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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青函連絡船, ruby=せいかんれんらくせん)] Seikan Tarin Ferry | 세이칸 연락선 ''' 폐지 ''' | |
철도연락선 토야마루 | |
노선 정보 | |
분류 | 철도 연락선 |
기점 | 아오모리역 |
종점 | 하코다테역 |
역 수 | 2 |
개업일 | 1908년 3월 7일 |
폐업일 | 1988년 3월 14일[1] |
소유자 | JR 홋카이도 |
운영자 | |
노선 제원 | |
항로거리 | 113.0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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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역과 홋카이도 하코다테역을 이었던 일본의 철도 연락선. 이름은 아오모리(青森)의 '青'와 하코다테(函館)의 '函' 에서 유래했다. 이 이름 그대로 세이칸 터널에도 쓰이게 된다.2. 역사
홋카이도 및 도호쿠 개발의 최전선으로 1908년 3월 7일에 철도차량을 선적해 쓰가루 해협을 건너는 페리 기선이 개통한 것이 그 시초. 아오모리역과 하코다테역이 바다를 향하는 방향으로 건설된 것도 다 이 세이칸 연락선의 인프라 활용을 위해서였다.태평양 전쟁 기간에도 절찬리 운행하였고, 전후에 설립된 일본국유철도가 아래에 나올 여러 연락선들과 같이 인수, 영업을 계속했다. 홋카이도 개발 및 관광 열풍을 타고 하루 여러 대의 선박이 철도차량과 승객을 실어서 오갔다. 다만 이 과정에서 토야마루 침몰사고 같은 대참사도 벌어졌다. 이 토야마루호 사고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악천후시에도 안전한 승객 및 화물 수송을 위해[2] 세이칸 터널의 굴착을 결정, 설계를 거쳐 1971년 착공하였다. 한편, 그 세이칸 터널의 굴착이 시작된 시점에 일본이 고도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고, 국민소득 증대에 따라 삿포로 방면의 항공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3], 세이칸 연락선의 여객 수송 실적은 내려가고 있었다. 화물의 경우 1971년에 855만여 톤, 여객은 1973년 498만 5천여명을 수송한 게 최대 실적이었고 그 이후로는 실적이 내려갔다. 1980년대 초반 국철재건법이 나오고 특정지방교통선들이 사라지던 시기에는 이용객 수가 연간 200만명 대까지 줄었다.
그래도 화물수요는 꾸준히 있었던 덕분에 여전히 하루 여러 척의 선박을 띄웠고, 승객의 경우는 하쿠쵸 및 하츠카리, 호쿠토, 오조라, 소야 등과 연계 운행해서[4] 승객들을 실어 날랐다. 혼슈에서 하쿠쵸나 하츠카리를 타고 아오모리역에 내린 후 세이칸 연락선으로 환승, 쓰가루 해협 건너 하코다테역에 내려서는 호쿠토나 오조라 소야 등으로 환승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그 역으로도 가능했다. 그리고 홋카이도 쪽 연계열차들은 삿포로역을 종점으로 삼지 않고 삿포로를 넘어서 가거나 심지어는 삿포로를 거르고 쿠시로역이나 왓카나이역 등으로 바로 달리기도 했다. 1980년 전까지 일본국유철도는 홋카이도 내에서의 수송보다 혼슈와 홋카이도를 오가는 승객 수송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고, 세이칸 연락선은 그 중심축이었다.
1980년 10월 1일 다이어 개정[5]을 통해, 일본국유철도는 혼슈와 홋카이도의 연결보다는 홋카이도 내에서의 운행 체계 확립
2021년 현재 일반 자동차 및 승객용 카페리는 여전히 절찬리에 민간 여객선 회사들이 운행하는 중으로, 홋카이도 신칸센 개통 이후로도 저가 패스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홋카이도로 가는 제일 값싼 교통수단[7]으로 알려져 있다. 21세기 JR그룹에서 운영하는 철도연락선은 JR 서일본 미야지마 페리의 미야지마 연락선이 유일하다.
3. 기타 연락선들
자매품으로 시모노세키역과 모지코역을 이었던 칸몬 연락선, 왓카나이잔교역과 오도마리역을 이었던 치하쿠 연락선, 시모노세키역과 부산역[8]을 이었던 부관연락선, 우노역과 타카마츠역을 잇는 우코 연락선이 있었다.부관연락선은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면서 폐지되었다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부관훼리로 부활했고, 칸몬 연락선은 칸몬 터널로 대체, 치하쿠 연락선은 어쩌다가 가끔 다니는 여객선으로, 우코 연락선은 세토 대교로 대체되었다.
2021년 현재 위 노선에는 모두 정기 여객선이 다니고 있지만 철도연락선이 아니라 철도와 직접 연계되지 않는 일반 카페리(칸몬 기선은 일반여객선)이다.
[1] 전날인 1988년 3월 13일 세이칸 터널이 개통했으나, 연락선은 그 다음날에 폐지되었다. 따라서 1988년 3월 13일 하루만큼은 세이칸 터널과 연락선이 공존했다. 실제 정식 서류상 폐선일은 1988년 9월 19일.[2] 당장 풍랑주의보 뜨는 순간 선박은 동작 그만이다. 현재도 울릉도에 풍랑주의보 내려서 배가 운행을 못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갇히는 사례가 나온다.[3] 일본항공의 747SR도 이 때 들여왔다. 삿포로 이외에도 오사카나 오키나와, 후쿠오카행에 고정으로 들어갔다.[4] 열차 승객에게 선박 좌석을 우선적으로 배정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세이칸 연락선을 끼고 혼슈와 홋카이도를 오가는 승객들은 일반 승차권 승객보다 1일 빠르게, 즉, 운행일 1개월 1일 전부터 좌석을 예매할 수 있었다.[5] 쇼와 55년 10월이라서 1963년의 산로쿠토오, 1968년의 욘산토오처럼 고고토오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국유철도 3대 다이어 개정(앞의 둘에 1978년의 고산토오 포함) 보다는 덜하지만 나름 중요도 있는 다이어 개정으로, 홋카이도에서는 이때가 3대 다이어 개정보다 여파가 더 컸다.[6] 삿포로는 광주와 비슷하게 홋카이도 전 지역으로 가는 대중교통편이 마련되어 있으며, 자가용으로 출근한다고 해도 도로망이 홋카이도의 가운데에 있는 삿포로에서 홋카이도 각지로 방사형으로 퍼지는 형상이라 삿포로에 살면 홋카이도 어디로 발령이 나도 출근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때문에 홋카이도 각 지역에 직장을 두고 근무하는데 집을 두고 살기에는 생활 인프라가 더욱 훌륭하고 각 지역으로 가는 교통이 편리한 삿포로에 거주하는 사람(주로 공무원, 교사)도 많다. 최소한 전라남도는 면적이 작기라도 하지 북쪽의 대지(北の大地)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면적이 남한 영토의 80% 크기를 자랑하는 홋카이도에서 만에 하나 집이 하코다테인데 발령이 쿠시로로 났다던가 집이 키타미인데 발령이 왓카나이로 났다는 등의 사례가 나오면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도시공학적 모델에서는 교외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 중심부로 출퇴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삿포로나 광주 같은 곳에서는 도시 사람들이 시골로 출퇴근한다고 보면 된다.[7] 청춘 18 티켓으로 쓰가루 해협선에서 특급열차 자유석을 탈 수 있던 특례 및 홋카이도&동일본 패스로 약간의 추가요금만 내면 탈 수 있던 하마나스가 사라지고, 오쿠츠가루이마베츠역과 키코나이역 구간에 한해서만 홋카이도 신칸센 하야부사를 탑승할 수 있는 데다 도난 이사리비 철도의 옵션권 구매가 강제되면서, 저가 패스 여행객들이 신칸센 옵션권보다도 저렴한 페리로 몰리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8] 정확히는 지금은 없어진 부산잔교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