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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3:20:16

요한 보스코

성 요한 보스코에서 넘어옴

이탈리아어: San Giovanni Bosco
라틴어: Sanctus Iohannes Bosco
영어: Saint John Bo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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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1. 개요2. 유년기3. '돈 보스코'4. 사망 이후와 영향5. 기적과 일화들

1. 개요

가톨릭의 성직자, 교육자.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을 위한 활동을 하는 수도회살레시오 수도회(남자)와 살레시오 수녀회(여자)를 창설했다.

풀네임은 조반니 멜키오레 보스코(Giovanni Melchiorre Bosco)이다. 따라서 본래 이탈리아어로는 '조반니 보스코'라고 불러야 맞지만,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인명을 라틴어 발음이나 통용 발음으로 호칭하는 예에 따라 '요한 보스코'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2]

'젊은이들의 스승이자 신부'로서 보스코(Don Bosco, 보스코 신부님)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며, 편집자·출판업자·학생·젊은이·마술사[3]수호성인이다.

2. 유년기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베키(Becchi)[4]에서 농부인 프란체스코 보스코와 마르게리타 오키에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두 형과 함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다.

그러나 마르게리타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어머니였고, 요한이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마르게리타는 항상 기도를 생활화하였으며,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거지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이 구걸을 하면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1825년, 요한은 9살 무렵 자신의 일생을 계시해 준 을 꾸게 된다.

드넓은 마당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더러 욕을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요한은 그 아이들을 말리려다 되려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얼굴이 너무 빛나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고상한 옷차림을 한 위엄 있는 남자 한 분이 나타나 요한을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주먹다짐으로 하지 말고 온유와 사랑으로 이들을 네 친구로 삼아야 하느니라. 바로 이 일이 불가능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너는 순명과 지식의 연마로써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나는 네 어머니가 하루에 3번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준 그 분의 아들이란다. 내 이름은 나의 어머니께 여쭤 보아라.

어린 요한이 너무나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태양과 같이 빛나는 망토를 입고 있는 존엄한 부인이 나타나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고 한다. 순간 마당의 아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나운 동물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자, 여기가 너의 일터다. 네가 지금 일해야 할 곳이다. 겸손하고 강인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어라. 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있는 이 동물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너는 장차 나의 자녀들에게 하게 될 것이다.
요한이 다시 눈을 들어보니 사나운 짐승들이 모두 순한 양으로 변해서 그 남자부인 곁에서 껑충껑충 뛰놀았다. 요한은 이내 울음을 터트리며 무슨 말인지 설명해 달라고 애원했다. 부인이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요한은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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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보스코의 어린 시절 꿈 속 계시를 묘사한 성화(聖畵)
그는 이 꿈을 평생 간직했으며, 이를 계기로 사제가 되기를 원했다. 후에 그는 70세 무렵, 사망을 몇 달 앞두고 미사를 집전하던 중,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미사 중에 이 꿈이 눈앞에 다시 펼쳐졌고, "9살 때 성모님께서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이제 진정 깨달았다"라고 했다.

집이 가난했던 탓에 사제가 되기 위한 수업을 뒤늦게 시작하였지만, 머리가 워낙 비상했다고 한다. 공부를 할 수 없어 농사일을 거들던 시절에도, 주일미사 강론을 듣고 나서 책 읽듯이 줄줄 외웠다고 한다. 한번은 라틴어 독해책을 가져오지 않은 날, 선생님이 본문을 읽고 해석해 보라고 하자 문법책을 대신 펴놓고 미리 암기했던 본문을 그대로 읽고 해석해서 모두가 놀란 적도 있다고.

재능도 출중했지만, 공부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밤새 책을 읽다가 동틀 때 쯤에 잠든 적이 많았다고 한다. 나중에 점점 건강이 나빠지자 "앞으로는 건강을 위해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따로 해야 할 정도였다.

신학교에서 항상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요한은, 26세인 1841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토리노 교구에서 사목하게 되었다.

3. '돈 보스코'

산업화가 한창이던 당시,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는 일자리를 찾아 시골을 떠나 도시로 왔지만 구직하지 못해 거리를 방황하고 범죄를 저질러 사회로부터 불량하다고 외면받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요한 보스코는 특히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간 소년들을 보고 크게 마음 아파했다. 아무도 돌봐주는 이가 없어서, 출소한 후에도 또다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는 악덕업주도 많고 아동인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지라, 일은 죽어라 해도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하는 소년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신앙을 멀리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기 마련이었다.

이 아이들도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입각한 교육을 받고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받으면 교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일요일마다 맘껏 놀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성당 마당을 내어주었다. "내 아이들아, 죄가 되지 않는 한 마음껏 뛰놀아라!"라고 하며 본인도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즐겁게 놀아주었고, 한편으로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신부에게 엄숙하고 경건함이 강조되었던 시대에,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한복판에서 같이 놀이를 하는 그의 행동은 파격적이었다. 요한 보스코는 아이들과 거리를 두며 근엄한 모습을 보이는 사제상이 아니라, 친근하게 다가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제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주변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난장판을 만든다는 불만이 쌓이게 되자, 토리노시 주변 광장이나 들판에서 아무런 경제적 기반도 없이 수백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술집 옆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출발한 초기 오라토리오는, 곧 청소년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치는 곳으로 점차 성장하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는 오라토리오는 항상 놀이, 음악, 연극으로 활기가 가득했으며, 요한 보스코는 이러한 활동들이 아이들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러나 그 많은 아이들을 모두 돌볼 오라토리오를 운영하는 일은 실로 상당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는 후원을 받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그야말로 평생 동안 하게 된다. 게다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오라토리오에서의 생활비를 면제하거나 대폭 감면해주었기 때문에, 항상 부채가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그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해 보였던지, 동료 신부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두 동료 신부는 요한 보스코를 마차에 싣고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시도 했지만, 이를 알아챈 그가 되려 두 신부들이 탄 마차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화해하고 이들도 오라토리오에서 일을 맡아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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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직접 기술을 가르치는 요한 보스코 신부
시간이 지날수록 오라토리오의 규모가 커지자 좀 더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1859년 12월 8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오라토리오회(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해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승인받았다. 그만큼 요한 보스코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존경했고, 항상 아이들에게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1874년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마리아 도미니카 마자렐로와 함께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도회(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했다. 마자렐로 수녀 역시 어려운 가운데서 살레시오 수녀회를 꿋꿋하게 운영했고, 사망 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수도회를 창설한 후 청소년 교육에 매진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체벌과 강요가 아니라 종교적 유대감을 통해 스승과 제자의 신뢰를 긴밀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명한 어록으로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라는 말이 있다.

요한 보스코 신부의 보살핌을 받은 청소년들은 그를 '돈 보스코'라 부르며 친밀하게 따랐고, 요한 보스코 신부의 교육 철학에 따라 설립ㆍ운영된 도제학교, 공업학교, 일요학교, 야간학교는 큰 성과를 거두어 사회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요한 보스코 신부가 사망하기 전까지 오라토리오 출신 사제들만 천여 명이 넘었다.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오라토리오를 '사제 공장'이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그 역시 사람이었기에 인간적으로 부족한 모습도 보였다. 과거 절친했던 가스탈디 주교에게 말 실수를 하는 바람에 둘 사이는 교황의 중재가 필요할 만큼 매우 악화됐고, 신문에서도 이를 부추기듯 보도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적도 있었다. 이로 인해 바티칸의 인사들 중에서는 요한 보스코 신부와 오라토리오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이도 종종 있었다. 물론 후에 거의 억지로 화해하긴 했지만, 이것은 요한 보스코가 시성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 보스코는 이미 살아 생전에 이탈리아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성덕과 기적으로 매우 이름이 높았고, 그에게 조언을 듣거나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인사들로 쉴 틈이 없었다. 노쇠하여 유언까지 쓰고 모금하러 갔던 프랑스스페인에서도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모였고, 그의 옷을 가위질해 가려는(!!) 사람들을 막느라 수행하던 사람들이 고생했을 정도였다. 아마 성경에서 예수의 옷자락만 잡고도 병이 나은 여인 기사 때문이었던 듯.

4. 사망 이후와 영향

산업화라는 격변기 속에서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빈곤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몸소 실천한 교육자이자 영성가이며 뛰어난 저술가였던 요한 보스코 신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1888년 1월 31일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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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요한 보스코 신부의 시신을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Santuario di Maria Ausiliatrice)에 안장했다. 살레시오회에서는 보스코 탄생 200주년인 2015년을 앞두고 청소년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성해[5]를 모시고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전세계 134개국을 순례한다. 우리나라에는 21번째로 도착해서 2010년 11월 1일부터 11월 17일까지 머무르며 신자들의 참배를 받았다. 관련기사

2015년 6월 21일, 성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토리노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을 방문해 성해를 참배했다.

5. 기적과 일화들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시성된 만큼, 여러 기적을 남겼다. 우선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비슷한 것이 있다.[6] 오라토리오는 그의 생애 동안 풍족했던 적이 별로 없었고, 운영은 항상 적자로 허덕이거나 빠듯하곤 했다.

하루는 빵이 다 떨어져서, 주방장은 고해성사를 주고 있던 요한 보스코 신부에게 찾아와 "빵이 부족합니다"고 알렸다. 고해성사가 끝나고 요한 보스코 신부는 광주리에 있던 빵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나눠주기 시작할 때는 열 몇개 남짓 밖에 없었으나 무려 400여명의 아이들이 빵을 받아갔다고 한다. 이를 먼 발치에서 목격한 아이는 마침 그 날 오라토리오 생활이 싫어서 어머니와 함께 나가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회심하여 결국 신부까지 되었다고.

또한 피정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나눠줄 군밤을 원래 3자루 준비했어야 하나 실수로 1자루밖에 준비하지 못했던 적도 있었는데, 자신들을 따라온 수백명의 아이들에게 양껏 나눠주고도 한참 남았더라는 일화도 있다. 아이들은 군밤을 손에 가득 쥐고 "돈 보스코는 성인이시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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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나지 않는 군밤 광주리
다음으로, 요한 보스코는 오라토리오에 다니던 카를로라는 소년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서둘러 길을 떠났으나, 도착했을 당시 이미 카를로는 죽어 있었다. 그러나 요한 보스코가 "카를로!"하고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눈을 떴고, 방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카를로는 "죽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지 않아 두려워하다가, 심판을 받으려던 차에 요한 보스코 신부님이 깨워서 일어났다"고 했다. 곧이어 카를로는 요한 보스코에게 고해성사를 받고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요한 보스코가 말년에 오라토리오를 위해서 각지로 모금활동을 다니던 시절, 그의 명성을 듣고 미사를 집전하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러 왔다. 하루는 다리가 불편해서 걸을 수 없었던 소녀[7]가 요한 보스코를 만나고 모금을 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마차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소녀는 요한 보스코를 꼭 만나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 이내 마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고 많은 이가 이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또한 지인들에게 꿈 속에서 보았던 내용으로 자주 예언을 했으며, 많은 내용이 후에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가 꿈 속에서 보았던 성당은 후에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건립되었다. 죽을 고비에 있었던 그의 후계자 루아 신부가 병자성사까지 받은 상황에서도 오로지 그만이 "할 일이 아직 많으십니다"라며 태연한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루아 신부는 요한 보스코의 사망 후 20여년 넘게 살레시오회를 지도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선한 일을 하거나 악한 일을 했을 때, 보지도 않고도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맞히기도 했고, 이를 겪은 아이들은 감명하여 평생 요한 보스코를 위해 살았다.

그밖에도 잿빛 가 나타나서 그가 위험할 때마다 구해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요한 보스코가 그리조(그랏조)라고 이름 붙여준 이 개는 어느 날 강도에게 습격당해 봉변당할 뻔한 보스코 신부를 구해주거나, 종일 문 앞을 막고 짖어대서 나가지 못하게 했던 적도 있는데, 알고 보니 강도들이 바깥에서 노리고 있던 걸 눈치채고 막아줬던 것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 누구도 그리조(그랏조)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밤길을 홀로 걷는 늙은 보스코 신부의 앞에 나타나 오라토리오까지 가이드해준 뒤로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일부 극단주의적 개신교 신자들이 공격적인 개종운동에 전념하여 가톨릭과 마찰을 일으키자, 요한 보스코 신부 역시 끊임없는 살해 협박과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납치될 뻔한 적도 있었는데, 그리조가 나타나 범인들을 물어뜯어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였던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가톨릭에서 최연소(14세)로 시성된 성인으로, 요한 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서 생활하다 사망했다. 요한 보스코와 도미니코 사비오가 처음 만난 날, 도미니코 사비오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은 머리가 좋다"고 소개했다. 요한 보스코는 "내일 확인할 테니 책 한 페이지를 외워보라"고 시켰다. 그러자 도미니코 사비오는 곧바로 8분 만에 다 외워서 그를 놀라게 했다. 요한 보스코는 도미니코 사비오가 총명할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도 신심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았다. 고행을 하기 위해 일부러 찬 바닥에서 자고 먹질 않아서, 그가 강하게 말릴 정도였다. 도미니코 사비오가 14세의 나이로 죽자, 요한 보스코는 그의 짧은 생애를 글로 옮겼고, 이 책은 그가 시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비오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1954년 6월 시성되었고, 소년 성가대수호성인으로 지정되어 있다. 어린이 가운데 순교자가 아닌 경우로는 처음 시성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성인들 가운데 최고의 꽃미남이다링크

어렸을 때부터 마술, 카드게임 등 각종 잡기(雜技)에 조예가 있었다. 친구들이 주말마다 마을에 머무르던 곡예사를 보러 가느라 성당에 오질 않자, 그 곡예사와 내기를 벌여 승리하는 등 아크로바틱의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돈은 모두 곡예사에게 돌려줬다.[8] 후에 신부가 되어서도, 거리의 불량 청소년들이 카드게임으로 돈내기를 하는 것을 보고 끼어들어 놀라운 실력으로 판돈을 싹 쓸어버린 다음에 오라토리오로 이끈 뒤 돈을 모두 돌려주었다는 일화도 있었다. 심지어는 어느 날은 그냥 판돈을 싸들고 오라토리오로 냅다 튀었고, 아이들은 이 황당한 도둑 신부를 뒤쫓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돈을 다 돌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아이들이 오라토리오에 가입하도록 권유했다.

요한은 키가 상당히 작은 편이었지만(163cm), 신체가 굉장히 강건한, 그야말로 강골을 타고난 사나이였다고 한다. 힘 또한 엄청났다. 다 죽어가는 건강 상태의 요한 보스코를 걱정한 의사가 그의 기력을 시험해 보려고 "내 손을 꽉 잡아 보라"고 말하자, 요한 보스코는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분명 후회하실 걸요."라고 답하며 의사의 손을 잡고 힘을 줬다. 의사는 손이 으스러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신학생 시절에 동기 몇 명이 달려들어서 넘어트리려고 했는데도 쌀 푸대처럼 엮어 들어서 운동장을 돌아다녔다거나, 길거리에서 투견 2마리가 싸우느라 사람들이 길을 가질 못하자 개 1마리는 집어던지고 다른 1마리는 그냥 걷어차서 도망치게 만들었다거나 하는 일화가 전한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앞날을 예언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위에서 소개한 유년 시절의 꿈도,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일생 동안 반복해서 나타났다고 한다. 이외에도 살레시오회가 해외로 선교를 나가는 꿈, 큰 성당을 건축하게 되리라는 성모 마리아의 계시, 그가 앞으로 겪게 될 시련과 영광에 대한 다양한 비유가 담긴 꿈들을 꾸었다. 그런데 요한 보스코 신부 스스로도 놀란 것은, 결국 이 모든 꿈들이 다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남수단의 톤즈마을에서 봉사하다가 사망한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를 가리켜 '수단의 돈 보스코'라 칭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흔히 이태석 신부를 한국알베르트 슈바이처라고 일컫는데, 사실 슈바이처의 사상은 가톨릭과 좀 심하게 차이나는 부분이 있어 곤란하다. 게다가 이태석 신부도 살레시오회에 소속된 수도사제였으니 '수단의 돈 보스코'가 훨씬 어울리며, 한국의 슈바이처로는 장기려 박사가 어울린다. 또한 이태석 신부가 암투병을 하면서 임종 직전에 자신이 소속된 살레시오회의 설립자인 요한 보스코를 꿈에서 보고 자신을 간병하던 살레시오회 수도자들에게 강복한 후 "Everything is good."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가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칭송받는 성인으로 여겨지는지는 그의 전기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그의 72년 생애를 종합적으로 다룬 <돈 보스코 전기>는 총 20권에 16,830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1898년부터 1948년까지 무려 50년에 걸쳐서 4명의 신부가 이어서 집필하며 완성되었다. 이 20권을 축약한 전기가 <돈 보스코>라는 제목으로 몇 년 전에 한국어번역되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을 찾아보면 좋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조금씩 있지만, 한국어로 나온 최초의 요한 보스코의 전기로서는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여느 성인이 그렇듯, 요한 보스코 역시 성모신심이 매우 깊었다. 위에서 소개한 기적 외에도 병든 이, 보지 못하는 이, 듣지 못하는 이들을 여러 명 치유했는데, 그때마다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성모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십시오'라고 일러주었다. 말년에 건립한 성당 이름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으로 지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벌어질 무렵, 모국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서 벌어진 반 교권 운동에 반발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한 적이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무시했으나[9] 수상인 카밀로 카보우르가 그의 편지를 보고 대신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1] 사진 속에서 요한 보스코 신부가 쓰고 있는 모자는 비레따.[2] '요한'은 통용되는 표기를 따른 것. 라틴어 발음에 따르려면 '요안네스'라고 해야 한다.[3] 어릴 적에 줄타기나 기타 잡기들을 선보이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일화에서 비롯된 듯하다.[4] 현재는 그의 이름을 따 카스텔누오보 돈 보스코(Castelnuovo Don Bosco)로 개명되었다.[5] 요한 보스코 신부의 오른팔로, 성인의 시신을 본뜬 모형의 가슴 부분에 모셨다.[6] 참고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비슷한 기적은 의외로 많이 나오는 편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행한 기적 중 다른 기적들은 이후에 한 사람이 없는데, 오병이어의 기적만은 예수처럼 빵 5개와 2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 넘는 사람들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위엄 쩌는 규모는 아니더라도 핵심 요지는 '사람들을 먹였다'라는 것에서는 대동소이한 기적들이 나온다. 더욱이 예수가 최초로 행한 기적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예수보다 규모는 작아도 엘리야엘리사가 행한 바 있다.[7] 소아마비 환자였다.[8] <내 친구들> 만화에서 이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는데, 두 판을 내리 깨진 곡예사가 마지막 승부로 나무 높게 올라타기를 제안했고, 곡예사가 나무가 부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올라가자 요한은 그 높이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해서 발을 꼭대기 나뭇가지에 걸어 이겼다.[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요한 보스코를 죽일까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칭송받는 사람을 살해했다가는 고대 폴란드에서 그렇게 했다가 수백년 동안 분할 공국시대(1138 ~ 1320)라는 암흑기를 겪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을 본 탓에 이탈리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겁이 나서 무시일관했다는 야사가 있으나 야사는 야사일 뿐, 당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왕비 오스트리아의 아델라이데, 남동생 제노바 공작 페르디난도를 연달아 잃어서 답장할 여유가 없었다.