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국전 폭동 首都圏国電暴動 Tokyo Metropolitan National Railway Riot | ||
<colbgcolor=#bc002d> 발생 일시 | 1973년 4월 24일 | |
유형 | 폭동 | |
발생 위치 | 일본 도쿄도 및 수도권의 주요 기차역 38개소 (오미야역 / 아카바네역 / 신주쿠역 / 우에노역 / 시부야역 / 아키하바라역 / 유라쿠초역 / 이케부쿠로역 / 칸다역 / 신바시역) | |
주요 원인 | 일본국유철도 노조 단체의 파업으로 인한 승객들의 반발 | |
피해 | 수도권 내 기차역 내부 시설 및 다수의 전철 파괴 | |
검거 인원 | 총 138명 검거 | |
영향 | 일본국유철도 해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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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首都圏国電暴動 (しゅとけんこくでんぼうどう)
2. 배경
1970년대 초반은 일본에서 전후 단카이 세대가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나서게 되면서 대도시권 인구가 폭증하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도쿄의 집값은 이미 버블경제 이전부터 살인적이었기에 하치오지, 타치카와, 오미야, 아게오 등 도쿄 근교는 물론이고 오다와라, 아타미, 우츠노미야, 타카사키 등과 같이 도쿄에서 거리가 먼 교외 지역에서도 통근/통학을 위한 철도 승객이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1] 정작 국철 노조원들이 시위를 하느라 열차 배차 간격이 제멋대로였고 당연히 헬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던 상황이었다.1973년(쇼와 48년) 춘계 임금 협상과 관련한 투쟁의 일환으로 국철노조(약칭 국노)와 국철전동차노조(약칭 동노)에서는 준법투쟁으로 사측에 대항했는데 말만 준법투쟁이지 상당한 운행 지연을 야기하는 태업으로 교통 대란이 발생하게 되어 3월에 아게오 사건이 터졌다. 아게오 사건 자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 수습되었으나 국철노조와 전동차노조는 지속적인 파업을 진행하였고, 운수성과 국철은 파업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엄청난 교통마비를 계속해서 만들어 갔다.
여기에 더해서 국노와 동노는 "아게오 사건은 운수성과 국철의 선동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라는 근거가 전혀 없는 반론을 냈고 이 발언은 한창 불타오르고 있던 이용객들의 교통체계에 대한 분노에 기름을 드럼통째 들이부었다. 그 결과 아게오 사건 이후 한 달이 지난 같은 해 4월 24일에 승객들의 불만이 제대로 폭발하여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3. 상세
3.1. 오미야역 소요 사태
4월 24일 당시 국철의 노선들은 4월 27일부터 있을 교통계 총파업에 대비해 준법투쟁이 강화된 상태였다. 오후 4시 30분 경 오미야역에서는 준법투쟁의 영향으로 도호쿠 본선, 타카사키선이 60~90분 지연되었고 귀가시간과 겹치면서 역 승강장은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일부 승객이 역장실을 점거하는 소란이 발생하는 등 분위기가 잠시 험악해졌으나 사이타마현 경찰 병력이 급하게 파견되어 진화에 나섰고 도부 철도 노다선과 버스로 승객들을 유도해 분산하여 일단은 수습되었다.3.2. 불타는 아카바네역
문제는 아카바네역이었다.도호쿠 본선, 타카사키선 하행 플랫폼에 전혀 오지 않는 열차에 승객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오후 8시에 아오모리행 급행 츠가루 1호를 우츠노미야역까지 보통열차로 운행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정시 운행 중이었다면 츠가루 1호는 오후 7시 35분에 우에노역에서 발차해야 했으나 준법투쟁과 화물 적재 지연의 영향으로 오후 8시 15분이 돼서야 발차했고 출발할 때부터 열차 안에는 지옥도가 펼쳐진 상황이었다.
츠가루 1호가 아카바네 역에 도착하기 전에 상행 중거리 열차가 역에 들어왔는데 홈 안의 승객 1,500명이 오지 않는 하행열차에 불만이 폭발해 "열차 돌려서 빠꾸해라!" 라고 요구하고 기관사를 끌어낸 후 전차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오후 8시 30분, 츠가루 1호가 수백 명이 기다리는 아카바네역에 들어왔으나 우에노역에서부터 승객을 마구잡이로 우겨넣고 도착했던 터라 이 이상의 승객을 더 태울 수 없었다. 이에 이용객들은 기관차를 둘러쌌고 이 기세에 놀란 기관사는 임무를 내팽개치고 도망갔다.[2] 츠가루 1호는 꿈쩍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승객들은 움직이지 않는 열차 창문을 깨부수기 시작했으며 국철 측은 케이힌토호쿠선으로 승객을 분산하려고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 노선의 열차 또한 신호기 고장으로 아카바네역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고, 이를 기다리다가 버티지 못한 승객들이 철길 위를 걸어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후 9시 경, 아카바네역은 6천 명이 넘는 승객들로 넘쳐났다. 화가 날 대로 난 승객들은 역장실로 몰려가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급히 경찰기동대가 출동했으나, 이를 본 시민들의 분노가 더욱 커져 결국 대치상황까지 흘러갔다.
오후 9시 30분 경에는 1번 선에 정차되어 있던 케이힌토호쿠선 이소고역행 열차 내부에서 발연통이 폭발해 차내가 파괴되었다. 오후 10시 30분 경에는 어느 남성이 운전대에 불을 질렀다.
아카바네역에서 열차운행이 중지되며 야마노테선 등 다른 국철 노선에도 영향이 전해졌고 수도권 일대 철도는 유례가 없는 대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폭동은 철로를 따라 다른 역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3.3. 다른 역으로 번진 폭동
한편 우에노역에서는 9시 전부터 출발하지 않는 열차 때문에 지친 승객들이 타카사키선 카고하라역행 열차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타카사키선과 토호쿠 본선 양쪽의 기관사를 끌어내어 열차를 끌고 가 버렸다. 7번 선 승강장에서 승객 3천 명이 발화통에 불을 붙이고 유리창을 깨부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역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부터 역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승객들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하자 출동한 경찰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폭도들은 역사의 매표소 등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직원들은 전부 도주해 역이 무인상태가 되었다. 이후에도 파괴행위는 계속되어 다음날 0시 20분 경에는 역 광장에서 방화소동이 일어났고 움직이지 않는 열차의 행선판을 뜯어내 불 속에 던져넣는 사태도 벌어졌다.신주쿠역에서는 우에노역의 소란 발생 영향을 받아 9시 10분 경부터 소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9시 30분 경에는 역장이 야마노테선의 운행 중지를 안내했고 사철과 다른 노선들로 승객을 분산시키려 했다. 이에 승객들이 역장실에 난입하는 소동이 있었다. 10시 경 서쪽 출구 요금정산소와 매점이 습격당했다. 동쪽 출구에서는 철도공안실에 방화가 벌어지는 소동이 일어났다. 폭동은 그 다음날 7시까지 계속되었으며 가담자는 최대 2만 명에 이르렀다. 그래도 신주쿠역의 직원들은 도망가지 않고 사태 수습에 끝까지 힘을 써서 후에 감사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시부야역, 아키하바라역, 유라쿠초역 등 총 38개 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 등 폭동이 벌어졌다. 군중은 32,000명에 이르렀고 일부는 현금, 승차권, 매점의 상품을 약탈하기도 해서 피해액은 현금으로만 1천만 엔이 넘어갔다. 이케부쿠로역에서는 군중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칸다역에서는 택시를 향해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신바시역에서는 역 시설의 파괴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가스 누출도 일어났다.
이에 오후 10시 경에 경시청에서는 파괴행위 방지, 역무원과 차량보호를 위해 기동대를 최대한으로 소집하는 한편 각 역장들과 역무원들에게 대기명령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11시 30분에는 각 경찰관에게 악질행위자를 체포, 검거하고 사건 확대 방지를 위한 대체 열차편 확보 지시를 내리고 각 사철에 전동차와 버스의 임시운행과 막차시간 연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소란에는 유효한 방법이 없었고 군중에 겁을 먹은 역무원들이 줄행랑을 치는 사태가 줄줄이 발생해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다.
한편 이 사태를 야기한 국철 양대 노조 측에서는 9시 30분 경에 투쟁을 중지하고 전면 협력하기로 했으나 이미 물그릇은 엎어진 뒤였고, 9시 45분 경에는 아카바네선, 케이힌도호쿠선, 야마노테선, 도호쿠 본선, 타카사키선, 조반선(조반선 각역정차 포함)이 이미 운행정지된 상태였다.
결국 다수의 철도차량과 시설이 파손되어 수도권 내의 철도 운행은 4월 25일 10시까지 전면 중지되었다.[3]
4. 사태 진압 이후
당연하지만 폭동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국유철도 및 폭동 주모자인 국노와 동노 등 주요 국철 노조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성난 여론과 정치권의 질타 속에 몰락했고[5], 이후 민영화 과정을 거쳐[6] 제3차 나카소네 내각 때인 1987년 4월 1일부로 해체되어 JR그룹으로 바뀌었다.5. 그 외
- 도호쿠 본선, 카와고에선[7] 등 우에노역을 시, 종착역으로 하는 급행, 특급은 준법투쟁에 더해서 운행정지의 영향을 받아 도중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거나 운행이 중지되어 폭동의 영향은 수도권 밖에서도 있었다. 사이타마현에서는 4개 편, 도치기현에서는 11개 편이 정지되어 승객들이 열차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 아오모리역에서는 다음날 25일 세이칸 연락선에서 토호쿠 본선으로 환승하려는 승객들이 열차가 운행될 조짐이 없자 기다리다 지쳐 버스를 대절해 도쿄로 향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 날 16시 20분에는 본래 시간보다 10시간 지연되어 하행 급행 핫코다편이 도착했는데 그 안에서 보통승차권 131매가 발견되었다. 폭동 때 누군가가 훔쳤으나 도장이 찍혀있지 않아 환금 가능성이 없었기에 핫코다 열차 안으로 던져넣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 세이칸 연락선은 운항 시간표가 열차 운행과 맞아떨어지게끔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둘중에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수백 내지 수천명의 승객들이 발이 묶이게 된다. 그러나 도쿄에 비하면 폭력사태는 비교적 적게 벌어졌는데 열차 승무원을 제외한 역무원들에 대해서 "저 사람들이 뭔 죄가 있겠냐"는 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 도카이도 본선, 요코스카선 연선 구획에서는 폭동의 영향은 경미했으나 25일 오전 10시 경에 오이소역 ~ 니노미야역 간의 육교 공사 중 자재가 낙하하면서 전선을 끊어 11시까지 불통이 되어 혼란에 박차를 가했다.
- 이 사건으로 귀가가 곤란해진 시민이 다수 발생해서 에이단 지하철(현 도쿄메트로)에서는 29개 편성, 케이오 전철(당시 케이오 테이토 전철)이 9개 편성을 추가하여 야간운행을 실시했다. 토큐와 도영 지하철 이외의 각 회사들도 야간운행 체제를 갖추었다. 25일 아침에도 국철은 운행중지 상태였고 사전 예고된 파업이 아니라서 이용객들이 자구책은 생각도 못 한 채 러시 아워 시간에 집중되어 각 사철과 지하철 역으로 쇄도했다. 가장 혼잡했던 노선은 도카이도 본선과 병행하는 케이큐, 토에이 지하철 아사쿠사선과 케이세이선으로 최대 30분 지연을 기록했고 혼잡도도 케이큐 노선이 보통의 2.5배에 도달하는 막장 상태가 오전 10시까지 계속되었다. 이외에 토큐가 각 노선에서 평상의 2.5배, 오다큐 에노시마선도 후지사와역에서부터 대체운행으로 2배를 기록하는 등 대혼란이었다. 입장제한, 개찰제한 등이 실시되었으나 토부 이세사키선, 닛코선, 케이큐등에서는 승객들이 다 타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했고 요코하마역에서는 승객 5천 명이 개찰구로 몰려들면서 7명이 부상을 입었다.
- 야마노테선 지역 내의 운송을 일임하게 된 모양새가 된 에이단 지하철에는 승객이 집중되어 마루노우치선 이케부쿠로역에서는 탑승하는 데 60 ~ 90분이나 걸렸다. 다른 역에서도 입장제한을 실시하고 러시아워 다이어를 연장하는 것으로 사태에 대처했다.
- 버스도 영향을 받아 신주쿠역 서쪽 출구광장에서는 마루노우치선을 타려는 승객들로 지상 정류장까지 사람이 넘쳐나 버스가 진입을 못하여 8시 반부터 10시까지 마비 상태였다. 이케부쿠로역 앞에서는 버스 승객이 긴 줄을 만들어 일반 차량의 진입을 제한하고 승객의 일부를 조시가야공원(雑司ヶ谷公園)으로 이동시키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 25일, 마츠도역에서는 운행하지 않는 열차에 분노한 승객 100명이 역 사무실로 난입해 직원들을 납치해 아야세역까지 걷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오미야역에서도 7시 경에 승객 4천 명이 몰려들어 국철 직원을 압박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건 조반선이었는데 지금이야 츠쿠바 익스프레스가 2005년에 개업했기에 해당 없지만 그 당시에는 조반선 대체 노선이 전혀 없었다.
- 25일 새벽까지 138명이 절도, 방화 등으로 체포되었다. (우에노역 35명, 신주쿠역 43명 등)
[1] 오다와라, 아타미, 우츠노미야, 타카사키는 도쿄에서 80~110km 정도 떨어진 곳들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천안, 원주, 춘천 등과 같이 서울에서 거리가 먼 교외 지역에서 통근/통학을 위한 대중교통 수요가 생긴다고 보면 된다.[2] 하지만 다소 추할지언정 어떤 의미에서는 현명한 선택이기도 했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인 아게오 사건 당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역장이 집단 린치를 당해 부상을 입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는 분위기도 훨씬 험악했던 데다 역장과 달리 지연운행에 대한 직접적 책임이 있는 기관사였으니 그대로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3]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실상 복구를 하지 못했다.[4] 분할 민영화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으며 과거 폭동 사건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철도 분야를 총지휘하는 운수대신을 지냈고, 사건 당시에는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의 통상산업대신을 지냈다.[5] 다만 국철 노조 중 하나였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철도노동조합(철노)은 살아남았는데, 이후 이들은 JR 경영 체제에서 제1노조가 된 전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JR 노조 총련)의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6] 사실 까고 보면 민영화 과정도 매끄럽게 이뤄지진 못했다. 음주운전이나 대리운전을 비롯한 국철 기관사들의 막장 행위는 고사하고, 중핵파가 국노와 연합해서 수도권 내 주요 노선 설비에 테러까지 가했기 때문.[7] 현재와 달리 1973년 당시 카와고에선은 도호쿠 본선의 지선 취급을 받아 우에노역에서 시종착했다. 현재처럼 신주쿠 방면으로 운행하게 된 것은 1985년 사이쿄선 개통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