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10대 오몽드 백작 토머스 버틀러 Thomas Butler, 10th Earl of Ormon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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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토머스 버틀러 Thomas Butler |
출생 | 1531년 2월경 |
아일랜드 왕국 | |
사망 | 1614년 11월 22일 |
아일랜드 왕국 티퍼레리주 캐릭온슈어 | |
아버지 | 제9대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 |
어머니 | 조앤 피츠제럴드 |
형제 | 에드먼드, 존, 월터, 제임스, 에드워드, 피어스 |
배우자 | 엘리자베스 버클리 (1559년 결혼 / 1582년 사망) |
엘리자베스 셰필드 (1582년 결혼 / 1600년 사망) | |
헬레나 배리 (1601년 결혼) | |
자녀 | 존, 엘리자베스, 토머스 |
직위 | 제10대 오몽드 백작, 제3대 오소리 백작. |
1. 개요
아일랜드 왕국의 백작. 데스몬드 반란 시기 잉글랜드 왕국을 위해 아일랜드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2. 생애
1531년 2월경에 출생했지만, 출생지는 아일랜드라는 것 외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9대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이고, 어머니는 제10대 데스몬드 백작 제임스 피츠제럴드의 딸인 조앤 피츠제럴드였다. 친가인 버틀러 가문은 1177년 헨리 2세에 의해 아일랜드의 수석 집사로 임명된 시어볼드 월터의 후손으로, 아일랜드 남부 일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외가인 제럴드 가문 역시 오래된 잉글랜드-아일랜드 명문가로, 버틀러 가문과 아일랜드 남부의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다.1544년 5월 잉글랜드 궁정에서 교육받기 위해 런던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영어, 복장, 예의범절을 익혔으며,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궁정의 다른 젊은 귀족들은 그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촌 동네로 취급받던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그래서 친구를 별로 두지 못하고 외롭게 지내던 그는 엘리자베스 공주와 친분을 맺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어머니 앤 불린의 친할머니인 마거릿 버틀러를 통해, 두 사람은 먼 친척 관계였다. 또한 엘리자베스 공주는 어머니가 처형당한 뒤 사생아로 취급받고 있었기에, 외롭게 지내는 그의 처지에 공감했다. 일설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그를 "흑인 남자"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1546년 10월 28일, 15세의 토머스는 아버지 제임스 버틀러가 런던의 엘리 하우스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가 독살당한 뒤 제10대 오몽드 백작이자 제3대 오소리 백작이 되었다. 세간에서는 아일랜드 총독이자 제임스 버틀러의 정적이었던 앤서니 세인트 레거가 사주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1547년 2월 20일 에드워드 6세의 대관식에 참석해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547년 9월 호국경 에드워드 시모어의 스코틀랜드 왕국을 향한 원정에 참여해 핑키 전투에서 활약했다. 1554년, 메리 1세 치세에 발발한 토머스 와이엇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헌했다.
한편, 어머니 조앤 피츠제럴드는 1548년에 프랜시스 브라이언과 재혼했고, 1550년 프랜시스 브라이언이 사망한 뒤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재혼했다. 1554년 토머스 버틀러의 사생아인 듀이스크의 피어스 피츠토머스 버틀러가 태어났다. 세간에서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피어스의 어머니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학계에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피어스의 아들 에드워드는 훗날 초대 갈모예 자작이 되었다.
1558년 11월 17일,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토머스를 호의적으로 대했고, 1559년 8월 26일 아일랜드 재무관에 선임했다. 그는 재무관의 자격으로 아일랜드의 추밀원 고문을 겸임했다. 1559년, 토머스는 제9대 버클릴 남작 토머스 버클리의 딸 엘리자베스 버클리와 처음으로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버클리는 궁정에서 미인으로 여겨졌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1564년에 자녀를 두지 않고 헤어졌지만, 엘리자베스 버클리는 이혼을 거부했다. 그녀는 1582년 9월 1일에 브리스톨에서 사망했다.
토머스는 1560년대에 티퍼레리주 캐릭온슈어의 슈어 강 유역에 있는 오몽드 성에 튜더 양식의 영지 확장 공사를 했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가 아일랜드로 여행할 때 머물기에 적합한 궁전을 제공하려는 조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를 2번 방문할 계획이었다. 1602년에 방문 일정이 잡혔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병에 걸려서 취소되었고, 1603년에 다시 계획이 잡혔지만, 그 해에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먼 친척이며 자신의 친구인 그를 총애했고, 그가 아일랜드에서 강력한 귀족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토머스는 생애 대부분을 데스몬드 백작 가문과의 불화 속에서 보냈다. 1560년, 토머스의 어머니 조앤 피츠제럴드의 중재로, 보허모어에서 양자 간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조앤이 1565년 1월 2일에 사망한 지 한 달 남짓 후인 1565년 2월 8일, 토머스는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애페인 전투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토머스가 승리했고, 데스몬드 백작은 300명의 전사를 상실하는 참패를 당한 뒤 다친 채 토머스에게 체포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봉신들이 주군인 자신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인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두 가문의 수장을 런던으로 불러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게 했다. 이후 토머스는 엘리자베스와 우호적인 관계인 덕분에 사면받았지만, 제럴드 피츠제럴드와 동생 존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다.
데스몬드 백작의 사촌인 제임스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는 잉글랜드 당국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1569년 아일랜드 총독 헨리 시드니의 억압 정책에 불만을 품은 게일인 영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해 7월 말, 피츠모리스는 4,5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토머스의 거주지인 킬케니를 포위했다. 여기에 형제 에드먼드, 에드워드, 피어스가 피츠모리스에게 가담했다.
토머스는 이 소식을 듣고 런던에서 워터포드로 귀환하여 버틀러 가문 인사들과 일부 게일인 씨족을 동원했다. 이후 헨리 시드니, 그리고 먼스터 주지사로 선임된 험프리 길버트와 함께 초토화 작전을 감행해 피츠모리스의 동맹 세력이 보유한 영지를 파괴했다. 각 영주가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후퇴해야 했기 때문에, 피츠모리스의 군대는 와해했다. 이후 피츠모리스에게 가담한 토머스의 형제 에드먼드, 에드워드, 피어스는 1570년 4월 아일랜드 의회의 법률에 따라 불법화했다.
헨리 시드니는 피츠모리스를 케리주 산악지대로 몰아놓았지만, 피츠모리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오몽드 백작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피츠모리스는 자기를 따르는 이들이 얼마 안 남자 1573년 2월 23일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제1차 데스몬드 반란이 종식된 뒤, 데스몬드 백작은 1573년경 석방되어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반란을 일으켰던 피츠모리스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풀려난 후 1575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1579년 6월 17일, 피츠모리스가 교황령과 스페인 제국의 지원을 받아 딩글 반도에 상륙해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을 일으켰고, 제14대 데스몬드 백작 제럴드 피츠제럴드도 가세했다. 토머스는 먼스터 주지사로 선임된 뒤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특히 1583년에 아일랜드 주둔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이전 사령관들과는 달리 초토화 전술을 자제하고 외교로 반란군을 회유하기로 했다. 그의 군대는 반란군은 코크 주 서부와 케리 주로 봉쇄했고, 데스몬드 백작의 가까운 친척들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 그 결과 대다수 반란군은 항복했고, 데스몬드 백작은 산악 지대를 떠돌다가 1583년 11월 11일 케리 주 트랄리 인근의 슬라브 미시 산맥의 글렌간티에서 딩글반도 캐슬드럼의 모리아티 가문 수장 오언 모리아티가 파견한 군대에 피살당했다. 이리하여 제2차 데스몬드 반란은 종식되었다.
1582년 9월 1일 첫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버클리가 사망한 후, 토머스는 그해 11월 9일에 51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제2대 셰필드 남작 존 셰필드의 딸 엘리자베스 셰필드와 재혼했다. 1588년 봄, 엘리자베스 1세는 토머스를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 선임했다. 그해 여름 무적함대가 잉글랜드를 위협했을 때, 그는 틸버리에서 열린 군대 사열식에 참석해 여왕의 틸버리 연설을 들었다. 그는 이때 여왕 앞에서 국가의 검을 드는 역할을 맡았다.
1600년 아일랜드 타이론 지방에서 발발한 반란 진압에 참여했지만, 그해 4월 렌스터에서 먼스터로 쳐들어온 오우니 맥로리 오모어에게 패배해 6월까지 포로 로 지내야 했다. 1600년 11월 두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셰필드가 사망하자, 토머스는 1601년 6월 70세의 나이에 제5대 버티번드 자작 데이비드 배리의 딸 헬레나 배리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1602년 렌스터 해군 중장으로 선임되었다. 토머스는 1614년 11월 22일에 남자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고, 킬케니의 세인트 캐니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동생 에드먼드는 추방당했기 때문에 방계인 킬캐시의 버틀러 가문에 속한 월터 버틀러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엘리자베스 버클리(? ~ 1582): 제6대 버클리 남작 토머스 버클리의 딸.
- 엘리자베스 셰필드(? ~ 1600): 제2대 셰필드 남작 존 셰필드의 딸.
- 존 버틀러(1584 ~ 1589): 요절.
- 엘리자베스 버틀러(1593년 이전 ~ 1628): 토머스 버틀러의 형제 에드먼드 버틀러의 아들이자 그녀의 사촌인 툴레오펠림 경 시어볼드 버틀러와 결혼했고, 1613년 시어볼드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한 뒤 초대 데스몬드 백작 리처드 프레스턴과 재혼했다.
- 토머스 버틀러(1600년 이전 ~ 1606): 요절.
- 헬레나 배리: 제5대 버티번드 자작 데이비드 배리의 딸. 토머스 버클리와 결혼하기 전에 기사 존 파워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