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플로레스 해전 스페인어: Batalla de Flores 영어: Battle of Flores | ||
| 시기 | ||
| 1592년 5월 20일~8월 13일 | ||
| 장소 | ||
| 아소르스 제도 플로레스섬 앞바다 | ||
| 원인 | ||
| 대서양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을 약탈하려는 잉글랜드 사략선 함대의 공세. |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병력 | ||
| 전함 8척, 지원함 7척. | 다향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 | |
| 피해 | ||
| 120명 사상, 선박 3척이 폭풍으로 침몰. | 카락선 1척 나포, 1척 파괴, 갤리온 1척 나포, 다른 선박 3척 나포 또는 파괴 1,000명 사상 또는 생포. | |
| 결과 | ||
| 잉글랜드군의 승리. | ||
1. 개요
1585~1604년 영국-스페인 전쟁 시기인 1592년 5월 20일~ 8월 13일, 아소르스 제도의 플로레스 앞바다에서 잉글랜드 해군과 스페인 해군이 맞붙은 두 번째 해전.2. 상세
1592년 초, 제3대 컴벌랜드 백작 조지 클리퍼드는 대서양, 스페인 해안, 카리브해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을 약탈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 위한 사략선 함대를 조직했다. 그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설득해 런던 탑에 갇혀 있던 월터 롤리를 가석방한 뒤 함대 제독에 세웠고, 존 버러가 부제독에 선임되었으며, 마틴 프로비셔가 두 사람의 보좌를 맡았다. 컴벌랜드 백작은 원정 준비 과정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졌으며, 런던의 유명 상인과 귀족들이 일정 부분 자금을 투자했다. 함대에는 윌리엄 몬슨, 로버트 크로스, 사무엘 퍼커스, 리처드 호킨스, 크리스토퍼 뉴포트 등 사략선 선장으로서 활약한 유명 인사들이 포함되었다.원정대는 악천후로 인한 지연 후 1592년 5월 6일 다트머스 항에서 출항했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서인도 제도였지만, 연이은 지연으로 보급품이 고갈되었기에 보류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아소르스 제도로 가서 식량과 식수를 보충하고, 동인도 제도에서 귀환하는 스페인 보물선단이나 포르투갈 상선단을 습격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월터 롤리가 지휘를 맡았지만, 여왕으로부터 잉글랜드로 즉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자 물러났고, 마틴 프로비셔가 그를 대신해 지휘를 맡았다. 5월 11일, 피니스테레곶 바로 앞에서 폭풍이 몰아치면서 함대 대부분이 흩어졌다. 소형 선박 3척이 침몰했고, 갈랜드 호는 거의 좌초될 뻔했다.
이후 포르투갈 해안의 세인트 빈센트곶에 접근하자, 잉글랜드 함대는 둘로 나뉘었다. 존 버러가 이끄는 한 부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함대를 기다리기 위해 아소르스 제도를 맡았고, 다른 한 부대는 컴벌랜드 잭작과 마틴 프로비셔의 지휘 아래 스페인 함대를 자국의 해안가에 고정하는 전략을 세우고 세인트 빈센트곶으로 항해했다. 5월 말, 잉글랜드 함대는 세인트 빈센트곶 앞바다에서 600톤급 스페인 갤리온 산타 클라라호를 만났다. 잉글랜드군은 격렬한 공격을 벌인 끝에 산타 크랄라 호를 나포하고, 스페인군이 불타버린 선체에서 회수하지 못한 모든 물품을 탈취했다. 이 배는 7,000파운드 상당의 철제품을 대량으로 싣고 있었고, 서인도 제도로 가서 산루카르 데 바라에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 전리품은 마틴 프로비셔와 조지 클리퍼드에게 분배되었다.
6월 초, 잉글랜드 함대가 남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이때 존 버러의 로벅 호가 스페인 플리부트를 긴 추격 끝에 스페인 해안가에서 따라잡아서 나포했다. 플리부트의 선장은 카디스와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 대규모 스페인 함대가 준비되었다고 진술했다. 이 함대 지휘관은 제2대 산타크루스 후작 알론소 데 바잔으로, 스페인 제국 군주 펠리페 2세의 지시에 따라 동인도 카락선들을 항구로 호위하고 잉글랜드 함대를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마틴 프로비셔의 함대는 6월 18일 브라질 식민지에서 리스본으로 향하는 설탕을 가득 실은 포르투갈 상선을 노획해 설탕을 확보했고, 며칠 후에는 스페인 카라벨을 노획했다. 프로비셔는 남쪽으로 더 나아가 여러 스페인 선박을 노획한 뒤,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한편, 존 버러의 함대는 아소르스 제도에 정박했다가 6월 25일 아소르스 제도 최북단 코르보 섬 근처에서 대형 선박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시 나포하러 출진했다. 800톤급 포르투갈 카락선 산타크루스 호는 적선 3척에 추격당했다. 때마침 폭풍이 물아치면서 잉글랜드 함대는 리 쇼어에서 물러났지만, 산타크루스 호는 코르보 해안에 좌초되었다. 다음 날 아침 폭풍이 지나가자 상륙한 포르투갈인들은 근처에 참호를 설치하고 화물을 내린 뒤 배를 불태웠다. 나중에 이걸 알게 된 존 버러는 즉시 군인 100명을 파견하여 해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해안을 지키던 적병을 손쉽게 물리쳤다.
산타크루스 호 사무장과 외국인 포수 2명을 비롯한 포로들이 잡혔고, 잉글랜드군의 심문과 고문받은 끝에 15일 이내에 다른 카락선 3척이 섬에 도착할 거라고 자백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함선은 마드레 데 데우스 호였다. 이 배는 함포 32문을 갖춘 1,600톤급 선박으로, 역사상 가장 큰 범선 중 하나로 포르투갈 왕국의 자랑거리였다. 이에 잉글랜드 함대는 이들을 급습하기로 마음먹고, 우선 코르보 마을을 약탈해 물자를 확보했다. 이후 7월 한 달 동안 플로렌스 섬 남북 축을 따라 약 6마일 간격으로 경계선을 형성했다. 이때 산타크루스 후작은 적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서쪽으로 항해해 잉글랜드 해군을 요격할 기회를 놓쳤다.
8월 3일, 경계 근무를 서던 데인티 호가 자기들을 향해 직접 향하는 마드레 데 데우스 호를 발견하고 즉시 공격했다. 정오 무렵에 뉴포트 선장의 골든 드래곤 호가 가담했고, 로벅 호도 전투에 참여했다. 저녁에는 포어사이트와 프루던스 호가 2시간 간격으로 뒤따라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데인티 호의 앞 돛대가 날아가면서, 5시간 동안 전투에서 제외되었다. 잉글랜드군은 이 큰 배를 가급적 침몰하거나 좌초되지 않고 나포하길 바랐다. 하지만 마드레 데 데우스 호의 대응 포격으로 잉글랜드 함선의 피해가 누적되었다. 존 버러는 자기가 탄 기함 로벅 호의 선수 조작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로벅 호를 마드레 데 데우스 호에 충돌하도록 했다. 얼마 후 포어사이트 호가 달려들어 마드레 데 데우스 호의 주포 바로 아래에 바짝 붙었다.
오후 10시, 잉글랜드군이 어둠 속에서 마드레 데 데우스 호에 등선했고,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 끝에 배를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마드레 데우스 호의 갑판은 시체로 뒤덮였고, 피가 낭자했으며, 특히 조타실 주변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탄약이 가득 찬 선실에 불이 붙어서 배가 거의 파괴될 위기에 몰렸지만, 잉글랜드 장병들이 재빨리 꺼서 폭발을 모면했다. 존 버러는 이 배의 선장 페르난도 데 멘돈사와 나머지 부상자들을 해변으로 보내 치료받게 했다. 이후 존 버러는 승선한 뒤 여왕의 이름으로 선원들의 전리품 약탈을 중단하게 했다.
그 후 잉글랜드 함대는 마드레 데 데우스를 재빨리 수리했고, 뒤이어 이 배를 엄중하게 경비하면서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뒤늦게 잉글랜드 함대가 한 짓을 알게 된 산타크루스 후작은 그들을 100리그 동안 추적했지만, 끝내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지 못하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잉글랜드 함대는 9월 초에 영국 해협에 무사히 도착했다. 존 버러는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동안 마드레 데 데우스에 보관된 물품을 정리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에 따르면 마드레 데 데우스 호에는 보석과 진주, 금화와 은화, 용연향, 최고급 천으로 만든 볼트, 고급 태피스트리, 후추 425톤, 정향 45톤, 계피 35톤, 메이스 3톤, 육두구 3톤, 벤자민(향수와 의약품에 사용되는 특수 발효 수지) 2.5톤, 붉은 염료인 코치닐 25톤, 흑단 15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카오에서 인쇄된 중국과 일본 무역에 대한 귀중한 정보가 담긴 문서도 있었다.
마드레 데 데우스 호는 9월 7일 다트머스 항구에 입항했다. 주민들은 이와 같은 거대한 배를 생전 처음 봤기에, 힘을 모아서 약탈하기로 했다. 이후 온갖 상인, 소매치기, 도둑, 어부들이 배에 올라타서 화물을 마구 갈취하고, 이를 막으려는 선원들을 폭행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전리품의 상당 부분을 군주에게 귀속하도록 규정한 법을 무시한 약탈자들에게 분노하고 그들을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월터 롤리가 여왕의 지시를 받들어 질서를 회복할 무렵, 다트머스 호에 들어있던 50만 파운드에 달하던 화물은 14만 파운드로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해안을 따라 템스강을 거쳐 런던까지 보물을 운반하려면 화물선 10척이 필요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원정을 통해 투자 대비 20배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존 버러와 조지 클리퍼드는 자신들이 받은 이익에 실망했고, 다른 투자자들과 함께 자기들의 몫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조지 클리퍼드에게 일정 금액을 할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존 버러에게는 별다른 보상이 없었다. 이에 존 버러는 분노해 월터 롤리의 친척인 존 길버트와 다툰 끝에 1594년 결투를 벌였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잉글랜드 당국은 마드레 데 데우스 호에 주민들이 대거 달려들어 화물을 빼앗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모든 선박이 항구에 정박했을 때 경비를 철통같이 배치해서 주민들의 접근을 차단하게 했고, 선박들이 하역을 위해 템스강에 입항할 때 부두 노동자들은 "주머니 없는 캔버스 더블릿 바지"를 입는 걸 의무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