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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 헝가리 |
1. 개요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관계에 대한 문서다. 두 나라는 중세부터 오랜 관계를 지속해왔으며 1882년 11월 21일 세르비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수교하였다. 헝가리는 베오그라드에 대사관, 수보티차에 총영사를 두고 있으며, 세르비아는 부다페스트에 대사관, 세게드에 명예영사를 두고 있다.세르비아에는 184,000명의 헝가리인이 살고 있으며 대다수가 보이보디나 자치주에 살고 있다. 헝가리에는 7,000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있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10세기 경 마자르족들이 판노니아로 이주하면서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관계가 시작된다. 현재의 세르비아와 헝가리 영토 인근에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과 헝가리 대공국이 세워졌는데 1130년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1세의 딸 옐레나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이슈트반 2세의 아들이 결혼하면서 두 나라의 지배 가문 사이에 최초의 결혼을 기록하였다. 이후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은 헝가리-크로아티아 공주 커털린과 결혼하고 그의 동생인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 또한 헝가리 공주 에르제베트와 결혼했다. 세르비아 왕자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헝가리 왕국의 가신으로 들어가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그 후 그는 난도르페헤르바르를 받아내어 수도로 지정했다. 두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서 함께 싸워나갔고 세르비아 제국의 몰락 이후 헝가리는 세르비아인 난민들을 받아주어 남부의 국경 근처에 배치해 방어병력으로 써먹었다. 헝가리와 세르비아 난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점령을 피해 도망쳤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윙드 후사르 부대의 일원이었다.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서진으로 멸망해 루멜리아 에얄레트에 속했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역시 1526년 사실상 멸망의 길을 걸었으나 헝가리 서북부와 크로아티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가문을 국왕으로 선출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을 구성하였고 중부는 오스만 직할령, 동부는 헝가리인의 자치공국 에르데이 공국을 형성했다. 약 150여 년 동안 갈라져있던 헝가리는 퇴쾨이 임레로 인해 촉발된 제2차 빈 공방전과 이어진 대튀르크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승리하여 대부분 합스부르크령으로 귀속되었고 이때 세르비아인 유민들이 합스부르크군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봉기때 많은 세르비아인 농민들이 친 합스부르크 헝가리 귀족들의 민병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레오폴트 1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연이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헝가리 남부에 세르비아인 유민들을 받아들였고 이 지역은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기원이 되었다.
2.2.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며 세르비아 공국이 부활하자 양국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많은 세르비아인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가담하여 헝가리 독립 운동을 방해하였고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세르비아인 다수 거주 지역을 보이보디나 공국으로 지정하여 자치주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전환되자 보이보디나 공국은 폐지되었다.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세르비아 왕국이 건립되고 보스니아, 보이보디나에 대한 세르비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두 국가의 관계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는 꽤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있어 세르비아를 응징하기도 어려웠다.
2.3. 20세기
결국 범세르비아주의 단체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헝가리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속하여 세르비아군과 대치했다.전쟁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는 보이보디나를 비롯한 여러 영토들을 세르비아한테 잃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40년 12월 12일 헝가리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나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헝가리는 이를 어기고 나치 독일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보이보디나를 다시 얻어낸다. 그러나 헝가리가 또다시 전쟁에서 패배하며 다시 도로 빼앗긴다.(...)
두 국가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고 헝가리 인민 공화국에서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을때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를 비판했다.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관계는 유고슬라비아 붕괴가 시작한 1990년대에 최악이었다. 헝가리는 새롭게 독립한 크로아티아를 지지하였으며 크로아티아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통로를 주었다. 그러나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 당시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세르비아 북부를 침공하라는 미국과 영국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선 세르비아 폭격을 중단하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후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관계는 좋아지나 싶었지만 헝가리 총리 주르차니 페렌츠가 코소보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다시 파토나고 말았다.
2.4. 21세기
2013년 세르비아와 헝가리 관계에서 화해가 이루어졌다. 헝가리 대통령 아데르 야노시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헝가리의 세르비아 침공에 관하여 사과하였다. 그 결과 2014년 세르비아 국민의회에서는 헝가리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무효화했다.2015년 세르비아 대통령 알렉산다르 부치치는 유럽 난민 사태 동안 헝가리-세르비아 국경에서 이주민을 대상으로 헝가리가 최루탄을 사용하는 것을 잔인하고 비유럽적이라고 비난하면서 EU의 대응을 촉구했다.#
그 후로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관계는 우호적인 스탠스를 맞추고 있다. 중국이 주도하는 베오그라드와 부다페스트 사이의 고속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또한 헝가리는 코소보를 국가 승인 하긴 했으나 2023년 유럽 평의회에서 코소보가 회원국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가 친러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전통적 친러 국가인 세르비아가 합이 잘 맞는 것도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세르비아와 헝가리는 공통적으로 2022년 대러시아 경제제재에 불참하였다. 또한 두 나라 모두 러시아의 가스 수입 제한에 반대해 왔으며 그 결과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이렇게 양국의 공통된 입장으로 인해 양국 관계는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왔다. 최근 세르비아와 헝가리는 헝가리에서 세르비아의 정유소까지 송유관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2024년 말 현재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관계는 긴밀하다. 헝가리는 그리스, 루마니아와 함께 유럽에서 세르비아의 몇 없는 동맹국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