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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대함대의 3차 잉글랜드 원정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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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대함대의 3차 잉글랜드 원정
Third Spanish Armada
시기
1597년 10월 18일~11월 15일
장소
영국 해협, 콘월, 웨일스
원인
잉글랜드 왕국을 기필코 무너뜨리려는 펠리페 2세의 고집.
교전 세력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제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후안 델 아길라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산타가데아 백작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디에고 브로체로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카를로스 데 아메스키타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에식스 백작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노팅엄 백작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월터 롤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번셔 백작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페르디난도 고지스
병력
함대: 갤리온 44척, 갤리온 상선 16척, 헐크선 52척, 소형 선박 24척
병력: 군인 9,634명, 선원: 4,000명
총합: 함선 140척, 탑승 인원 13,000명~14,000명.
함선 120척, 병사 8,000명.
피해
함선 6척 나포, 22척 침몰 또는 난파, 1,500명 이상 사망. 미미함.
결과
잉글랜드군의 승리.
영향
스페인군의 위축.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97년 10월 18일~11월 15일, 잉글랜드 왕국을 기필코 굴복시키려는 펠리페 2세의 명령으로 거행된 스페인 대함대의 세 번째 잉글랜드 원정. 폭풍으로 인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지난 2차례 원정처럼 실패했다.

2. 배경

1588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이 대실패로 끝난 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해군을 재편했다. 그는 프랑스 서부 해안에 전진 기지를 건설한 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끊임없이 위협하고자 했다. 1589년 스페인 함대 재건을 막으려는 잉글랜드 대함대의 스페인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 스페인 해군은 무사히 재건되었다. 1593년, 스페인군은 브르타뉴의 블라베를 장악하고 그곳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 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해안을 위협했다.

1596년 4월, 스페인 해군이 지리적으로 근접하여 잉글랜드 본토 침공을 쉽게 수행할 수 있는 칼레를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를 따르는 위그노로부터 접수했다. 이 일련의 성공에 고무된 펠리페 2세는 대규모 함대를 끌어모아서 잉글랜드를 침공해 전쟁을 끝내버리려 했다. 잉글랜드에서 스페인으로 망명한 예수회 사제 로버트 퍼슨스는 펠리페 2세에게 엘리자베스 1세가 예상하지 못할 때 잉글랜드를 공격해야 한다며 겨울에 해상 원정을 감행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1588년 스페인 함대의 잉글랜드 원정 실패는 적이 충분히 예상할 때 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봤다. 또한 적군이 알아채는 걸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규모의 함대를 동원하라고 권고했다.

여러 인사는 스코틀랜드 왕국, 켄트주, 밀포드 헤이븐, 와이트 섬을 상륙 거점으로 제안했지만, 왕의 인사 상당수는 잉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 현지 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아일랜드에 스페인군을 상륙한 뒤 그들과 연합하여 잉글랜드군을 쳐부수자고 제안했다. 아일랜드 반란군 지도자인 타이론 백작 휴 오닐과 휴 로 오도넬은 일찍이 펠리페 2세에게 가신이 될 테니 지원해달라고 호소했고, 펠리페 2세의 사촌인 오스트리아 대공 알베르트 7세를 아일랜드 대공으로 옹립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펠리페 2세는 측근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산타가데아 백작이자 해군 제독인 마르틴 데 파딜라에게 아일랜드로 진군할 함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리스본에서 대함대가 조직되었다. 카스티야에서 갤리온 15척이 리스본으로 이동했고, 포르투갈에서 온 갤리온 9척, 포획한 플랑드르와 독일 함선 53척, 피네스 6척, 카라벨 1척이 편입되었다. 여기에 병사 10,790명이 리스본에 이르렀고, 세비야에서 플리부트 30척에 2,500명이 탑승해 원정함대에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비고에서는 다양한 톤수의 함선 41척이 병사 6,000명과 함께 합류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선원 수는 5,500명이었고, 장비가 부족하고 열약한 보병 11,000명과 기병 3,000명으로 구성되었다. 마르틴 외에도 디에고 브로체로, 산초 마르티네스 데 라이바, 카를로스 데 아레아노가 각각 함대를 지휘했다.

스페인 대함대가 조직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임박한 스페인 해군의 침공을 훼방 놓기 위해 네덜란드 공화국과 힘을 합쳐 카디스에 정박한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1596년 6월 30일~7월 15일, 찰스 하워드가 지휘하는 잉글랜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가 스페인 함대 집결지인 카디스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하워드의 카디스 습격) 현대 학계에서는 스페인이 이때 입은 경제적 손실을 500만 두카트로 추산한다. 여기에 교회와 병원 외에도 주택 1,303채 중 290채가 불에 탔으며, 함선 32척이 침몰 또는 나포되었다. 이 사건에 격노한 펠리페 2세는 기필코 잉글랜드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하고, 원정을 곧바로 감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596년 10월 24일~11월 1일에 감행된 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은 스페인 해역을 벗어나기도 전에 피니스테레곶을 지나가다가 폭풍에 휘말리는 바람에 갤리온 5척 침몰, 기타 선박 38척 침몰 또는 난파, 5,000명이 사망하는 등의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중단되었다. 카디스 습격에 이어 원정 실패까지 겹치자, 스페인 당국은 1597년 초 펠리페 2세가 재위한 이래 3번째로 파산을 선언하고 채권자들에게 빌린 돈 지급을 중단했다.

1597년, 스페인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가뭄이 들면서 수천 명이 굶어 죽었고, 많은 사람이 세금을 낼 수 없다며 집단 항의했다. 프랑스 국왕 앙리 4세,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네덜란드 공화국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의 합동 방해 공작으로 해외에서 식량을 구할 길도 요원했다. 상황이 이토록 어려웠는데도, 잉글랜드와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적개심이 너무도 강렬했고, 전쟁을 자기 대에서 기필코 끝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은 펠리페 2세는 원정을 다시 감행해 어떻게든 잉글랜드를 굴복시키기로 작정하고, 이탈리아의 영지 내 자원들을 총동원해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3. 경과

펠리페 2세의 명령으로, 스페인 함대가 라코루냐에서 집결했다. 잉글랜드에 상륙할 육군 지휘관으로는 후안 델 아길라가 선임되었고, 함대 지휘관으로는 산타가데아 백작이자 스페인 해군 제독 마르틴 데 파딜라가 선임되었다. 제2차 해상 원정 때는 아일랜드를 목표로 삼았지만, 이번에는 콘월의 팔머스 항구로 바뀌었다. 스페인은 그곳을 접수한 뒤 잉글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의 호응을 얻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평화 협정을 강요하기로 했다.

그렇게 작전을 준비하던 중,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가 먼저 출항해 아소르스 제도를 돌면서 보물선들을 나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수송선들이 육군을 팔머스에 옮기는 동안, 함대는 아소르스 제도에서 돌아오는 에식스 백작의 적 함대를 섬멸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또한 팔머스 항구를 장악하기 어렵다면,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을 대체 항구로 정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잉글랜드의 간첩들이 함대 내에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여기고, 고위 사령부 외에는 이번 원정의 목표를 비밀로 해뒀다가 영국 해협에 접근했을 때 비로소 선장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라코루냐에서 총 180척이 집결했고, 나머지는 다른 항구에서 출발한 후 합류하기로 했다. 10월 1일까지 결성된 함대 규모는 136척에 달했는데, 이 중 44척은 왕실이 제공한 갤리온 44척이었다. 또한 무장상선 16척, 독일 및 플랑드르에서 온 헐크선 52척, 캐러벨, 피네스, 바크 24척이 있었다. 군인은 8,634명, 선원은 4,000명, 말은 300마리였다. 함대 사령관 중에는 스페인 장성 중 유일하게도 2년전인 1595년에 잉글랜드의 콘월 해안에 상륙하여 성공적으로 약탈했던 카를로스 데 아메스키타도 포함되었다. 또한 이 함대는 테르시오로 알려진 정예 스페인군이 탑승했는데, 많은 부대가 나폴리와 롬바르디아 등 이탈리아 내 스페인 영토 출신으로, 전투에서 거의 패배하지 않은 숙련된 전사였다.

1597년 10월 18일, 스페인 대함대가 라코루냐에서 출항했다. 뒤이어 페롤에서도 함대가 뒤따라 출항했다. 이들은 스페인 통치하에 있는 브르타뉴의 블라베에서 대기 중이던 페드로 데 주비아우르가 이끄는 함대와 가담했다. 3일 동안 날씨가 맑았고, 함대는 영국 해협에 접근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 선박 한 척이 발각되어 침몰했고, 남은 선원들을 생포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번 원정은 지난 2차례의 원정과는 달리 순탄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후 순풍이 강풍으로 바뀌었고, 폭풍이 발생했다. 산타가데아 백작은 처음에는 날씨가 호전되기를 바라며 폭풍을 견뎌내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에 바람은 더 거세졌고, 폭풍은 3일간 계속되었다. 그 결과 열러 함선이 폭풍에 휘말려 파괴되었다. '산 루카스' 호는 리자드에서 좌초되어 말과 노새를 바다에 던져야 했다. 포병대장 페드로 게바라를 태운 갤리온은 부이 붙어 굉음을 내며 폭발했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팔머스 항에 정박한 잉글랜드 함대를 파괴할 목적으로 가연성 물질을 잔뜩 싣고 공성용 장비도 실었던 또 다른 대형 선박도 폭발해 가라앉았다. 대형 갤리온 '산 바르톨메'는 실리 제도 인근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 '산 페드로' 호에 탑승한 디에고 브로체로는 배가 심하게 손상되자 비스케이 항구로 피신한 뒤, 플리부트를 타고 다시 바다로 나가 함대에 합류했다.

산타가데아 백작은 밀포드 헤이븐, 워터포드, 코크, 또는 브레스트에 비상 상륙하기 위해 함대를 어떻게든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폭풍이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이고 피해가 누적되자, 10월 25일 밤에 어쩔 수 없이 남은 배들에 흩어져서 각자의 안전을 도모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폭풍으로 돛대가 부러진 스페인 함선 한 척이 실리 제도에서 잉글랜드 피나스에 의해 나포되었다. 이 함선은 펜잰스로 끌려가던 중 침몰했지만, 선장, 선원, 군인 등 포로들은 다른 배에 옮겨 탄 뒤 팔머스로 보내졌다. 잉글랜드 함장은 이곳에서 포로들을 심문한 뒤, 잉글랜드 당국에 스페인 함대가 실리 제도에서 약 30리그 떨어져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스페인 포로들은 팔머스에서 함대가 집결한 뒤 작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계획서와 서신을 가지고 있었다.

추밀원은 즉시 소집되어 대응책을 논의했다. 당시 잉글랜드 함대 대부분은 에식스 백작을 따라 아소르스 제도로 파견되었고, 잉글랜드에 남은 배는 12척뿐이었다. 그렇지만 추밀원은 본 함대가 제때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병력 소집, 급여 책정, 보급품 확보 명령만 내렸을 뿐, 새 함대 건설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인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는 스페인 함대가 아일랜드로 상륙할 것을 대비해 아일랜드의 모든 군대를 지휘해 적의 상륙을 막을 준비를 갖추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스페인 함대는 폭풍으로 인해 사방에 뿔뿔이 흩어졌다. 선박 여러 척은 콘월에서 훨씬 북쪽으로 휩쓸려 웨일스 해안으로 떠내려갔다. 이후 그들은 서로 통신을 주고받아서 서로의 위치를 확인했고, 스페인 선박 3척이 펨브로크셔 근처에서 합류한 뒤 밀포드 헤이븐 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은 불행히도 밀포드 헤이븐에서 또다시 폭풍에 휩쓸렸다. 40톤급 카라벨 누에스트라 세노라 부엔비지(Nuestra Senora Buenviage)는 해안으로 밀려간 뒤 그곳에서 웨일스 민병대에게 포획된 후 약탈당했다. 이 배에는 막대한 금과 은이 실려 있었는데, 민병대는 그곳을 놓고 다투다가 한 명이 다쳤다.

120톤급 '암스테르담의 베어'는 애버디피 근처에 좌초되었다. 이들은 일단 디피 강어귀를 거쳐 항해한 뒤 병사들을 해안에 상륙시켰지만, 메리오네스셔에서 동원된 민병대의 매복 공격을 받고 2명이 전사하고 4명이 생포되었다. 그 후 스페인군은 배로 후퇴했지만 바람이 부족해서 떠나지 못했다. 또한 칼데아 섬 앞바다에서 됭케르크에서 온 스페인 보물선이 좌초되었지만, 현지 민병대가 무질서하게 움직이느라 제때 잡지 못하는 사이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스페인 함선 한 척은 콘월의 팰머스 인근 밀포드 헤이븐 인근의 샌디 헤이븐 해변에 정예병 700명을 상륙시켰다. 이 스페인 장병들은 참호를 판 뒤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민병대가 대규모로 몰려와서 포위하려 들면서 압박감을 느꼈고, 스페인 함대는 모일 기미가 없었다. 결국 스페인 장병 700명은 해안에 상륙한 지 이틀 만에 야음을 틈타 배에 오른 뒤 그곳에서 탈출했다.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서 스페인군이 상륙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플리머스와 주변 지역에 경계 태세가 발령되었다. 플리머스 요새 총독 페르디난도 고지스 경은 마을에 경비병 500명을 배치하고 스페인 함대를 확인하기 위해 첨탑에 감시병을 배치했다. 고지스 경은 콘월과 웨일스에서 스페인군이 상륙했으며, 스페인 함선이 인근을 떠돌고 있다는 첨탑 감시병의 보고도 받았다. 그는 즉시 런던에 사절을 보내 자기가 확인한 정보를 고스란히 전했다.

잉글랜드 당국은 스페인군이 해안가에 대거 상륙하고 있다고 여기고 급히 조치했다. 프랑스 가톨릭 동맹으로부터 앙리 4세의 프랑스군과 함께 탈취한 아미앵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본국으로 철수시켰고, 웨스트 컨트리에서 군대를 대거 동원했다. 덴버셔 백작 찰스 블런트는 잉글랜드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소수의 갤리온이 콘월과 데번 해안으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팔머스에 도착했을 때, 스페인 함선은 한 척도 확인하지 못했다. 한편, 일부 스페인 함선은 여전히 잉글랜드 해안을 떠돌면서 항구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바람이 불자, 그들은 디에고 브로체로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라코루냐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10월 23일, 에식스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 본 함대 108척 선두 편대가 팔머스, 플리머스, 다트머스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잉글랜드 해안에서 떠돌다가 도주하는 스페인 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에식스 백작은 도착하자마자 덴버셔 백작으로부터 상황을 전해 듣고 매우 놀랐다. 그는 자기에게 적의 상륙 허용과 돌아가는 적 함대를 찾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추궁을 받을 것을 우려해, 즉시 의회와 여왕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처음에 여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고, 영국 해협 함대에 에식스 백작의 깃발 아래 집결하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그러나 여왕은 나중에 에식스 백작에게 서신을 보내, 아소르스 제도에서의 성과가 시원치 않고, 잉글랜드가 보호받지 못한 것에 대해 추궁했다. 에식스 백작은 즉시 궁정에 가서 자기 행동을 설명했지만, 여왕으로부터 차가운 비난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낙심한 채 완스테드로 돌아갔고,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가 그를 대신해 함대 지휘권을 맡았다.

며칠 후, 잉글랜드군의 마지막 함대가 도착했다. 당시 이 함대 사령관인 아서 고지스 경은 폭풍 때문에 세인트 아이브스로 떠내려갔고, 부제독 월터 롤리가 그를 대신해 함대를 지휘했다. 월터 롤리가 탑승한 위스파이트호는 수리를 위해 항구로 향했다. 그러던 중 스페인 바크선과 비네스 선이 발견되자, 그는 즉시 이들을 공격해 짧은 교전 끝에 두 배에 탑승했던 이들의 항복을 받아낸 뒤 세인트 아이브스로 데려갔다. 피나스의 선장 후안 트리에고는 아서 고지스와 롤리에게 심문받으면서, 스페인의 계획과 배치를 실토했다. 고지스와 롤리는 스페인이 1년 전에 잉글랜드 해안에서 정보원을 보내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바크선 선장 역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후에도 밀포드 헤이븐에서 온 다른 모든 포로 장교와 선장들이 심문받았고, 잉글랜드 당국은 그제야 스페인 함대의 병력과 조직을 확인한 뒤, 140척에 달하는 함대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장악할 뻔했다는 것에 무척 놀라워했다.

그 후 월터 롤리는 중장으로 임명되어 플리머스에서 찰스 하워드와 합류했다. 두 사람은 작은 함대를 서둘러 출격해 스페인 해군을 추격하려 했고, 데번셔 백작 찰스 블런트가 플리머스와 주변 지역의 군대와 민병대를 조직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두 사람은 스페인군의 도착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비스케이만까지 정찰했고, 심지어 서부 프랑스 항구까지 항해했다. 10월 30일, 하워드 함대 소속 보든 선장이 이끄는 군함이 피니스테레곶에서 스페인 함대에 소속된 플리부트를 나포하고, 그곳에 탑승했던 육군 대위와 군인 40명, 선원 28명을 생포했다. 선장과 장교들은 다시 심문받았고, 스페인의 침략에 대해 동일한 증언을 했다. 편대 지휘관 조지 케어우는 남쪽으로 배를 더 몰다가 카스티야의 깃발을 내걸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선박 11척을 보고 즉시 추격했지만 따라잡는 데 실패하자 주력 함대에 합류하여 하워드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에 하워드는 적군이 완전히 철수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롤리와 함께 플리머스로 돌아간 뒤 의회와 궁정에 소식을 전했다.

이 무렵, 120톤급 '암스테르담의 베어' 호는 아직도 에버디피에 있었다. 열흘이 지나도록 바람이 불지 않았고, 민병대는 적선에 등선할 때 쓰일 적당한 배가 없어서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민병대는 적선을 불태우려 시도했지만, 스페인군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 후 바람이 불자, 암스테르담의 베어 호는 즉시 출항했다. 그러나 콘월반도 주변을 맴돌다가 동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수로를 따라 휩쓸려 다소 손상을 입었다. 11월 10일, 이들은 아군 함대가 팔머스에 있을 줄 알고 거기로 향했다가 대기 중이던 잉글랜드 함대에 의해 나포되었고, 스페인군 70명이 생포된 뒤 다트머스로 끌려갔다. 이 배가 스페인 대함대의 3차 잉글랜드 원정에서 나포된 마지막 함선이었다. 잉글랜드 함대, 민병대, 정규병은 이후에도 경계 태세를 유지하다가, 11월 말 스페인 함대가 더 이상 출몰하지 않자 해산했다. 유럽 대륙에서 잉글랜드로 급히 이동했던 군대는 상황이 나아지자, 네덜란드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4. 결과

스페인 해군은 이번 원정에서도 큰 손실을 보았다. 6척의 스페인 선박이 잉글랜드 남서부와 웨일스 서부 해안가에서 잉글랜드군에 나포되었다. 여기에 22척이 침몰 또는 난파되었으며, 300명이 체포되어 조사받고 감금되었고, 1,500명 이상이 죽었다. 11월 21일 스페인 왕실 조사 기록에 따르면, 나코루냐에 집결한 선박 수는 108척이며, 많은 선박이 수리를 필요로 했으며, 식량을 포함한 새로운 보급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게다가 스페인 해군이 상륙했을 때 호응할 걸로 예상했던 잉글랜드 가톨릭 세력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많은 인사는 스페인과의 전투를 지지하고 민병대에 가담해 보물선을 터는 데 함께 했다.

펠리페 2세는 또다시 원정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낙담했다. 그 후 그는 중병에 걸려 궁궐에 틀어박혔고, 더 이상 원정을 통해 승리를 거둘 가망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잉글랜드와 평화를 맺을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스페인 전역에서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행사가 거행되었지만, 펠리페 2세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598년 9월 13일에 엘 에스코리알에서 병사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비록 스페인 함대가 폭풍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해보고 무너지긴 했지만, 자칫했으면 대규모 적군이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할 뻔했다는 걸 파악하고, 해안선 방어를 철저히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전문 군사 기술자 폴 이브리가 세인트 모스 성과 펜데니스 성을 강화하는 책임을 맡았고, 플리머스와 밀포드 헤이븐의 방어도 개선되었다. 또한 민병대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해 스페인군을 상대할 때 부적절하게 행동했던 걸 인지하고, 그들이 전쟁 기술을 훈련받게 하고자 교관을 보냈다. 또한 저지대 국가에서 차출된 잉글랜드 보병 2개 중대가 콘월에 배치되었다.

스페인은 1601년 신임 국왕 펠리페 3세의 총신인 레르마 공작 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산도발의 주도하에 아일랜드 반란군을 돕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함선 33척, 병사 4,500명이 동원된 소규모 함대였는데, 이번에도 심한 폭풍으로 큰 손실을 보았지만 상륙에 성공하고 아일랜드 반군과 합세했다. 그러나 킨세일 전투에서 패배한 뒤 스페인군 전체가 항복하면서, 이 원정 역시 재앙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