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후안 데 울루아 해전 영어: Battle of San Juan de Ulúa 스페인어: Batalla de San Juan de Ulúa | ||
| 시기 | ||
| 1568년 9월 24일 | ||
| 장소 | ||
| 누에바에스파냐 산 후안 데 울루아 (현재 멕시코 베라쿠루스 해상) | ||
| 원인 | ||
| 잉글랜드 밀수업자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단속.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13척 | 6척 | |
| 피해 | ||
| 1척 침몰, 20명 사망 | 4척 침몰 또는 나포, 320명 사망 | |
| 결과 | ||
| 스페인 해군의 승리. | ||
| 영향 | ||
|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스페인에 대한 적대 의식 증폭. | ||
1. 개요
1568년 9월 24일, 누에바에스파냐 산 후안 데 울루아 해상에서 스페인 해군이 잉글랜드 사략선들을 기습 공격하면서 벌어진 해전.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되는 해전이다.2. 배경
1494년, 대항해 시대의 선두 주자인 포르투갈 왕국과 스페인 제국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에 따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스페인 왕실은 토르데시아스 자오선 서쪽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새로운 땅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이래 가톨릭을 배제하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국교로 삼은 잉글랜드 왕국의 상인과 모험가들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스페인 제국이 신대륙에 건설한 누에바에스파냐 각지를 돌아다니며 무역 활동을 벌였다. 당시 스페인은 대서양 횡단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거래를 금지했지만, 잉글랜드 상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여러 항구에 들러서 현지 관리 및 주민들과 밀수를 마음껏 벌였다. 잉글랜드 국왕 엘리자베스 1세도 이들이 수익 일부를 국고에 헌납하는 대가로 이들의 활동을 묵인했다.존 호킨스는 이러한 밀수 활동을 벌인 잉글랜드 상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대거 잡아들여서 노예로 삼은 뒤, 누에바에스파냐 각지를 돌며 여러 항구에 도착한 뒤 노예와 현지 특산품 간의 교환을 요구했다. 만약 현지 관리와 주민들이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대포를 들이밀며 도시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해 거래를 강제로 성사했다. 그는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 상당수를 여왕에게 바쳤고, 여왕은 그에게 문장을 하사하고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자신의 사설 함대에서 가장 좋은 배인 '뤼베크의 예수'와 '미니언'을 그에게 맡겨 다음 상업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1567년 10월 2일, 존 호킨스는 플리머스항을 출발하여 무기, 탄약, 런던 탑에서 가져온 상품을 탑재한 함선 6척을 이끌고 출진했다. 당시 그 함대에는 호킨스의 사촌이자 27세의 떠오르는 선원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탑승했다. 함대는 테네리페에서 잠시 정박한 후, 카보베르데, 기니, 시에라리온을 거쳐 항해하면서 노예 수백 명을 잡아들였다. 이때 포르투갈 노예 상선들과 맞붙어서 포르투갈 캐러벨 1척을 나포하고 이름이 '신의 은총(Grace of God)'으로 바뀌었다. 그 후 다른 6척은 누에바에스파냐로 이동했지만, '윌리엄 앤 존(William and John)' 호는 노예들을 데리고 귀환길에 오르다가 1569년 2월 아일랜드에 도착한 뒤 잉글랜드로 이동하던 중 실종되었다.
1568년 2월 초 기니에서 물과 노예 400~500명을 실은 채 누에바에스파냐로 출발한 존 호킨스는 3월 27일 산토도밍고에 도착한 후 현지 관리들과 거래했고, 뒤이어 도미니카, 마르가리타, 리오하차에 이르러 밀수를 벌였다. 리오하차 시 재무관이 밀수를 거부하자, 그는 인질을 잡고 시 재무관의 집에 총격을 가하며 거래를 허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해 허락을 억지로 받아냈다. 그는 비슷한 방식에서 여러 해안 도시에서 무역했지만,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에서는 항구에서 대포 사격을 받고 급히 떠나야 했다.
이렇게 강압적인 방식으로 밀수업을 수행한 존 호킨스는 모든 노예를 무사히 판매한 뒤 잉글랜드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그러나 쿠바 인근에서 폭풍이 몰아치자 멕시코만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 과정에서 일부 선박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이에 존 호킨스는 이 상태로는 대서양을 건너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함선 수리를 위해 1586년 9월 16일 산 후안 데 울루아 항구로 향했다. 이때 호킨스는 스페인 상선 2척을 나포한 뒤, 함선들에 스페인 국기를 게양하게 한 뒤 나포한 상선 2척을 앞세워 항구로 향했다.
지휘관 후안 데 우빌라와 산 후안 데 울루아 수비대는 이 함대를 보고 당시 도착이 예정되어 있던 새로운 총독 마르틴 엔리케스 데 알만사의 함대로 오인했다. 그들은 새로운 총독을 맞이하기 위해 기함에 여러 장교와 지방 관리를 태워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정체를 드러낸 호킨스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인질 취급을 받았다. 호킨스는 자기들은 그저 배를 수리하고 대서양을 건너기 위한 식량을 받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니, 순순히 협조해 준다면 말썽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프란시스코 데 루한이 스페인 갤리온 13척이 새로운 총독을 태운 채 산 후안 데 울루아 해안에 이르렀다. 존 호킨스는 루한에게 전령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항구 입항을 허용하기 전에 평화 유지를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총독 마르킨 엔리케스 데 알만사는 호킨스 일행을 이대로 공격한다면 그들이 항구에 정박한 배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마을에 해를 끼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서로 공격하지 않고, 인질 12명을 교환하며, 잉글랜드 선원들은 배를 수리하고 마을에서 거래하는 걸 허락받았다. 총독은 자기가 탔던 기함을 잉글랜드 선박 옆에 정박하라고 명령했다.
잉글랜드인들은 모든 게 잘 풀렸다고 여기고 마음을 놓았지만, 스페인 총독은 휴전 약속을 존중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참에 누에바에스파냐에서 횡포를 부리는 잉글랜드 밀수업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다시는 발을 들일 엄두를 못 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총독의 지시를 받은 프린시스코 데 루한과 후안 데 우빌라는 방심한 잉글랜드인들을 급습할 준비를 은밀히 시작했다.
3. 전투 경과
스페인인들은 정박한 잉글랜드 함선을 방어하고 있던 해안 포대를 점령하기 위해 항구 근처 본토에 공격 부대를 비밀리에 집결했고, 잉글랜드와 스페인 함대 사이에 끌어올릴 예정이었던 선체인 산 살바도르에 병사 150명을 숨겼다. 그들은 잉글랜드인들이 점심을 먹을 시각인 9월 24일 정오에 스페인과 잉글랜드 함대 사이에 헐크(hulk: 물에 뜰 수 있지만 바다에 나갈 수 없는 배.)를 배치하고, 배치가 완료되면 나팔 소리와 함께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그러나 잉글랜드인들은 스페인 선원들이 배 사이에서 무기를 옮기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었다. 호킨스는 뤼베크의 예수호 선장 로버트 바렛을 보내 총독에게 부하들을 헐크에서 내리게 하고 위협적인 활동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음모가 들켰다는 걸 깨달은 총독은 바렛을 체포한 뒤 나팔을 급히 불어서 스페인군에게 즉시 공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본토에 숨어 있던 스페인군은 델가딜로 선장의 지휘하에 급히 피나스(Pinnace: 노나 돛으로 나아가는 가벼운 보트. 상선과 군함에 실려서 이동했으며, 정찰 및 습격 작전에 주로 활용되었다.)를 저어 섬으로 향했다. 그들은 해변에서 대포를 조종하던 잉글랜드 선원들을 압도했고, 많은 선원이 배로 도망쳤다.
헐크에 가장 가까운 잉글랜드 배인 미니언은 스페인군이 가장 먼저 올라탈 표적이었지만, 선원들이 결사 항전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다음 호인 뤼베크의 에수 호에서는 스페인군이 선체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지만, 뒤이은 격투 끝에 쫓겨났다. 그 후 뤼베크의 예수 호는 급히 출항해 미니언과 합류했다. '신의 은총' 호의 사령관 로버트 블론델은 배에 불을 지르고 탈출한 뒤 존 호킨스와 함께 뤼베크의 예수 호에 올라탔다. 잉글랜드 선원들은 스페인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고, 부제독의 배인 갤리온 선 산타 클라라가 이 포격에 맞아 불이 붙어서 항구 안에서 침몰했다. 여기에 총독이 탑승했던 기함 산 페드로도 미니언과의 포격전 중에 심하게 파괴되었다.
그 후 해안 포대를 장악한 스페인군이 잉글랜드 함선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뤼베크의 예수호는 심하게 손상되고 돛대가 파괴되었다. 잉글랜드 선원들은 뤼베크의 예수호를 미니언 호와 해안 포대 사이에 위치하도록 조종해, 미니언 호가 해안에 있는 스페인 포대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방패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한편, 엔젤호는 몇 차례의 일제 사격 후 침몰했고, 스왈로우호는 포대를 관리하던 스페인 군인들에게 포획되었다. 엔젤호와 스왈로우호의 선원들과 뤼베크의 예수 호의 승무원 일부는 호킨스가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후 바다에 몸을 던졌다가 나중에 피나스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 후 호킨스는 미니언 호를 몰아 탈출했고,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유디트 호를 지휘해 뒤를 따라갔다. 뤼베크의 예수 호는 만신창이가 된 채 산 살바도르 호의 스페인군에게 나포되었다. 그날 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유디트 호를 몰아서 잉글랜드로 홀로 돌아갔고, 호킨스는 혼잡하고 식량이 부족한 미니언 호를 홀로 이끌었다. 스페인군은 이들을 마저 추격해 섬멸하려 했지만, 밤 동안 풍향이 바뀌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후안 데 우빌라 선장은 부하들이 뤼베크의 예수호에 남겨진 전리품을 마음껏 약탈하도록 허용했고, 델가딜로 선장은 잉글랜드 기함을 획득한 뒤 경매에 내놓았다.
잉글랜드 선원 114명은 배에 탑승하지 못한 채 멕시코 해안에 버려졌다. 이들 대부분은 남쪽으로 향하다가 치치멕의 공격을 받고 탐피코에서 스페인군에 붙잡혀 감금되었다가 멕시코시티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스페인 사람들의 호의를 받으며 자유롭게 살았고, 일부는 감시에서 풀려난 뒤 농사를 짓고 가족을 이뤘다. 그러나 3년 후인 1571년에 종교재판소에 끌려왔다. 전투 당시 16세 미만이었던 11명은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았지만, 나머지는 이단적이고 타락한 인간들로 간주했고, 자백받기 위해 고문을 당한 후 화형에 처하거나, 종신형 또는 장기형을 선고받고 갤리선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한편, 일부 선원들은 남쪽으로 가는 대신 북쪽의 프랑스 요새로 탈출하기로 하고, 12개월에 걸쳐 5,000km에 달하는 항해를 이어간 끝에 데이비드 잉그램, 리처드 트와이드, 리처드 브라운 등 3명만이 케이프 브레턴에서 프랑스 선박에 구조된 뒤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1582년, 잉그램은 자신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구술했고, 잉글랜드 국교회 사제 리처드 해클루드는 1589년 출간한 저서 <잉글랜드의 주요 항해, 교통, 그리고 발견들>에 그의 이야기를 실었다.
4. 이후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1568년 12월에 플리머스항에 도착했고, 존 호킨스는 한 달 후에 단 15명의 선원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원래 원정대 중 잉글랜드로 무사히 돌아온 선원은 70~80명에 불과했다. 호킨스는 드레이크가 탈영하고 그들이 모은 보물을 훔쳤다고 비난했다. 드레이크는 두 가지 비난을 모두 부인하며, 자신은 모든 이익을 선원들에게 분배했으며 호킨스가 떠났을 때 길을 잃었다고 믿었다고 반박했다.이후 존 호킨스는 스페인이 휴전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들을 기습 공격했다고 비난했고, 잉글랜드 정부는 이에 따라 스페인 당국에 항의했지만, 엔리케스 총독은 행패를 부리는 밀수업자들을 정당하게 심판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 후 산 후안 데 울루아 해전은 많은 잉글랜드인들에게 스페인이 극악무도한 배신을 저지른 사례로 기억되었고,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이 일을 계기로 스페인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스페인을 향한 해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그래서 많은 현대 학자는 이 전투가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의 전조였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