초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40,531 (14.6%) | 재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8,318 (17.2%) | 3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8,568 (20.4%) | 당선 (2위) | 4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8,652 (19.7%) | 5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2,268 (18.1%) | 당선 (3위) | 6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1,556 (202.6%) | 당선 (1위) | 7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9,149 (18.2%) | 당선 (4위) | 8선 |
[1] 1930~2007, 중의원(4선), 참의원(재선) 역임[2] 1857~1929, 체신대신, 내무대신, 외무대신, 내각 철도원 총재직 역임[3] 다른 사람의 집에 하숙해 가사와 잡무를 도우면서 공부나 하적을 하는 젊은이. 주로 일본 근대시절에 성행했다.[4] 現 농림수산성과 경제산업성의 전신인 중앙성청이다.[5] 오자와 이치로의 부친이다.[6] 이 당시 반대시위를 이끌었던 사람 중 한명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7] 시이나는 11월 30일 파벌 회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시이나는 파벌을 초월한 각료 인사를 단행할 것, 총재를 배출한 파벌에서 간사장을 맡지 않을 것(총간분리), 당의 정책 입안 기능을 강화할 것 등의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 다음날 재정문을 발표하면서 "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신께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총재는 청렴할 것은 물론이고 당의 체질 개선과 근대화에 몰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국민은 우리 당이 파벌 항쟁을 끝내기를 기대하고 근대 정당으로 탈피하기 위한 연찬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바라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저는 새로운 총재로 정계의 장로인 미키 다케오 군이 가장 적임자라고 확신하여 이에 천거합니다." 라며 사실상 미키를 지지하였다.[8]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도 2000년 6월 2일 의회 해산과, 동년 6월 25일 차기 중의원 선거의 중간 시점인 6월 19일에 사망했다.[9] 자유당과의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