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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4:35:03

송추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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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보병사단 예하부대
제200보병여단 제201보병여단 제202보병여단
포병여단
※ 군 공통의 직할부대(본부근무대, 의무근무대 등)는 소속 부대 문단 참고
※ 과거 송추방위사령부에 대한 내용은 송추방위 문서 참고


1. 개요2. 대상3. 부대 편성4. 신병교육대5. 부대생활
5.1. 출퇴근5.2. 식사5.3. 보급품5.4. 복무기간/휴가/계급/진급/봉급5.5. 일과시간5.6. 퇴근 후 생활5.7. 인적구성5.8. 징계
6. 훈련7. 현역병과의 관계8. 특수 보직9. 전설10. 카더라
10.1. 과연 현역을 능가하는가?10.2. 대민접촉과 사고10.3. 행군 중 사망사고
11. 여담

1. 개요

육군 제72보병사단에서 1981년부터 1996년 6월[1]까지 복무하였던 방위병-단기사병들을 일컫는 말이다. 협의의 의미로는 '200연대' 소속 병사들로 한정하기도 한다.[2]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매스 게임[3]의 주인공이자, 1987년, 1990년도 국군의 날 카드섹션의 담당자였다.[4]

"잘 키운 방위 하나 열 공수 안 부럽다" 정신승리의 주인공이다.

"전투에 실패한 방위는 용서할 수 있어도 퇴근에 실패한 방위는 용서할 수 없다"며 퇴근을 중요시 했다.(전투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제73보병사단금곡방위와 더불어 1980, 1990년대 전투방위의 양대 산맥이다. 하던 일이 거의 같은 금곡방위는 별도 문서가 없으므로, 이 문서 내에도 금곡 전투방위(제73보병사단 전투방위)에 대한 내용이 꽤 들어가 있다.

1987년 국군의날 시가행진 참가부대는 제72동원사단이 아닌 금곡방위인 제73동원사단이 참가했었다.

2. 대상

18방 - 18개월 방위
당시의 징병검사 기준으로 신체등급 3급, 4급[5]인 경우에 해당되었으며, 소집 연도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지역적으로는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거주자들이 주로 소집되었으며, 특정한 해에는 종로구중구, 도봉구 병력들이 소집되기도 했다.[6] 1971년생 이후의 소집자 중, 고졸인 경우에는 신체등급 2급이어도 현역으로 입영하는 대신 방위병으로 소집되었다.[7]

중졸/고퇴[8]인 경우에도 신체등급에 관계없이 방위병으로 소집되었다.

대부분 동일한 지역에서 소집되는 관계로, 훈련소에서부터 자대 배치까지 학연/지연으로 얽히는 경우가 많은데, 군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입대월 기준으로 서열이 정해지며, 학교 선후배, 동네 선후배 사이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군번이 우선이지 고등학교 학번이 우선이 아니다![9]

6방 - 6개월 방위
2대 독자, 부선망 독자[10], 극조혼[11]인 경우에는 6개월을 복무하고 일병 진급과 동시에 소집해제 했었다.

6방인 경우에는 무조건 200연대로 배치되었다.

3. 부대 편성

일반 보병사단과 마찬가지로, 사단 직할대와 3개의 보병연대 1개의 포병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동원사단이어서 모두 감편부대여야 하지만 단 한 개의 연대만 완편부대이고 나머지 2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는 감편부대이다. 따라서 200연대 하나만 대령이 연대장인데 이에 따라 자동으로 선임 연대장이 되었다.

4. 신병교육대

입소 당일에는 오전까지 경기도 양주시 소재 사단 사령부에 개인별로 집합하여, 간단한 입소식 후에 수송 버스에 탑승해서 말머리 고개 중턱에 있는 신병교육대로 향하였다.[13]

기초군사훈련 기간은 4주였으며, 교육훈련 내용은 제식훈련, PRI, 사격(주/야간), 수류탄투척, 각개전투, 50Km 행군, 화생방 훈련 등등 이었다. 각개전투 교장은 신병교육대 건너편의 산 중턱에 위치했는데, 그 경사가 지극히 가파를 뿐만 아니라, 바닥이 흙이나 자갈이 아닌 모난 돌로 채워져 있었기에 포복을 하고 나면 해당 부위가 짙푸르게 멍이 드는 것이 예사였다. 한마디로 경사진 채석장을 응용포복으로 올라간다고 상상해 보자. 4주 후 수료식에서는 기수에 따라 교육사열이 행해지기도 했으며, 입대년/월에 따라, 기수[14]가 부여되었다.

당시 다른 부대와 비교해 봐도, 신병교육대의 시설은 지극히 열악하였으며,[15] 1980년대 중반까지 입소자들은 여전히 작은 연병장 조성공사에 동원되었다. 29만원의 3남[16]이 입소하게 된 것을 계기로(1992년 7월에 입대했다.) 신병교육대가 시설에 대한 대대적 보수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17]

신병교육대의 현역병들은 주로 행정병 보직이었으며, 실제로 방위병들을 교육하는 조교들은 모두 같은 방위병이었다. 이들 조교들은 입영장병 중에서 나름 신체조건이 우수한 병사들을 신병교육대에서 미리 찜하여 선발했기 때문에 매우 우수한 피지컬을 자랑했다. 그리고 매 기수마다 교육조교를 선발한다. 사단과 떨어진 격오지로, 당시에는 신병교육대 부근을 통과하는 대중교통이 없었다. 신병교육대 조교와 단기사병들은 출퇴근 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½톤 트럭으로 신병교육대에서 송추삼거리까지 이동했고, 당연히 출근시간의 지각으로 인해 해당차량을 놓친다면... 그 이후는 상상에 맡긴다.

혹서기와 혹한기 중에 간혹 신병교육을 실시하지 않는 공반기가 있었다.

1992년 전차중대가 창설되면서, 잠시 신병교육대에서 더부살이를 했는데, 당시에 신병교육대 기간병과 방위병, 전차중대 현역병 간의 기싸움이 나름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5. 부대생활

5.1. 출퇴근

특수 보직을 제외한, 일반병의 경우, 오전 8시까지 소속중대 막사로 출근, 오후 5시 퇴근을 원칙으로 했다.[18][19] 퇴근에 관해서는, 영외 야외훈련이 없는 기간에는 대체로 잘 지켜진 편이다.(일부 행정병 제외) 5시에 퇴근하지 않으면, 저녁식사를 배식해야 하는 난점이 있었다. 하지만 방위병 저녁식사용으로는 부식이 보급되지 않았다. 아무리 1980 ~ 1990년대의 군대 분위기라지만 밥은 먹여주었던 시절이었다.(1985년 중반까지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출퇴근 옷차림은 반드시 사복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출근 직후 전투대기실[20]에서 전투복으로, 퇴근 직전 전투대기실에서 사복으로 환복했다.[21] 세탁은 토요일 퇴근하면서 집으로 가져와 세탁하고, 다려서 월요일에 출근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여름철 목요일 정도 되면 훈련을 받느라 전투복에 밴 땀냄새가 전투대기실(내무반)을 가득 채웠다. 일요일 저녁을 먹고 전투복을 다리는 시간이 전투방위들에겐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다. 부대마다 동네마다 다르게 군복입고 출퇴근 하는 경우도 있다.

출퇴근시 교통 수단은 주로 수송협회 산하의 예비군 수송버스, 혹은 156번 버스나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했는데, 이 경우 위병소 통과의 압박이 종종 있었다. 위병소 위병들의 통제가 녹록지 않았다. 두발이나 복장 상태 등에 대한 일명 갈굼이 있었다. 방위병도 상병급은 머리를 꽤 길렀는데, 오히려 사복으로 출퇴근하는 젊은 장병의 특성상 부대 밖에서 최대한 군바리로 보이기 싫었기 때문에, 짬을 먹어갈수록 머리를 기르곤 했다. 별도의 검문 없이 부대 내부로 직행하는 수송버스를 놓치고, 도보로 부대 위병소를 통과해야 하게 되면, 위병 또는 헌병대에서 군기감찰로 지켜서서 검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5시 퇴근시간에는 수천 명의 방위병들이 팔도 사나이를 힘차게[22] 부르면서 위병소로 열을 맞추어 걸어나오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그 옆 도로에서는 수십대의 수송버스가 방위병들을 입석으로 가득 채운 상태로 내려온다.[23]

자가용을 이용한 출퇴근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200연대는 뒷배로 들어온 행정병은 잦은 야근으로 자가용을 끌고 오기도 했다. 대부분 야근때나 비상대기때 부대내 자가용을 끌고 들어오기도 했다.

영외 야외훈련이 잡혀 있으면 (ATT, RCT, FTX, TS, 진지보수, 동원훈련 등) 당연히 퇴근을 못한다. 야외 훈련이 끝나고 복귀한 후에도 영내 정비 명령이 있을 경우에는 목욕과 빨래를 한 다음 퇴근했었다. 주로 ATT, FTX같이 가혹 훈련을 마치고 들어올 경우 영내 정비를 하고 퇴근. 정비가 야밤에 끝날 경우에도 친절히 수송 버스를 동원해 구파발역까지 수송해 주기도 했었다. 버스가 끊겨 집에 못갈 시간임에도 수송버스로 구파발까지 수송한 이유는 방위들을 재울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5.2. 식사

도시락이 없다. 1987년부터 군 부대 근무자는 점심을 제공했다.(1985년 하반기쯤부터 점심을 제공했었다.)[24] 그 전까지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대대, 중대 단위로 부대 밖으로 훈련을 나가면 점심 때 쯤에 부대차량으로 도시락을 실어다 줬었다. 24시간 100km 행군을 할 때에는 식사를 제공했다. 원칙적으로 방위병에게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는 제공되지 않으며, 점심식사에 한하여 부대 내에 존재하는 2곳의 식당-200연대 식당[25], 포병연대 식당에서 각기 제공했다.[26] 배식 인원이 많다 보니[27] 배급량은 물론이고, 식사의 품질이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으며 나중엔 대대식당이 따로 만들어졌다.

가끔 특수한 사정[28]에 의해,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부대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방위병들을 위해 별도의 아침식사, 저녁식사용 부식이 보급되지 않았던 관계로, 가끔은 급양관리관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29] 훈련 때에는 부대에서 집에 못 가고 여러 날 있거나 야간 근무를 하기도 하였는데 도시락 갖고 다니던 때에도 이 때엔 식사가 나왔다.[30] 같은 맥락에서, 방위병 중 생계곤란자는 취사병으로 배치하여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하는 대신 주중에 부대에서 먹고 잘 수 있도록 부대장이 배려해 주기도 하였다.

훈련 중에는 대대 단위 야전 취사로 식사가 제공되었고 식단이 영내 200연대 식당보다 좋았다. 1990년 군납 채소 파동으로 훈련중 양배추김치, 양배추쌈, 양배추국 쓰리콤보로 제공된 적이 있었고 삼시세끼 고기가 같이 제공되었었다. 쓰리콤보가 안스러웠는지 분대용 전투식단인 콩자반 통조림, 멸치볶음 통조림, 가공 깍두기로 대체 지급 되기도 했었다. 통조림 크기가 두루마리 휴지보다 더 컸었다.

현역병들에게 제공되는 우유는 제공되고 맛스타와 건빵은 제공되지 않았다.

방위병은 녹색 플라스틱 식판을, 현역병은 스테인레스 식판을 사용하였다. 즉 방위병에 대한 차별도 있었다.

5.3. 보급품

기본적으로 민무늬 전투복 상, 하의 2벌, 야전상의 1벌, 전투화 2족, 방상내피를 지급받았다. 수색대 방위병은 위장복 상, 하의 1벌 추가 지급받았다. 그리고 군용 속옷과 양말도 지급받았다. 1980년대에는 이름표에서부터 계급장, 부대마크 등을 모두 개인이 장만했다. 부대근처나 남대문쪽의 가게에서 사서 달았다. 철모는 턱끈이 대부분 없어서 뜀걸음 시에는 붙잡고 뛰어야 했고, 군장은 월남전때 미군이 쓰던 것이었다. 모포를 3 ~ 40cm 폭으로 돌돌 말아서 군장 위 아래에 달고 옆에 야전삽을 달았다. 정면 뒷쪽으로는 반합을 다니까 폭이 좁은 군장에 뒤가 튀어나와서 행군하다가 쉴 때 빈군장으로 나가면 등이 배겨서 기대고 앉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 군장이 몹시 낡아서 꺼내기도 부끄러운 말이지만 1980년 중반까지, 행군 전에 빨래줄로 밴드를 만들어서 매고는 살이 쓸려서 고생하는 병사도 있었다. 1988년 이후 비축중이던 D형 군장을 배포해서 쓰게했다. 이전에는 군복도 기워서 입고, 총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자기가 직접 마련하는 형태였다. 보급품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소외된 부대였었다. 1988년 올림픽 행사로 대통령 표창후 이름표와 부대 마크 계급장은 지급했는데, 옷에 박는 것은 부대내 군복 정비소에 맡겨서 박았다. 여담이지만 1990년 군복이 위장복으로 바뀌어 지급되었으나 군납 비리로 물빠짐 현상이 있어 한달간 군복 세탁 금지 명령이 나오기도 했다.

개인지급 소총M16 소총이었으며 병과에 따라 K1 기관단총도 같이 지급되었다, 1991년 당시에는 방탄모가 아닌, 알철모였으며,[31] 군장은 구형 군장으로 1990년부터 신형 군장이 지급되었다.[32][33] 하지만 당시 신형 군장이 빈군장 무게가 2kg였고 구형군장은 그램 단위라 구형 군장을 선호했었다.1994년에 K2 소총이 지급되었다.

금곡 방위, (구)제57보병사단 소속 기동타격대 전투방위는 훈련소에서부터 K2로 훈련을 받았고, 자대에서도 1986년부터 K2를 지급받았다. [34]

면세 담배도 지급되었는데, 한달에 한 보루 반을 줬다. 종류로는 군 '백자', 군 '솔'을 줬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 대신 매월 1280원을 현금으로 지급받았음.[35] 그 이전 1980년대 초에는 현역병에게 무료로 지급되던 한산도, 은하수 담배가 방위병에겐 지급되지 않았다. 중반이후 동일하게 지급되기는 했으나 시중 330원 짜리 한산도 은하수가 현역보다 먼저 200원짜리 백자로 변경 지급되어 원성을 샀었다가 백자에서 500원짜리 군솔로 변경되면서 원성이 사라졌다.

총기 수입포 보급이 안돼 총기 수입을 선임병이 소집해제때 던져주고 간 내의를 찢어 사용했다. 보급품은 오직 강중유와 윤활유.
현역병과 방위병을 가르는 가장 큰 보급품의 차이는 바로 세면백이다.[36]

5.4. 복무기간/휴가/계급/진급/봉급

1986년 이후에 방위병의 복무기간이 총 18개월로 변경됨에 따라, 이병/일병/상병의 진급기간은 각기 7/8/3개월이며, 휴가는 정기휴가 10일, 말년휴가 10일로 복무기간 동안 총 2번의 휴가가 주어졌다. 1984 ~ 1986년경에는 아직 14개월 근무 였지만 분대장집체교육을 수료한 단기사병(부대 안에서는 절대로 방위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은 상병으로 진급하였다. 간혹, 복학했을 때 학교의 담당자가 방위병이 어떻게 상병이냐고 생각해서 일병으로 수정하여 기재하는 경우가 있었다.

복무기간을 모두 채우면, 18개월 방위는 상병으로 소집해제되었으며, 6개월 방위는 일병 진급과 동시에 소집해제되었다.

대학생 출신인 경우에 교련교육의 이수 여부에 따라 복무단축 혜택이 있었다. 문무대전방입소 교육을 모두 마치면 20일 단축 혜택, 문무대 교육만 마치면 10일 혜택이 주어졌다. 즉 87학번까지는 20일, 88학번까지는 10일 혜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89학번부터는 대학교에서 교련이 폐지됨에 따라 없어졌다.[37] 원칙적으로 혜택이 있었으나 소집해제 명령이 정시에 떨어지지 않으면 교육을 마친 87학번이라도 혜택이 날아 가기도 했다.

현역병과 다른 진급 개월수로 인하여,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38]

1991년 기준으로 교통비로 매월 5000원, 담배값으로 1280원이 지급되었다.

5.5. 일과시간

통상의 상비부대에서 실시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과 시간을 보낸다. 즉, 교육/훈련/작업/경계. 단, 일과 시간은 08시 출근 이후부터 시작해서 17시 퇴근 전까지 였다.

통상 동원사단의 감편 편제의 분위기였기에, 완편 부대인 200연대를 제외하면, 그다지 빡빡하거나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39]

다만, 오리지널 전투방위인 200연대의 경우에는 일과 시간의 교육훈련이 상비사단의 교육훈련과 거의 동일했다. 주특기 별 훈련(M60, 90mm 무반동총,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 등등)을 받거나, 상황에 따라 작업, 부대 외곽 경계 등에 동원되었다.

드넓은 사단 주둔지의 야간 경계를 위해서 밤에만 출근하는 야간 경계병들이 존재했다. 오후에 출근해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다음날 오전에 퇴근[40]하는 방식이었는데, 각 부대별로 로테이션 되는 기간은 달랐지만, 짧게는 하루, 길게는 17개월[41]까지였다. 야간 근무 이후에는 별도의 정비[42]가 주어졌다. 주 대상자는 본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저소득층이 많았다.

포병연대도 200연대와 마찬가지로 방위병들이 압도적 다수였으며 작업, 훈련의 연속이었다. 포병연대 역시 타이어박 사단장 지휘 하에 있었던 만큼 타이어 작업을 피할 수 없었다. 경사면이나 배수로를 타이어로 곱게 포장하는데 4 ~ 5일을 고스란히 쓰는 경우도 있었다. 요령이 없는 신병이나 이등병은 폐타이어에 흙을 꽉꽉 그리고 빵빵하게 채워넣느라 개고생을 했지만 요령과 짬밥이 있는 선임병들은 작업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나중에 뽀록이 나면 큰일나는 작업은 정말 빵빵하게 흙을 채워넣었지만 뽀록이 나도 별 문제가 없을 작업에는 `앞은 빵빵하게, 뒤는 얼레불레`라는 지혜로운 작업 철학을 구현하기도 했다.

포병연대의 대부분 훈련은 방열이었다. 방열은 포신을 사각과 고각상으로 표적에 조준시키는 작업이다. 송추방위병들이 했던 방열은 100% 수동방열로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포를 움직이는 작업이었다. 155mm 곡사포 대대였던 623대대는 5톤 이상이 나가는 155mm 곡사포를 방열했다.[43] 포반원들이 쟈키를 띄우고 가신을 벌리고 40kg쯤 나가는 훈련용 포탄을 장전했다.[44]

623 대대가는 다음과 같았다.
오봉산 바라보며 포탄을 쏠 때면
초탄에 효력사 우리는 선봉대대
장미같은 그녀 앞에 벌벌 떨지만
가신을 벌리고 쟈키를 띄우면
번개같은 동작에 오차는 공밀이다

랄라랄라 623 무적상승 623
623 623 무적의 623

송추방위로 입대했던 연대 작곡과 출신 방위병이 작곡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5.6. 퇴근 후 생활

통상 17시에 퇴근하면,[45] 다음날 부대에 정시 출근하기 전까지는 이른바, '자유시간'이었다.

평일에는 구파발이나 연신내, 불광동 등지에서 자대별로[46] 간단한 회식을 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토요일 12시 퇴근 이후에는 신촌이나 홍대거리, 종로 등지로 흩어져, 광란의 회식을 벌이기도 했다.[47]

별도의 경제 활동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나, 대민 마찰의 우려가 없는 아르바이트[48] 수준의 경제 활동은 대부분 할 수 있었다.

자기개발을 위한 학원 수강도 가능했다.

1990년 행군 도중 일사병으로 사망한 사고 이후에, 퇴근 후의 생활에 대한 간부들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어, 퇴근 후의 회식에 대한 금지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며, 퇴근 후 일정시간 이내에, 본인이 귀가했음을 알리는 번개통신 보고를 해야 하기도 했다.[49]

202연대 3대대 방위병들은 동원훈련장으로 출퇴근 하였다. 그래서 송추역에서 산을 가로질러 줄맞춰 출퇴근 했는데~ 가끔 퇴근때는 산 위에 있는 무덤가 옆에서 얼차려 받고 퇴근도 했다. 즉 방위병도 군기가 대단했다.

5.7. 인적구성

1991년 기준이다.

5.8. 징계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 영내 대기라는 징계가 주어지기도 했다. 즉, 방위병인데 퇴근을 안 시키고 전투대기실에 남긴다. 물론, 대형 사고의 경우,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영창[54]군사법원[55]의 회부는 전군 공통이다. 200연대의 경우 징계는 심각도에 따라 대대 군기 교육-> 사단 군기 교육대 입소-> 군단 영창 입소였다. 당연히 영내 대기는 없었다. 방위가 대기할 영내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6. 훈련

200연대의 훈련과 나머지 연대, 직할대의 훈련으로 크게 나뉜다.

200연대의 경우, 상비사단의 실행하는 모든 훈련을 동일하게 수행했기에, 송추방위 전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ATT, RCT, FTX, 팀 스피릿, 춘계, 추계진지공사, 혹서기 훈련, 혹한기 훈련, 행군 등이다. 야외 훈련의 경우 보통 1주일, 길어지면 2 ~ 3주 정도 진행되었으며, 당연히 출퇴근은 없다.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면 '정비'라는 이름으로 2~3일 정도의 휴무가 주어졌다.(출퇴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상 훈련이 금요일에 끝나고 휴일 포함 2일간 정비가 주어진다). 100km행군은 혹서기와 혹한기 훈련에 실시하였고 18개월 동안 3번이지만 훈련 1개월전 입대한 경우 말년에 4번째 행군을 하기도 한다.

송추가 유명해진 것은 그 훈련의 강도도 있겠지만, 1.21사태때 김신조 일당이 통과한 지역이라는 점 때문에 야간에는 고개를 통제하고 주위로 잘 정비된 호에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실탄과 수류탄 등을 소지한 채 투입되어 매복작전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까지 한건진 모르겠으나 1980년대 중반에는 말머리고개 정상에 구축된 진지에서 중화기중대를 제외한 200연대의 각 중대가 돌아가면서 경계를 섰고, 24시간을 근무하므로 전일 정상 출근하여 익일 오전 퇴근하였다. - 기동타격대라고 불렀다.(81미리 박격포가 지원나와서 진지구축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일 아침 엄격한 통제 속에서 실탄과 수류탄 등 수령하고 부대를 출발하여 약 10여km를 걸어 24시간동안 투입되었는데, 원래는 3개 소대가 돌아가면서 해야 하지만 출퇴근하는 병사들이므로 안전사고 등을 우려하여 1개 소대만 경계에 투입되었다. 야간 매복 중 코펠에 라면 끓여 먹다 걸리도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모텔, 음식점 등이 들어서서 당시 근무자들에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측정이 있거나 하면 약 한 달 전부터 주로 부대 밖 훈련지였던 소머리, 말머리 고개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평지가 시작되는 곳부터 구보로 귀대하기도 했는데 지금같으면 통행량으로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당시는 주말이 아니면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다. 10km를 한 시간에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200연대는 출근 후, 아침 2시간을 기본적으로 태권도 훈련을 한 후에 일과를 시작했다. 유단자는 괜찮았지만 단을 따지 못한 병사는 아무리 추워도 상의 탈의하고 맨발로 연습하도록 했다.[56] 1985년 군단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89년 소집된 본인의 경우와 다르다. 일과 시작은 점호와 구보였고 바로 야외교장에서 교육훈련이 시작되고 교육외 시간에 무단자들은 거의 태권도훈련이다. 전투체육시간도 예외없이 무단자는 태권도시간이다.)

군 생활이 1년쯤 경과했을 때, 분대장 교육대상자들은 다시 한 번 신병교육대분대장 교육을 받으러 가게 된다.[57]

나머지 연대와 직할대의 경우, 해당 대대의 동원훈련유격 훈련만 하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격은 부대 주둔지 뒷산에 있는 오봉유격장에서 받았다.[58] 물론 방위병의 기본 덕목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출퇴근 유격이다.[59] 이곳으로 유격을 받으러 온 타부대의 현역들도 덩달아 문화충격을 받았다.[60] 1989년, 1990년, 1991년까지의 유격 조교들은 201연대 4대대 병력이었으며, 이후 1992년부터는 수색대대에서 교육을 담당했다.[61] 92년 방위 유격 조교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은 헌병들이 열 받아서 퇴근하던 방위 유격 조교들을 잡으러 수송버스 정류장에 들이 닥쳤고 방위 유격 조교들은 빤스런했었다. 당시 사단장님의 중재와 유격훈련의 강도를 낮추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연 1회 전장병 유격훈련을 했는데, 18개월로 늘어난 이후에는 재수 없으면 두 번 가기도 했었다.

금곡 방위, 67사단 방위병은 사단 본부에서 유격을 받았다. 역시 출퇴근이었으며 조교는 현역 사병과 부사관. 매일 출퇴근하기 힘들다고 유격 기간동안 텐트 치고 자는 현역과 함께 유격장에서 자는 선임 방위병도 있었다.

사격훈련의 경우, 도보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실거리 사격장에서 실시했다. 기본적으로 예비군용 교탄이 많이 남았기에 사격 훈련은 매우 자주 행해졌고, 소모사격도 많았다.[62]

팀 스피릿 훈련은 2주간 실시하였으며 선발대는 훈련 1주전 출발해서 훈련 종료 1주후 귀대하기도 했다. 훈련 중 방위가 포를 쏜다 하여 주이 타부대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훈련 중 미군 지나간 자리에 탄피 줏어 탄피 분실 땜방용으로 비축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다.

200연대는 1사단 RCT 훈련에 대항군으로 단골 차출되었으며 빨간색 마크로 분장을 하고 투입되었다. 주로 야간 투입되어 폭파 딱지를 붙이고 복귀하는게 주 임무지만 가끔 육탄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3번 나가면 1번은 맞고 온다는 역대 전적을 자랑한다.

1989년 9사단(백마부대)과 임진강 도하훈련을 콜라보로 했는데 200연대는 IBC훈련 한달 받고 투입되었고 한 IBC에 두 부대 병력이 섞여 훈련을 진행했었다. 도하 중 IBC 하나가 뒤집어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방위만 살았왔다는 전설이 있다.

7. 현역병과의 관계

훈련과 마찬가지로 부대간에 무척 분위기가 달랐다고 한다.

현역병들이 대놓고 방위병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수적 열세나 상똘아이 방위병들의 존재[63], 또한 방위병들에 의한 각종 편의 제공[64]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무 수행에 관해서는 같은 중대, 대대 안에서 임무 수행시 묘한 경쟁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현역이나 방위병이나 신병 시절에는 이런 묘한 관계 때문에 무척 괴로웠었다. 현역 고참들은 현역 신병들에게 방위병 상대로는 계급과 무관하게 말을 놓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65]

반대로, 방위병 고참들은 신병에게 현역 고참을 상대로 다나까를 쓰지 말고 경례하지 않을 것을 강요했다.[66] 또 그렇게 티격태격 하다 보면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라 서로 정이 들기도 하곤 했다.[67]

200연대의 경우에는 중대에 간부외 현역이 없었고 연대 본부에만 현역병 5 ~ 10여명이라, 연대본부 건물에 들어가야 현역을 볼 수 있었으나, 201연대, 202연대의 경우 대대 40명 중에 방위병 5 ~ 10여명이라 현역병들의 등쌀에 치이며 살았다고 한다. 물론 내무부조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방위병들은 퇴근을 하기 때문이다.

직할대의 경우 수적으로 비슷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상호간에 짬밥 대우는 해주는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냥 서로 '요'자를 써주는 선에서 타협했다.

보통 중대, 대대가 다르면, 상대방을 아저씨 취급하는 것은 전군 공통이다.

8. 특수 보직

보통 사단에도 다 있는 보직이나, 방위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는 보직이다.

그리고, 소집해제 1 ~ 2개월 전에 원래 소속 자대로 복귀한다. 200연대에서는 부대 특성상 현역 못지 않은 정규훈련이 많았던 관계로, 특수보직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짬밥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대에서도 선임 대접을 별로 해주지 않는 편이었다. 따라서, 복귀 후 전역 전까지는 소속 중대에서 좀 애매한 위치가 되었다. 전역 대상자는 훈련보다 교육 위주의 일과가 구성되므로 몸이 고단할 일은 없겠지만, 부대원들에게 제대로 된 중대 고참으로서 대우받기는 불가능했다.

9. 전설

신체검사 2급 이하의 방위병들이 소화해야 하는 훈련치고는 매우 강도와 빈도가 높았다.(특히 200연대) 하지만 훈련의 정도가 당시 일반 상비사단에서도 모두 감당해야 하는 통상의 수준이었다.

10. 카더라

전설 못지 않게 일병 카더라 통신도 많이 양산 되었으며 이 중에 사실이 아닌 것을 몇 가지 밝힌다.[81]

하지만 전투대기실 생활[83]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정해진 일과표에 따른 훈련이었고, 일과시간 중에는 여유를 주지 않고 훈련을 시켰다고 보면 된다.(50분 훈련, 10분간 휴식을 말한다.) 오전 정신교육과 오후 전투체력의 날인 수요일을 빼면 일주일에 4일을 오전 4시간, 오후 4시간으로 채웠다. 주 5일 근무제 이전 토요일은 4시간 훈련이고. 가사나 학력 미달 등으로 몸은 멀쩡한 상태로 온 자원도 있지만, M60을 메면 가로세로가 비슷하다고 할 만큼 키가 작고 말라서 애처로운 병사들도 많았다. 그래도 다들 그 힘든 훈련을 버텨냈다. 반복되는 훈련을 거쳐 상당히 쓸모 있는 병사들이 될 수 있었다. 워낙 힘들게 훈련을 시키다 보니, 6개월 정도 지나면 웬만한 병사들은 식스팩이 드러나는 강인한 몸매로 바뀌었다.

방위병이라고 별 생각없이 입소했다가 행군, 뜀걸음, 장거리 훈련, 사격, 유격 훈련[84]까지 받게 된다면 그 강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세고, 나중에는 그 기억이 과장되어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의 사례처럼 터무니없이 뻥튀기된 이야기도 있지만 상당부분 사실에 근거한 기억이라고 보면 된다.[85] 전쟁이 나면 병사들의 체격이나 체력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승리의 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10.1. 과연 현역을 능가하는가?

200연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상비사단의 현역병과 비교하여 훈련량이나 강도에 비해서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평한다.

18개월이라는 짧은 복무기간과, 일과시간 이후의 퇴근이라는 절대적인 넘사벽 메리트는 당시 다른 상비사단의 현역병들이 치러야 하는 몸고생 마음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 맞다. 그러나 완편연대 인원들이 현역을 능가한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를 분석해보자면, 전방의 경계사단이나 완편 상비사단에 비교하자면 능가할 수 없는 것이 맞지만, 후방의 기행부대(육군본부, 보안사령부, 군수사령부 등)나 지역방위사단 (30번대의 2군 지역 지역방위사단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힘들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완전한 뻥이나 엄살로 볼 수만은 없다.

'군대 이야기'라는 특수성 때문에 뻥카가 개입되기 마련인데,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에도, 디펜스 코리아, 유용원의 군사세계, 디시인사이드, 밀갤등의 댓글을 보면 일정 부분의 과장이나 기억착오로 인해서 사실과 다르게 부풀려진 이야기도 가끔 보인다. 반대의 경우에, 이른바 카더라로 취급되는 이야기였지만, 상대편이었던 훈련부대 출신자들의 증언으로 인해서 사실로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대체적으로 가방끈이 긴 병사들로 말미암아 머리를 쓰는 보직의 경우 훈련 효율이나 성과가 월등했다는 증언이 많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방위병을 받는 훈련소에서 대학생, 특히 좋다는 인서울 대학교 다니는 인원을 우선적으로 힘든 곳에 배치하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1980년대 당시 정권의 녹화사업과 관련이 있다.) 현역 입영 대상자 중 고학력자와 학생 운동 참가자는 최전방과 공수부대 등으로 우선 배치되었고, 거주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방위 대상자는 관할 동원사단으로 가되 고학력자가 송추나 남양주의 금곡 방위(제73보병사단)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고학력자를 전방으로 보내고 남은 이들이 배치된 동원 사단의 현역 사병들에 비해 (학력 미달로 방위병이 된 사람을 제외하면) 방위병들의 학력이 높았고, 출신 학교도 더 평가가 높은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 통계적으로도 봐도 어쩔수 없는 결과다. 송추, 금곡은 수도권 동원 훈련 사단이다. 군 입영 대상은 서울 주변에 사는 성인과 대학생이니 당연히 대학생 비율도 높고 그 중 인서울 대학생이 많았고, 현역으로 전방 가고 남은 방위 입영 대상은 다 수도권 동원 사단에 배치되었다.(저학력자는 동사무소 같은 편한 곳으로 갔다) 반면, 수도권에서 복무하게 되는 현역 사병은 전국에서 랜덤으로 모아 배치된 인원이니, 대학생 비율, 인서울 대학생 비울이 당연히 적어진다.

높은 학력이 군에서의 높은 능력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낮은 학력으로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10.2. 대민접촉과 사고

군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정에서 출, 퇴근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사회와 접촉하게 되므로 이로 인한 사건사고가 간간이 발생했다.[86] 당시, 토요일 오후 신촌이나 홍대거리일대에 자주 집단적으로 떼를 이루어 짧은 머리를 하고 돌아다녔던 젊은이들이 바로 방위병 이었다.

사고가 많았던 이유 중에는 고학력자가 많았던 만큼 저학력자도 많은 게 방위였는데, 당시엔 범죄를 저질렀어도 6개월 이하의 형을 받은 인원은 방위병으로는 소집이 되었고, 중졸 이상 고졸 미만 학력인 사람도 방위병 입영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문신이 있어도 현역으로 못 갔다. 그렇게 범죄 세계로 빠졌었거나 또는 나쁜 환경에서 자라 고등학교를 나오지 못할 만큼 거칠게 살던 이들이 꽤 있었으니,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도 높았던 것이다.

1993년, 200연대에서 조리병으로 선발되었던 병사가 주말 동안 대형 사고를 저지른 사례가 있었다. 주요 혐의사실은 음주 상태에서 민간인과의 시비 및 차량 탈취, 음주운전에서 이어진 교통사고, 기물파손 등이었다. 결국, 사단 군사경찰 영창을 거쳐 군교도소에까지 영치되었지만, 돈과 빽을 최대한 활용하여 3개월 만에 자대로 복귀했다.[87]

이에 지휘관들은 병력의 퇴근 이후에도, 번개통신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퇴근 이후에 자택 대기를 강제하기도 했다.[88]

또한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 출신의 방위병들이 퇴근 이후에 운동권 학생들과 어울릴 경우, 국가보안법 혐의를 받아 영창에 수감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10.3. 행군 중 사망사고

1990년 7월 9일 오전, 하계종합훈련 행군 도중 200연대 2대대, 4대대에서 40명이 소사고개에서 쓰러지고 그중 3명이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큰 사고가 있었다. 현역 복무에 부적합한 신체조건의 방위병이었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했으나 대부분이 신병들이었고 혹서기 훈련에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혹서기 훈련 첫날 행군 중 쓰러진 병사를 계속 걷게하여 사망에 이르렀고 그 날 날씨는 섭씨 32도가 넘었으며 행군 중 아스팔트 온도는 훨씬 높은데다 소사고개까지 오르는 언덕 길은 경사가 높은 힘든 구간이다. 무리하게 강행시킨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당시 헌병대에서 행군 중 비틀거리는 사병을 뒤에서 똑바로 걸으라며 걷어 찼다는 증언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사망자를 보호자의 시신 확인 및 동의 없이 즉각 화장까지 마치고 유골 전달을 한 것이었다. 당시 유가족들이 의문사라며 항의하던 중 만류하던 소속 중대의 중대장 군복이 찢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기사1 기사2

1990년 6월 군번의 전언에 의하면 사망자 중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술을 먹지 않았고 다음날 훈련에 대비하여 일찍 자고 일어나 정상적으로 출근하였다고 들었으며 전언자 또한 6월 군번자이고 다른 대대 복무중인 자였다. 1990년 7월은 밤에는 비, 낮에는 폭염이 계속된 날씨였다.

이 사건으로 연대장 등 영관급 3명은 군단 징계위원회에 중대장 등 위관급 지휘관 5명은 사단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11. 여담



[1] 마지막 방위병 입대가 1994년 12월 이었다.[2] 201연대, 202연대의 경우 중대 기준 십여명으로 구성되는 등 전형적인 동원사단의 형태였으므로 대부분의 병력이 200연대 소속이었다.[3] 고놀이, 떠나가는 배, 오작교, 혼돈[4] 86 아시안게임 카드 섹션에는 역시 수방사 예하부대인 57사단을 비롯한 향토사단의 방위병이 동원되었다. 2개월간 노천에서 맹 연습을 하느라 얼굴이 눈코입이 안 보일만큼 새카맣게 탔었다.[5] 연도마다 차이가 있는데 1969년생 ~ 1972년생이 징병검사를 받았을때 대학 재학 이상인 경우에는 3급 판정자도 보충역이었다. 1968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 3급 판정을 받은 경우에는 학력에 따라서 현역인 경우도 있고 보충역인 경우도 있었는데 대학 3급이면 현역, 고졸 3급이면 연도마다 현역인 경우도 있고 보충역인 경우도 있었다. 4급도 방위 받았다. 서울 성북구 거주에 대학 재학자인 4급 판정을 받은 65년생이 86년에 18개월로 입소한 경우가 있다.[6] 72사단이 아닌 56사단으로 배치받고자, 위장전입을 하기도 했다. 서대문구에서 은평구로, 은평구에서 서대문구로 했다.[7] 당시 병역처분기준에서는 고졸 2급도 현역대상으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같은 2급 현역병 대상자라도, 대학에 합격한 경우에는 현역으로 입대했으며, 3수의 경우에는 보충역으로 전환되어 방위병으로 소집되는 경우도 있었다.[8] 동네에서 심하게 놀던 형님들이 많음[9] 친구끼리 같은 자대에서 고참과 졸병으로 만나면 대략 난감했다. 단 둘이 있을 때 아니면 무조건 군번순이다.[10] 父先亡 獨子 :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셔서 안 계시는 독자[11]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또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으면 해당된다.[12] 사단 직할대의 경우 1개 대대가 현역병, 방위병을 합쳐서 50여명을 채 넘지 않았다. 보통 직할대대의 지휘관은 소령.[13] 지금은 방위병 제도가 폐지되었으니 당연히 동원사단에 있었던 신병교육대도 없어졌다.[14] 1991년 2월 입대자의 경우, 91년 2기.[15] 콘센트막사(비닐하우스처럼 생겼으나, 겉은 함석이었고 보온재로는 석면을 썼다.)였으며, 물 사정이 극히 엉망이었다.[16] 전재만[17] 당시 신병교육대 입소식에서 부대장이 최근에 건물 보수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혔었다.[18] 8시까지 출근하려면, 최소한 각 자신의 집에서 6시에는 기상을 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19] 부대에서 운용하는 '수송버스'에 앉아서 가기 위해서는 이보다도 더 빨리 나와야 했다.[20] 방위병은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생활관은 전투대기실이다.[21] 구파발에서 3개 사단의 방위병들이 출퇴근을 위해 모였을 경우, 이들이 모두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22] 1절 첫가사가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펴면 고향의 안방'인데 가사대로 퇴근 후 집에 와서 두 다리 쭉펴면 고향의 안방이 되는거다.[23] 당시 요금 500원이었다. 1985년도에 출퇴근 요금이 같았으나 출근시에는 위병소 터치 안 받고 내리는 곳까지 자면서 가니까 모두 타려고 하지만 퇴근시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관계로 잘 타지 않자 출퇴근 요금을 차등적용하였다.[24] 주민센터 등 지역 근무자는 유격 훈련 입소 같은 훈련 때를 제외하면 식비를 지급했다.[25] 200연대 1대대와 2대대 사이에 위치했다.[26] 식당의 구성인원 역시 각 중대에서 선발한 단기사병이었다.[27] 한끼의 배식인원이 대략 3,000여명이었다.[28] 행정병의 야근, 야간근무조, 새벽근무조, 생계곤란자, 짬밥성애자[29] 물론 웃자고 하는 갈굼이었다.[30] 원칙적으로는 밥을 주면 안 되므로 방위는 퇴근시켜야 하는데, 번거롭게 그러느니 재우고 훈련에 참가시키는 대신 부대장 재량으로 식사를 시켜주었다. 감편 부대라 항상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병사나 간부들이나 그 쪽이 나았다.[31] 무겁기도 무거울 뿐더러, 내피와 철모가 따로 노는 경우도 있었다.[32] 구형 군장은 날개 모포, 밑 모포가 있는 군장이었다.[33] 군장을 꾸릴 때마다 모포를 말아야 하므로, 행정병은 웬만하면 날개와 밑 모포는 항시 달아놓았다 군기교육대에 끌려가기도 했다.[34] 대학교를 다니며 문무대, 전방 입소교육을 받아 보지 않은 인원은 부대 번호 5자로 시작하는 수도 동원사단에 배치되었을 경우 이미 모든 사용하는 총기가 K1 K2로 바뀐 후라 M16을 쏠 일이 없었고, 근무지에 따라서는 아예 구경도 못하고 제대, 소집해제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도사단 동원 부대는 전 군에서도 K 시리즈를 이르게 지급 받은 편이다.[35] 동전까지 맞추느라고 행정병들이 은근히 스트레스였다.[36] 방위병이야 일과 시간 후 언제든지 집이나 공중 목욕탕에 가서 씻으면 되기 때문이다.[37] 6개월 방위는 이런 혜택을 볼 수 없었다.[38] 현역병들은 6/7/8/9개월로 진급했기에, 2달 입대가 늦은 현역병이 상병 진급을 같이 하는 경우가 발생했다.[39] 사단장 이하, 영관 장교들까지 진급보다는 전역 전에 편히 쉬어가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단, 원스타 사단장인 경우에 분위기가 매우 달라졌다는 후문이 있다.[40] 자대막사에는 취침시설이 없고 일과 후에 잠가버리기 때문에, 기간현역병 내무반에서 수면을 취하면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41] 즉, 훈련소 수료 이후 줄곧 야간조만 하다가 소집해제하는 경우도 있었다.[42] 부대로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대기하며 쉬는 것을 말한다.[43] 물론 5톤짜리 돌을 들어서 움직이는 것과는 다르다. 아무리 구형이지만 그래도 현대식 무기이다보니 사람의 힘을 효율적으로 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도 무겁긴 무겁다.[44] 이런 훈련을 하다가 허리가 나가는 방위병들도 실제로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방위병들이 이런 훈련을 이상없이 견뎌낸 것을 보면 병무청 신체 검사 결과가 과연 정확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45] 퇴근시간은 매일매일 조금씩 달랐다. 소속부대나 업무상황에 따라서 일찍 퇴근한 병사들은 대기 중인 수송버스에서 앉아서 가고, 늦게 도착한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입석으로 탑승했다.[46] 너무 많은 인원은 통제하기 힘들어서 대개 분대별로 이루어졌다.[47] 물론 머리가 짧았기 때문에, 당시의 술집 업주들은 이들이 방위병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곤 했다.[48] 과외교습, 부모님 가게일 돕기, 서빙 등등[49] 당시에는 휴대폰은 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50] 1991년 이병달 소장 (육사 20기) 시절이었다.[51] 당시 부대원들이 매우 신기해했다.[52] 부친이 외교관이라 거의 해외에서 성장했던 관계로 우리말 대화가 불가능한 이가 있었는데, 회화가 가능한 훈련병이 항상 옆에 붙어 있었으며, 사격 훈련시에는 통제관마저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53]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 및 아이스하키 선수가 있었다.[54] 2020년부터 폐지되어 군기교육대 입소로 바뀌었다.[55] 구 군법회의로 2022년 7월부터 고등군사법원이 해체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넘겨졌다.[56] 게다가 200연대 1대대 막사 앞 훈련장은 흙이나 모래가 아닌 거칠게 조각난 잔돌을 깔아놓은 상태였다.[57] 총 4주간 실시했고 주말에는 토요일 오전에 외박하여, 일요일 오후에 귀대하는 형식이었다.[58] 북한산 자락이라 산세가 거칠며 평지가 거의 없다. 조금 과장하자면, 유격훈련보다 부대에서 유격장까지 뜀걸음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경사가 심한 비탈길에서의 온몸비틀기는 진짜로 힘들었다.[59] 이때 수송버스의 내부는 송장처럼 곯아떨어진 병사들이 많았다.[60] 후일 푸른거탑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61] 유격 조교의 인원 중 절반은 역시 방위병이었다.[62] 1993년에는 사단장의 전투력 강화 지시에 따라 한달 가까이, 일과시간의 대부분을 PRI와 실사격으로만 보내기도 했다. 오전에는 막사 앞 교장에서 PRI를 실시하고, 뜀걸음으로 사격장까지 이동하여 대기중에 다시 PRI, 사격 후 귀소하는 일정이었다.[63] 동네에서 놀던 형들이 있었다.[64] 사제물품 대리구입, 일반편지의 발송 등을 말한다.[65] 방위 상병도 초임 하사에게 반말하던 시절이었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66] 방위병이 야간근무를 서게되면 현역 내무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마침 현역 왕고가 성질이 개차반이고, 방위병이 신병인 경우에는 여러모로 갈굼을 당하곤 했다.[67] 측은지심, 상부상조, 인지상정에 가까웠고, 역지사지 같은 것은 역시 없었다.[68] 특급 호텔의 조리사 출신도 많았다.[69] 빵꾸나면 자기 돈으로 메꿔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게다가 가격을 속여서 팔아서 차액으로 용돈벌이도 할 수 있었다.[70] 비인가 파견이 많았다.[71] 테니스 관련 특기자들은 모조리 차출되었다.[72] 군 생활기간 중 최소 1/3에서 절반 이상을 각종 포상휴가로 때웠고, 매일 대형 세단으로 출퇴근했다.[73] 예하 부대 현역병들이 위병소에서는 방위병들에게 맞는 경우도 많았다.[74] 훈련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은 병사가 차출되기도 했다. 포병대대 106 주특기 병사가 차량 이동 중에 잠들었다가 차에서 떨어져 허리부상을 입고 보일러 관리병으로 전속된 사례가 있었다.[75]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것, 즉 계엄령 하에서만 실제로 가능한 훈련이다. 당연히 소총을 휴대하고, 방독면, 대검과 전투경찰용보다 더 길고 큰 곤봉으로 무장했다. 당시 정권은 국민을 진압 대상으로 보고 상시 훈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76] 아시안 게임 당시에는 훈련 시범 때엔 착검하고 훈련한 적도 있다.[77] 여기에는 사정이 있는데, 사격장도 부족하고 쏠 여건도 안되는데 교육용 탄환(교탄) 배정은 다른 부대와 비슷하게 인원에 맞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위병들이 주로 행정병, 전차병, 운전병 보직인 현역 사병 몫까지 쏴서 소비해야 했기 때문이다.[78] 그해 겨울에 신교대 개울 근처 지반의 경사면을 폐타이어로 곱게 포장하는 공사를 강행했다.[79] 도보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사격장까지 뛰어서 가기도 했다. 무장여부에 따라서 무장구보 또는 급속행군이라고 불렀다. 삽을 메고 뛴 적도 있었다.[80] 나중에 제701특공연대로 통합되었다.[81] 당시에는 인터넷이 그다지 발달되어 있지 않았었고, 방위병의 짧은 근무 개월수로 인하여 구전되어 내려오는 일화들에 대한 사실 확인이 어려웠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시 가장 어렸던 송추방위 출신의 예비군들이 4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시점이라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으며, 군대 이야기의 특성상 특유의 심한 거짓말이 가미되기 때문이다.[82] 아주 드물게 대규모의 행사에서 근무자 숫자가 모자라는 경우, 방위병에게 헌병 근무복장을 입혀서 행사장 외곽에 배치했었고, 부동자세로만 서있게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83] 내무생활[84] 연 1차례 전장병에게 실시했는데, 18개월로 늘어난 후에는 운이 없으면 방위라도 유격을 두 번 받을 수 있었다.[85] 1980년대 군대는 2010년대와 달리 아주 무식했다. 구타와 욕설이 난무하는 건 기본이고 지휘관들은 인권 말살이라 부를 만큼 혹독하게 훈련시켜도 잘 한다고 칭찬을 받았고, 혹시 사고가 나도 거의 뒤탈이 없었다. 군사 독재 정권이라, 집권자의 선후배가 지휘하는 곳인 군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리 심한 것도 다 무마되던 때였다.[86] 민간인과의 시비(주로 유흥가, 술집), 다른 부대 현역병 또는 방위병과의 시비, 음주운전, 교통사고 등이 있었다.[87] 사고를 낸 당사자는 3개월 동안 원래 가무잡잡했던 피부가 창백하게 변할 정도로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88] 유사시 즉각 부대에 복귀할수 있도록 통신 축선상에 대기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휴대폰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술을 마시더라도 집에 어디서 마시는지 술집 전화번호를 알려 놓고 마셔야 했다는 뜻이다. 어차피 위수 지역을 떠나지도 못한다.[89] 72사단의 작전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위의 두 고개를 필히 넘어야 했고, 고개의 경사도도 상당했다.[90] 담배값은 담배 안 피는 사람에 한해서이며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지급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