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레데부르트 공방전 Beleg van Bredevoort | ||
| | ||
| 시기 | ||
| 1597년 10월 1일~10월 9일 | ||
| 장소 | ||
| 네덜란드 헬러 브레데부르트 | ||
| 원인 | ||
| 스페인군의 지배를 받는 저지대 국가를 탈환하려는 마우리츠의 공세.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보병 6,000명, 기병 1,200명, 대포 24문. | 보병 200명, 기병 40명, 대포 20문. | |
| 피해 | ||
|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 전원 포로. | |
| 결과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승리. | ||
| 영향 | ||
|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의 사기 증진. | ||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97년 10월 1~9일,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스페인 제국의 지배를 받던 흐브레데부르트를 공략한 공성전. 마우리츠의 1597년 원정의 다섯 번째 전투이다.2. 상세
1597년 8월 원정을 단행하여 라인베르크, 뫼르스, 흐룬로를 잇따라 공략한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사령관 마우리츠는 10월 1일 보병 6,000명과 기병 1,200명, 대포 24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브레데부르크로 진군했다. 당시 이 마을은 프랑스 출신의 다미앙 가르도 대위와 부관 반 브로크하이센이 이끄는 보병 200명, 기병 40명, 대포 20문이 배치되었다. 마우리츠는 브레데부르트로 가는 길을 봉쇄하고 호레이스 베레가 지휘하는 13개 잉글랜드 중대와 프리지아 총독 빌럼 로더베이크 반 나소딜렌부르크 백작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12개 중대와 함께 마을 서쪽 알텐에 본부를 두었다. 동쪽에는 반 솔름스 백작의 9개 중대와 메레우 장군의 12개 스코틀랜드 중대가 함께 주둔했고, 두이벤부르데가 지휘하는 6개 중대는 미스테와 코를레에 주둔했다.10월 2일, 흐룬로 요새에서 차출된 대포 12문이 전방에 배치된 뒤 첫 번째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후 마우리츠가 항복을 요구하자, 수비대가 성벽 위에서 도전적으로 화답했다.
"너희 앞에는 흐룬로 병사들이 없다!"
그러면서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를 위해 최후의 한 명까지 도시를 방어하겠다고 선언했다. 수비대는 브레데부르트가 발이 푹 빠지는 깊은 습지대 사이에 있어서 포위 공격하기 힘들며, 이중 해자가 설치되었고, 일곱 개의 성벽, 2개의 원형 성벽, 2개의 라벨린으로 보호되는 2개의 도시 성문이 있는 강력한 방어 시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군이 곧 올 거라고 믿었기에 끝까지 저항하기로 했다. 마우리츠는 습지대가 워낙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어서 도시 주변에 포위망을 구축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일단 해자의 물을 빼기 위해 물레방아 근처에 댐을 뚫었다. 하지만 그는 곧 늪지대 한가운데의 저지대에서 해자의 물을 빼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마우리츠는 병사와 포병을 최전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접근로를 파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10월 3일 동쪽과 서쪽에서 도시를 향해 포격을 퍼부으면서 프리지아인과 잉글랜드인 장병들을 도시에서 400m 이내로 접근해 진입로를 건설하게 했다. 이후 마우리츠는 1597년 7월 15일 헤이그에서 시연된 이동식 코르크 다리를 쓰기로 했다. 이 다리는 여러 개의 구간으로 구성되어 무장 병력 150명과 그들이 이끄는 중포를 실을 수 있었다. 다리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나무판자로 보강되었다. 마우리츠는 이 이동식 코르크 다리를 되스뷔르흐에서 가져오게 했다.
이후 5일간 연합군이 맹공을 퍼부은 끝에, 10월 8일 스코틀랜드 장병들이 도시 서쪽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여 알터포르트강 앞의 한 지역을 점령했다. 또한 이날 뒤스뷔르에서 온 배들이 이동식 코르크 다리의 첫 번째 교량 부분을 가져왔다. 10월 9일 이른 아침, 도시는 또다시 전면 포격을 받았다. 특히 동쪽과 서쪽을 중심으로 맹렬하고 지속적인 포격이 쏟아졌다. 남쪽에서는 장병들이 엄폐물 없이 건설하느라 성벽에서 쏟아지는 끊임없는 포격에 시달린 끝에 이동식 코르크 다리를 건설했다. 여기에 장병들은 첫 번째 성벽에 접근하여 참호를 파고 들어갔다.
이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수비대는 드러머를 성벽으로 올려보내 항복 조건을 협상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이 성채를 공략하느라 큰 희생을 치렀던 포위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드러머가 성벽 위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대포알에 머리가 날아갔다. 공격군이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성문을 뚫고 안으로 진입하자, 스페인군은 항복의 표시로 모자를 공중으로 던졌지만 살해당했다. 남은 스페인군 120명은 마지막 피난처인 내성으로 도주했다.
어려운 전투 끝에 브레데부르트 시내에 진입한 연합군은 마우리츠의 용인 아래 이틀간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한편, 프랑스인 총독 다미앙 가르도는 내성으로 후퇴하려 했지만, 반 브로크하이젠의 중대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고, 성 다리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다미앙이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 협상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협상을 거부해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르도는 충성스러운 병사들과 함께 성벽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나중에 호엔로헤 부대 소위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막대한 돈을 주고 자유를 얻었다. 브로크하이젠의 병사들도 1,700 골드 길더를 지급하고 떠날 수 있었다. 수비대는 이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3개월 동안 뫼즈강 이편에서 연합군에 대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0월 12일, 수비대는 6,000골드 길더에 달하는 몸값을 지급한 뒤 떠났다. 브레데부르트 시민들도 6,000길더를 지급해야 했지만, 그날 밤에 전리품을 찾던 연합군 군인이 어둠 속에서 사물을 확인하기 위해 짚단에 불을 질렀다가, 그 불이 번지면서 20채를 제외한 모든 집이 불타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우리츠는 이 사건에 매우 화를 냈지만, 다른 마을이 자신에게 대항할 엄두를 못 내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여러 전쟁 포로를 브레덴에서 석방한 뒤 포로 생활과 브레데부르크 화재 소식을 널리 알리게 했다. 또한 마우리츠는 시민들이 큰 화재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몸값을 면제하기로 했다. 브레데부르트 시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마우리츠에게 포도주 3통을 줬다. 이후 마우리츠는 브레데부르트에 2개 중대를 남겨놓고 엔스헤더로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